그림으로 다시 보는 ‘바람의 화원’

‘바람의 화원’은 지금껏 사극들이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우리네 옛 그림을 소재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극의 차별점은 단지 소재적 측면에서 머물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그림을 중심으로 놓고 그 그림 속의 이야기를 찾아가는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와, 그러한 대본을 예술적으로 영상화해낸 독특한 연출력에 있다.

이 사극이 그림에서 시작해서 그림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고 그림으로 갈무리되는 구조를 갖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따라서 이 사극의 진짜 주인공은 어쩌면 이야기의 중심 뼈대를 세워준 신윤복과 김홍도의 그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그림이 바람처럼 귓가에 대고 속삭여주는 ‘바람의 화원’의 이야기를 다시 들어보자.

‘기다림’- 한 예술가의 탄생
신윤복은 김홍도가 “그린다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린다는 것은 그리워하는 것이 아닐런지요”하고 말한다. 이 대화는 이 사극의 화두이기도 하다. 신윤복을 그림 그리게 하는 것이 어떤 것에 대한 그리움이라면, 그것은 거꾸로 삶에서 그가 갖는 결핍을 말해주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알 듯이 예술가의 결핍은 예술 작품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과정.

드라마적 설정으로서의 남장여자라는 코드는 이러한 예술가의 결핍상황을 미적으로 상징해낸다. 즉 자신이 갖고 있으나 표출할 수 없(게 사회가 강요하)는 아름다움(美)을 정향(문채원)이라는 뮤즈로 해소하거나, 사회 비판적인 그림으로 풀어내는 상황을 남장여자란 코드를 활용해 쉽게 구상화해냈다는 말이다.

신윤복의 ‘기다림’이란 그림이 드라마 초반에 등장하고, 후반에 그 그림을 통해 신윤복이 사실은 여성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채는 김홍도의 시퀀스가 등장하는 것은 따라서 여러 모로 의미가 있다. 그것은 김홍도가 신윤복을 한 인간이자 예술가로 이해해 가는 과정을 그 그림을 통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홍도의 이해는 또한 이 사극을 함께 본 시청자들의 이해와 맥을 같이 한다.

‘군선도’- 서민 지향적 세계관
김홍도와 신윤복이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먼저 그 군상들을 본 후, 화포 앞에서 군선도를 그리는 장면은 이 사극이 지향하는 서민 지향적 가치관을 드러낸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것을 그린다.”는 김홍도의 말은 저 서민들의 얼굴 속에서도 신선을 찾아낸다는 말로 해석된다.

사실 고미술에 대해 지금껏 대중들이 가졌던 인식을 생각한다면, 이 고급예술로 치부되는 소재가 드라마라는 대중적인 장르 속으로 들어온 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김홍도와 신윤복의 풍속화이다. 때아닌 신윤복 신드롬으로 한 고미술관에 이어진 대중들의 발길은 신윤복의 그림이 가진 서민성의 재발견인 동시에, 일정부분 그것을 대중적으로 전파한 이 사극의 기여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단오풍정’- 여성성의 시선
‘단오풍정’을 그리기 위해서 신윤복은 극중에서 단오날 금남의 지역인 계곡으로 들어간다. 그 곳에서 여장을 하고(물론 신윤복은 본래 여자 캐릭터이지만) 여성들의 세계를 둘러보는 신윤복과 김홍도를 그려낸 장면은 상징적이다. 즉 남성의(혹은 강요된 남성의) 시선으로 여성의 세계를 살피고 그 속에서 여성들이 단 하루지만 느꼈을 자유에의 희구를 그림 속에 담는다는 장면은 이 사극이 주목하는 여성성의 시선을 드러낸다.

‘주사거배’ - 억압된 사회에 대한 비판의식
김홍도와 신윤복이 정조(배수빈)에게 동제각화(같은 화제를 갖고 각각 그림을 그리는 것)를 명 받아 그리게 되는 선술집 풍경에는 대화원들이 각각 가진 그림에 대한 철학이 담겨져 있다. 그것은 주막 앞에서 배경을 두고 벌이는 그림 논쟁을 통해 드러난다. 김홍도는 배경보다는 인물 그 자체만으로도 그 성정이 다 드러난다고 주장하고, 신윤복은 그 사람만 봐서는 그 사람이 뭐를 원하는 지 알 수 없으며 오히려 그 배경이 그 마음을 알게 해준다고 한다.

신윤복은 주막 평상 위에 물로 찍어 새 그림을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새는 이렇게 있으면 그저 새일 뿐입니다. 허나 이렇게 새장을 그려놓으면 그저 새이기만 했던 이 새가 무엇을 원하는 지 그 마음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이 대목은 신윤복이 그리고픈 자유로운 그림(새)과 그것을 허하지 않는 상황(새장)을 상징화해낸다. 신윤복이 그린 ‘주사거배’로 정조가 조정대신들의 숙청을 단행하는 시퀀스는 바로 이런 억압된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을 에둘러 보여주는 대목이다.

‘월하정인’, ‘월야밀회’, ‘유곽쟁웅’ - 욕망과 인간애의 대립
조정대신들에 의해 도화서에서 쫓겨나 김조년(류승룡)의 사화서에서 일하면서 신윤복이 그리게 되는 일련의 그림들, 즉 ‘월하정인’, ‘월야밀회’, ‘유곽쟁웅’은 남녀 간의 사랑을 담고 있다. 하지만 드라마는 이 그림의 이야기를 조금은 다른 식으로 풀어낸다. 그것은 신윤복과 정향, 그리고 김조년 사이의 밀고 당기는 상황으로 그려내는 것. 김조년은 돈과 권력으로 정향을 붙잡아두고 있으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고, 신윤복은 정향의 마음을 얻고는 있으나 자신이 여성이라는 한계 때문에 그저 그림을 통해 사랑을 표현할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사랑의 차원이 극명히 대비되는 지점이다. 김조년의 사랑은 욕망이지만 신윤복의 사랑은 동성이라는 한계 속에서 인간애에 가깝게 그려진다. ‘월야밀회’를 가지고 김조년과 벌이는 해석에서 드러나는 남성성의 시각과 여성성의 시각의 부딪침은 욕망과 인간애의 대립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서직수 초상’ 같은 초상화들 - 기록으로서의 그림
사극의 중반 이후부터 시작된 정조의 사도세자 초상을 두고 벌어지는 숨가쁜 추리극은 그 바탕에 ‘기록으로서의 그림’이라는 그림의 다른 한 편의 얼굴을 그려낸다. 정조가 김홍도와 신윤복을 불러 “너희들은 내 눈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그림이 예술적 차원 이외에 사진 같은 기록적인 차원으로 기능함을 말해준다.

이 사극이 그림을 사진의 기록적 기능으로 판단하고 있다는 단초들은 여러 차례, 몽타쥬 기법으로 초상을 완성해내는 에피소드를 통해 드러난다. 이것은 풍속화로서 예술적이면서도 기록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신윤복의 그림 이야기가 어떻게 팩션이라는 역사추리에서 주목받게 되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미인도’ - 저널리스트의 면모를 가진 예술가
이 사극이 ‘미인도’에서부터 시작해 ‘미인도’로 끝나는 것은 그만큼 이 그림이 갖는 다층적인 의미에 주목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 첫 번째는 “‘미인도’는 신윤복의 자화상이었다”는 도발적인 팩션의 상상력이다. 바로 이 상상은 신윤복을 남장여자로 재탄생시켜 그의 그림과 삶을 재조명해줄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둘째는 이 ‘미인도’에 내포된 신윤복의 미의식의 세계이다. 섬세한 여성적 필치로 그려진 여인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신윤복이 가진 여성적 미의식의 세계를 드러낸다.

하지만 무엇보다 주목되어야 할 것은 바로 그 ‘미인도’의 주인공이 여성이며, 그것도 기생이라는 사실이다. 정향이라는 기생으로 대변되던 거세된 미의식을 통해 단 한 번 자신을 그녀의 모습으로 화해 그림에 담아 넣은 그 정신 속에는 신윤복이 가진 시대에 대한 저널리스트적인 면모가 숨겨져 있다. 그것은 양반들의 초상이나 임금의 어진과 함께 나란히 기생의 그림을 거의 실물 크기로 그려 넣는 마음 속에 드리워진 비판의식을 말한다. 따라서 ‘미인도’는 신윤복의 예술적 성취와 저널리스트적인 면모를 드러냄과 동시에 이 드라마가 취하려한 팩션의 상상력까지 아우르는 그림이라 할 수 있다.

‘바람의 화원’은 교과서나 화첩 속에 박제되어 있던 그림들을 끄집어내 생생한 영상과 상상력을 동원한 스토리를 통해 다시 살아나게 했다. 수백 년을 건너온 그림이라는 매체를 따라서 과거와 현재가 이어지는 이 경험은 고미술관에서 보여주지 못한 새로운 예술적 경험이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물론 사실과 허구 사이에 놓인 거리가 있지만 이것은 이 사극을 통해 환기된 옛 그림에 대한 지대한 관심만으로도 충분히 상쇄될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드라마의 몫이다. 깨워낸 그림들을 통해 진짜 사실을 찾아가고, 또 지속적으로 옛 그림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는 것은 이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떼루아’의 트렌디한 구조, 넘어서려면

‘떼루아’를 와인으로 친다면 갓 나온 햇와인일까, 아니면 좀더 숙성을 두고 봐야 하는 와인일까. ‘떼루아’의 여주인공 이우주(한혜진)는 맞선 자리에서 두 시간째 와인이 어쩌고 저쩌고 잘난 척을 하는 상대방에게 이렇게 말한다. “이딴 와인얘기 하지말고 그 사람에 대해 얘기해요, 그게 예의니까.” 이 대사는 우리가 흔히 와인하면 떠올리는 그 우아한 척 폼잡아가며 마시는 술이라는 편견을 깬다. 전통주를 담그는 그녀에게 술이란 “간판보고 찾는” 것이 아니라, “맛이 좋으면 간판 없이도 몰리는” 그런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강태민(김주혁)은 전설적인 와인 샤토 무통 마이어 1945년 산을 찾아오라는 특명을 받고 프랑스로 날아간다. 강태민이 1억5천만 원을 주고 산 그 와인이 그만 이우주가 갖고 있던 복분자주와 바뀌어지고, 와인에 대해 문외한인 그녀는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며 홀짝 홀짝 이 와인을 마셔버린다. 강태민은 이 일로 심한 문책을 받고 결국은 회사를 떠나게 된다. 강태민에게 술은 맛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간판이기도 하다. 와인 한 병에 회사를 떠나게 되는 게 그의 처지다. 물론 그 간판은 강태민이 다니는 와인수입업체 사장 양승걸(송승환)에 의해 강요되는 것이다.

강태민의 삼촌, 정태(정호빈)는 그 양승걸과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 정태는 양승걸에게 “그 노력으로 좋은 와인을 만들 생각은 없냐”고 묻는다. 그러자 양승걸이 말한다. “아직도 그 꿈 못 버렸냐. 떼루아가 되어야 와인을 만들지.” 여기서 떼루아는 와인이 생장할 수 있는 환경적 조건을 말한다. 그러자 정태는 와인을 만드는 건 “사람의 노력”이라고 말한다. 정태는 결국 지병으로 죽게 되지만 이 생각은 강태민으로 전달된다. 따라서 양승걸과 강태민 사이에는 떼루아와 사람의 노력이라는 와인 철학에 대한 대결의식이 생겨난다.

‘떼루아’는 여러모로 이러한 와인을 두고 벌어지는 대결구도가 도식화되어 있다. 간판(이름, 마케팅)이냐 맛이냐, 떼루아냐 사람의 노력이냐 같은 이야기들은 이미 캐릭터로 구획되어 있고 그것은 또한 우리네 시골 같은 풍경과 파리의 이국적인 풍경의 대비처럼 명확하게 나뉘어진다. 이러한 도식적인 구조는 드라마의 시작으로서는 그다지 좋은 선택이 아니다. 대부분의 전문직을 내세운 장르 드라마들은 먼저 그 직업적인 특성이 갖는 긴박감으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고는 서서히 이야기를 도식화시키는 반면, ‘떼루아’는 물론 (프랑스의 풍경은 이국적이지만) 이미 인물들의 멜로 구도가 벌써부터 드러날 정도로 긴장이 흐트러져 있다.

만일 트렌디 드라마였다면 이러한 멜로 구도로부터의 시작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것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와인이라는 소재를 처음으로 다루는 드라마에서 와인에 얽힌 긴박한 사건을 초반부에 다루지 않는다는 것은 어딘지 기대감을 꺾는 느낌이다. 게다가 이미 그 흔한 실장님으로 등장한 강태민이 사실은 대기업 총수의 손자이고 그 할아버지가 태민이 사랑하는 지선(유선)을 떼놓는 그런 장면들은 이 와인 소재 드라마를 전형적인 트렌디 드라마로 착각하게 만든다.

물론 초반부지만 ‘떼루아’가 지금껏 보여주는 양상은 깊은 와인의 맛이 아니다. 그것은 아직은 전혀 숙성을 거치지 않은 햇와인의 어설픈 맛이다. 당장 입에 달고 상큼하다고 그것이 와인의 진짜 맛은 아닌 것처럼 드라마도 와인이라는 소재를 끄집어왔지만 당장 달콤한 대기업 손자와 보통의 명랑쾌활한 여주인공이라는 멜로 구도설정이 와인 소재 드라마의 진짜 맛일 수는 없다. 드라마는 기본적으로 성장의 구조를 갖고 있기 마련이기에, 그것은 응당 햇와인이 아닌 숙성와인을 닮아 있어야 한다. 강태민과 이우주라는 캐릭터가 그저 달콤 쌉싸름한 멜로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좀더 많은 시련을 거쳐 위대한 캐릭터로 변해가는 모습을 기대한다. 처음에는 모난 맛이지만 인고의 세월을 거쳐 차츰 부드러워져 실크 같은 감미로운 맛을 내는 숙성와인처럼.

SBS‘온에어’ vs MBC‘스포트라이트’ vs KBS‘그사세’

2008년 드라마의 특징 중 가장 도드라지는 것은 방송국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다. 그 첫 포문을 연 것은 SBS의 ‘온에어’이며 이어서 MBC의 ‘스포트라이트’가 방영되었고, 지금 현재 KBS에서 ‘그들이 사는 세상’이 방영되고 있다. 같은 방송가를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지만 이들 3사의 드라마들은 약간씩 결을 달리했다. 어떤 점들이 달랐고 그것은 또 어떤 결과로 이어졌을까.

‘온에어’, 판타지를 리얼리티로 뒤바꾼 영리한 전략
SBS의 ‘온에어’는 전략적으로 우수한 드라마였다. 이 드라마가 포착한 곳은 대중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방송가의 맨 얼굴(리얼)이면서도 여전히 판타지를 놓치지 않는 그 지점이었다. 드라마(온에어) 속에 드라마(티켓 투 더 문)를 배치함으로써 ‘온에어’는 그것이 리얼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즉 드라마라는 허구를 찍는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거꾸로는 진짜라고 강변하는 식이다.

하지만 바로 이 리얼로 포장된 ‘온에어’라는 드라마는 사실 판타지를 그려낸다. 여전히 드라마를 찍는 배우나 매니저, PD, 작가의 세계가 여느 보통사람들과 같은 그런 세계가 아니라는 것을 그 안에서 보여주고, 배우와 매니저와의 멜로, 작가와 PD와의 멜로를 그려내면서 판타지를 극대화시킨다. 드라마 속의 드라마를 끼워 넣어 한편에서는 리얼리티를 강변하면서도 동시에 판타지를 배치하는 이 전략으로 ‘온에어’는 더 큰 판타지성을 갖게 되었다. 즉 ‘사실 같은 판타지’가 구축된 것이다. 이를 통해 ‘온에어’는 시청률을 확보하면서도 완성도에 대한 비판을 비껴나갈 수 있었다. 방송가라는 소재를 적절히 이용한 영리한 선택이었다고 볼 수 있다.

‘스포트라이트’, 좋은 소재, 하지만 미완의 드라마
반면 MBC의 ‘스포트라이트’는 보다 극화된 현장 속으로 시청자들을 이끌었다. 우리가 흔히 뉴스를 통해 보던 사건사고의 뒷얘기는 그 자체로 훌륭한 소재가 되었다. 게다가 ‘스포트라이트’는 초반부 이 특정상황, 즉 방송국 기자의 상황을 일반 조직상황의 이야기로 풀어내려는 노력을 보였다. 즉 방송국 내의 라이벌 구도나 서열 관계 같은 이야기를 통해 보통 사람들의 공감을 끌어내고, 한 편으로는 이들의 특화된 사건상황을 끄집어내 긴장감을 높이는 방식은 대단히 효과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드라마의 문제는 구성에 있었다. 초반부 희대의 살인범 장진규 에피소드에서 지나치게 하이라이트를 보여주자 그 후의 에피소드들이 상대적으로 잔잔해져 버렸다. 물론 후에도 여러 번 기회가 있었지만 드라마는 그 때마다 정치적인 해결을 도모한다. 대신 불필요해 보이는 사회부 내의 경합구도를 자꾸만 내세우면서 드라마는 방향성을 잃었다. 에피소드의 병렬적 구성이 갖는 장점만 취하지 못하고 오히려 약점을 취함으로써 이 드라마는 어떤 상승곡선을 타지 못하고 말았다. 멜로 조차 애매해진 이 드라마는 가장 뜨거운 아이템을 잡았지만 불필요한 것들을 킬하지 못함으로써 미완의 드라마가 되고 말았다.

‘그사세’, 의미와 가치를 가졌지만 대중성을 확보 못한 드라마
현재 방영되고 있는 ‘그들이 사는 세상’은 이 두 드라마와는 다르게 리얼리티쪽에 더 많은 무게중심을 취하고 있다. 방송가 뒤편을 보여주되 대중들이 보고 싶어하는 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온에어’와는 다르게 ‘그사세’는 그저 담담한 시선을 유지한다. 거의 스케치에 가까운 영상들과 함께 ‘그사세’가 취하는 입장은 방송국의 드라마제작을 통해 우리네 인생을 은유하는 것이다. 즉 ‘그들이 사는 세상’을 통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여주려는 것.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선택으로 인해 이 드라마는 거꾸로 그들이어야 제대로 알 수 있는 드라마가 되어버렸다. 즉 대중들의 입장, 그들이 보고 싶은 입장을 끌고 가면서 동시에 그걸 통해 우리의 세상을 은유해내는 작업이었어야 했지만, 이 드라마는 아쉽게도 대중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여주는 그 입장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 노희경 작가로서는 너무나 잘 알고 당연한 리얼리티겠지만 대중들은 생소한, 그 거리감에서 폭발적인 대중의 반응까지 다가가지는 못하게 된 것이다. 어쩌면 방송가를 소재로 한 드라마 중 가장 의미로서는 가치가 있는 드라마인 ‘그사세’는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대중적인 호흡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2008년을 뜨겁게 달군 이 장르 드라마들은 저마다 각각의 새로운 시도들을 보였지만 그만큼 한계도 드러냈다. 멜로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이 세 드라마가 초반부의 의지와는 다르게 결구 멜로에 힘을 실어주고(혹은 실리고) 있다는 것은 장르 드라마로서의 시도들이 어느 지점에서부턴가 흐지부지해졌던가, 아니면 어려움에 봉착했던가 했기 때문이다. 방송을 캐스팅한 ‘온에어’는 초반부 화두처럼 드라마 제작의 문제점을 끄집어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한 아무런 답도 제시하지 않는 한계를 보였고, ‘스포트라이트’는 한창 긴장감을 높여놓은 사건을 정치적 해결로 덮어버리는 한계를 보였다. 그리고 ‘그사세’는 그 좋은 의도와 작품에도 불구하고 대중들과 좀더 호흡하지 못하는 한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첫술에 배부르랴. 방송가를 소재로 한 이들 드라마들의 성과와 한계는 앞으로 그 계보를 잇는 드라마들의 가능성을 더욱 높일 것으로 기대된다. 아쉬움이 많지만 흥미롭고 의미 있는 시도였다.

현실에서 드라마를 꿈꾸거나 드라마를 현실처럼 만들거나

드라마와 현실 사이에는 얼마만큼의 괴리가 있을까. ‘그들이 사는 세상’의 9,10회의 부제인 ‘드라마처럼 살아라’는 말은 정지오(현빈)가 주준영(송혜교)에게 무심코 했지만 현실은 전혀 달랐던 것처럼 그 사이에 커다란 간극을 두고 있다. 드라마 PD로서 무언가 멋지게 살아가고 싶지만 현실은 당장 초짜 작가와 함께 단막극을 만들어야 하는 정지오는 까칠하고 인간미 없지만 시청률로 인정받는 손규호(엄기준)에게 자격지심까지 느낀다.

그의 현실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를 그래도 사랑하는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어머니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그는 오픈카를 타고 멋지게 차려입고는 어딘가로 주준영과 드라이브를 가는 그런 드라마 같은 장면을 떠올린다. 드라마와는 전혀 상관없는 초라한 현실을 갖고 있는 그는 갑자기 나타나 “저 건물이 내 거야”하고 말하는 주준영의 어머니를 만나고는 심지어 자신이 만나고 있는 주준영 마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생각한다.

이것은 주준영에게도 마찬가지다. 겉으로 보기엔 감정이 메마른 것처럼 보이는 그녀는 그 속을 들여다보면 만신창이의 상처를 가지고 있다. 드라마 같이 쿨해 보이던 그녀의 삶은 사실은 참 구질구질한 어머니와 아버지의 외도로 점철되어 있다. 그녀가 당장 발을 디디고 철야를 밥먹듯 하며 링거를 맞아가며 촬영을 해야하는 현장과, 그 속에서도 “보고 싶어 미치겠다”면서 찍어놓은 동영상으로 마음을 달래는 애인 정지오 사이에 놓여진 거리는 바로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드라마(판타지)와 현실의 괴리감은 또한 좋은 드라마와 인기 있는 드라마 사이의 거리이기도 하다. 정지오와 손규호로 대립되는 이 시청률은 낮아도 좋은 드라마와 시청률이 높아도 늘 그게 그거 같은 드라마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이 주인공인 이들에게는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과의 괴리감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정지오가 “드라마처럼 살라고 했지만 자신에게 드라마는 도피처”라고 말하는 것처럼, 판타지를 끄집어내는 드라마와, 리얼리티를 담보하는 드라마 사이에서 사람들은 현실이 아닌 환상을 선택한다. 이것은 드라마를 제작하는 이들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드라마 같은 삶과 현실의 삶에 대해 한 편의 드라마를 쓸 정도로 잘 알고 있는 노희경 작가의 선택은 무엇일까. 표민수 PD가 인터뷰를 통해 말한 것처럼 이 드라마는 반(半)다큐멘터리적인 드라마다. 즉 판타지를 자극하기보다는 리얼리티를 끄집어내려 노력했다는 말이다. 만일 이 드라마가 판타지를 만들려 했다면, 드라마 제작현장은 좀더 치열하게 극화되었어야 한다. 그래야 그만큼 먼 거리에 위치한 애인 정지오에 대한 주준영의 그리움이 절절할 테니까.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러한 ‘온에어’적인 선택을 하지 않았다. 제작현장의 장면이 담담할 정도로 스케치에 머무는 것은 이 드라마의 ‘판타지보다는 현실 선택’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 현실인 그들이 전혀 드라마처럼 살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까. 그래서 노희경 작가가 선택한 것은 드라마(환상) 같은 드라마가 아닌 현실 같은 드라마가 아니었을까. 드라마와 현실 사이의 괴리감은 어쩌면 거꾸로 현실성보다는 판타지에 몰두하는 드라마들의 유행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만일 현실 같은 드라마가 세상에 가득하게 된다면 “드라마처럼 산다”는 말은 더 이상 현실의 반대말이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우리가 적어도 이 현실 가득한 드라마를 보는 동안은 ‘드라마처럼 사는’ 셈이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판타지보다는 현실을 그리며, 이것은 노희경 작가가 자신은 물론이고 그 드라마를 보는 이들까지 드라마처럼 살게 하는 자신만의 노하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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