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와 재미 사이에 선 퓨전사극

‘드디어 ‘주몽’이 막을 내렸다. 35주 연속 주간시청률 1위를 기록하고, 시청률 50% 넘겨 또 한 편의 국민드라마가 된 ‘주몽’. 그러나 ‘주몽’은 그런 성공 이면에 다양한 숙제들을 남겼다. 그 문제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이 바로 퓨전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다.

‘주몽’만큼 퓨전사극이 가진 장점들을 잘 활용한 드라마가 있을까. 과거 ‘다모’, ‘상도’, ‘허준’, ‘해신’ 등에서 그 새로운 사극의 묘미를 맛보게 해주었던 퓨전사극은 ‘주몽’에 와서 그 정점을 이룬다. 이것은 퓨전사극의 중흥을 이룬 최완규(허준, 상도), 정형수(상도, 다모), 정진옥(해신)이란 작가들이 ‘주몽’이란 한 작품에 모두 모여있다는 점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래서일까. ‘주몽’은 이들 작품들의 요소들, 예를 들면 ‘상도’의 상단 이야기, ‘해신’의 해적이야기 같은 유사한 소재들이 혼재되어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러한 소재들은 마치 우리가 환타지 소설하면 알아야될 코드들(엘프나 골렘 같은 종족이나 그들의 특성 같은)처럼 이제 퓨전사극의 코드가 되고 있는 것 같다.

최근에는 사극하면 당연히 퓨전사극인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주몽’ 마지막 회, 한나라군과 벌이는 요동벌 전투에서 하늘로 솟구쳐 날아올라 황자경에게 칼을 내리치는 장면은 과거라면 도저히 상상도 못할 장면이었다. 갑자기 환타지나 무협지가 된 듯한 그 장면을 그러나 이제 시청자들은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것 같다.

이런 경향은 ‘주몽’이란 작품 속에 무수히 나타난다. 비금선 신녀의 출현이나 주몽을 저주하기 위해 제를 올리던 부여의 마우령 신녀가 번개에 맞아 죽는다는 설정 같은 건 아무리 퓨전사극이라 해도 사극의 틀을 너무 벗어나는 게 아닌가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래도 사극을 표방하는 작품 속에서 재미를 위해 진지함을 잃어버린 게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주몽’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다. 최근의 ‘연개소문’을 보면 뜨거운 불길 속에서도 기를 끌어 모아 태연히 불을 뚫고 나오는 연개소문의 모습이 등장한다. ‘주몽’만큼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과장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보면 ‘대조영’은 그나마 진지한 사극의 틀을 온전히 유지하려 애쓰는 작품으로 보인다.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 어느 정도의 ‘퓨전’은 어쩌면 당연한 대세인지도 모른다. 무협, 환타지, 게임 등으로 달라진 시청자들의 마인드는 오히려 퓨전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확실한 ‘퓨전’을 보여준 ‘주몽’은 재미있다. 우리가 신화와 역사를 통해 보았던 무표정한 인물들은 드라마로 퓨전되면서 톡톡 튀는 개성적인 인물로 재탄생되었다.

주몽, 소서노, 금와, 대소, 유화부인, 오이, 마리, 협보 등등, 이제는 역사서를 보면서 바로 이 수많은 캐릭터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들이 엮어내는 고구려라는 국가의 탄생은 당대 주몽과 유민들처럼 시청자들의 바람이기도 했다. 우리는 주몽이 한나라를 몰아내고 하나의 국가를 탄생시키는 그 장면을 보기 위해 끝없이 채널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잦은 완성도에 대한 논란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시청률과 논란의 상관관계는 퓨전사극이 가진 재미와 문제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주몽’이 처음 직면한 문제는 역시 퓨전사극의 가장 큰 문제인 역사고증 논란이다. 우리의 눈을 화려하게 사로잡은 등장인물들의 의상이 중국풍이며 건축물도 조선시대 양식이라는 점. 철기라는 게임의 레벨적 장치로 사극 전체의 재미를 끌어낸 드라마 도입부의 설정, 즉 한나라의 철기문명에 멸망한 고조선의 설정 역시 거짓이라는 점. 퓨전사극으로서 인물간의 멜로 구도를 만들기 위해 설정된 주몽과 소서노, 예씨 부인의 삼각관계 역시 지나친 설정이라는 점 등이 그것.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에 대한 왜곡이다.

부여와 고구려의 관계를 지나치게 대결구도로 만들었다는 것은 고구려 건국이라는 이 드라마의 목표를 위해 부여라는 역사를 희생시켰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게 만든다. 역사 속에서 부여는 고구려를 잉태한 모(母)국가 역할을 했고, 또한 온조가 세운 백제도 성왕 시절 수도를 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고 했을 정도였다. 부여의 부정은 아무리 퓨전사극이라 해도 지나친 것이라는 게 학계의 공통된 의견이다. 특히 ‘주몽’이 최초의 고구려사극이라는 점에서 그 부정적인 영향은 대내외적으로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밖에도 스케일 문제와 환타지 역시 퓨전사극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진 일이었다. 만일 정통사극을 주창했다면 고작 십수 명의 별동대로 수만의 한나라군과 맞서는 장면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난해 비금선 신녀가 등장하면서 불거진 ‘신물3종세트’논란은 ‘주몽’이 가려던 환타지사극의 실체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후 논란이 점점 거세지자 후에는 결국 슬그머니 사라져버린 신물에 대한 이야기는 ‘주몽’의 목적이 점점 시청률쪽으로 선회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시청률에 대한 집착은 결국 우리에게 사상 유례 없는 주인공 없는 사극을 2회에 걸쳐보게 만들었다.

이런 시청률 지상주의는 결국 퓨전사극이 가진 함정이기도 하다. 사극에서 역사가 중심이 되지 않고, 재미가 중심이 되자 결국은 작품성보다는 시청률에 더 치중하게 된 것이다. 어찌 됐든 ‘주몽’은 우리에게 고구려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사극임에는 틀림없다. 거기에는 퓨전사극이 갖는 재미의 요소가 가장 큰 몫을 차지했다. 그러나 바로 그 재미라는 것 때문에 모처럼 나온 고구려사가 왜곡되고 재단된 것 또한 사실이다. 드디어 ‘주몽’은 끝났으나 문제는 여기부터다. 역사 자체도 재미거리로 변형시키는 강력한 퓨전사극의 맛을 보여준 ‘주몽’은 이후의 사극에도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역사냐 재미냐 양날의 칼을 쥐고 있는 퓨전사극의 숙제다.

다수는 현실적이고 소수는 비현실적인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라는 말은 최소한 ‘하얀거탑’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다. 최근 쏟아지는 의견을 보면 캐릭터에 대한 현실성 논란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수를 차지하기 때문. 그 논란의 중심에 선 두 캐릭터가 있다. 이른바 내부고발자로 나선 최도영(이선균)과 염동일(기태영)이 그들. 선악의 차원을 넘어서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장준혁(김명민)을 필두로 한 여타의 캐릭터들에 비해, 이들의 선택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것이 논란의 핵심이다. 그렇다면 이들은 진정 비현실적인 캐릭터일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들은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아니다. 오히려 어찌 보면 더 현실을 제대로 말해주는 캐릭터라고 보여진다. 모두 권력과 돈을 향해 움직이는 조직 속에서 그렇지 않은 캐릭터의 존재는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조직 속에서 어떤 선택의 순간들을 매번 경험하지만 조직 모두의 선택이 같을 수는 없다. 장준혁이 조직의 논리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선택을 했다고 해서 더 현실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최도영과 염동일이 소수자들이 하는 선택을 했다고 해서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명인대 외과와 군대의 공통점
‘하얀거탑’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명인대 외과와 군대의 공통점. 첫째, 생과 사가 오가는 피 말리는 상황에 있다. 둘째, 상명하달. 이견은 용납되지 않는다. 셋째, 전쟁이 벌어지면 옳고 그름을 떠나 무조건 이겨야 한다. 넷째, 조직의 꼭지점에 있는 몇몇을 위해 조직원들은 기꺼이 희생을 감수한다. 그것이 결국 조직에서 살아남는 방법이다. 다섯째, 부하직원의 희생(도덕적인 희생을 포함)에는 반드시 미래라는 보장이 따른다. 여섯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포기하며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 소수자, 속되게 말해 ‘골통’들이 존재한다.

그 소수자들이 주장을 굽히지 않는 대가로 오는 것은 처절한 보복이다. 염동일이 그처럼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그것이다. 조직으로부터의 따돌림과 징계, 부적응자라는 낙인은 사회생활을 통해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갖게되는 두려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양심선언’을 하게 되는 것은 바로 그 양심을 저버림으로 해서 스스로 겪을 심적 고통이, 조직이 가할 고통보다 더 앞서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준혁이 최도영의 집에 숨어있는 염동일을 찾아와 하는 대화 속에서 엿볼 수 있다.

“무엇 때문에 그랬냐”는 장준혁의 질문에 염동일은 “힘들었어요! 마음이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라고 말한다. 그러자 장준혁은 역시 조직의 두려움을 보여주어 염동일을 회유하려 한다. “마지막 기회야. 의사 그만 할래?”라고 되묻는 것이다. 장준혁은 돌아서 나오며 마지막까지 “염동일 가자!”는 명령 투의 말로 저 조직을 상기시킨다. 그럼에도 “지금 제 모습에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라 말하는 염동일은 조직의 두려움을 넘어서 양심선언을 하는 이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양심선언을 한 소수자라는 문제
그런데 여기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양심선언을 하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지난 2007년 1월 한국일보에서 발표한 공익제보자 20인의 전화 인터뷰 결과가 말해줄 수 있을 것이다. 제보자 중 90%가 스트레스에 시달렸고 그중 60%는 심지어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을 정도라 답했다. 그 이유는 제보를 통해 당한 집단 따돌림, 징계와 해고, 오명 씌우기, 공갈 협박 등, 조직의 가혹행위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양심선언을 한 이들에게 박수를 쳐주기보다는 오히려 비난을 가했다는 것.

최도영과 염동일이란 캐릭터에 대한 비현실 논란은 바로 이점에서 기화한 것이 아닐까. 문제는 캐릭터가 비현실적인 게 아니고, 그들이 ‘양심선언을 한 소수자’라서가 아니었을까.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골통’이라 부르는 그들 말이다. 이 점을 뒤집어서 보면 왜 그다지도 장준혁이란 캐릭터가 ‘대단히 현실적’이라며 시청자들을 사로잡은 이유를 찾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장준혁, 그는 바로 조직 속에서 양심보다는 현실을 선택하면서 더러워도 버텨야 하는 대다수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판단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준혁이 잘못됐고 최도영과 염동일이 옳은 일을 한 것이라는 것에 이견을 달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조직을 경험했고 그 쓴맛과 단맛을 알고 있다. 소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장준혁이 했던 것과 유사한 선택들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가끔씩 최도영과 염동일 같은 사람들이 조직에 나타난다. 그들은 위협적인 존재들이다. 모두 암묵적인 동의로 행해져왔던 다수의 비양심적 선택들에 대해서 그들은 잘못됐다고 말한다. 그러니 다수의 시선이 고울 리가.

비현실적으로 보고 싶은 그들
최도영과 염동일이란 캐릭터에 쏟아지는 비현실 논란은 바로 이 다수가 내부고발자를 목격했을 때 벌어지는 양상과 유사하다. 우리가 그들 캐릭터를 ‘비현실적’이라고 말하는 속내에는 ‘비현실적으로 보고싶은’ 마음이 자리한다. 이것은 어쩌면 시청자뿐만 아니라 드라마 제작자들 역시 마찬가지였을 지도 모른다. 좀더 리얼하게 현실적으로 공감할만한 캐릭터를 그려내기 위해서 장준혁을 전면에 배치하고 최도영의 비중을 낮춘 것은 결과적으로 시청자들의 이런 심리를 제대로 읽은 것이 아닐까.

드라마는 때론 ‘현실’보다는 ‘현실이었으면 하는’ 것을 극화해 보여주기도 한다. 그것이 실제 현실이건 아니건, 장준혁은 바로 드라마 속에서 현실이었으면 하는 캐릭터였던 것이고, 최도영과 염동일은 그 반대였을 뿐이다. 현실이 아니었으면 하는 캐릭터라고 해서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아니다. ‘하얀거탑’의 캐릭터 현실성 논란은 우리사회의 다수와 소수, 조직의 동조자와 내부고발자를 보는 시선에서 비롯한 바가 크다.

드라마에 부는 전문성과 오다쿠적 감수성의 요구

최근 들어 미드(미국드라마), 일드(일본드라마)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그것은 과거부터 있어 온 것이지만 요즘의 열기는 수면 위로 올라와 있다는 점이 주목할만한 이유다. 한때는 ‘한류’라는 태극마크에 우쭐하던 우리네 드라마 세상에서 갑자기 미드, 일드가 부상하는 이유는 무얼까. 그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가장 큰 것은 한류의 ‘한 때 부흥’에 들떠 새로운 시도를 하지 않은 우리네 드라마의 진화 속도가, 오히려 한류로 드라마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시청자들의 드라마를 보는 높은 수준을 따라잡지 못한 데 있다.

언제부턴가 시청자들은 우리나라 드라마의 공식을 꿰뚫고 있으면서 그 공식에 딱딱 맞게 무한 생산되는 드라마들을 외면하고 있다. 작년부터 본격화된 이런 현상은 이른바 ‘트렌디 드라마’, ‘멜로 드라마’의 몰락을 불러왔다. 모든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트렌디 드라마’는 구태의연한 드라마의 대명사로, ‘멜로 드라마’는 통속적인 신파로 싸잡아 인식되었던 것. 우리네 드라마가 이런 시청자들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미드와 일드는 그 시청자 욕구의 빈자를 찾아 매일 거의 실시간에 가까운 속도로 인터넷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드와 일드 어떤 점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을까.

헐리우드와 시즌제 드라마의 만남
우리는 헐리우드 영화가 헐리우드 시스템에 갇혀 무언가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헐리우드는 영화라는 장르에서 시즌제 드라마라는 장르로 새로운 부흥의 돌파구를 찾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매회에 영화 제작비에 버금가는 투자가 이뤄지고 유명 감독들과 스타들이 포진하는 이 시즌제 드라마는 그저 갑자기 나타난 괴물이 아니다. 이 괴물은 우리가 과거 ‘육백만불의 사나이’, ‘소머즈’에서부터 ‘V’, ‘맥가이버’를 거쳐 ‘X파일’을 통해 익숙한 헐리우드라는 강물 아래서 꾸준히 커왔고 수면 위로 올라와서는 거침없이 세계의 시장을 향해 질주를 시작했다.

미드가 가진 특징은 헐리우드 영화들이 갖는 특성 중 하나인 전문성이다. 특정 직업에 대한 심도있는 접근은 미드가 가진 최대의 장점이다. 형사(CSI)와 의사(그레이 아나토미)는 물론이고 탈옥전문가(프리즌 브레이크) 같은 혀를 내두를 정도의 전문성은 시청자들의 시선을 붙박아두기에 부족함이 없다. 또한 한 편 한 편에 들이는 영화 수준의 완성도는 전체적인 연결성을 두고 이어지면서 파괴력을 높인다. 어느 중간에 한 편을 봐도 충분히 재미를 느끼게 하는 데다 자꾸 찾아보게 만든다는 것이다. 게다가 시즌제를 통해 무한복제되는 양상은 두렵기까지 하다. 최근에는 방송형태에 있어서도 PMP를 통한 방식을 취해 언제 어디서나 쉽게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되었다니 드라마 폐인의 탄생은 이 정도면 당연한 결과로 보여진다.

오다쿠적 드라마의 중독성
반면 일드의 특징은 편집증적이라 할 만큼 집요한 디테일과 섬세한 감정 묘사이다. 우리네 드라마에 비해 좀 템포가 느리다거나 다이내믹하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영상문법에 있어서 우리보다는 좀더 고도의 우회를 거치기 때문이다. 우리 드라마는 한 장면을 묘사할 때 A=A로서 얘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일본 드라마는 A=B이고 B=C라는 전제를 충분히 깔아놓은 상태에서 A=C라고 말한다. 그러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더 수고를 해야 그 감정 선을 읽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언뜻 보면 답답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일단 이런 방식에 익숙해지면 그 중독성은 더 커진다. 일방적인 전달보다 강한 것은 상호 교감이라는 것. 이것이 오다쿠적인 일본 드라마의 중독성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튼튼한 문화의 기반이 있기 때문이다. 스토리로 승부하는 수많은 소설들이 또한 각종 권위 있는 상을 휩쓸고 있는 건 우리네 소설계 풍토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또한 만화를 하위장르가 아닌 하나의 가치 있는 상위장르로 보고 있으며, 엄청나게 많은 소재와 다양한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는 것은 드라마처럼 늘 소재발굴에 목마른 장르에게는 축복이 아닐 수 없다.

미드와 일드 앞에 우리 드라마는?
이러한 미드와 일드의 약진 속에서 작년 우리 드라마가 내민 성적표는 그다지 좋지 않다. 좀 과장되게 말한다면 작년 한 해 우리의 드라마는 사극과 논란드라마, 그리고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깨는 몇몇 실험적인 드라마로 나뉠 수 있을 것이다. 사극은 드라마적인 재미에 있어서 가능성을 보인 것은 사실이나, 또한 민족주의적인 접근이 갖는 한계성을 내포한다는 점에서 미드와 일드에 대적할 수 있는 힘이 약하다. 논란드라마는 드라마의 퇴진과 시청률 지상주의가 가져온 병폐로 진화보다는 퇴화가 가까울 것이다. 그나마 몇몇 트렌디 드라마의 공식을 깨는 실험적 드라마들(예를 들면 ‘90일 사랑할 시간’이나 ‘환상의 커플’같은)이 겨우 우리 드라마의 가능성을 보여줬을 뿐이다.

그래서 올 들어 새롭게 등장하는 것이 소위 ‘전문직 드라마’다. 이것은 분명 미드와 일드의 영향이 가져온 결과다. ‘하얀거탑’, ‘외과의사 봉달희’같은 병원드라마는 그저 화제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지금 현재 우리 드라마의 지반을 변동시키는 큰 동인이 되고 있다. 과거의 향수로서 드라마를 대하는 시청자들은 이들 전문직 드라마보다는 드라마의 원형에 가까운 가족드라마와 사극에 아직도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만 이들은 미래의 시청자가 아니다. 미래의 시청자들은 굳이 TV가 아니라도 인터넷 등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드라마를 보는 세대다. 이들 세대들을 겨냥하는 더 많은 전문직 드라마의 등장이 예고되는 건 당연한 일이다.

변화된 환경, 시청률에도 질적 개념이 필요하다
재미있는 것은 어떠한 장르든 인터넷과 연결되면 ‘매니아화’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인터넷의 속성이다. 인터넷은 누구든 쉽게 접근하고 쉽게 주장을 펼치고 거기에 좀더 많이 빠져들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하얀거탑’의 시청률은 상대적으로 낮지만 인터넷에서의 폭발력도 낮은 것은 아니다. 이 ‘충성도 높은 시청자’는 ‘그저 심심풀이로 보는 시청자’와는 다르게 분류해봐야 할 것이다. 시청률도 양적인 개념이 아닌 질적인 개념이 도입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문제는 변화된 매체환경 속에서 미드와 일드가 각자 자신들이 가진 개성과 힘으로 무장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만의 무기를 갖고 있느냐는 것이다. 외부의 영향으로 인해 변화를 촉발하게 된 우리네 드라마는 현재 퓨전 사극과 전문직 드라마들에 올인하는 느낌이 있다. 이것은 매너리즘에 빠진 우리네 드라마에 활기를 줄 훌륭한 시도임에 틀림없으며 또한 인터넷 환경에서 자꾸만 요구되는 전문성과 오다쿠적 감수성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다.

한편으로 아쉽게 느껴지는 것은 과거 한류드라마의 틀을 이루었던 ‘멜로드라마’에 대한 무관심이다. 이것은 한류에 기대 몇몇 유명 한류스타를 내세워 성공하려했던 제작사들의 책임이 크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들 졸속 멜로드라마들에 대한 백안시 때문에 ‘완성도 높은 멜로드라마’에 대한 실험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우리가 가졌던 힘을 버리는 행위는 아닐까. 멜로는 드라마의 원형이라는 점에서, 전문성에 매니아적 감수성 그리고 여기에 덧대진 질 높은 멜로의 틀이 완성될 때 우리 식의 독특한 개성이 나타나지 않을까.

‘외과의사 봉달희’가 던지는 질문들

병원드라마가 재미있는 건 그 공간이 생명을 다루기 때문이다. 환자의 생사 갈림길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의사라는 직업은 그 자체로서 강력한 드라마성을 갖는다. ‘외과의사 봉달희’는 의사가 늘 직업 속에서 접해야하는 바로 그 선택의 딜레마들을 다룬다.

이 딜레마는 의사라면 당연히 해야하는 원칙적이고 본원적인 이야기들이면서, 의사라는 직업이 가진 특유의 숭고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외과의사 봉달희’는 바로 그 본원적인 질문들을 다시 던짐으로써, 자꾸만 상업화 되어가는 의사라는 직업을 다시 본질로 돌아가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첫 번째 질문 :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
‘외과의사 봉달희’가 서두에서 하고자 한 이야기는 ‘사람 살리는 의사’보다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의사’라는 문제이다. ‘외과의사 봉달희’가 처음 방영되었을 때, 시청자들은 “도대체 봉달희가 의사 맞냐”는 반응을 보인다. 당장 피를 뽑지 않으면 5분 내에 사망할 환자를 두고 어찌해야할지 몰라 발만 동동 구르는 의사를 보고(물론 울릉도 보건소의 검진의지만) 시청자들이 충격을 받은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의사의 모습과 너무나 달랐기 때문. 그녀가 한국병원 레지던트로 오면서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심근경색 환자를 소화제 처방해 결국 사망하게 하고 식도가 약해진 환자 동건에게 딱딱한 고구마를 먹게 해 중태에 빠뜨린 그녀는 환자들의 생과 사가 자신의 순간적인 선택에 달려 있다는 중대한 사실에 맞닥뜨리게 된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 살리는 의사보다 먼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는 의사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 드라마의 갈등상황은 바로 이 중대한 선택 앞에 수시로 놓이게 되는 의사들에게, 일반인으로서의 시청자들이 감정이입되는 순간 발생한다. 이 손에 땀을 쥐고 피 말리는 선택 앞에서 기쁨과 슬픔은 오버랩된다. 봉달희의 판단 착오로 심장이 멎어 죽게된 환자 앞에서 함께 안타까워하다가도, 그녀의 옳은 판단으로 괴사성 근막염으로 사망할 위기에 처한 환자가 살았을 때 무한한 희열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불치병 드라마’를 뒤집어놓은 상태가 된다. 불치병 드라마는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를 다루지만, 이 ‘인간으로서의 의사’가 주인공인 드라마는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의 문제를 다룬다. 똑같이 삶과 죽음을 다루지만 ‘불치병 드라마’가 수동적인 입장을 취한다면, 이 드라마는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입장을 취한다. 여기서 드라마는 좀더 철학적이 되고 좀더 역동적인 모습을 띄게 된다. 이건욱(김민준)의 말을 빌리면 ‘인간에게 칼을 댈 수 있는 유일한 면허를 가진 인간’, 의사라는 직업 특성 상 환자 앞에서의 모습과 인간으로서의 모습은 괴리를 갖게 마련이다.

두 번째 질문 : 의사인가 인간인가
그렇기에 의사 조문경(오윤아)은 아들의 병 앞에서는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어머니가 된다. 그 두 정체성(의사와 어머니) 사이에서 그녀는 갈등을 일으킨다. 재미있는 것은 자신의 친자식이 아니라는 사실에 아들을 부정하던 이건욱이 아들의 병을 알고 아버지이기를 자처하는 장면이다. 이것은 죽음 앞의 한 인간(그것도 아주 가까운)에 대한 의사로서의 안타까움일까 아니면 아버지로서의 애절함일까. 혹은 그 둘 다인지도 모른다. 이 복잡 미묘한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들의 감정 속에는 인간과 의사라는 두 존재가 공존한다.

봉달희는 한 의식불명환자의 생명유지를 위해 벼랑 끝에 매달린 앰블란스 속에서 갈등한다. 의사로서의 판단은 그 환자를 유기할 수는 없다는 것이지만, 의식불명으로 빈사 상태에 있는 환자를 위해 자신의 목숨을 내놓을 수 없다는 인간적인 판단 사이에서 갈등한다. 그 두려움 앞에 서서 손을 부들부들 떨어가며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갈등하는 모습은 의사는 의사일 뿐인가 아니면 의사도 한 인간인가 하는 문제를 질문하게 만든다. 이 드라마 속에 존재하는 ‘멜로 라인’은 바로 이 ‘인간으로서의 의사’라는 부분과 연결성을 갖는다.

‘멜로 라인’이 있는 드라마로서 ‘무늬만 전문직 드라마’가 되지 않을까 우려해왔던 것과는 달리, ‘외과의사 봉달희’는 이 ‘멜로 라인’을 ‘인간적인 의사’의 갈등 라인 속으로 끌어들인다. “도대체 그 아이의 친아버지가 누구냐”며 조문경에게 핏발을 올리는 이건욱. 늘 자신보다 앞서있는 경쟁자이자 기분 나쁜 존재인 안중근(이범수)과 조문경이 함께 가는 장면을 보고 증오 섞인 눈빛을 던지는 그의 모습은 강력한 긴장감을 유발한다. 만일 누군가를 살려야할 한 의사가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정도의 살의를 가지고 있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까. 의사의 인간으로서의 따뜻한 면모는 때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한다.

세 번째 질문 : 의사로서의 판단과 인간으로서의 판단
모든 환자들을 자신의 동생처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아이처럼 여기는 ‘인간적인 의사’라는 존재는 이상일 뿐, 현실은 아니다. 봉달희가 “의사도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때, 안중근이 “누가 의사가 사람이래?”라고 되묻는 건, 감정이 들어간 판단은 오히려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말처럼 “너무나 살리고 싶은 환자가 있어 더 빨리 낫게 하려고 수치 이상의 항생제를 쓰면” 결국 환자는 죽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게되는 환아가 동건이다. 1차 항암치료에서 별다른 암세포의 변화를 보지 못하자 좀더 강력한 2차 항암치료를 강행했던 동건이는 일시적인 회복을 보이고는 결국 암세포의 급작스런 전이로 사망하게 된다. “왜 내게 희망을 주었냐”는 동건에게 “그래도 이겨낼 수 있다”고 2차 항암치료를 강권한 봉달희는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개입된 판단’으로 결국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게 했던 것.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동건의 담당의로서의 조문경(오윤아 분)의 최종 결정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문경은 사망자컨퍼런스에서 자신은 이제 둔감해져 사라진, 열정을 갖고 있는 봉달희가 부러워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녀는 의사가 환자에 대한 열정으로 기적을 바라는 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환자를 괴롭힐 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설상가상으로 위급환자를 돌보다 혈관이 터져 죽게 하자 봉달희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그녀는 그 두 환자의 죽음을 동일선상에서 보게 된다. 그러나 안중근은 봉달희에게 그 두 죽음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동건의 경우에는 봉달희의 열정이 문제가 되었지만, 그 후에 사망한 위급환자는 제대로 된 판단과 처치를 다 했지만 사망했으므로 의사로서는 할 일을 다 했다는 판단을 내려준 것. 이 판단은 이런 문제가 단지 봉달희 같은 유별난 의사의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모든 의사들이 갖게 되는 양면의 딜레마라는 걸 말해준다. 즉 봉달희든 안중근이든 똑같이 딜레마에 봉착한다는 것이다.

네 번째 질문 : 생명에 우선순위가 있나
이제 그 질문은 의사의 환자 선택의 문제까지 확대된다. 응급실에 실려온 살인용의자와 그 용의자에 의해 차에 치어 죽을 위기에 몰린 아이. 둘 다 위급한 환자지만 병원에 남은 혈액의 양은 한 명만 살릴 수 있다. 잔인하게도 먼저 실려온 살인용의자는 살고, 몇 분 늦게 도착한 아이는 피를 구하지 못해 수술도중 사망하게 된다. 여기에 대해 아이의 수술을 맡았던 이건욱은 안중근에게 항변을 해보지만, 안중근의 말은 단 하나다. “생명에 우선순위는 없다”는 것. 그건 의사로서는 어쩔 수 없는 판단이지만 인간적인 판단은 아니다.

그런 안중근에게 사태는 더 복잡하게 돌아간다. 살인용의자가 그를 지키는 경찰과 담당의인 봉달희를 칼로 찌르고 도망친 것. 자신이 살린 살인용의자 때문에 아이가 사망했다는 자책감을 갖고 있던 안중근에게는 자꾸 마음이 끌리는 봉달희까지 상처를 입은 상황에 이르자 의사로서의 냉정을 찾기 어렵게 된다. “의사는 의학적 판단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안중근에게 “아이가 우선”이라는 게 의학적 판단이었다고 이건욱이 추궁하자 결국 안중근은 속내를 드러낸다. 자신의 판단에 이건욱에 대한 개인적 감정이 개입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일 것인가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도망친 살인용의자가 결국 쓰러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것. 이건욱과 안중근은 순간 인간적인 판단, 즉 이 살인용의자를 살려야 하는가를 생각하지만 결국 의사로서 그를 살려낸다. 그것이 의사로서의 자기 존재 증명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인간으로서의 의사가 가진 미덕
외과의사 봉달희’는 ‘인간으로서의 의사’를 다루었다. 그리고 그 ‘인간으로서의 의사’는 위험천만이 아닐 수 없다. 환자와 의사 사이에 인간 대 인간의 감정이 섞일수록 그 의사는 더 위험해진다. 아무리 능력 있는 의사라도 자기 자식 같은 사람에게 함부로 칼을 댈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감정이 조절되지 않는 의사가 칼을 쥔다는 것 역시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 고민하고 더 신중해지는 봉달희를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어떤 위대한 면모를 발견하기도 한다.

결국 봉달희는 의사를 의사답게 만드는 것이 환자라고 말하는 것 같다. 그녀가 이 모진 의사가 되기로 마음먹은 것은 자신의 아팠던 과거와 스스로도 환자로서 여러 차례 수술을 받았던 때문이다. 또한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포기하려했던 의사의 길로 다시 돌아오게 만든 존재 역시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환자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위험천만한 의사에게서 비로소 안심하게 된다. 환자의 입장에 섰던 봉달희야말로 진짜 환자의 아픔을 이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문제가 있다. 이 ‘외과의사 봉달희’는 왜 이런 의사라는 직업이 갖는 철학적이고 심각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는 것일까. 순수외과에 지원하는 의사들이 점점 줄어들고 성형외과 같은 돈 되는 과에 지원하는 이들이 많아지는 세태, ‘인간으로서의 의사’니 ‘인술’같은 말들이 과거의 가치가 되어버리고 이제는 오로지 부의 축적이 한 목적이 된 세태 속에서 어쩌면 이런 질문들은 아무런 현실성을 띄고 있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이 드라마는 더더욱 그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지도 모른다. 당신이 처음 의사를 선택하고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던 시절의 그 마음을 드라마라는 틀 속에서 찾아보게 하려는 지도 모른다.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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