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보다 인물 판타지, 마동석이라는 캐릭터는

마동석 현상이다. ‘흥행보증수표’라는 표현까지 등장했다. 항간에는 ‘원빈을 넘어섰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청불영화로서 역대 흥행 3위인 <아저씨(628만여명)>를 <범죄도시(636만여명)>가 넘어섰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후속작으로 방영중인 <부라더> 역시 첫 주에 73만 관객을 동원하며 이대로 가면 100만 관객 돌파는 시간문제라고 한다. 무엇이 이런 현상을 만들어내고 있는 걸까.

사진출처:영화<부라더>

액면대로 얘기하면 <범죄도시>는 굉장한 작품이라기보다는 잘 만든 오락영화다. 특히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가진 이미지를 가장 잘 끌어와 작품에 녹여냄으로써 흥행에 성공한 영화라고 할 수 있다. <부라더>는 <범죄도시>에 비교하면 소품이고, 작품 내적으로 봐도 그다지 성취가 보이지 않는 영화다. 

안동 문중의 보물을 찾는 형과 그 땅에 고속도로를 내기 위해 문중사람들을 찾아가 허가서를 받아내는 동생이 그 안동에 내려가 벌어지는 사건을 다뤘다. ‘가보도 팔아먹는 형 vs 집안도 팔아먹는 동생’이라는 홍보문구가 거의 다라고도 할 수 있는 코미디다. 물론 대학로 스테디셀러 뮤지컬인 <형제는 용감했다> 원작을 가진 작품이지만 영화로서는 어딘지 밋밋한 이야기에 중간 정도 지나고 나면 결말까지 대충은 감이 잡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영화 역시 마동석이라는 배우가 가진 그 캐릭터를 적극 활용한다. 산만한 덩치에 어딘지 건들대는 그 모양새가 안동의 유서 깊은 집안사람들과 부딪칠 때 나올 수밖에 없는 웃음. 특히 동생 역할을 한 이동휘와 사사건건 부딪치는 모습에서는 어딘지 유치해도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물론 뒤로 가면 이 덩치가 눈물을 흘리는 반전모습을 볼 수 있지만.

그래서 결과적으로 보면 <범죄도시>의 놀라운 성적도 그렇고, 그에 이은 <부라더>의 선전도 그 연원은 결국 마동석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미 작년 <부산행>을 통해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관객들에게 눈도장을 찍은 이 배우는 놀랍게도 올해 두 작품의 성공요인이 되었다. 작품이 가진 부족함이 분명한데도 불구하고 마동석이라는 이름 석 자 때문에 관객들이 영화관을 찾았다는 것. 

물론 마동석처럼 작품 속 캐릭터를 연기한다기보다는 자기 이미지를 오히려 작품 속으로 가져오는 배우는 적지 않다. 특히 성룡이나 아놀드 슈와제네거, 빈 디젤 같은 액션 배우들의 경우 이런 특징이 두드러진다. 그들의 작품을 볼 때 우리는 그 작품이 가진 내용을 그리 눈여겨보지 않는다. 대신 그들이 보여줄 액션에 더 관심이 간다.

마동석은 그런 점에서 보면 외형적으로 이런 액션배우들의 틀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다고 보인다. 터질 듯한 근육은 오리모양이 수놓아진 티셔츠 하나만 입고 있어도 웃음을 터트리게 만들고, 살벌한 조직폭력배들이나 심지어 좀비들 앞에서도 어딘지 든든함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동석의 액션은 성룡이 하는 현란한 동작이 아니고 그렇다고 아놀드 슈와제네거가 보여주는 화력 강한 액션도 아니다. 맞으면서 싸우는 이 캐릭터는 남다른 완력으로 상대방을 압도한다. 어딘지 칼을 맞아도 버텨낼 것 같은 그런 인상이다. 우리네 액션 장면들이 가진 정제되기보다는 치고받는 현실감을 이만큼 잘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가 있을까.

하지만 마동석이 우리네 관객들에게 어필하는 가장 큰 지점은 훨씬 더 사회적인 정서와 관련이 있다. 그는 너무나 견고해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공공의 적들 앞에서는 강력한 힘을 보여주지만, 보호해야할 약자들 앞에서는 한없이 부드러워지는 마블리로 변신한다.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우리 사회의 비정함을 마동석은 그 캐릭터를 통해 뒤집는다. 이런 점은 관객들이 마동석의 액션에 무엇을 기대하는가를 잘 말해준다. 현실의 비정함을 뒤틀어버리는 강력한 힘에 대한 요구다.

그렇지만 마동석 현상에 대해 과도한 평가를 내릴 필요는 없다. 그건 굉장한 연기력이나 작품의 성취도에 의해 생겨난 것이라기보다는 마동석이라는 인물 자체가 가진 캐릭터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마동석이 스스로 배우로서 성장해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가 하는 걸 말해준다. 물론 이런 액션스타가 우리에게도 존재한다는 건 그 자체로 즐거운 일이지만.

‘남한산성’이 촉발한 정치권 공방, 예나 지금이나...

죽음을 불사하고라도 치욕적인 삶은 살지 말아야 한다. 살아야 비로소 대의도 명분도 있다. 영화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청의 대군에 포위된 남한산성에서 당시 척화파였던 예조판서 김상헌(김윤석)과 주화파였던 최명길(이병헌)이 치열하게 벌인 논쟁을 다뤘다. 유독 추웠던 그 해 겨울, 성을 지키는 군사들은 청군이 오기도 전에 얼어 죽거나 굶어 죽을 판이었다. 청군들은 칸이 직접 오는 시기에 맞춰 남한산성을 총공격할 준비에 들어간다. 

사진출처 : 영화 <남한산성>

인조(박해일)는 김상헌의 주장도 최명길의 주장도 허투루 들을 수가 없다. 한 나라의 군주로서 쉽게 무릎을 꿇을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죽어가는 백성들과 군사들을 대의명분을 따지며 버티기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살 수 있는 ‘말의 길’을 항상 열어둬야 한다고 주장하는 최명길을 통해 청과의 화친을 도모하면서 동시에 김상헌을 통해 청과 맞서 일격을 가할 기회를 엿본다. 

공교롭게도 <남한산성>이라는 영화가 가져온 역사의 한 대목이 지금의 북핵 위기에 놓여진 우리의 상황을 떠올리게 한다. 현 정치권의 여야 입장이 첨예하게 갈리고 있는 상황은 당시 척화파와 주화파의 대결구도를 떠올리게 한다. 더불어민주당 소속 박원순 서울시장과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영화 <남한산성>을 빗대 벌인 공방은 당시나 지금이나 갈리진 여야의 대립을 고스란히 재연하고 있다. 

박원순 시장은 “얼마든지 외교적 노력으로 사전에 전쟁을 예방하고 백성의 도탄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민족의 굴욕과 백성의 도륙을 초래한 자들은 역사 속의 죄인이 아닐 수 없다”며 “무능하고 무책임한 지도자들이 잘못된 현실 판단과 무대책의 명분에 사로잡혀 임진왜란에 이어 국가적 재난을 초래한 것”이라고 영화 관람 후기를 남겼다. 

홍준표 대표는 “나라의 힘이 약하고 군주가 무능하면 고스란히 백성의 몫이 된다는 것을 새삼 알게됐다”며 “백성의 삶이 피폐해지고 전란의 참화를 겪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무능과 신하들의 명분론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박원순 시장이 영화를 빗대 외교적 해법이 중요하다는 걸 강조한 반면, 홍준표 대표는 이 영화를 통해 ‘안보무능’ 프레임을 꺼내든 것. 

같은 영화, 나아가 같은 역사지만 그걸 보는 관점은 정치적 입장에 따라 너무나 다르다. 물론 영화 속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은 서로 입장은 달라도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예우를 보여준다. 그래서 결국은 최명길이 얘기한대로 칸 앞에 인조가 삼전도의 굴욕을 겪게 되지만, 그 와중에도 그는 인조에게 김상헌 같은 충신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자신은 영원히 역적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한다. 다른 입장이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같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영화 한 편을 놓고도 정치 공방을 벌이는 여야는 과연 어떨까. 영화 속 인물들처럼 저마다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이런 서로 다른 논평들을 내놓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정치적 대결을 위해 영화 한 편을 두고도 ‘아전인수’의 입장을 내놓는 것일까. 

영화 속에는 그러나 흥미롭게도 역사에 남은 실존인물들만이 아닌 날쇠(고수)라는 민초가 등장한다. 남한산성 마을 안에 자리한 대장간의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날쇠는 이러한 외세의 침략과 그 안에서 벌어지는 조정대신들의 날선 말의 대결들 속에서 결국 죽어가는 건 민초들이라는 걸 보여주는 인물이다. 

농사를 짓기 위한 낫을 만들던 그는 어쩔 수 없이 그 낫을 무기로 들게 되지만 그의 말대로 민초들이 원하는 건 대단한 것이 아니라 봄에 씨 뿌려 가을에 거둬 추운 겨울을 날 수 있으면 되는 평범한 삶일 뿐이다. 그 작은 민초들의 삶조차 지켜내지 못하는 저들의 치열한 논쟁들이 바로 이 날쇠라는 인물 앞에서 너무나 허망하게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래서 결국 전쟁 속에서도 또 치열한 정쟁 속에서도 끝까지 살아남아 또 새로운 삶을 이어가는 가장 강한 생명력을 보여주는 건 다름 아닌 민초들이다. 그 누구도 전쟁을 원치 않았고 그 누구도 대단한 삶을 원하지도 않았다. 그저 굶지 않고 추위에 얼어 죽지 않을 정도의 삶을 원했을 뿐이다. <남한산성>은 그래서 최명길과 김상헌의 팽팽한 설전만큼 날쇠라는 인물의 한 마디가 더 큰 울림으로 남는 영화다. 전쟁이니 화친이니를 주장하기 전에 날쇠 같은 보통의 서민들을 먼저 들여다봐야 하지 않을는지.

웃음과 눈물과 감동의 ‘아이 캔 스피크’

그는 도대체 왜 20여 년간 무려 8천 건에 달하는 민원을 넣었을까. 도깨비 할매로 불리는 옥분(나문희)은 시장통에서 수선집을 하며 시장 곳곳에 문제들을 그냥 넘기지 않고 하나하나 구청에 민원으로 제기한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 속 깊숙이 담겨져 있는 그 말은 꺼내지 못하며 살아간다. 자신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까지 상처를 입게 했던 그 말. 그래서 그가 8천 건에 달하는 민원을 넣었을 때 그 마음이 느껴진다. 얼마나 그는 말하고 싶었을까.

사진출처:영화<아이 캔 스피크>

그는 시장통에서 사사건건 문제가 될 만한 것들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하다못해 민재(이제훈)의 동생이 생라면을 먹고 있는 것조차 안쓰러운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는 그 나이에 이제 그다지 필요 없을 것 같은 영어를 그토록 열심히 배우려 한다. 그래서 집안 벽 곳곳에는 영어 문장들이 적혀진 종이들이 붙어 있다. 학원도 다니며 젊은 친구들 사이에 앉아 조금 천천히 해달라고 선생님께 조른다. 결국 학원도 받아주지 않자 그는 구청에 새로 온 9급공무원 민재(이제훈)에게 영어 개인교습을 청한다. 동생이 인연이 되어 옥분을 가르치게 된 민재는 궁금하다. 왜 그가 이렇게 영어를 배우려 하는지. 

영화 <아이 캔 스피크>는 옥분이라는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하지 못하고 있는 할매를 등장시킨다. 사람들은 그가 하고 있는 많은 말들이 진짜 하고픈 말을 못해서라는 걸 잘 모른다. 그가 영어를 배우려 하는 것이 무엇 때문인지 잘 모른다. 그래서 오해한다. 하지만 그 오해가 우리가 가진 많은 편견들에게 비롯됐다는 걸 우리는 모르고 있었다. 옥분은 일제강점기에 깊은 상처를 가진 위안부 할머니다. 그 모진 고통을 겪고 돌아왔을 때 그러나 부모조차 그를 반겨주지 않았다. 그가 평생을 입을 다물고 살았던 이유다. 

<아이 캔 스피크>는 위안부 할머니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겁게 시작하지는 않는다. 가벼운 코미디처럼 접근한다. 그래서 영화의 전반부를 보면 이 영화의 제목처럼 할머니가 영어를 배운다는 그 설정이 가진 휴먼 코미디처럼 느껴지는 면이 있다. 하지만 그 할머니가 하려는 이야기가 점점 진중해지고 무게가 얹어지는 후반부로 가면 관객들로서는 그 둔중하게 다가오는 메시지에 코끝이 시큰해진다. 지금껏 많은 영화들이 위안부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다뤘지만 이 영화만큼 균형 있으면서도 따뜻하게 담은 영화가 있을까 싶다. 

그래서 <아이 캔 스피크>라는 제목은 뒤로 갈수록 그 의미가 확장된다. 처음에는 옥분의 끝없는 민원과 영어가 그 목적어처럼 여겨지다가 그가 평생을 숨기고 있던 그 역사의 한 대목이 될 수밖에 없는 상처가 목적어가 된다. 그리고 그것은 더 나아가 그것은 그의 삶만이 아니라 꽤 많은 세상의 할 말은 있지만 말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아픈 서민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누구나 하고픈 말을 ‘말할 수 있는’ 그런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

웃다가 뭉클해져 눈물을 흘리다가 깊은 감동을 느끼게 되는 이 감정의 파고는 <아이 캔 스피크>가 위안부 할머니를 소재로 하면서도 그 이야기를 그 소재에만 매몰시키지 않고 보다 확장시킨 데서 나오게 되었다. 역사적 실제 사건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하면서도 그 이야기가 그분들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걸 영화는 그래서 훌륭하게 설득시킨다. 이만큼 감정을 추스르기 쉽지 않은 이야기를 이토록 균형 잡히게 말해주다니. 그러고 보면 이 영화의 제목은 이 영화가 이런 무거운 소재들도 충분히 따뜻하게 그려낼 수 있다는 것 또한 담고 있었던 건 아닌가 싶다.

“부정을 그냥 넘길 순...”, ‘저수지게임’ 그 질깃함의 이유

다큐 영화 <저수지 게임>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의 비자금을 무려 5년째 추적해온 주진우 기자는 스스로 실패했다고 말했다. 모든 정황들이 있고, 합리적인 의심을 하기에 충분하지만 결정적인 증거가 나오지 않았다는 것. 

사진출처:영화<저수지게임>

그리고 이런 결과는 이미 이 영화를 보기 위해 돈을 지불하고 영화관에 들어온 관객들은 알고 있다. 만일 주진우 기자의 추적이 성공했다면 우리는 이 이야기를 영화관이 아닌 뉴스를 통해 봤을 것이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민들 대다수가 의구심을 갖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속 시원한 뉴스는 나오지 않았다. 결국 주진우 기자 말대로 실패한 것이다. 

그래서 <저수지 게임>이 담고 있는 것은 속 시원한 성공담이 아니다. 실패담이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마음은 좀체 시원해지지 않는다. 답답하다 못해 화가 날 지경이다. 그런데도 영화는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저 정도라면 포기했을 거라는 게 보통 사람들의 경우일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진우 기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5년을 추적했고 지금도 그 추적은 끝나지 않았다. 영화는 결과를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 담긴 집념을 담는다.

<저수지 게임>의 주진우 기자는 MB의 비자금을 추적하며 하나의 패턴을 발견한다. 해외 투자라는 명목으로 망할 투자를 공기업들이 나서서 하고 그래서 적게는 수백억에 이르는 투자금을 공중분해시켜 버린다. 사라진 돈의 출처가 불분명한 가운데, 이상하게도 손실을 본 투자자인 공기업들은 이를 회수하려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고소도 하지 않는다. 주진우 기자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주진우 기자가 스스로 “열이 받는다”고 말하고 그 말에 관객들도 공감하는 까닭은 그 많은 돈들이 사실은 국민의 세금이라는 점이다. 결국 우리 돈을 가져가 망할 투자를 하고 돈을 날려버린 뒤 찾으려는 노력도 또 책임자에게 법적인 책임을 추궁하지도 않는다는 이야기다. 이런 식의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가 가능한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국민은 바보로 전락한다. 정부는 혹 대책이 없는 게 아니라 공범자는 아닐까 하는 의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주진우 기자가 끊임없이 관련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을 통해 어려운 진술을 받아내고, 또 해외로 직접 날아가 관련자들과의 인터뷰를 시도하는 그 일련의 과정들에 우리는 집중할 수밖에 없다. 제발 증거가 나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게 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쉬운 일일까. 주진우 기자와 함께 사건을 추적했던 김어준은 말했다. 자금 추적을 하면 사라져버리는 일이 일상이었다고.

그러니 5년여의 추적이 실패로 돌아올 이 일을 그들 또한 몰랐을 리 없다. 심지어 고소도 당했다. 그런데도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이 일에 집착하냐고 감독이 묻는다. 기자정신 같은 건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다만 눈앞의 “부정을 그냥 넘길 수는 없다”고 말한다. 외면할 수는 없다는 거다. 적어도 이렇게까지 “뒤쫓아다니는 사람이 한 명은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다”는 것. 

그래서 관객들이 실패담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저수지 게임>을 들여다보려는 건 적어도 주진우 기자의 그 질깃질깃한 집념에 동감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저런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다는 것에 지지를 표하고 싶어서다. 어떤 안도감이라도 갖고 싶어서다. 보는 내내 화가 나고 허탈한 한숨이 터지지만 그래도 영화관을 나오며 어떤 뭉클함 같은 게 느껴지는 건 그래서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가, 하는 그 의아함에 담겨지는 놀라운 집념에서 어떤 작은 희망 같은 것이 보인다는 것. 그래서 그의 실패담에는 단서가 붙었다. ‘아직까지는’이라는.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