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르, 사회극, 사극 속에서 계속되는 멜로의 실험들

미드(미국드라마), 일드(일본드라마)로 대변되는 외국드라마 전성시대에 우리는 너무 쉽게 우리 드라마의 문법을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있는 건 아닐까. 엄청난 물량이 투입된 제작비에 완벽한 사전제작으로 꽉 짜여진 완성도 높은 외국드라마들을 보다가 무언가 어수룩한 우리 드라마를 보면 단박에 그 열등감에 휩싸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지금까지 우리 드라마들이 쌓아온 공력은 적지 않다. 그것을 모두 무시한 채 그저 미드, 일드는 정답이고 우리 드라마는 오답이라는 편견은 어딘지 부적절해 보인다.

모든 멜로가 죄인은 아니다
특히 멜로에 강점을 가진 우리 드라마들이 어느 순간부터 멜로드라마를 ‘표방하지 않게 된’ 것은 미드, 일드가 준 영향임에 틀림없다. 한 마디로 쿨해 보이는 그네들의 드라마를 보면서 왜 우리는 매번 똑같은 삼각 사각 구도에 신데렐라 이야기, 그리고 눈물이나 짜는 그런 드라마밖에 없는가 하는 비판은 당연하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우리의 멜로드라마를 다 싸잡아 비판하는 건 문제가 있다. ‘멜로드라마 = 식상한 것’이라는 등식으로 괜찮은 멜로드라마들 역시 시청률의 무덤에 던져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90일 사랑할 시간’같은 실험적인 멜로드라마의 시청률 실패이다. 소재만으로 보면 불륜에 불치 코드가 뒤섞여 있었지만 이 드라마는 이 두 가지를 엮어서 전혀 다른 형태의 멜로드라마를 직조해냈다. 하지만 당시 멜로드라마라고 표방하기만 하면 하나같이 철퇴를 맞는 분위기에서 방영된 이 드라마는 역시나 참담한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물러나야 했다. 멜로라는 말은 쑥 들어가 버렸다. 하지만 위에서 표현한대로 드라마들은 멜로드라마를 표방하지 않았을 뿐, 멜로를 완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비판으로 식상한 틀을 벗어버린 멜로는 다양한 외투를 입고 새로운 진화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보인다.

장르 속으로 들어온 멜로
미드, 일드의 영향으로 등장한 우리네 전문직 장르 드라마들은 장르를 구사하면서도 여전히 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본격 수사물을 표방했던 ‘히트’는 범인을 좇는 이야기만큼 시청자들을 설레게 한 것이 차수경(고현정)과 김재윤(하정우)의 닭살 멜로였다. 차수경에게 ‘바보팅이’라고 말하는 김재윤의 모습에서 저 미드의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캐릭터나, 일드의 쿨한 캐릭터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우리 식 로맨틱 코미디류의 멜로드라마에서 익숙한 귀여운 남자가 있었을 뿐이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의사라는 전문직의 장르 드라마를 구사하면서 그 중심에 봉달희(이요원)와 버럭범수 안중근(이범수)의 멜로드라마를 접목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그네들의 톡톡 튀는 사랑법이 병원이란 공간에서 인간으로서의 의사들 이야기와 맞물리면서 독특한 아우라를 형성했다. 한편 ‘에어시티’의 실패는 공항이라는 공간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장르의 실패로도 볼 수 있지만, 오히려 멜로드라마를 적극 활용하지 못한 데서도 패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장르드라마라는 무게에 짓눌려 어정쩡하게 구사한 한도경(최지우)과 김지성(이정재)의 멜로라인은 드라마를 이도 저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최근 종영한 본격 느와르 ‘개와 늑대의 시간’ 역시 멜로를 상당부분 뺐다고 해도 여전히 그 중심에 멜로드라마가 섞여 있다. 이 느와르만의 특징은 복잡하게 얽혀있는 인간관계들 사이에서 어느 한쪽을 선택할 수 없는 주인공들의 심리를 다룬다는데 있다. 따라서 이수현(이준기)과 강민기(정경호) 그리고 서지우(남상미)의 삼각구도는 심리적으로 멜로드라마의 구조를 그대로 가져온다. 다만 그 양상이 사랑타령으로 드러나는 게 아니라 총을 든 느와르의 양태로 나타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사회극을 표방한 멜로
한편 SBS가 계속해서 사회극을 표방한 드라마를 내놓는데는 역시 이 멜로에 대한 대중들의 무조건적인 혐오를 염두에 둔 포석으로 보인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알겠지만 그 사회극 속에는 여전히 멜로드라마가 존재한다. ‘쩐의 전쟁’은 사채업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안에 기본적으로 금나라(박신양) - 서주희(박진희)의 멜로드라마를 엮었고, 여기에 공식적으로 이차연(김정화)이란 인물을 끼워 넣어 삼각라인을 만들었다. 드라마는 한창 사회적인 이슈들을 잡아나가다가 마지막회에 이르러 주인공들의 결혼식으로 흘러가는 멜로드라마의 양상을 보였다.

‘내 남자의 여자’는 과거 전형적인 틀을 가진 식상한 멜로드라마를 철저히 부수는 멜로드라마이다. 이 드라마는 멜로드라마들이 가진 전형성을 마치 탐구라도 하듯이 현미경을 들고 조명해나간다. 식상한 멜로드라마들이 어찌어찌 우여곡절을 겪다가 결혼에 골인하는 해피엔딩으로 끝났다면, 이 드라마는 결혼에서 시작해서 결국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끝을 맺는다. 그 중심에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사랑과 질투, 분노, 기쁨 같은 것들이 환타지가 아닌 현실적인 결론으로 끌고 가기에 ‘내 남자의 여자’는 사회극과 멜로드라마가 그 정점에서 만난 드라마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현재 방영되고 있는 ‘완벽한 이웃을 만나는 법’은 멜로드라마라는 틀을 통해 사회를 들여다보는 실험적인 작품이다. 결론을 정해놓지 않고 멜로드라마가 가질 수 있는 인물들을 배치해놓은 다음, 그 화학반응을 통해 인간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식이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이웃이라고 하는 사람은 사실 당신이 아는 그 한도 내에서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 기본 틀은 정윤희(배두나)를 사이에 둔 백수찬(김승우)과 유준석(박시후), 그리고 유준석을 따라다니는 고혜미(민지혜)가 이루는 사각관계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이들 사각관계 내부에서 벌어지는 멜로드라마가 아닌, 그 틀 바깥에 존재하는 많은 이웃들(조연들)의 화학관계를 통해 그 멜로를 이어가는 차이를 보인다. 즉 멜로는 나타난 현상이지 목적은 인간관계 자체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우리 식의 멜로드라마, 외면 말아야
이러한 멜로드라마의 실험과 진화는 최근 불고 있는 사극 열풍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사극의 메인 테마가 되고 있는 것이다. ‘왕과 나’는 내시인 나, 김처선(오만석)이 왕(고주원)이 사모해온 여인 윤소화(구혜선)를 운명적으로 사랑하는 이야기다. 새롭게 시작한 ‘이산’에서도 정조 이산(이서진)과 성송연(한지민)의 애틋한 멜로드라마가 그려진다. 현대물에서는 외면한 운명적인 멜로드라마를 사극이라는 형식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멜로드라마는 늘 식상하다는 편견 속에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멜로드라마는 늘 우리가 보는 드라마 속에 존재해왔다. 다만 새로운 외투를 입고 나타났을 뿐이다. 멜로드라마는 그렇게 비하되거나 구닥다리로 손가락질 받을 존재가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네 드라마들의 성패를 가름하는 진짜 숨은 주역인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타 분야보다 더 많은 노하우를 축적하고 있는 멜로드라마를 외국 드라마와 단순히 비교하면서 그 가치를 평가절하 하는 것은 우리 드라마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일이다. 멜로는 죽지 않았다. 다만 끊임없이 다양한 틀 속에서 실험을 해왔을 뿐이다.

페이크 다큐와 다큐 드라마, 같은 듯 다른 길

올 초 느닷없는 성추행 동영상에 인터넷은 후끈 달아올랐다. 동영상이 유포되면서 언론들이 일제히 이를 보도했고, 경찰들은 ‘성추행범 검거’에 나서기도 했다. 하지만 이틀 후, 이 퍼포먼스(?)는 고교생들의 자작극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발칙한 고교생들이 덧붙인 말이다. “우리의 동영상을 검증이나 여과 없이 방영한 방송 등 미디어의 행태 등에 비춰 UCC 동영상의 정치·상업적 악용 가능성에 주목해달라”고 했던 것. 물론 동영상이 극장이나 TV에 어떤 영화나 드라마 같은 틀로서 제공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작품(?)은 현실을 오도하는 부적절함을 남긴 것이 분명하지만, 그 목적으로만 보면 진정한 ‘페이크 다큐’의 한 면모를 보인 것은 틀림없다.

페이크 다큐, 사기와 작품 사이
최근 케이블 TV를 통해 하나의 장르로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소위 페이크 다큐는 고교생들이 만든 동영상처럼 ‘장르 패러디’의 성격을 갖고 있다.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의 진실성을 꼬집으면서 동시에 그 장면 속에 잡히는 진실처럼 보이는 사회의 허구성을 폭로하는 것이다. 고교생들이 만든 동영상은 그런 면에서 보면 지금 미디어들의 선정성을 끄집어냈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동영상이 어떠한 허구적 장치를 담보할 수 있는 틀이 없었다는 데서, 작품이 아닌 사기가 되었던 것이다. 1999년 인터넷을 발칵 뒤집히게 한 ‘블레이 위치’나 2006년 토론토 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상을 받은 페이크 다큐, ‘대통령의 죽음’은 영화라는 틀로 소비될 수 있었기에 사기가 아닌 작품이 되었다.

즉 페이크 다큐가 가진 전략적 의미는 다큐보다는 그 다큐를 담고 있는 그릇으로서의 영화라는 허구에 더 방점이 찍힌다. 이들 영화의 틀을 가진 페이크 다큐가 보여주는 영화적인 의미는 허구를 현실처럼 믿는 대중들에게 그것은 본래 허구였다는 걸 깨닫게 해준다는 데 있다. 즉 허구를 깨기 위해 다큐라는 무기를 쓰는 것이다.

환타지를 제공하는 가짜들
그렇다면 최근 케이블 TV에서 들고 나온 프로그램들을 ‘페이크 다큐’의 범주에 넣을 수 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가짜 다큐를 보여주는 것은 맞지만 이 프로그램들은 그 그릇으로 영화 같은 허구가 아닌 다큐멘터리를 취하고 있다. 즉 이들 프로그램들이 파괴하고 있는 것은 허구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라는 현실이다. 이것은 마치 뉴스 프로그램 속에 선정적인 거짓장면을 넣은 후에(이것은 고교생들의 성추행 동영상을 통해 실제로 벌어졌다) 사실은 페이크 다큐였다 말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본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가 갖는 신뢰성을 무너뜨려 가면서 이들 프로그램이 얻어내려는 목적은 다른 데 있다. 현실에서라면 보기가 쉽지 않은 자극적인 장면들을 현실인 것처럼 보여주는 것이다. 즉 이것은 페이크 다큐가 가진 환타지 파괴가 아니라 정반대의 방향, 즉 환타지 제공의 목적을 갖고 있다.

시청자들은 이들 프로그램 속에 ‘실제 소재를 바탕으로 제작진이 재구성한 페이크 다큐멘터리입니다’라는 자막 고지가 나온다고 해서 이 프로그램을 통해 얻는 자극이 줄어들지 않는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성에 있는 게 아니고 환타지에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은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는 포지셔닝 이론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의 환타지를 깨는 다큐 드라마
즉 페이크 다큐는 허구라는 그릇 속에 들어가야 그 진가를 발휘한다. 그것이 아닌 페이크 다큐(?)는 TV가 가진 신뢰성을 저 기반에서부터 무너뜨리는 제살 파먹기와 마찬가지다. 그런 면에서 이런 상황에 주목을 끄는 것이 ‘다큐 드라마’라는 형식을 표방하면서 만들어진 ‘막돼먹은 영애씨’다. ‘다큐’라는 진실성을 담보하는 단어에 ‘페이크’라는 정반대의 의미를 붙여 ‘페이크 다큐’가 탄생했듯이, ‘다큐 드라마’는 ‘다큐’라는 현실성에 정반대축에 있는 ‘드라마’라는 환타지가 붙어 탄생했다. 목적은 페이크 다큐와 같다. 드라마가 가진 환타지를 다큐라는 형식을 통해 깨겠다는 의도다.

‘막돼먹은 영애씨’라는 제목 역시 다큐 드라마처럼 상반된 두 의미를 갖고 있다. ‘막돼먹은’이란 단어에 연기자 이영애가 붙은 것이다. 드라마는 영애씨(김현숙)의 음성변조와 모자이크 처리된 얼굴을 보여주며 다큐의 한 틀로 시작하지만 곧 드라마 형식으로 전환된다. 즉 ‘막돼먹은 영애씨’는 다큐가 아닌 드라마라는 걸 공공연히 드러내면서 다큐적인 속성들을 활용해 트렌디한 드라마들의 환타지를 깬다. 도저히 안될 것 같은 사랑은 저 트렌디 드라마의 해피엔딩과는 상반되게 끝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처럼 다큐를 활용해 드라마의 허구성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에서 ‘막돼먹은 영애씨’는 그 목적에 있어서 진짜 페이크 다큐의 장르적 미학을 제대로 따르고 있다 말할 수 있다.

케이블 TV들이 ‘페이크 다큐’라 부르는 프로그램들은 다큐멘터리를 표방하지만 거짓이고, ‘막돼먹은 영애씨’ 같은 다큐 드라마는 드라마라는 허구를 표방하지만 진실에 가깝다. 전자는 환타지를 더 적극적으로 끄집어내고 후자는 환타지를 부순다. 똑같이 다큐를 표방하고 있어도 양자가 그 길이 서로 다른 것은 이처럼 목적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지금 방영되고 있는 케이블 TV의 ‘페이크 다큐’라 불리는 프로그램들에 어느 정도의 안전장치가 필요한 이유는 그 목적이 자극 그 자체에 있기 때문이다.

미래 개그맨의 자질, 순발력, 개인기, 연기력

모든 것은 무대개그의 시작을 알린 ‘개그콘서트’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이 프로그램은 그간 개그의 양대산맥으로 내려오던 ‘유머일번지’류의 콩트 개그와 ‘일요일 일요일 밤에’류의 토크쇼가 갖는 ‘안전함’의 틀을 깼다. 그 ‘안전함’이란 두 가지 측면을 말한다. 경쟁이 없다는 것과 일방향성 개그라는 것.

무대개그는 개그맨들의 무한경쟁을 알리는 신호탄인 동시에, 관객과 개그맨이 호흡하는 개그의 쌍방향 시대를 예고했다. 개그는 더 이상 스튜디오에서 안전하게 짜진 형태로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연달아 ‘웃찾사’, ‘개그야’가 같은 형식으로 경쟁에 뛰어들면서 이른바 개그의 춘추전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 무대개그 역시 한계의 징후들을 보이고 있다.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다양한 개그를 쏟아져 나오게 했던 바로 그 무한경쟁에서 비롯된다. 경쟁하는 개그가 가져오는 개그 컨셉의 단명으로 인해 웃음은 있어도 웃기는 자는 부각되지 않는 상황을 맞게 된 것.

과도한 경쟁 속에서 참신하고 실험적인 시도들이 계속해서 등장하는 것은 반가운 일이나, 이것이 동시다발적으로 쏟아져 나오게 되자 너무 빠르게 소비되는 현상을 불러온 것이다. 지금 무대개그 프로그램들이 쏟아내는 아이디어들은 계속 쳐다보고 있지 않으면 따라잡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진화 자체는 발전적인 것이지만, 너무 빠른 진화는 단명을 낳는다.

무대개그의 가장 큰 영향, 리얼리티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무대개그들이 현재의 개그 프로그램들에 준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무대개그가 갖는 현장성, 대전성격, 몸 개그 같은 요소들은 ‘무한도전’이나 ‘타짱’ 같은 개그 프로그램에 직ㆍ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그 중 무대개그가 개그 프로그램에 끼친 가장 큰 영향은 ‘리얼리티’다.

만일 지금의 무대개그 이후, 포스트 개그 프로그램을 예측하면서 가장 먼저 갖추어야할 요건을 말하라면 바로 ‘리얼리티’가 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개그 프로그램만의 문제는 아닐 정도로 TV 전체 프로그램의 기본 요건이 되어가고 있다. 더 이상 ‘짜고 치는 고스톱’으로 시청자들의 눈과 귀를 빼앗기는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리얼리티’에 의해 부각되는 것은 즉흥성(애드리브)이다. 짜진 틀 밖의 어떤 즉흥적인 대사가 순간적인 리얼함을 확보하면 웃음이 유발되는 것. 최근 개그 콘서트에 신설되어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애드리브라더스’는 그 대표적인 형식이 될 것이다.

리얼리티와 연관되어 더 확장되어질 것으로 보이는 것은 ‘현장성’이다. 관객의 반응을 좀더 포착해내기 위해 좀더 관객 속으로 개그가 이동한다는 말이다. 무대개그 속에서 카메라가 공개홀을 벗어날 수 없다면, 그 공감의 폭은 좁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무대를 벗어나 현장 속에 뛰어드는 저 ‘막무가내 중창단’류의 현장개그가 가진 현장성이 중요해진다.

또한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 개그의 인해전술(한 코너에 등장하는 개그맨들의 숫자는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증가했다)로 이것은 개그맨들의 희소성을 떨어뜨릴 수 있다. 양적으로 팽창된 개그맨들은 또한 그 속에서 살아남은 몇몇 개그맨들의 개인 브랜드화를 부추긴다. 이렇게 스타가 되어 브랜드화된 개그맨은 저 ‘무한도전’의 경우처럼 리얼리티에 흠집을 만들 수 있다. 그것이 실제상황인지 아니면 브랜드화된 개그맨의 연기인지 헷갈리게 되는 것이다.

개그맨들은 참신하지만 다수 속에 익명으로 존재하거나, 유명해졌지만 브랜드화되어 식상해지는 양쪽의 압박을 받게 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개그 하는 층의 변화도 감지되고 있다. 개그맨 자체가 브랜드화 되자 그 사라져 가는 리얼리티를 확보하기 위해 일반인들(여기는 개그맨이 아닌 타 분야의 탤런트도 포함된다)의 개그 진출이 활발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이미 UCC를 활용하는 쇼 프로그램(예를 들면 스타킹 같은)을 통해 전조를 보이고 있다.

개그맨의 자질, 순발력, 개인기, 연기력
이렇게 변화되는 상황 속에서 개그맨들이 우선적으로 갖춰야 하는 자질은 뭐가 있을까. 그 첫 번째는 순발력이다. 순간적인 촌철살인의 말 몇 마디와 행동 한두 개로 좌중을 휘어잡을 수 있는 기술이 필요해진다. 이 순발력과 함께 강조되는 것은 개인기다. 읽고 듣는 것보다는 보는 것에 더 민감해진 세대들에게 말 개그는 아무래도 몸 개그가 가진 파괴력을 따라가기가 어렵다. 게다가 몸 개그는 언어의 장벽을 넘어설 수 있다는 점에서 점점 글로벌한 환경 속에서 개그를 해야 하는 개그맨들의 필수무기가 될 것이다.

이러한 리얼리티 개그의 또 한 측면은 그 반작용으로서의 콩트 개그를 촉발시킬 가능성도 있다. 오히려 꽉 짜진 틀 속에서 ‘정극을 하는 개그맨들’을 통해 웃음을 유발시키는 것. 이것은 전통적으로 ‘개그맨은 연기자’라는 등식과도 연결된다. 따라서 개그맨이 만약 순발력과 개인기로 주목을 받고 점점 성장해 자체 브랜드화 된다면 그 생명력을 이어가기 위해 필요해지는 것은 이제 연기력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아담 샌들러 같은 연기파 코미디언이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다.

급변하는 상황 속에서 개그 프로그램들은 진화의 진화를 거듭해오고 있다. 그 진화 과정 속에서 당연히 발생하는 것은 다양해진 개그 프로그램들이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지만 이러한 시도들이 결과적으로는 좀더 공감을 넓혀갈 수 있는 웃음의 초석이 된다는 점에서, 그 어느 것도 실패라는 낙인을 쉽게 찍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의 개그 프로그램은 현재 승승장구하건, 혹은 주목받지 못하건 그 살을 깎는 노력들의 융복합으로서 등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는 것은 바로 ‘리얼리티’다.

다큐 드라마 새 지평 연 ‘막돼먹은 영애씨’의 정환석 PD

‘막돼먹은 영애씨’는 겉보기엔 거친 화면을 가진 막돼먹은 드라마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사회가 영애씨의 외모만을 보고 그 존재가치를 부정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다. 이 드라마는 다큐 드라마라는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케이블에서 저예산으로 시도할 수 있는 모범답안이면서도, 그것을 통해 기존 관습에 머물러 있는 드라마들에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성공적이다.
국내에서 모든 드라마를 통틀어 거의 첫 번째로 시즌2가 생기는 것 역시 큰 의미가 있다. 시즌2가 어려운 많은 이유들 역시 이 드라마는 손쉽게 넘어서고 있다. 저비용이고, 에피소드별로 끊어지면서 연결고리를 갖는 시즌 드라마 성격을 갖고 가기 때문이다. 이제 더 까칠해진 모습으로 돌아온 영애씨의 면면을 들어보기 위해 정환석 PD를 만났다.

초심으로 끝까지 갈 것이다
- 굳이 다큐 드라마라는 형식을 취한 이유는?
▲ 케이블에서 드라마를 한다는 것이 공중파와 같을 수 없다. 스타시스템을 가져올 수도 없는 문제고. 드라마를 어떻게 차별화 할 수 있겠느냐는 측면에서 형식적인 면을 고민했다. 여기에 다큐 드라마가 갖는 외형적인 포맷이 우리가 다루고자 하는 목적에 잘 맞아 떨어졌다. 리얼한 존재들의 숨기고 싶고 가리고 싶어하는 것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보고자 6mm라는 좀 다소 거칠지만 리얼함이 돋보이는 시각을 구사했다. 그러다 보니 다큐 드라마라는 게 나오게 되었다.

- 다큐 드라마라는 포맷이 참신하다. 다큐멘터리의 속성과 드라마의 속성이 다르게 느껴지는데 다큐는 굉장히 현실적인 걸 잡아내는 반면 드라마는 환타지를 갖고 가기 때문이다. 이것을 붙인 이유가 혹시 우리나라 드라마 속의 환타지를 만족시켜주는 멜로 같은 형식을 파괴해보자는 목적도 있지 않았나.
▲ 드라마적인 복선이나 환타지 같은 것이 배제되고 그걸 따라가지 않더라도 공감이 가는 이야기를 다큐적인 기법을 통해 보여준다면 어떨까. 드라마로는 완성도가 좀 떨어진다 해도 다큐로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 리얼함을 더 높게 사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 시트콤 냄새가 많이 나는데 시트콤이 많이 하는 게 장르 파괴다. 예를 들면 익숙한 장면들에서 다음에는 이런 장면이 나올 것이다 하고 기대하는데 전혀 엉뚱한 것이 나올 때 웃음이 터진다. ‘막돼먹은 영애씨’에서도 그런 장면들이 많이 들어 있는 것 같다.
▲ 아무래도 시트콤을 계속 해오던 사람이라 시트콤적인 요소가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트콤하고 다른 방법이 뭘까를 작가팀하고 자주 얘기하고 고민한다. 그래서 어떤 소재가 나올 때도 시트콤이면 이렇게 풀 텐데 하면서, 그러니까 그렇게 하지 말자고 하는 경우가 많다. 정반대의 발상으로 늘 생각을 하고 있다.

- 캐스팅이 굉장히 파격적이었는데.
▲ 처음 제의를 받았던 연기자분들은 다큐 드라마라는 것에 대해 재미있겠다고 생각을 해주었다. 면면을 보면 다 A급으로 빛을 발했던 분들은 아니지만 다 연기내공과 느낌이 있는 분들이라 연기 같지 않은 연기를 해보지 않겠냐는 그런 제안에 굉장히 공감을 해주었다. 따라서 오히려 설득하기가 쉬웠다.

- 영애역의 김현숙씨나 영채역의 정다혜씨 둘 다 연기라기보다는 그냥 생활 느낌이 많이 든다. 이 드라마가 주는 캐릭터의 느낌이라는 게 환타지쪽은 전혀 아니고 리얼함이 주는 정감 같은 것이다. 캐릭터로만 봤을 때는 ‘어글리 베티’나 ‘김삼순’같은 캐릭터와 유사한데 그런 드라마들은 환타지로 갔다. ‘막돼먹은 영애씨’의 경우에도 환타지가 깨졌다곤 해도 어느 정도는 가미가 된 걸로 보이는데.
▲ 처음에 생각했던 ‘막돼먹은 영애씨’는 세상에 대해서 꼬인 게 많고 그런 것 때문에 울분이 많은 여자였다. 그런 부분을 여과 없이 보여주자는 게 의도였다. 한편으로 환타지 혹은 미화되지 않는 부분을 어떻게 시청자분들이 받아들여 주실까 걱정도 많이 했다. 하지만 오히려 점점 더 리얼해서 좋다는 느낌, 환타지가 없어도 재미요소가 있구나 하는 공감을 해주셨다. 그래서 자신감을 많이 가졌는데 현실적으로 나이 서른의 솔로 여자가 직장생활 하면서 어떤 남자라도 관계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영애씨가 연하남과 연애를 하게 됐다. 애초에는 되지 않는 사랑, 짝사랑의 개념이었는데 하다보니 그래도 어느 정도 여성들을 설레게 하는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해서 살짝 로맨스가 들어갔다. 그런데 영애씨의 눈에 하트가 그려지다 보니까 까칠함이 없어지게 되고 보통 드라마류와 비슷하게 빠지게 되는 것 같았다. 외려 로맨스로 가면 대본 만들기가 쉬웠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생각에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으로 가는 게 맞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0대 노처녀를 넘어 폭넓게 사회문제를 다룰 것이다
- 시즌 2에서 시즌 1과 비교해 달라지는 것은?
▲ 환타지가 없어도 된다는 점에서 오히려 자신감을 더 얻었다. 오히려 더 리얼하게 나갈 것이다. 좀더 까칠해진 영애가 살아가는 방법을 보여줄 것이다. 어차피 로맨스도 벗어나지 않았나. 이것이 달라지는 하나이다. 또 하나는 이게 어느 정도 반향이 되고 했으니 이제 변죽만 올리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폭넓게 얘기해보려고 한다. 30대 노처녀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 드라마에는 시트콤이 가진 다양한 세대들이 있기 때문에 그분들의 사회적인 이야기를 같이 할 것이다.

- 이 드라마에는 여성들의 연대의식, 동지애 같은 게 있는데 심지어는 회사동료도 자매로 느껴진다. 물론 남자 시청자가 재밌게 보는 부분도 있는데 그것은 샐러리맨들로서의 동지의식, 애환 같은 것이다. 시즌 2에서는 그런 측면이 많이 나온다는 얘기인가.
▲ 새로운 인물도 보강됐고 직장이나 그런 데서 공감 갈 수 있는 얘기들을 더 많이 포진하려 한다. 사실 사회에서 막돼먹은 행동을 전혀 안해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선하고 착하다고 해도 사람은 이기적이기에 누구에겐가는 부지불식간에 막돼먹은 행동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동 하나로 악인으로 규정될 수 없듯이 인간은 다면성을 갖고 있다. 마초적이고 권위적인 사장도 기러기 아빠라는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자기 자식에 대한 정이 있다. 그런 양면성을 가진 사람들이 이야기들 리얼하게, 정제되지 않은 알 것 그대로 보여줄 것이다.

- 새로운 캐릭터인 정대리(정지순)가 곰과 여우를 합쳐 놓았다던데 그 캐릭터가 갖는 의미는 뭔가.
▲ 대다수 남성들을 대변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출세 지향적이고 적당히 아부 떨 줄 알면서 자기 손해보는 일 하지 않는 그런 인물이다. 또 인물 설정 자체가 위에 윤과장 같은 선배도 있지만 무서운 사람이 없는 사람이다. 회사에서 자신이 헤게모니를 잡으려 한다는 걸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능력도 있고 노하우도 있고. 그런데 영애는 그걸 한눈에 알아보는 거다. 동류가 동류를 알아채듯. 막돼먹은 그림자를 보게 되는 거다. 둘이 티격태격하게 되는데 어떻게 보면 대놓고 성차별 하는 그런 사람보다 더 무서운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다.

- 더 까칠해진다는 말은 풍자와 직설에서 직설쪽으로 더 간다는 말인가
▲ 내 자체가 직설적으로 무언갈 잘 표현 못하는 사람이다. 직설적으로 까대는 건 쉬운 일이지만 풍자는 기술이 필요하다. 어렵지만 그걸 지향하고 있다.

- 노출 신이 많은 영채는 이 드라마의 양면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드라마는 직장내 성희롱도 많이 나오는데 그것조차 시청자들에게는 소비되는 측면이 있다. 그러면서 그걸 비판하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따라서 드라마를 보며 자아비판을 하게 되는 상황을 맞게 되는데이를 테면 영채를 성적환상으로 보다가 영애가 그걸 사정없이 부서버리는 그런 거다. 자기반성을 많이 하게 된다.
▲ 내 딸아이가 프로그램 시즌 2 제작발표회 때 남성들은 반성해야한다는 기사를 보고 이런 문자를 보냈다. ‘아빠, 여자들은 정말 반성할 게 없나?’ 보는 남자들도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은 사실은 반성해라 라고 직설적으로 얘기하는 것보다 자연스럽게 그런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에 이 드라마의 목적이 있다는 걸 보여준다. 오히려 여자들도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제 딸이 얘기한 것처럼 여자들은 반성할 게 없나 하는 생각을 해봤으면 한다.

늘 새로운 것을 고민하고 싶다
- 드라마를 찍으며 제일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 저예산 드라마를 표방하기 때문에 제작에 있어서 굉장히 어렵다. 60분 짜리를 단 이틀만에 아침7시부터 새벽1시까지 강행군한다. 이틀 동안 40신 42신을 찍어내고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어려운 건 어떻게 하면 좀더 우리가 하고 싶은 문제들을 효과적으로 거부감 없이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다. 이런 걸 공감시키고 싶은데 그 공감시킬 수 있는 방법이 어떤 걸까 하는 고민. 또 늘 똑같은 방식으로 내러티브를 전개하는 게 아니고 어떤 소재라도 다른 각도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 뭘까하는 그런 게 늘 고민이다.

- 6mm를 쓰는데 그걸 들고 가면 확실히 연기자들의 거부감이 덜하고 솔직해진다는데.
▲ 그렇다. 거부감이 덜해 여러 면에서 자연스런 장면들이 나오는 것 같다. 일부러 풀 샷 카메라 같은 것도 가구 밑에다 숨겨서 놓는다. 어디서 나를 잡는지도 사실은 잘 모르는 거다. 카메라 한 대면 아 저기 카메라가 있구나 할텐데 그래서 난 어깨만 나오는 구나 이럴 수 있는데 카메라 세 대가 동시에 도니까 카메라를 의식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모든 테이크를 끊지 않고 한번에 가는 위주로 하니까 최선을 다하게 된다. 끊어서 가는 것 즉 한번 더 간다는 건 연기가 된다. 연기자들 중에는 이런 방식을 어려워하는 분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편안하게 가는 편이다.

- 어떻게 보면 이 드라마는 그 기존 형식을 깬다는 자체가 포인트일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형식을 고민할 때 고민 끝에 나오는 순수 창작인가 아니면 다른 것들을 참고하나.
▲ 캐릭터는 아무래도 여러 드라마나 영화에서 참고를 하게 된다. 이런 것들이 있어서 거기서 조금 더 앞으로 나갈 수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고맙게 생각한다. 하지만 형식에 있어서 물론 ‘블레어 위치’ 같은 사실인지 허구인지 알 수 없는 느낌의 형식이 어느 정도 영향을 안 줬다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실 이거 비슷한 건 어디에도 없다. 그런 것들이 다 모여서 된 거다.

- 시즌 2 이후에도 형식 고민을 계속 할 것인지. 대부분 자기 형식을 고집하는 분들이 많은데 다큐드라마란 형식을 계속 가져갈 것인지.
▲ 다큐드라마란 장르는 독특한 스타일로 계속 갔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많이 듣는다. 내가 아니어도 다른 분들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계속 이걸로 갈 거냐면 그건 아닌 거 같다. 늘 새로운 걸 고민하는 게 내 취향인 거 같다.

- 케이블에서 할 수 있는 모범답안 같은 드라마다.
▲ 환경이 그렇게 만든 거다. 제작비만 봐도 시즌 1은 회당 3500이다. 참고로 키드갱 같은 건 회당 2억이 들었다고 한다.

- 환경이 그러게 만든 건 사실인데 케이블에서 하는 이런 시도들이 공중파에서 하지 않는 시도를 해서 결국 드라마 전체 발전에 이바지하는 경향이 있는 거 같다.
▲ 늘 듣는 말이 자극 받게 만들어라. 뒤통수를 쳐라. 이런 말이다. 그게 존재가치가 될 수 있다 생각한다.

이 드라마는 기존 딱딱하게 굳어있는 여타의 드라마들이 주는 답답함을 깨뜨리는 통쾌한 구석이 있다. 그것은 만날 똑같이 흘러가는 드라마들의 공식들에서 벗어나 어떤 반향을 일으켰을 때 주는 통쾌함이다. 그것은 이 드라마 속의 영애씨가 순간순간 주는 통쾌함과 맞닿으면서 동시에 이 드라마의 존재이유가 되기도 하다. 매번 새로운 시도, 새로운 형식, 새로운 내러티브를 고민하는 PD가 있다는 건, 우리네 드라마가 가진 가장 큰 자산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막돼먹은 영애씨’의 고군분투 자체를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로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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