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격자'도 그랬는데 왜 '브이아이피'만 문제 삼느냐고?

영화 <브이아이피>는 북한에서 내려온 고위급 자제 연쇄살인범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가져왔다. 누아르 장르를 표방하는 만큼 피가 튀는 총격전이나 칼부림은 심지어 미학적 액션으로까지 담아진다. 박훈정 감독의 전작이었던 <신세계>가 그러하듯이 이 작품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이러한 폭력이 난무하는 누아르를 통해 우리나라를 중심으로 한 미국, 북한의 외교적 관계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사진출처:영화 <브이아이피>

연쇄살인범을 잡았지만 북한의 고위 정보를 가진 그에게서 그 정보를 빼내기 위해 그를 보호하는 미국 측에 의해 처벌하지 못하는 상황. 누가 권력을 쥐느냐에 따라 연쇄살인범이 버젓이 일가족을 처참하게 유희를 위해 살해해도 아무런 처벌을 하지 못하는 북한의 비뚤어진 권력 체계. 그 안에서 피해를 보는 건 북한이든 남한이든 평범한 서민들인 상황. 이건 마치 사드 배치와 미사일 위협의 갈등 사이에서 결국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 몫으로 돌아가는 현 한반도를 둘러싼 외교적 정세를 압축해 보여주는 듯한 흥미로움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누아르에 덧댄 현실적 정경들 같은 흥미로움에도 불구하고 <브이아이피>는 비뚤어진 여성에 대한 의식을 담고 있다는 비판 여론에 직면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연쇄살인범이 저지르는 눈뜨고 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여성 살해 장면이 지나치게 과도하다는데서 비롯되었다. 그것은 그저 살인이 아니라 유희에 가깝기 때문에 특히 관객들은 왜 저런 장면이 저렇게 적나라하게 들어갈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중이다.

사실 폭력적인 장면이 수반되기 마련인 누아르에서 여성을 대상으로 하는 범죄가 소재로 다뤄진 건 한두 번이 아니다. <추격자>도 그랬고, <살인의 추억>도 그랬다. 그러니 그 장면만으로 섣불리 이 영화가 여성에 대한 비뚤어진 의식을 갖고 있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중요한 건 왜 그런 장면이 굳이 들어가야 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과연 <브이아이피>는 적절한 답변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추격자>나 <살인의 추억>의 경우 이 여성 피해자들이 더 이상 나오는 걸 막기 위해 온몸을 내던지는 형사들의 간절함 같은 것들이 등장한다. 즉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과 동정 그리고 그런 일들을 벌이는 살인자에 대한 공적인 분노 같은 것들을 영화가 그 정서적 기저에 깔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브이아이피>는 이 연쇄살인범을 추격하는 형사나 국정원 요원도 또 북한에서부터 내려온 보안요원도 분노하는 건 이 피해자에 대한 안타까움 같은 것 때문이 아니다. 대신 동료가 죽음을 당한 상황에서 범죄를 저지르고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는 연쇄살인범에 대한 사적 분노가 더 크다. 

그렇다면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이야기의 동력이 브이아이피이기 때문에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을 받지 않는 연쇄살인범이라는 상황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굳이 그토록 잔인한 여성 피해자에 대한 묘사가 왜 필요했는가 하는 점이다. 실제로 영화가 중반 이상을 지나고 나면 여성 피해자에 대한 감정보다는 저들끼리의 대립에 의한 감정이 더 전면에 등장한다.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가서 연쇄살인범이 최후를 맞는 결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남는 불편함을 피할 수 없다. 그 불편함은 처절하게 당한 피해자가 있지만 그 피해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이 영화가 보여주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영화는 결론적으로 이 피해자를 소외시키고 대신 저들끼리의 액션을 통한 카타르시스를 보여주는데 머무른다. 관객들이 불편함을 느끼고 나아가 여성에 대한 비뚤어진 관점이 투영되었다고 느끼는 건 바로 이 소외된 피해자라는 지점 때문이다.

‘애나벨’, 불길한 상상이 만드는 공포가 더 무섭다

영화 <애나벨 : 인형의 주인>은 개봉되기 전부터 무섭다는 소문이 돌았다. 너무 무서워 팝콘이 날아다니니 굳이 팝콘을 사서 들어갈 필요가 없다는 농담 섞인 이야기가 있었고, 그 유명한 <컨저링> 시리즈 사상 가장 무서운 작품이라는 평론가의 평가도 있었다. 

사진출처: 영화<애나벨:인형의 주인>

악령 들린 인형 하나 나오는 게 뭐가 그리 무서울까 하는 의구심을 갖는 관객도 있고, 또 실제로 영화를 봤는데 생각만큼 무섭지 않아서 왜 그렇게 호들갑이었는가 하는 비판을 하는 관객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영화를 보며 “안 돼”, “가지마” 같은 말을 할 정도로 몰입하는 관객도 있다. 어째서 이런 다른 반응들이 나오게 된 걸까. 

<애나벨>은 사실 다 보고 나오면 내가 왜 그토록 긴장했던가가 놀랍게 느껴지는 공포영화다. 대부분의 공포 영화들이 실제적인 끔찍한 장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어떤 충격을 가하지만, <애나벨>은 보여주기보다는 보여주기 전까지 기다려야 하는 그 침묵과 가려짐의 시간이 참을 수 없는 공포를 주는 영화다. 바로 그 장면과 장면 사이의 참고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 관객이 스스로 머릿속으로 떠올리기 마련인 불길한 상상. 그것이 <애나벨>이 공포를 만들어내는 힘의 원천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 영화가 말하려는 악이 어떻게 우리의 정신 속으로 깃드는가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딸이 교통사고로 죽고 실의에 빠진 애나벨 인형을 만드는 장인 사무엘(안소리 라파글리아)과 그의 아내 에스더(미란다 오토). 그리고 12년 후 그들이 내준 집에 들어와 지내게 되면서 섬뜩한 상황을 마주하게 되는 소녀들. 애나벨 인형에 깃든 악령이 깨어나 소녀들의 영혼을 잠식해가는 그 과정이 주는 공포가 바로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영화 속에서 어떤 끔찍한 공포 상황을 겪게 되고 그로인해 희생되는 건 다름 아닌 상처받아 약한 정신을 가진 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의 약한 정신 속에서 깃드는 불온한 상상은 악이 자라나게 되는 씨앗이 되고 그것이 그의 영혼을 잠식해간다는 것. 딸의 죽음을 여전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하는 사무엘과 에스더가 그렇고, 소아마비로 다리가 불편해 같이 놀아주지 않는 보육원 친구, 언니들에게 원망의 마음을 갖는 재니스(탈리사 베이트먼)가 그렇다. 

즉 사무엘과 에스더 그리고 재니스에게 그 악령이 나타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깊은 상처로 인해 그들 안에서 만들어진 ‘불길하고 불온한 상상’이 그 악령을 스스로 찾아가게 했다는 것이다. 재니스가 그 악령을 처음 맞닥뜨리는 장면은 그래서 두려우면서도 동시에 그 힘을 통해 보복을 하려는 마음에 이끌리는 양가감정이 교차한다.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는 허수아비나, 그저 아이들 장난감일 수 있는 인형 그리고 장난감 총이나 그저 방치된 우물 같은 것들은 그래서 이 곳에 머무는 이들의 상상에 의해 공포의 존재로 깨어난다. 그리고 이런 체험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도 반복된다. 관객 스스로 이미 벌어지지도 않는 상황을 상상하면서 영화를 보게 됨으로써 공포가 배가된다는 것. 

그래서 <애나벨>에 대한 평가는 보는 이들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다. 유난히 많은 불길한 상상을 떠올린 이들이라면 그토록 무서울 수가 없는 영화지만, 공포영화가 너무 익숙해 그저 액면 그대로의 장면이 주는 공포를 기대했다면 조금 심심한 영화로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렇게 잔인한 장면 없이도 소름끼치는 공포가 상상력만으로도 가능해질 수 있다는 걸 이 영화가 보여줬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청년경찰’이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공권력

수사의 세 가지 방법을 묻는 시험에서 공부 잘 하는 카이스트 출신 희열(강하늘)은 정답인 ‘피해자 중심 수사, 물품 중심 수사, 현장 중심 수사’라고 적어 넣는다. 반면 공부보다는 몸으로 부딪치는 성격의 기준(박서준)은 고민 끝에 엉뚱하게도 ‘열정, 집념 그리고 진심’이라고 답을 적어낸다. 아마도 영화 <청년경찰>이 하려는 이야기는 바로 이 부분에 다 들어 있을 것이다. 시험이 원하는 정답은 아니지만 기준이 적은 열정과 집념 그리고 진심이야말로 진정한 공권력 수행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세 가지 덕목이라는 것.

사진출처:영화<청년경찰>

경찰대생이 실제 사건을 수사하고 해결하는 이야기는 우리가 아주 오래 전 봤던 할리우드 코미디영화 <폴리스 아카데미>를 떠올리게 한다. 물론 <청년경찰>은 그 영화와는 정서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청년경찰>은 그 안에 우리네 현실적 상황과 정서들을 콕콕 박아 넣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인지 의외로 웃음의 강도가 강하고, 학생이라 어설프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사를 해나가는 이 청춘들의 좌충우돌에 대한 정서적 지지도 크다. 

<청년경찰>은 사실상 그 캐릭터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찰 이야기를 담으면서 굳이 부여한 ‘청년’이라는 캐릭터에는 그 자체로 이 영화의 메시지가 담겨있다. 당연한 것이지만 청년들의 어설픔은 오히려 영화 속에서 ‘순수함’으로 표현되고, 당장 성공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 응당 경찰로서 해야 할 일을 하는 ‘정직함’으로 그려진다. 그것은 거꾸로 말하면 그렇지 못한 기성 경찰들에 대한 엄중한 비판이다. 

결국 사건을 해결했지만 학생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행동이라며 징계를 주려는 경찰 수뇌부들이 바로 그 기성 경찰들을 표상한다면, 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양교수(성동일)는 과거에는 자신들도 그렇게 열정에 넘쳤던 적이 있다는 말로 스스로 반성하는 어른이다. 넘쳐나는 사건들 속에서 우선순위를 따져가며 해왔던 수사가 결국은 피해자들을 만들어내는 시스템적인 오류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이 청년경찰들의 열정, 집념, 진심이 들어간 수사는 그 어설픔에 웃음이 터지면서도 그 진지함에 뭉클한 면들이 묻어난다. 

<청년경찰>이 흥미로운 건 이런 거창할 수 있는 이야기를 아주 일상적인 수준에서 농담처럼 잘 배치해놓았다는 점이다. 훈련을 받으며 다리를 다친 희열을 업고 내려오다 정해진 시간을 초과해버리는 기준의 이야기는 사실은 고기를 먹게 해주겠다는 말에 한 행동으로 처리되며 웃음을 주지만 그 농담 속에 도움이 필요한 이를 위해 기꺼이 손을 내미는 것이 경찰의 본분이라는 메시지를 담아 넣는다. 결국 길거리에서 우연히 한 소녀가 납치되는 걸 목격한 그들이 그걸 외면하지 않고 수사에 뛰어드는 이야기는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 앞부분에 보여진 에피소드와의 연결고리를 가지며 공감을 만들어낸다. 

<청년경찰>은 영화에서 캐릭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현실정서를 반영하는 잘 축조된 캐릭터가 주는 매력만으로도 영화는 충분히 재미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최근 드라마 <쌈마이웨이>로 기분 좋은 청춘의 면면을 드러냈던 박서준과 영화 <동주>로 역시 청춘의 초상을 그려냈던 강하늘의 손발이 척척 맞는 콤비 코미디가 주는 재미를 빼놓을 수 없다. 그리고 그 코미디의 이면에 담겨진 의미 역시 작지 않다는 점에서 <청년경찰>은 부담 없이 보는 여름철 오락영화로서의 모든 구색을 갖추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게다. 

특히 <청년경찰>이 그려내는 청춘의 긍정성은 충분히 박수 받을 만한 일이다. 그간 청춘의 쉽지 않은 현실을 담은 작품들은 많았다. 하지만 그 작품들 속에서 청춘들의 고충이 주로 부각됐다면, <청년경찰>은 오히려 그 청춘이 가진 열정, 집념, 진심 같은 기분 좋은 가능성들을 영화의 에너지로 끌고 간다는 점에서 여타의 작품들과는 조금 다르다. 현실에 적응하기보다는 바로 그 부적응상태가 주는 긍정성. 이 영화가 주는 또 다른 통쾌한 구석이 아닐 수 없다.


사람이라면 응당.. '택시운전사'가 광주를 담는 방식
망자의 맨발은 우리에게 많은 이야기를 건넨다. 왜 그토록 더럽혀지도록 그 맨발이 수고를 다했을까. 무슨 일이 있었기에 맨발인가. 살아생전에 쉬지 않고 어딘가로 데려다주곤 했으나 이제 겨우 그 끝에 이르러 영원한 휴식에 들어간 고마움과 미안함 같은 감정들이 그 맨발에 묻어난다. 그래서 그 망자의 맨발에 신발을 굳이 신겨주고픈 마음은 사람이라면 응당 그러고픈 인지상정일 것이다.

사진출처:영화<택시운전사>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만섭(송강호)은 독일의 외신기자 피터(토마스 크레취만)를 손님으로 태우고 광주로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많은 맨발들을 맞이하게 될 줄 전혀 몰랐다. 만섭은 자신의 영업을 위해서라도 대학생들이 데모 좀 그만 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을 가진 소시민이었으니까. 그에게 ‘독재타도’ 같은 대학생들의 구호가 남다른 의미로 있었을 리 없다. 그저 자신의 유일한 가족 딸을 위해 쉬는 날도 거르고 택시를 운전하는 게 그의 삶의 유일한 목적이었을 테니.

신발 좀 구겨 신지 말라고 하는 만섭에게 딸이 신발이 작다고 말하는 대목에서 느껴지는, 두 사람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무게는 ‘80년 광주’라는 어마어마한 비극 앞에서도 결코 소소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저마다 신고 달려야 하는 신발의 무게는 있는 법이고, 그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폄하될 수 없는 일이니 말이다.

하지만 어쩌면 그 딸에게 새 신발을 사주기 위해 벌어야 할 돈 몇 푼에 광주로 들어가게 된 만섭은 도저히 방외인으로서의 입장을 고수할 수 없는 참담한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자기 일처럼 다친 이들을 실어 나르는 택시기사들과 그 택시에 돈도 받지 않고 기름을 채워주는 주유소 사장, 그리고 사람이 모여드는 곳에서 주먹밥을 나눠주며 우리는 결코 타인이 아니라는 걸 몸소 실천하는 이름 모를 젊은이들 속에서, 그들이 총칼에 쓰러지는 걸 결코 남의 일로 치부할 수 없게 된 것.

영화 <택시운전사>는 만섭의 시선에 비친 신발의 이미지를 곳곳에 배치해놓는다. 병원 가득 메운 부상자들과 사상자들의 맨발이 그의 눈에 들어오고, 거리에서 군인들의 군홧발에 질질 끌려가다 벗겨지는 신발이 들어온다. 하지만 그는 또한 딸의 그 꺾어진 신발을 떠올린다. 딸에게는 유일하게 자신이 신발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 곳의 더 이상 타자가 아닌 이들의 고통 앞에서 만섭이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는 이유이고, 그를 선선히 보내주는 광주 택시 기사와 피터의 마음이다.

하지만 애써 외면하며 빠져나오는 그 길 위에서 만섭은 누군가 신고 뛰어다녔을 무수한 신발들이 마구 벗겨져 널려 있는 것을 본다. 그 아픈 장면들은 그가 겨우 광주를 빠져나와 어느 시장통의 신발가게를 찾아갈 때, 마치 허공을 날아가는 듯 공중에 전시된 가벼운 신발의 이미지와 대비된다. 그는 결국 새 신발을 사서 딸에게 돌아가려 하지만, 못내 그 발길을 돌리지 못한다. 아마도 광주의 거리 위에서 봤던 그 버려진 신발들이 그의 눈에 밟혔을 것이다.

<택시운전사>가 광주를 보는 방식은 이처럼 대단한 영웅적 행보와는 거리가 멀다. 대신 그 극한의 비극적 상황 속에서 광주 사람들이 오히려 얼마나 인간적인 따뜻함을 보여줬는가를 대비시킨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당 해야만 하는 일로서 만섭의 변화를 담담하게 보여준다. 이것이 그저 실존인물인 피터의 이야기를 담기보다 지금껏 그 행적을 찾을 수 없는 한 택시운전사를 주인공으로 세운 이유다.

이 영화가 의도적으로 그려내는 신발의 이미지는 그래서 어찌 보면 택시운전사의 이미지와 겹쳐진다. 결국 어딘가로 누군가를 이동시켜주는 매체가 아닌가. 길은 어디든 열려있고 그 길 위로 누구나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있는 건 좋은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당연한 세상의 문제다. 하지만 1980년 광주는 그 당연한 길이 막혀 있었고 누구도 가고 싶은 대로 갈 수 없었다. 많은 신발들은 그렇게 막히고 꺾여 거리에서 스러져 갔다. 그 길을 뚫고 들어가는 만섭의 이야기가 결코 소소할 수 없는 건 그 상식이 무너진 세상 때문이다.

혹자는 <택시운전사>를 좌파 영화 운운하지만, 이 영화는 결코 그런 이념적인 걸 내세우는 영화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사람이라면 응당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 ‘상식의 문제’로서 광주를 이야기하는 영화다. 택시도 신발도 어디든 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나아가 그것은 진실이 소통하는 방식이라는 것.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