멜로의 귀환 ‘스타의 연인’에 교차하는 우려와 기대

멜로는 한 번도 사라진 적이 없었다. 다만 정체를 숨기고 있었을 뿐이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와 두루미(이지아), ‘이산’의 정조(이서진)와 성송연(한지민), ‘엄마가 뿔났다’의 영미(이유리)와 정현(기태영). 전문직 장르를 표방한 드라마, 사극, 가족 드라마, 그 어느 것에도 늘 멜로는 중심에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멜로가 정체를 숨겼던 것은 멜로 하면 ‘틀에 박힌 설정의 드라마’라는 등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서부터다. 하지만 그렇게 숨죽이고 있던 멜로가 이제 본격적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있다. ‘스타의 연인’이 그것이다.

어린 시절에 만났다 헤어져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한 명은 화려한 스타로 다른 한 명은 가난한 시간강사로 서로 만나 사랑하게 된다는 이 설정은 고전적이다. 가깝게는 ‘노팅힐’에서 보았고 멀게는 ‘로마의 휴일’에서 보았던 그 지위의 격차를 넘는 사랑의 이야기. 늘 반복되는 이야기의 틀이지만 늘 먹히는 이야기다. 물론 여기서 반복되는 이야기란 고전적이란 의미지, 틀에 박힌 설정이란 말은 아니다. 어떻게 매번 반복되는 틀이 매번 먹히게 될까. 이유는 멜로 드라마의 관전포인트가 가진 특징 때문이다. 멜로는 그 안전한 기대감을 주는 틀을 제공하고, 각각의 드라마는 그 틀 위에 자신만의 주제의식을 외피로 갖게 된다. 따라서 진짜 포인트는 틀이 아니라, 그 틀 위에 존재하는 외피가 된다.

‘스타의 연인’이 멜로의 틀 속에 외피로 입고 있는 것은 스타라는 이 시대의 주목받는 코드와 그 스타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이다. ‘한 아이는 하늘의 별이 되고 한 아이는 땅의 풀이 되어’ 만나는 그 거리감에서부터 드라마는 시작한다. 스타를 보는 시각은 저 연예기자 전병준(정운택)이 동네 아줌마들을 모아놓고 하는 것처럼 얼토당토않은 가십들로 가득 차 있다. 가난한 시간강사인 김철수(유지태)는 연예인에 관심이 없고 모든 일에 진지하며 심각한 인물. 톱스타인 이마리(최지우)가 누군지 조차 잘 모르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이마리의 대필작가가 되면서 그녀를 이해해 가는 과정이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다.

멜로라는 안전한 구도와 그 위에 입혀지는 ‘사람에 대한 이해’라는 주제의식은 이마리와 김철수라는 두 캐릭터 사이의 긴장감으로 유지된다. 이마리가 전형적인 멜로의 캐릭터라면 김철수는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을 입혀주는 캐릭터다. 김철수는 스타라면 선망의 눈을 가지는 보통의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김철수에게는 이마리에 대한 선망이 없다. 다만 이마리라는 조금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스타라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있을 뿐이다. 자기의 시선, 즉 작가의 시선을 유지하고 있기에 단순히 스타의 외형을 보지 않게 될뿐더러, 막연한 선망으로서의 사랑을 할 위험성도 사라진다. 결국 멜로의 틀을 따라가면 김철수가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는 순간에 그가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 뻔한 일이지만 멜로 드라마에서 중요한 것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다.

‘겨울연가’의 오수연 작가는 그 작품에서 형성되었던 최지우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드라마 속에 제대로 붙잡아두고, 그 위에 유지태라는 조금은 심각하고 진지한 배우를 접근시킨다. 최지우의 이미지는 조금은 반복적인 면이 있지만 이 멜로의 틀 속에서 가장 안정적이고, 드라마 첫 출연인 유지태는 ‘가을로’나 ‘봄날은 간다’같은 영화 속에서 보여주었던 진중한 면모를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여 가벼워질 수 있는 극에 무게감을 주고 있다. 일단은 안정감 있는 출발이지만 ‘스타의 연인’이 본격 멜로의 귀환을 성공적으로 이룰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스타의 연인’은 틀에 박힌 설정의 반복에 그치게 될 것인지, 아니면 더 이상 멜로가 정체를 숨기지 않아도 되는 선례를 남기게 될 지 우려와 기대가 교차하는 드라마다.

2008년도 드라마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용두사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드라마들이 기대한 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시청률에서 성공하면 완성도에서 떨어졌고, 완성도에서 어느 정도 성공하면 시청률이 난항을 겪었다. 또 시청률도 괜찮고 완성도도 괜찮다 싶은 드라마는 초반의 모양새를 끝까지 유지하지 못하고 중반 이후부터 어그러지기 일쑤였다. 물론 최근 들어 시청률과 완성도가 반비례로 가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이처럼 극과 극으로 치닫는 것은 올해 드라마들의 한 특징이 될 것이다.

먼저 완성도에서 성공적이었지만 시청률이 그만큼 따라주지 못한 드라마로 최근 종영한 ‘베토벤 바이러스’와 ‘바람의 화원’을 들 수 있다. 그나마 ‘베토벤 바이러스’는 김명민 파워를 통해 어느 정도의 시청률을 거두었지만 ‘바람의 화원’은 그 훌륭한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끝내 시청률을 얻지 못했다. 어찌 보면 이 두 드라마는 애초부터 마니아적인 성격을 띄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클래식이나 고미술이라는 소재 자체가 그러했다. 하지만 이 비대중적인 소재를 대중적인 틀 안으로 끌어온 그 시도는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한편 소재에 있어서 대중적일 것이라 생각되었던 ‘그들이 사는 세상’ 역시 이 범주를 향해 가고 있다. 방송가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완성도를 높였지만 그만큼 대중성을 확보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이들 드라마들이 보여주는 것은 역시 드라마는 소재 자체가 아니라 그 소재를 어떻게 요리하느냐는 것이 관건이 된다는 점이다.

다음은 완성도는 떨어지지만 시청률은 높았던 드라마들이다. 대표적인 예로 ‘조강지처클럽’이나 현재 방영중인 ‘에덴의 동쪽’을 들 수 있다. 완성도로만 보면 앞뒤가 맞지 않는 억지설정에 과장된 캐릭터들, 흐름의 비일관성, 앙상한 주제 등등, ‘조강지처클럽’은 전형적인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의 계보를 이으면서 시청률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에덴의 동쪽’은 상대적으로 세련된 외피를 입고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조강지처클럽’의 다른 줄기라고 보여진다. 역시 과장된 캐릭터들과 인물설정 등이 시대극을 표방하면서(전혀 그러나 시대극은 아니다)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이 드라마들의 특징은 주로 과거 드라마들이 했던 문법들, 그 중에서도 특히 신파를 그 바닥에 깔고 간다는 점이다. 이것이 현 어려운 현실과 맞아떨어지면서 향수마케팅과 함께 TV의 실 시청자로 자리하고 있는 비교적 나이든 시청층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던 점이다. 이들 드라마들이 말해주는 것은 드라마의시청률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공감지수는 아니라는 점이다. 어찌 보면 드라마 시청률은 단지 상업적인 의미로서 존재하며, 따라서 업계가 불황이 되면 될수록 완성도로의 접근은 더 요원하다는 점이다.

마지막은 용두사미가 되어버린 드라마들이다. ‘스포트라이트’, ‘이산’, ‘왕과 나’, ‘타짜’같은 드라마들을 비롯해 현재 방영되고 있는 ‘종합병원2’나 ‘바람의 나라’같은 드라마들도 이 경향을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방영 이전부터 화제가 되었다가 방영과 함께 고꾸라진 경우도 있고, 또 방영 초기에는 화제를 일으켰지만 차츰 그 불씨가 가라앉은 경우도 있다. 올해 특히 이런 드라마들이 많이 양산된 것은 드라마가 거꾸로 마케팅이나 기획쪽에 더 많이 힘이 실렸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소재로 치면 누가 봐도 관심을 가질 만한 것들을 끄집어오고, 또 출연진들도 기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스타들을 배치했지만 결과적으로 그 요소들을 작품으로 끌어안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한 마디로 포장은 요란했지만 그 내용물은 볼품이 없었다는 말이다. 올해 유난히 이런 작품들이 많았던 것은 그만큼 우리네 드라마 제작에 거품의 요소들이 실체로 드러났었다는 것을 반증한다.

이렇게 보면 최근 박신양 사건을 계기로 드라마 제작에 대한 거품을 걷어내자는 여론이 일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여진다. 완성도는 높지만 시청률이 떨어지는 마니아 드라마 경향과, 시청률은 높지만 완성도는 떨어지는 퇴행적인 드라마 경향, 그리고 초기에는 창대했지만 결과물은 앙상해지는 용두사미 드라마 경향. 이것은 올해 우리네 드라마가 직면한 가장 큰 문제이자, 내년 드라마들의 숙제가 될 것이다.
(이 원고는 스포츠칸에 게재되었던 칼럼입니다.)

문근영의 발견, 장태유 PD의 성과 그리고 박신양의 숙제

'바람의 화원'은 시작하기 전부터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그 이유는 이 범상치 않은 사극이 제시하는 세 가지 도전 상황 때문이었다. 그 첫째는 박신양이 첫 사극 도전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며, 둘째는 문근영이 남장여자 출연으로 그녀에게 족쇄로 작용하던 국민여동생 이미지를 벗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셋째는 장태유 PD가 역시 첫 사극 도전을 어떻게 해낼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종영에 와서 이 도전은 어떤 결과를 가져왔을까.

문근영의 발견, 국민여동생에서 연기자로
'바람의 화원'의 최대 성과는 아마도 문근영이라는 배우의 재발견일 것이다. 문근영은 이미 국민여동생이라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었지만 바로 그 이미지가 족쇄로 작용했던 게 사실이다. 한 때 '사랑따윈 필요 없어'같은 영화에 출연하면서 성인연기자로의 변신을 노렸던 문근영이지만 대중들은 그 이미지 변신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의 화원'에서 남장여자 설정의 신윤복이란 캐릭터를 만나 문근영은 비로소 이 족쇄를 벗어버릴 수 있었다. 여성의 이미지를 남장여자라는 캐릭터 속에서 중화시켜버리자 비로소 문근영의 연기자로서의 면모가 드러났고, 그것은 대중들의 호평으로 이어졌다. 극중 신윤복이 당대 사회에 갇힌 새로써 당당히 새장을 빠져 날아간 것처럼, 문근영은 이 작품을 통해 국민여동생이라는 새장을 벗어나 연기의 세계로 훨훨 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장태유 PD의 성과, 사극에서 더 빛난 연출
'쩐의 전쟁'을 연출했던 장태유 PD의 연출 스타일은 꼼꼼하고 빡빡하기로 정평이 나 있다. 이 완벽주의자의 연출에 걸리면 배우들은 죽어난다는 곡소리를 하면서도 그 완벽한 결과물에 환호성을 지른다고 한다. '바람의 화원'으로 첫 사극 연출에 도전한 장태유 PD는 특유의 꼼꼼함으로 군더더기 없는 영상을 선보였다.

게다가 실험적일 수 있는 그림 속의 이야기를 영상으로 풀어내는 연출은 오래된 시간 속에 박제된 옛 그림을 눈앞에 생생하게 살려놓는 특별함을 선사했다. 그림 대결과 감동(감상)을 통해 설명되는 그림의 묘미는 사극 외적으로도 충분한 미술적인 즐거움을 제공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현대물과 사극을 오가는 그 연출력을 인정받음으로써 장태유 PD는 앞으로 좀 더 폭넓은 연출의 세계로 뛰어들 수 있는 가능성을 보였다.

박신양의 사극 도전, 비슷한 캐릭터 이미지가 발목 잡아
아쉬운 점은 박신양의 사극 도전이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그가 사극 연기에 실패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사극 속에서도 그는 여전히 훌륭한 연기력을 보였지만, 그 김홍도라는 캐릭터의 해석에 있어서 지나치게 기존 캐릭터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보였다는 것이 문제가 되었다. 즉 김홍도에게서 '쩐의 전쟁'의 금나라 이미지가 반복되어 보이자 그 역할은 박신양에게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보였다.

물론 후반부에 와서는 어느 정도 역할에 적응이 된 모습을 보였지만 어쨌든 박신양에게 이 사극은 이제는 새로운 캐릭터에 대한 도전의 필요성을 알게 해주었다. 자칫 하나의 패턴으로 고정된 이미지는 아무리 좋은 연기력이라 해도 대중들에게 외면 받게 된다는 점을 숙지해야할 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박신양에게는 연기자로서 숙제로 남은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의 화원'은 여러 모로 새로운 소재와 새로운 연출, 연기가 어우러져 독특한 사극의 한 세계를 열어놓았다는 점에서 그 가치를 말할 수 있다. 그 도전이 아름다웠고 그 성과 또한 의미가 있었다.

‘윤복-홍도’ 라인보다 강했던 ‘윤복-정향’ 라인, 왜?

‘바람의 화원’이 그 베일을 벗기 전부터 세간의 관심은 남장여자로 등장하는 신윤복(문근영)과 스승이자 연인으로 등장할 김홍도(박신양)의 러브 라인에 쏠렸다. 혹자들은 제2의 ‘커피 프린스 1호점’을 예상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드라마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뜻밖의 인물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정향(문채원)이라는 기생이었다.

정향과 홍도 사이에 선 윤복, 그 무게중심은?
어떻게 보면 이 사극의 멜로 구도는 남장여자인 신윤복을 가운데 두고 한편에는 김홍도가 다른 한편에는 정향이 서 있는 형국으로 볼 수 있다. 여기에 정향을 사로잡아 두려는 김조년(류승룡)까지 포함시키면 전형적인 사각 구도가 만들어진다. 하지만 이 멜로 구도의 독특한 점은 그 중심에 서 있는 신윤복이 그 어느 쪽을 선택할 수도 포기할 수도 없는 입장에 서 있다는 점이다.

정향과는 실제 육체적인 동성이고, 김홍도와는 대외적으로 알려진 성으로서의 동성이다. 이 상황은 신윤복으로 하여금 보통의 남녀 간의 사랑을 허락하지 않음으로써, 사극의 멜로를 그 이상의 것으로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된다. 즉 정향과는 육체적인 사랑이 아닌 미에 대한 사랑으로 승화되고, 김홍도와는 단순한 남녀 관계를 넘어선 사제이자 동료로서의 애정까지를 포함하는 사랑으로 다루어진다.

여기서 그림은 그 닿지 않는 사랑에 대한 그리움의 매개체로서 위치를 잡는다. 김홍도와 신윤복이 함께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장면이나, 손에 묻은 먹 자국을 닦아주는 장면은 그 어떤 육체적 접촉보다 더 아련하게 다가왔고, 정향과 신윤복이 나누는 눈빛이나, 가야금과 그림이 어우러지는 장면 역시 그 어떤 달콤한 대사보다 더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런데 전반적인 사극의 흐름 속에서 살펴보면 정작 초기에 기대했던 김홍도와 신윤복의 멜로 라인은 그다지 살아나지 않았고, 대신 신윤복과 정향의 멜로 라인이 부각되었었다는 걸 알 수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런 멜로 라인의 균형을 깨게 만든 것일까.

왜 윤복과 홍도의 멜로가 살지 않은 것일까
그것은 신윤복 신드롬이 사회적으로 크게 이슈화되면서 남장여자라는 설정이 갖는 극의 부담감 때문이었을 수가 있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러브라인을 깊게 파고 들어가면 이 사극의 아킬레스건이자 매력인 동성애 코드가 부각되게 된다. 물론 정향과 신윤복의 관계 역시 동성애적 상황인 건 마찬가지지만, 우리나라에서 남-남의 동성애 코드를 보는 시각과 여-여의 동성애 코드를 보는 시각에는 큰 차이가 있다. 즉 여-여의 동성애 코드는 과거부터 남성들의 성적 소비 대상으로서 받아들여져 왔던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단정은 조금 과도한 듯하다. 이 사극 속에서는 그 멜로의 힘의 균형이 윤복-정향 쪽으로 기울었다 뿐이지, 여전히 윤복-홍도의 멜로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사극은 전체적으로 멜로 구도를 그리면서 육체적인 애정표현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만큼 그림 같은 것을 통해 예술적으로 승화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중간에 윤복과 홍도가 키스하는 장면을 연출하려 했다가 뺀 것은 아마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오히려 설득력이 있게 들리는 것은 박신양의 사극 연기 논란과 관련된 것이다. 연전연승을 거듭해온 박신양이 연기하는 김홍도에서 ‘쩐의 전쟁’의 금나라가 자꾸 연상되었다는 점이다. 연기로만 두고 봤을 때, 사실 박신양이 ‘바람의 화원’을 통해 떨어지는 연기력을 보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박신양의 고정된 이미지가 김홍도로 고스란히 이어졌다는 지점에 있다. 이것은 대중들에게 식상하게 다가왔다.

익숙한 배우의 익숙한 캐릭터? 참신한 배우의 참신한 캐릭터!
반면, 아직 새내기로 연기 역시 서투른 문채원은 ‘여성을 사랑하는 여성’이라는 신선한 캐릭터로 주목받았다. ‘닷냥 커플’로 대변되는 정향과 윤복의 러브라인이 힘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이 배우와 캐릭터가 조합된 결과로 보여진다. 이미 연기력이 검증된 익숙한 배우의 늘 봐왔던 캐릭터(혹은 연기)보다, 연기력은 아직 떨어지지만 참신한 배우의 참신한 캐릭터가 더 주목받게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써 문근영을 빼고 이 사극으로 가장 큰 수혜를 입은 배우는 박신양이 아닌 문채원이 되었다.

문근영이 과거 힘겨웠던 것은 국민여동생이라는 고정된 이미지를 탈피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남장여자 설정의 신윤복으로 그 이미지를 탈피해 이제 한 연기자로 발돋움하게 된 문근영과는 상반되게, 한편으로 점점 고착되어가는 박신양은 이 사극을 통해 숙제 하나를 갖게 된 셈이다. 최고의 연기자라면 늘 같은 이미지에서 뱅뱅 돌기보다는 새로운 영역에서 새로운 이미지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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