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현 작가의 밥상은 늘 훈훈하다

‘엄마가 뿔났다’의 엄마, 김한자(김혜자)는 자식들 때문에 뿔이 잔뜩 났다. 늘 부엌에서 살다시피 밥을 짓는 그녀가 울면이 먹고싶다며 시아버지를 조른다. 중국집에서 시아버지가 사주시는 울면을 먹으면서 그녀는 소녀처럼 즐거워한다. 한편, 뿔난 그녀가 마음에 걸려 남편 나일석(백일섭)은 붕어빵을 사 가지고 그녀를 찾는다. 울면이나 붕어빵은 흔하디 흔한 음식이지만 이 드라마 속에서는 그것이 마음을 전해준다. 그 마음은 그걸 만들거나 사주는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고, 그걸 먹는 사람의 마음이기도 하다.

김한자가 답답하다며 남편 나일석을 졸라 저녁 드라이브를 간 곳은 다름 아닌 딸이 일 때문에 잠을 자곤 하는 오피스텔이다. 그녀의 손에는 반찬그릇이 들려있다. 그리고 그 집 앞에서 그녀가 발견하는 것은 아마도 딸이 먹고 내놓았을 배달음식 그릇들이다. 마침 오피스텔에는 딸이 만나는 이혼남, 이종원(류진)이 함께 있었는데 그는 재빨리 이층으로 몸을 숨긴다. 그런데 그 빈자리에서도 엄마는 다른 사람의 흔적을 쉽게 찾아낸다. 그 흔적이란 다름 아닌 두 개의 커피 잔이다.

음식은 늘 만드는 사람의 마음이 담겨져 있고, 그걸 먹은 사람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수현 작가는 우리 생활 속에서 바로 이 음식의 흐름, 음식의 법칙을 가장 잘 아는 작가다. 전작이었던 ‘내 남자의 여자’에서도 화영(김희애)과 지수(배종옥)의 캐릭터를 극명하게 나누는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의 부엌과 그들이 먹는 음식이었다. 본처를 버리고 아내의 친구와 살림을 차린 홍준표(김상중)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바로 그 지수가 해주던 음식. 뻔뻔스럽게도 그는 지수를 찾아와 밥을 차려달라 하고, 그런 뻔뻔스런 남자에게 그래도 지수는 밥을 차려준다.

‘엄마가 뿔났다’에서는 특히 드라마의 화자가 엄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유달리 음식에 대한 묘사들이 많이 등장한다. 막내딸과 사귀는 재벌집 아들이 불쑥 찾아왔을 때도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저녁거리였다. 여기서 저녁거리를 차려주는 엄마는 그 자체로 딸의 남자친구에 대한 호감을 드러낸다. 그러나 재벌집 아들과 헤어지겠다 마음먹고 회사에 사표까지 낸 후 집으로 돌아온 막내딸에게 엄마는 밥을 먹으라 권하지 않는다. 이유는 “마음이 더 아플테니 밥이 넘어가겠냐”는 것이다. 그런 엄마를 걱정 끼치지 않기 위해 막내딸이 “나는 괜찮아”하고 말하자 엄마가 먼저 하는 이야기가 “괜찮으면 밥 먹어”이다. 엄마의 사랑은 밥으로 가장 잘 표현된다.

때론 ‘밥 먹는 것을 끊는 것’으로 자신의 확고한 의지를 전달하기도 한다. 고은아(장미희)의 결혼반대에 대해 그녀의 아들 김정현(기태영)은 단식투쟁을 한다. 결국 사흘을 굶는 아들 앞에서 고은아는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제아무리 강한 여자라 해도 한 아들의 엄마이기 때문이다. 세상에 어떤 엄마가 자식이 굶는 것을 눈뜨고 볼 수 있을까. 그렇게 허락을 받아낸 김정현에게 그래도 자신이 받은 치욕 때문에 결혼은 할 수 없다는 나영미(이유리)의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도 역시 밥이다. 그녀는 김정현이 죽을 각오로 사흘을 굶었다는 말에 와락 눈물을 쏟아낸다. 그녀 역시 미래의 엄마이다.

자신의 집안에서의 반대 때문에 힘겹게 했던 일들에 대해 사죄를 하는 김정현에게 “네가 승낙을 얻어왔어도 반대한다”는 나일석의 마음을 열게 하는 것 역시 밥이다. 자기 딸과 결혼하기 위해 사흘을 굶었다는데 아무리 나쁜 녀석이라도 세상의 어떤 아빠의 마음이 풀어지지 않을까. 말은 반대한다 말하면서도 나일석은 그 나쁜 녀석에게 먹일 죽이 잘 되고 있는지 궁금해한다. 그리고 그 죽 한 그릇이 전하는 의미는 아무리 많은 말로 해도 다 채워지기가 어렵다.

김수현 작가는 일상의 생활 속에서 툭툭 던져지는 말이나, 늘 행해지는 행동들에서도 그 독특한 뉘앙스의 의미들을 잘 찾아내는 작가다. 그래서 김수현 작가의 작품에서 나오는 명대사란 실상은 그다지 거창한 수사가 별로 없다. 그냥 일상 용어일 뿐인데, 그것이 특정한 상황에 콕 찍힐 때 놀라운 울림으로 전달되는 것이다. 그것은 유독 그녀의 작품 속에 많이 등장하는 음식 속에서도 마찬가지다. 일상에서 그것이 아무리 매일 먹던 밥이나 죽이더라도 김수현이 차려놓은 드라마 상황이라는 밥상 위에 올려지면 특유의 훈훈한 맛을 전한다. 그것은 마치 매일 매일 먹는 밥이지만 거기서 느껴지는 엄마의 온기 같은 것이다. 이것이 김수현 작가가 매번 차리는 밥상이 훈훈한 이유고, 먹어도 먹어도 물리지 않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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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하트’ vs ‘쾌도 홍길동’ vs ‘불한당’

작년부터 유난히 뜨거웠던 수목 드라마 경쟁은 올해 새해 벽두부터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 MBC는 일찌감치 ‘태왕사신기’의 여파를 몰아 ‘뉴하트’를 20%대의 시청률로 올려놓은 상태다. 여기에 새로운 도전장을 내미는 KBS와 SBS는 각각 퓨전사극 ‘쾌도 홍길동’과 휴먼드라마를 표방하는 ‘불한당’을 내놓았다. 그 강점과 약점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뉴하트’, 의드불패 혹은 의드도 식상
작년 ‘하얀거탑’의 뜨거운 반응을 이어 ‘뉴하트’는 시작부터 관심을 끌어 모으면서 일각에서는 ‘의드불패’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확실히 의학드라마는 여러 모로 보나 유리한 점이 많다. 먼저 인간의 생과 사가 오가는 병원이라는 공간이 가진 다이내믹함이 드라마의 극적인 전개를 쉽게 만들어낸다.

게다가 ‘하얀거탑’에서 시청자들을 열광케 만들었던 병원 내의 권력다툼은 ‘뉴하트’에서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최강국(조재현)이란 캐릭터는 바로 그 권력다툼의 재미를 끄집어내게 만드는 천재의사다. 그리고 여기에는 어김없이 멜로가 등장한다. ‘뉴하트’는 현재 이은성(지성)과 남혜석(김민정)의 멜로 라인에 이동권(이지훈)이 끼여들면서 본격 삼각 구도가 만들어진 상태이다.

이렇게 요소 요소들을 보면 ‘뉴하트’의 ‘의드불패’는 당연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속단하기는 어렵다. 드라마는 단순한 조합으로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요소들은 부정적으로 말하면 ‘하얀거탑’류의 권력다툼과, ‘외과의사 봉달희’가 보여준 인간으로서 고뇌하는 의사의 모습에, ‘그레이 아나토미’류의 애정라인이 뒤섞여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의드불패’라는 말은 이제 우리의 의학드라마도 하나의 장르로서 특정한 시추에이션과 요소들을 조립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장르는 그 자체에 충실할 때 재미를 주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너무나 뻔한 설정으로 반복될 때 식상함을 주기도 한다. ‘뉴하트’가 가진 강점이자 약점은 바로 이 장르화 되어가는 의학드라마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쾌도 홍길동’, 신선한 시도 혹은 낯선 실험
‘쾌도 홍길동’은 작년부터 내내 주중드라마에서 고배를 마셨던 KBS로서는 절치부심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KBS가 전통적인 강점으로 가진 사극을 선택했다는 점은(‘황진이’나 ‘한성별곡’ 같은) 특이할만한 사항은 아니지만, 그 스타일 면에서 퓨전 사극 그 이상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파격이다.

첫 회를 통해 보여진 바로는 이 사극은 역사적인 시점을 다룬다기보다는 ‘홍길동’이라는 텍스트 자체를 지금의 시점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보여진다. 따라서 거기 등장하는 시대가 과거인 것은 ‘홍길동’의 본래 텍스트가 그렇기 때문이지 그것이 역사적인 어떤 의미를 갖기 때문인 것은 아니다. 따라서 사극 속의 배경은 역사가 아닌 한 가상의 시공간을 연상케 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홍길동’이라는 고전을 똑같이 드라마로 구성하는 것은 이 시대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누구나 아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는’ 홍길동의 이야기는 따라서 누가 봐도 다른 새 옷을 입을 필요가 생긴다. 이 퓨전사극이 무협과 코믹을 모두 끌어안고 현대적인 연출을 가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 사극의 강점은 바로 이 부분에 있으며 특히 젊은 세대들에게는 신선한 시도로서 다가갈 것이 자명하다. 아직까지 역사 자체를 탈피한 퓨전 사극은 시도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 낯설음이 또한 이 사극의 약점이 된다. 과거 KBS 드라마들 중 많은 것들이 호평을 받았으나 시청률은 낮았던 마니아 드라마가 된 것은 바로 그 낯설음의 강약조절이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만화 같은 설정의 퓨전사극에 전통적인 사극의 주시청층이 얼마나 공감할 수 있느냐가 이 사극의 성패를 가름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다.

‘불한당’, 참신한 휴먼드라마 혹은 똑같은 멜로드라마
‘불한당’은 겉으로만 보면 여자 등이나 치며 살아가는 천하의 잡놈, 불한당인 권오준(장혁)과 싱글맘이지만 밝게 살아가는 진달래(이다해)의 사랑이야기로 읽힌다. 하지만 이 드라마가 표방하고 있는 것은 단순한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휴먼드라마다. 멜로드라마가 남녀간의 사랑타령에 머무른다면, 휴먼드라마는 그 이상을 넘어 사람에 대한 사랑을 담아낸다. 작년 한 해 우리를 따뜻한 훈풍에 휩싸이게 했던 ‘고맙습니다’나 ‘인순이는 예쁘다’ 같은 드라마가 그 예이다.

실제로 진달래의 뒤에는 모녀처럼 지내는 시어머니인 이순섬(김해숙)과 그녀의 딸의 이야기가 있고, 권오준의 뒤에는 그의 누이인 권오순(윤유선)과의 사연이 숨겨져 있다. 사랑이야기 뒤편에 사람의 이야기가 포진되어 있는 셈이다. 부잣집 아들인 김진구(김정태)가 끼어 들지만 전형적인 신데렐라 이야기로 간다기보다는 오히려 부자가 알게되는 진달래의 진심에 더 무게중심이 쏠리는 느낌이다. 따라서 이 드라마가 휴먼드라마로 가기 위해서는 권오준과 진달래의 앞모습이 아니라 그 뒷모습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거기서 어떤 진정성을 끄집어내야 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드라마가 사회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던질 것이냐는 것이다. ‘고맙습니다’가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건드렸고, ‘인순이는 예쁘다’가 우리네 냄비근성에서 기인되는 사회적 편견과 허영을 꼬집었던 것처럼, ‘불한당’이 어떤 부분을 조명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남녀 간의 틀을 넘어 사람에 대한 사랑을 그리는데 있어서 사회적인 이야기는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바로 이 춥게만 느껴지는 세상에 따뜻한 훈풍을 전해줄 수 있는 휴먼드라마라는데 강점이 있지만, 또한 거기서 어떤 사회적 공감을 끄집어내지 못한다면 그저 비슷한 멜로드라마에 머물 수도 있다는데 약점이 있다.

방송 3사가 연초부터 각자의 독특한 색깔을 드러내며 다양한 드라마를 선보인다는 것은 이제 우리네 드라마가 그만큼 풍성해졌다는 방증이다. 또한 이들 드라마들이 모두 새로운 분야를 노리고 그 안에서 나름대로의 시도를 하고 있다는 점도 높게 사야할 대목이다. 모쪼록 그 초심이 드라마 끝까지 이어지길 바라며, 그 초심이 또한 올 한 해 동안 방송 3사 드라마에서도 계속 이어지길 희망한다.

끝없는 논란에도 불구, 대마불패 신화 건드리나

‘태왕사신기’에 대한 논란은 도대체 어디까지 갈까. 430억 원이 투여된 덩치 큰 대작만큼이나 논란도 끝이 없다. 지난 6월 네 번째로 방송연기를 발표했을 때, MBC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무리 외주제작사의 몸피가 커졌다고는 하지만 MBC는 거기에 대해 뭐라 한 마디 토를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MBC가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급작스런 ‘태왕사신기’의 연기로 비어있는 월화의 밤을 채우기 위해 8부작 ‘신현모양처’가 급조되었지만 당연히(?) 반응은 없었고, ‘태왕사신기’와 겹쳐 SBS에서 방영하게 된 ‘쩐의 전쟁’은 당시 수목의 밤을 뜨겁게 달구며 MBC를 안타깝게 했다. 한편 화려한(?) 캐스팅과 소재만 난무하고 제대로 된 스토리가 부재했던 주말드라마 ‘에어시티’는 60억이 투여되었지만 시청률 10% 내외를 오가는 저조한 상황이었다.

이 정도의 상황에서 MBC가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뚜껑을 연 작품이 어느 정도의 질을 담보했다는 것. 송지나 작가의 대본은 짜임새가 있었고, 김종학 PD의 연출은 명불허전이었으며, 배용준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로 작품 전체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잡음은 생겼다. 완성도 높은 사전제작을 주창했던 ‘태왕사신기’는 결국 시간에 쫓기는 ‘생방송 편집’을 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테이프 입고가 늦어져 20분이나 뉴스를 연장 편성하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편성제작부문 김정규 부위원장은 ‘태왕사신기의 오만, 그리고 MBC의 굴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을 통해서 “지난달 중순에는 제작시간 부족을 이유로 23회 방송이 어려우니 마지막회로 예정돼 있던 ‘태왕사신기 스페셜편’을 방송하겠다고 요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두고 보면 ‘태왕사신기’는 방송사의 고유권한인 편성권마저 뒤흔들 정도의 힘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작품에 대한 욕심에서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다 보니 나타난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작용이란 결국 우리네 드라마의 고질병인 시간에 쫓기는 방송제작 행태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태왕사신기’의 잇단 논란들은 그 고질병이 대작이라는 힘을 등에 업고 이제는 편성까지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작품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만든 계속되는 연기자들의 부상과 끝없이 쫓기는 시간과의 전쟁 속에서 ‘태왕사신기’는 그 마지막회의 화룡점정을 하지 못했다. 시청자들의 “안 본 걸로 할 테니 다시 찍어달라”는 요구는 대작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대작드라마를 표방한 ‘태왕사신기’의 마지막으로는 너무 밋밋했던 데서 나온 비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 불거져 나온 것은 ‘대작’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만든 430억 원이란 돈의 행방이다. MBC 노조측은 430억 원 중 배용준 개인에게 지급된 금액이 60억 원에 달한다고 하면서 대작이란 말은 허명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작사와 배용준 측은 이것을 극구 부인하고 나서고 있어 그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논란은 대작드라마가 남긴 깊은 후유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그나마 배우들의 거품 개런티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가 자리를 잡아가는 요즘, 이것이 ‘태왕사신기’의 대작 마케팅을 타고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 때문이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방송사의 편성까지 움직일 정도의 성공을 거둔 ‘태왕사신기’가 드라마 제작의 새로운 모델로 자리잡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대마불사의 잘못된 신화가 드라마의 대작화를 부추기지는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 때문이다.

돈들이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대작드라마’의 환상일 뿐이다. 시청자들은 볼거리보다 스토리에 더 열광하며 그렇기에 드라마가 집중해야 할 것은, 규모보다는 참신한 연출과 다양한 소재발굴, 작가군의 양성 그리고 새로운 제작시스템의 도입 등을 통한 드라마의 완성도이다. MBC가 꿈꾸던 ‘태왕사신기’라는 쥬신의 별은 저 드라마 속의 담덕처럼 실제로 반짝반짝 빛났던 것이 사실이나, 그 별의 반짝임만큼 그림자도 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드라마를 이끄는 힘, 입체적 인물

MBC 사극 ‘이산’에서 위기에 빠진 이산(이서진)에게 홍국영(한상진)이 절실한 것처럼, 요즘 드라마들은 홍국영 같은 입체적 인물을 필요로 한다. 드라마가 만들어내는 극적 상황 속에서 흔히 빠지기 쉬운 선악대결구도는 요즘 시청자들의 눈길을 잡아끌지 못한다. 현실이 더 이상 권선징악으로 설명될 수 있을 만큼 단순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공감 가는 캐릭터는 오히려 선과 악으로 단순히 나누어지는 전형적 인물이 아닌 양측을 포괄하거나 그 선을 왔다갔다하는 입체적이고 복합적인 인물이 되었다. 중요해진 것은 선악이 아니라 인물을 움직이는 욕망, 혹은 인물의 목표이다.

홍국영에 쏟아지는 관심, 왜?
그런 점에서 홍국영에 쏟아지는 공감은 당연하다. ‘이산’이란 드라마는 오히려 선악구도가 너무나 명확한 드라마다. 이산을 중심으로 한 성송연(한지민), 박대수(이종수), 남사초(맹상훈) 같은 인물군들은 모두 선이며, 이산의 반대편에 선 정순왕후(김여진), 화완옹주(성현아) 같은 인물군들은 악이다. 모두 선악이 분명한 인물들이다. 여기서 악은 강하고 선은 약하기에 드라마가 생긴다. 하지만 이런 단순구도로는 이병훈 PD 특유의 미션 해결 구조의 드라마가 쉬 지루해질 수 있다. 그것은 결과가 뻔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필요해지는 인물이 선악으로 구분되기 어려운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이산’의 초반부에 이런 역할을 해온 인물은 영조(이순재)다. 그는 이산의 할아버지면서도 이산의 강력한 시험으로 자리잡았고, 그 힘은 대결구도의 단순함을 무마해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이미 영조가 이산의 손을 들어버렸고, 그의 시험이 좀더 강력한 군주의 탄생을 위한 조련과정이라는 것이 드러났다. 이 즈음에서 홍국영이란 인물의 등장은 적확하면서도 효과적인 장치라 할 수 있다.

홍국영은 캐릭터로 보면 이산의 착한 인물들(?)을 대신해 손에 피를 묻히는 인물이다. 그는 처음부터 대의만을 내세워 이산 밑으로 오지 않았다. 정후겸(조연우)과 이산의 양 갈래 길에서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고민했던 인물이다. 그만큼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인 홍국영은 이산이 하지 못하는 일들을 도맡아 한다. 정치적인 대의를 중시하는 군주 이산의 현실적인 측면을 보강해준 것이다. 홍국영은 지금의 입장이 이산의 든든한 두뇌 역할이기 때문에 선의 한 측면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정후겸과 같은 부류의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냉철하게 자신의 욕망을 추구해나가는 인물이지만 드라마는 단순히 홍국영을 야심가로서의 한 측면만을 조명하지 않는다. 때론 ‘꼴통’이니 ‘개소리’같은 리얼리티쇼를 방불케 하는 거친 현실감이 넘치는 대사들을 쏟아내면서 서민적이고 서글서글한 모습까지 갖게된다. 홍국영의 출연은 대의 중심의 단순한 대결구도를 벗어나, 욕망 중심의 대결구도를 새롭게 만들어낸다. 사실상 입장만 다를 뿐, 똑같이 욕망을 추구하는 홍국영과 정후겸의 두뇌게임이 본격화되는 것이다.

드라마는 입체적 인물의 힘으로 굴러간다
이러한 드라마 속 입체적 인물들의 역할은 단지 ‘이산’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왕과 나’의 조치겸(전광렬), ‘태왕사신기’의 서기하(문소리)는 물론이고 현대극 속에서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박희순)까지 그 사례가 될 것이다. 먼저 ‘왕과 나’를 이끌어 가는 힘의 중심 축으로서 조치겸(전광렬)이 서 있는 이유는 그 복합적이고 능동적인 캐릭터 때문이다. 조치겸은 ‘욕망 하는 내시’로서 희대의 역적처럼 보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군주와 백성 사이에 그 어떠한 사특한 무리들도 용납하지 않는다는 대의를 가진 충신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태왕사신기’의 서기하는 사랑하는 사람인 담덕(배용준)과 동생 수지니(이지아)와 맞서게되는 운명을 가진 복잡한 캐릭터다. 이 역시 담덕과 사신으로 대변되는 선과 연씨 집안으로 대변되는 악의 단순구도를 깨는데 일조한다. 시청자들은 서기하의 행동들을 이해하면서도 분노하게 되는 묘한 입장에 처하게 된다. 한편 ‘얼렁뚱땅 흥신소’의 백민철은 조폭이면서도 순간 희경(예지원)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인물이다. ‘치매를 갖고 있는 어머니’ 같은 개인적인 사연이 많은 그는 흥신소의 인물들과 부딪치면서도 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복합적인 성격의 인물이다.

드라마는 실로 주인공의 힘만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조역들이 있어 주연이 힘을 발하는 것이며, 그 조역들의 캐릭터가 입체적이고 복합적일 때 드라마는 더 깊은 재미를 주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 입체적 인물을 연기하게 되는 연기자들은 베테랑일 경우가 많다. 그만큼 연기하기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왕과 나’의 전광렬이 그렇고 서기하 역의 문소리가 그렇다. 문소리는 캐스팅 논란이 일었지만 사실상 이런 어려운 심리묘사를 할 수 있는 연기자로 그녀 만한 인물을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최근 ‘세븐데이즈’로 영화에서도 주목받고 있는 박희순은 바로 이러한 입체적인 캐릭터를 타고난 연기자로 보인다.

드라마의 저변이 넓어지면서 이제 한번 보면 그 행동을 다 짐작할 수 있는 단순하고 전형적인 인물이 드라마에 설 자리는 좁아졌다. 대신 능동적인 욕망이 꿈틀대면서 언제든 변화할 수 있는 입체적 인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가고 있다. 요즘 드라마는 때론 아이 같은 천진함을 가졌지만, 때론 욕망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전략가의 모습을 보이는 홍국영처럼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진 인물을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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