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애 영화? 에로 영화? 무협 영화? NO!

(이 글은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쌍화점’. 제목부터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이미 화제가 되었다. 유하 감독이 하는 사극이라는 점도 그랬지만 아무래도 그 화제의 첫 번째는 조인성과 주진모가 벗었다는 것. 그것도 동성애를 연기하기 위해서다. 시사회를 통해 미리 본 관객이라면 누구나 느꼈겠지만, 그 동성애 장면은 꽤 충격적이다. 그것도 조인성과 주진모라니.

하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이 영화는 동성애 영화가 아니다. 여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왕(주진모)이 왕의 호위무사인 홍림(조인성)을 사랑하고, 그래서 둘 사이의 묘한 멜로 구도가 들어가 있지만, 이 영화가 말하는 것은 소수의 성으로서 동성애자가 갖는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이 아니다. 실제로 동성애자는 왕이라는 절대권력을 갖고 있는 자이며, 홍림은 동성애자라기보다는 어린 시절부터 왕을 보필하면서 자신의 성 정체성을 잃고 있었던 인물이라 할 수 있다. 후사를 위해 왕 대신 왕후(송지효)와 합궁을 하게 되면서 그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찾게 되고 이것은 비극의 신호탄이 된다.

동성애 영화가 아니라면, 혹 에로영화? ‘남녀상열지사’로 일컬어지는 고려가요 ‘쌍화점’에서 따온 영화 제목은 당연히 이런 선입견을 갖게 한다. 게다가 실제로 홍림과 왕후의 정사장면은 노골적인데다 여러 차례 반복되어 보여진다. 적나라하게 벗은 조인성과 송지효의 몸은 커다란 스크린 위에서 뱀처럼 서로의 몸을 휘감고 뜨거운 입김을 관객들에게 쏘아댄다.

하지만 그 장면이 노골적이라고 해서 이 영화를 에로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유하 감독이 기자간담회를 통해 밝혔듯이 이 영화는 ‘감각의 제국’류의 욕망을 탐구하는 영화다. 홍림과 왕후 사이에는 아무런 사랑의 감정이 없었지만(오히려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 둘은 몸의 결합을 통해 점점 감정이 불타오른다. 여러 차례 홍림과 왕후의 섹스 장면이 반복되는 것은 그 육체적 사랑을 통해 어떻게 욕망이라는 감정이 타오르는가를 살펴보기 위함이다.

육체적인 성에 대해 눈뜨지 못했던 두 사람(물론 왕이 동성애자이기 때문에 왕후도 성 경험이 없을 수밖에 없다)은 성애에 눈을 뜨고, 그것은 사랑의 감정으로 타오른다. 후반부에 가서 그것이 단지 욕정이 아닌 감정의 교감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된 질투에 불타는 왕이 홍림을 거세하는 장면은 상징적이다. 즉 이 영화는 시작부터 거세된 남자(왕)와 거세를 강요받은 남녀(홍림과 왕후)가 함께 궁이란 공간에 고립되어 살고 있었는데, 그 남녀가 자신들의 성 정체성을 찾게 되는 그 순간, 왕이 그들을 거세시키는 영화다. 이것은 에로영화라기보다는 그리스 비극을 떠올리게 한다. 권력을 쥐었지만 거세된 자의 빗나간 욕망이 만들어내는 비극.

혹자는 사극에 칼이 춤을 추는 예고편을 통해 혹 무협영화 같은 액션이 이 영화의 주는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 역시 이 영화를 너무나 단순하게 보게 만드는 편견이 될 수 있다. 물론 화살이 날아와 머리에 꽂히고 한껏 힘을 모아서 순식간에 내리치는 칼과 그 굉음이 보는 이의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왕과 홍림, 그리고 꽃미남 호위부대 건룡위가 사용한 검의 수만 5백 자루가 넘는다 하니 이 영화를 무협의 반열에 세워도 무방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쌍화점’에서 칼과 칼이 부딪치는 장면은 그저 물리적인 부딪침이나 합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액션의 즐거움을 주기 위한 장면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또 다른 대화로서 표현되는 검의 말이다. 칼과 칼이 부딪칠 때, 거기에는 왕의 질투와 사랑이 묻어나고, 홍림의 억눌렸던 감정과 그래도 남은 애증이 느껴진다. 칼은 보이지 않는 이 인물들의 감정을 몸으로 표현해내는 하나의 무용과 같은 표현수단이 된다.

그렇다면 동성애도 아니고 에로도 아니고 무협도 아닌 이 영화는 도대체 무얼까. ‘쌍화점’의 제작진들은 이 영화를 ‘대서사극’이라는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정의하고 있다. 멜로드라마의 다른 버전으로 읽히지만 그 깊이가 그리스 비극 같은 서사극에 닿아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흔히 멜로라 하면 남녀 간의 사랑 정도를 생각하겠지만 여기서는 성별을 넘어서는 사랑의 감정들이 어떤 파국을 향해 가는가를 그려내는 멜로가 번뜩인다. 베드신과 액션신은 그 감정들을 최고조로 그려내는 장치가 된다. 여기에 서사극으로서의 비장미는 인간의 욕망을 탐구하는 그 자세에서 비롯된다.

‘쌍화점’은 보는 이에 따라 저마다의 해석과 저마다의 재미를 줄 수 있는 영화다. 혹자는 재미도 없고 그저 지루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이 영화는 위에서 언급한 선입견들을 능가하는 영화다. 낯설지만 꽤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재미를 선사하는 영화.

‘과속스캔들’의 겸양어법 통했다

“좀 합디다.” ‘과속스캔들’에서 남현수(차태현)는 다 커서 애까지 딸린 미혼모로 찾아온 딸 황정남(박보영)이 노래하는 걸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의 뉘앙스는 보통의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말과는 다르다. “잘했다”도 아니고 “아직 부족하다”도 아닌 그 중간쯤에 위치한 이 말은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화법이기도 하다.

이 영화 속에서 차태현이 연기하는 남현수는 차태현이 그런 것처럼 더 이상 아이돌 스타가 아니다. 이제는 30대 중반의 연예인으로 그럭저럭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존재. 그런 그에게 갑자기 다 큰 딸이 애까지 데리고 찾아온다. 영화는 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한 집에서 살아가며 좌충우돌하는 코믹을 선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 가족 드라마적인 요소 위에 다양한 재미의 지층들을 깔아두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늘 함께 있어서 발견하지 못했던 가족들의 놀라운 면면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저 미혼모로만 생각되었던 황정남은 사실 노래에 재능을 갖고 있으며, 황정남의 아들 황기동(왕석현)은 피아노 천재다. 영화는 평범하게만 보였던 가족의 모습에서 비범함을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그 기쁨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 때문에 가족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딸이 “왜 내가 없어야 하는데. 여기 있잖아 내가 여기 있는데 왜 내가 없어야 하냐고!”라고 외쳤을 때의 그 기분. 사실 늘 보석처럼 반짝이며 곁에 있었지만 그 존재를 무시해왔다는 자괴감. 그래서 잠시 사회라는 무대를 내려와 그 무대를 오롯이 가족을 위해 쓰고 싶은 이 영화의 마음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남현수가 건네는 “좀 합디다”라는 말 속에는 그 표현 자체가 어색해진 현대인들의 정서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표현하고픈 욕구가 공존한다. 한때 잘나가던 아이돌이 이제는 아저씨돌로 돌아오는 이 영화가 포착한 문화현상은 사회경제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대변한다. 삶이 어려워지면 가족은 더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아이돌과 아저씨돌이 가진 이미지의 기본적인 차이는 가족의 유무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는 또한 우리영화계가 한때 가졌었던 아이돌 시절의 화려함보다는, 이제 겸양 어린 마음을 담은 아저씨돌의 수수함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화려한 수식어로 과장 광고되던 여타의 한국영화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다. 그것은 오히려 3류의 냄새를 풍기면서 한껏 낮추었고, 그것은 거꾸로 의외의 재미를 통한 상승효과를 만들었다. 이것은 재미없을 것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의외의 재미를 선사하는 토크쇼에서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만든다.

“좀 합디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이 영화는 그러나 조금이 아닌 꽤 많은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차태현은 능수능란 한 코믹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박보영은 때론 귀엽고 때론 당차며 때론 성인연기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아역으로서 왕석현은 촌철살인의 웃음과 감동을 전달한다. 이렇다할 크리스마스 영화 한 편 개봉되지 않는 작금의 영화현실, 경제현실 속에서 이처럼 힘겨워진 가족들의 어깨를 두드리는 영화는 좀체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과속스캔들’은 ‘좀’이 아닌 ‘꽤’하는 영화다.

사랑한다, 나를, 나만 혹은 나도

결혼하면 사랑은 어떻게 변할까. 혹은 결혼은 사랑을 구속할 뿐인가. ‘아내가 결혼했다’라는 이 도발적인 제목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결혼과 사랑의 이중주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말은 ‘결혼한 아내가 또 결혼했다’는 앞뒤가 맞지 않는 진술이 된다. 그런데 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말은 우리네 관습적, 윤리적, 법적 기준에 의한 것이다. 이것을 넘어선다면 그것은 문장으로서 말이 된다. ‘아내가 결혼했다’는 바로 그 관습적으로 말이 안 된다고 판단하는 그것을 눈앞에 보여주면서 이것도 말이 된다고 주장하는 영화다.

아내 주인아(손예진)는 그 이름에서부터 역전되어 있는 남녀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남편 노덕훈(김주혁)은 그녀를 “주인아씨”라고 부르게 된다. 따라서 영화 속에서 주인아는 자유를 구가하는 여인인 반면, 노덕훈은 그 자유로운 여인에 전전긍긍하는 전형적인 소심남이다. 노덕훈은 그녀를 온전히 자기 것으로 소유하길 바라지만, 무심코 뱉은 “내 거”라는 말에 그녀는 “나 자길 사랑하지만 자기 건 아냐”하고 되받는다. “나를 사랑한다”고 여기게 된 여인을 “나만을 사랑하게” 하고픈 욕구 때문에 노덕훈은 그녀에게 결혼을 하자고 조른다. 하지만 결혼으로 ‘내 거’ 되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며 “그와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한다. 이 순간부터 그는 그녀가 ‘나도’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를’에서 ‘나만’으로 그리고 ‘나도’로 바뀌는 이 3단계의 사랑을 영화는 축구경기를 빗대서 보여준다. 서로 각자의 위치에서 사랑하던 ‘나를’의 단계에서 보여지는 축구경기는 각자의 공간에서 보는 레알 마드리드와 바로셀로나 FC의 경기다. 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밤새 본 이 경기를 공동화제로 서로에게 다가간다. ‘나를’에서 ‘나만’으로 가는 두 번째 단계, 즉 결혼을 하게 되는 그 지점에 등장하는 건 2002 월드컵 스페인전이다. 홍명보가 골을 넣는 그 집단적인 황홀감에 젖어 있는 순간, 주인아는 노덕훈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나만’에서 ‘나도’로 가는 세 번째 단계에서 보여주는 경기는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유럽에서 아내와 두 남편과 그리고 딸 이렇게 넷이 함께 보는 축구경기다.

영화가 굳이 축구를 빗대 우리네 결혼의 속살을 보여주려 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단지 축구경기가 남녀 간의 사랑 행위를 상징적으로 닮았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거기에는 우리네 정서 속에 담겨 있는 결혼이라는 틀 이면의 얼굴이 담겨져 있다. 즉 2002 월드컵의 집단적인 분위기에서 주인아가 허락하는 결혼은, 결혼이라는 것이 단지 사랑의 종착지가 아니라 그렇게 사회의 집단적인 분위기에서 강요되는 어떤 것이라는 걸 암시한다. 특히 아내가 결혼한 후, 두 집 살림을 하는 주인아가 아이를 갖게되자 “우리 아이야?”하고 묻는 대목에서는 우리네 핏줄 의식에 대한 집착이 들어 있다. 주인아는 ‘우리’아이라고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저 노덕훈이 말하는 ‘우리’와 의미가 다르다. 첫 남편과 둘째 남편 그리고 아기까지 아우르는 ‘우리’를 뜻하는 것이다.

“한국 축구의 문제점이 뭐냐”고 묻는 대목에서 그것은 “골 결정력 부족”이 아니라 “즐기지 못하는 것”이라는 대사는 사랑 그 자체보다 오히려 어떤 목표로써 자리하고 있는 결혼이라는 강박을 에둘러 말해준다. 주인아가 축구에 빗대 말하는 이 투톱 시스템(?)에 “현재 스코어는 불륜이야”하고 소리치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렇지만 가끔은 이 여자를 이해하고 싶어진다”고 말하는 노덕훈은 어쩌면 이 농담 같고 게임 같은 상황 속에서 결혼이라는 구속의 틀을 보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은 영화를 보는 관객의 마음이기도할 것이다.

‘비몽’, 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내가 꾸는 꿈이 누군가의 현실이라면. 김기덕 감독의 ‘비몽’은 이 단순한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 진(오다기리죠)이 꾸는 꿈은 란(이나영)의 현실이 된다. 즉 진이 꾸는 꿈을 란은 몽유병 상태에서 행동에 옮기는 것이 이 영화의 단순한 구조다. 하지만 이 단순한 구조는 그 안에 살아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만나면서 복잡해진다. 진은 꿈속에서 자신을 버리고 떠난 여자를 집착적으로 찾아가고, 바로 그 순간 란은 이미 헤어져 만나는 것조차 끔찍한 남자친구를 몽유병상태에서 찾아가게 된다.

의사인지 심령술사인지 모호한 여자(장미희)는 이 두 사람을 앉혀 놓고 한 사람의 행복이 다른 사람의 불행인 당신들은 ‘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바닥에 깔려있는 문양, 즉 하얀 색과 검정 색이 서로 선과 바탕으로 이어진 글씨를 보여주며 알쏭달쏭한 한 마디를 덧붙인다.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입니다.” 문양을 하얀 색으로도 검정 색으로도 읽을 수 있는 것처럼, 음각과 양각이 요철의 차이일 뿐 같은 것인 것처럼, 진과 란은 그것이 꿈과 현실로 나뉘어 있지만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김기덕 감독이 ‘비몽’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이미 장자몽을 연상케 하는 나비와, 중간에 진과 란이 찾아가는 절에서 드러나는 불교의 연기설과의 조합이다. 란만 떼어내서 본다면 그녀의 현실은 자신의 현실이 아니라 누군가(진)의 꿈일 뿐이다. 연기설로 본다면 꿈꾸는 진은 어쩌면 란의 전생일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버림받은 진은 또 다른 삶 속(란)에서는 누군가를 버리는 것으로 악연이 이어진다. 바로 이 연기설로 나타날 수 있는 하나이지만 반복적인 두 인물을 영화는 동시공간에 올려놓는다.

영화는 관념적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영화가 돋보이는 건 바로 이 추상적인 메시지를 생생하게 구상화하는 영상 미학에 있다. 꿈을 통해 두 인물이 만나는 과정이나 서로를 이해하고 가까워지는 과정, 그리고 한 사람의 꿈에 의해 다른 사람이 파괴되는 과정, 이 끝없는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 취하는 일련의 노력들은 충분히 스토리텔링 그 자체로도 이 관념적 상상을 형상화해낸다. 김기덕 감독은 이 무거운 관념의 이야기를 풀어내면서도 곳곳에 특유의 유머를 곁들이는 여유를 보여준다. 진이 입고 나오는 검은 색 계열의 의상과 란이 입고 나오는 흰 색 계열의 의상은 저 의사가 말한 “검은 색과 흰색은 같은 색”이라는 관념적인 말을 색채의 어울림으로 보여준다.

불교적으로 보면 이 끝없는 환생은 덧없는 꿈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형벌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고리를 끊기 위해(해탈) 정진하게 된다. 나무에 글씨를 새기는 목각을 하는 진이 수도자의 그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진 불교적 색채 때문이다. 그는 마치 생(生)이라는 나무토막에 어떤 집착적인 욕망을 가지고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가 잠자는 것을 이겨내기 위해 자신의 몸에 글씨를 새기는 장면은 이 끝없는 욕망으로 생에 글씨를 새겨 넣으려는 행위가 결국은 끝없는 자신의 고통(환생)으로 이어진다는 걸 표현한다.

그런데 한 가지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 있다. 그것은 일본어와 우리나라 말을 아무런 소통의 장치 없이 영화 속에 병치시켰다는 점이다. 진의 일본어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 알아듣고, 또 우리의 한국말을 진도 다 알아듣는 것처럼 대화를 한다. 이 현실적으로 있을 수 없는 대목은 어쩌면 이 영화가 또한 김기덕 감독이 꾼 꿈이라는 걸 말해주는 게 아닐까. 김기덕 감독은 ‘비몽’을 통해 진이 그랬던 것처럼 이 끝없는 인연의 고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한바탕 나비 꿈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어쩌면 영화를 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될 지도 모른다. 그렇게 ‘비몽’은 당신이 꾸는 꿈(욕망)이 그 누군가에게는 현실이 되고, 그 현실은 또한 덧없는 슬픈 꿈이라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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