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게티 웨스턴, 만주 웨스턴, 김치 웨스턴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하 놈놈놈)’의 시공간적 배경은 일제시대 만주다. 일제시대에 만주라는 공간이 함유하는 의미는 말 그대로 의미심장하다. 당대에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우리나라에서 만주는 대륙으로의 진입로이자 가능성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일제시대라는 독특한 시간적 배경은 그 가능성의 공간 위에 이질적인 문화들을 공존시킨다. 중국과 일본과 우리나라는 물론, 호전적인 북방민족들과 러시아 그리고 각종 신기한 문물들을 들고 중국을 통해 들어온 서구인들까지 공존하는 일제시대의 만주는 요즘으로 치면 퓨전문화가 살아있는 공간이었다. 게다가 법이나 규범보다는 총이 앞서는 무법천지로서의 만주는 오히려 국가 간의 분쟁이 벌어지는 상황 속에서는 자유에 가까운 공간으로 인식된다. 즉 나라와 나라,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같은 경계지움의 시대에 만주는 그 경계를 탈주하는 공간으로서 민족주의를 넘어 개인적 자유를 희구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스파게티 웨스턴, 미국 중심적 사고방식을 비웃다
경계를 탈주하는 공간으로서의 만주는 정통 웨스턴 무비를 비웃으며 이태리에서 만들어진 스파게티 웨스턴의 멕시코라는 공간과 유사하다. 존 포드 감독과 존 웨인으로 상징되는 초창기 미국 정통 웨스턴들은 분명한 선악구도를 내세우면서 정의는 반드시 이긴다는 표제 아래 민족주의적 이데올로기를 전파했다. 거기에는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었고, ‘좋은 놈’은 늘 멋지게 ‘나쁜 놈’을 해치웠다. 관객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고(물론 ‘나쁜 놈’을 선택하는 자는 없겠지만), 그 선택을 하는 순간 선택받지 못한 자는 철저히 응징되어야 하는 존재로 부지불식간에 구획되어진다.

정통 웨스턴이 가진 이러한 미국 중심적 사고방식과 흑백논리는 변방의 입장에서 보면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 이태리에서 들고 나온 스파게티 웨스턴의 대표주자로서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의 원제가 ‘좋은 놈, 나쁜 놈, 못생긴 놈(The Good, The Bad And The Ugly’인 것은 이 이분법의 구도를 깨버리면서 정통 웨스턴 무비가 가진 이데올로기를 비웃는다.

‘쇠사슬을 끊어라’, 만주 웨스턴의 민족주의를 끊다
1960년대 이른바 ‘만주웨스턴’이 우리네 영화사 속에 자리매김했던 것은 물론 당대의 웨스턴 무비의 영향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국내의 정치적 사정과 그 반작용이 맞물린 결과로 볼 수도 있다. 정통 웨스턴 무비들이 그랬던 것처럼 ‘만주웨스턴’은 대부분 일제시대를 배경으로 한 민족주의 영화들로 당대 친정치적 성향이 강했다. 하지만 그 주제의식을 빼놓고 나면 만주라는 공간에서의 탈법적인 행위들을 통한 당대 답답한 현실의 대리충족 기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1971년 이만희 감독의 ‘쇠사슬을 끊어라’는 정통 웨스턴의 국가주의적 색채를 저 스파게티 웨스턴이 잔뜩 비꼬았던 것처럼, 만주웨스턴의 민족주의적 색채를 끊어놓는다. 즉 주인공들은 애국자인양 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캐릭터로 분하는 것이다.

김지운 감독 스스로 밝힌 것처럼 ‘놈놈놈’이 만주라는 공간을 활용하는 방식도 바로 이 스파게티 웨스턴이나 ‘쇠사슬을 끊어라’의 연장선상에 있다. 거기에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지만 입장이 다른 세 인물들이 서로 보물을 차지하려 싸울 뿐, 민족주의도 대의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면 스파게티 웨스턴이나 ‘쇠사슬을 끊어라’가 그랬던 것처럼 ‘놈놈놈’은 과연 어떤 경계로부터 탈주하려는 것일까.

우리 영화의 ‘이상한 놈’, 잘 만든 오락영화를 꿈꾸다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못생긴 놈’에서 주인공은 분명 좋은 놈(클린트 이스트우드)이었지만 정통 웨스턴과 비교했을 때 주목해야할 캐릭터는 못생긴 놈이다. 이것은 좋은 놈과 나쁜 놈으로 이분되는 선악구도를 이도 저도 아닌 상황으로 만들어버리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에서 주목해야할 캐릭터도 이상한 놈(송강호)이다. 그리고 ‘놈놈놈’은 실제로 이 이상한 놈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좋은 놈과 나쁜 놈이 장르영화 속에서 툭 튀어나온 듯 정형화되어 있다면 이와는 상반되게 이상한 놈은 독특한 캐릭터를 갖추고 있다. 이상한 놈이란 캐릭터 속에는 만주라는 공간과 일제시대 조선이라는 상황이 혼재되어 있고, 민족주의적 성향을 벗어나 지극히 자기 욕망에 충실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인간미를 버리지 않는 모습이 내재되어 있다. 액션이라고 하기보다는 몸 개그에 가까운 해학이 있으며, 그 웃음 이면에는 섬뜩한 부분도 숨겨져 있다.

이 도드라진 부분이 김지운 감독이 탈주하고픈 경계가 아닐까. ‘놈놈놈’이라는 김치 웨스턴이라는 이상한 장르영화는 바로 이 이상한 놈의 캐릭터처럼 도드라지고 기이하면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구석이 있다. 한국영화라는 지형에서 보면 ‘놈놈놈’은 이상한 놈이다. 흔히 “한국영화가 망하게 생겼다”는 상업적 가치를 가장 큰 위기로 받아들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락영화를 백안시하는 우리 영화의 지형 속에서 이 영화는 김지운 감독의 말마따나 그 ‘오락영화에 혼신의 힘을 담은’ 이상한 영화다.

한국영화를 말할 때, 늘 발목에 꼬리표처럼 달리는 작품성이나 예술성 같은 것들은 오히려 상업적일 수밖에 없는 대중영화의 토대자체를 위협하기도 한다. 그것은 우리 스스로 영화라는 사실상의 무한 자유의 공간에 그어놓은 경계가 아닐 수 없다. 드러내놓고 “열심히 재미있게 만들었다”는 그 말에 박수가 쳐지는 것은 바로 그 부분이 오락영화에 대한 편견의 경계를 넘게 해주기 때문이다. ‘놈놈놈’이 만주까지 가게된 것은 그 정도까지 달려가서야 비로소 한국영화라는 족쇄를 풀어내고 자유로운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 보기 드문 수작의 ‘오락영화’는 한국영화의 경계를 벗어나 스스로를 ‘이상한 놈’으로 자리매김하는 그 지점에서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B급 농담 질펀한 섹시한 폭력, ‘플래닛 테러’

어린 시절 했던 놀이 중에는 이른바 ‘엉망진창 놀이’라는 게 있었다. 진흙탕에서 뒹굴거나, 케이크를 잔뜩 얼굴에 바르거나 사방으로 던지고, 때로는 손바닥 가득 물감을 칠하고는 커다란 도화지 위에 아무렇게나 막 칠하는 그런 놀이. 엉망진창 놀이의 묘미는 처음 손이나 몸을 더럽힐 때만 조금 꺼려지지 아예 포기하고 나면 묘한 자유의 쾌감을 만끽할 수 있다는 점이다. 피가 철철 흐르고 살점이 튀며 머리가 호박처럼 쪼개지는 ‘플래닛 테러’는 바로 그 엉망진창 놀이를 닮았다. 일단 마음의 저항감을 없애고 그 피칠갑의 영상에 몸을 맡기게 되면 그 재미에 푹 빠지게 된다는 점이 그렇다.

엉망진창 놀이에 잘 꾸며진 영상이 대수일까. 일부러 B급 영상을 표현하기 위해 고의로 화면에 스크래치를 하고, 어딘지 엉성한 화면 연출과 대사까지 의도적으로 흘려보내며, 심지어 중요한(?) 베드신 장면에서는 필름이 소실된 듯한 영상을 꾸미면서 ‘필름이 분실되어 죄송합니다’라는 자막까지 끼워 넣는다. 이 엉성하고 느슨한 연출은 그 위에 얹어질 좀비들과의 피 튀기는 일대격전을 한바탕 놀이로 만들어버린다. 그 속에서는 조금 개연성이 떨어지거나 어색한 화면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은 것이 되어버린다. 중요한 것은 그 엉성함이 깔아주는 편안함 속에서 마치 카타르시스처럼 잘라지고 터지는 몸뚱어리와 피의 제전이며, 그 기저에 깔려진 끝없는 블랙유머다.

하지만 엉망진창으로 꾸며졌다고 해서 이 영화가 실제로 엉망진창이라는 것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화 곳곳에 치밀한 계산이 되어 있는 면면들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가 클럽에서 고고댄스를 추는 체리 달링(로즈 맥고완)의 도발적인 춤에서 시작한다는 것은 그 유혹적인 춤동작들이 후반부에 여전사의 모습으로 전화될 것을 예고한다. 이 에로티시즘이나 식욕 같은 욕망을 폭력으로 연결시키는 독특한 발상은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스의 걸쭉한 영상 농담으로 구현된다. 영화 속 짝패를 이루는 체리 달링과 엘 레이(프레디 로드리게스)는 남녀의 성적 욕망을 폭력으로 구현된 캐릭터들이다. 좀비들에게 다리가 거세된 체리 달링은 엘 레이를 만나고 그가 나무 막대기를 다리에 박아주면서 여전사로 우뚝 선다.

체리 달링을 겁탈하려 하는 강간범(타란티노)을 때려눕히면서, 바로 그 나무다리는 부러지지만 엘 레이는 거기에 좀더 강력한 기관총 다리를 무기로 박아 넣는다. 이 성적인 묘사들은 두 사람의 사랑의 징표인 반지에 새겨진 ‘둘이 함께 세상에 맞서며’라는 문구와 잘 어울린다. 거기에는 사랑과 폭력이 함께 공존한다. 이러한 욕망과 폭력의 연결은 식욕과 피를 연결시키는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소시지 소스의 비밀을 찾고 있는 JT(제프 파헤이)가 피에서 단서를 발견하는 것이나, 죽은 듯 쓰러진 척 하는 JT의 배 위에 내장처럼 올려진 소시지를 엘 레이가 씹어 먹으며 “죽이는 맛이다”고 말하는 장면이 그렇다. 사실 사람을 뜯는다는 좀비들에 대한 상상 자체가 바로 이 식욕과 폭력의 혼합물이다.

‘플래닛 테러’는 엉망진창으로 만들어진 영화처럼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영화다. 그것은 이미 전설이 되어버린 조지 로메로 감독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대한 찬양이지만 로드리게스 특유의 농담은 그 B급 취향을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힘이 있다. 그러니 이 영화를 보면서 괜스레 진지해질 필요는 없다. 그저 그 엉망진창 놀이가 주는 조금은 느슨한 즐거움으로 바라보기만 하면 그 안에서 우리는 피를 뒤집어쓴 수많은 농담을 발견해낼 수 있을 테니까.


‘쿵푸 팬더’, 그 젓가락 쿵푸의 재미

술에 비틀비틀 취해 움직이면서 상대를 공격하는 ‘취권’은, 부모나 사부의 원수를 갚는 전통적인 쿵푸영화의 비장함을 거꾸로 꼬집으면서 성룡의 코미디 쿵푸 시대를 열었다. 이어서 나온 ‘사형도수’와 ‘소권괴초’는 1979년을 성룡의 해로 만들었다. 성룡의 쿵푸는 액션의 하드코어에 가까운 이소룡 쿵푸, 사무라이식 퓨전의 냄새가 났던 외팔이 시리즈 왕우의 쿵푸와는 달랐다. 이소룡처럼 타고난 강자도 아니고, 왕우처럼 비장하지도 않은 대신 성룡은 웃겼다. 배꼽 잡게 웃다보면 어느새 성룡은 모든 적들을 다 물리치고 있었다. 그 유쾌함 속에서는 전통적인 쿵푸 영화가 가진 개연성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쿵푸 팬더’에 바로 그 성룡이 원숭이 역할로 목소리 출연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쿵푸 애니메이션은 바로 성룡의 코미디 쿵푸 영화와 맥을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복수의 코드를 가진 액션임에도 불구하고 폭력적이지 않다는 점이 그렇고, 처절한 분노보다는 유쾌함이 적을 이기는 무기가 된다는 점이 그렇다.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져 있으면서도, 어른들에게도 충분한 즐거움을 선사하는 가족 영화의 틀 속으로 쿵푸 액션을 가져온 점도 그렇다. 이것은 유혈이 낭자하던 외팔이 시리즈의 무협B급 액션들이나, 비장한 쿵푸 영웅으로서 액션의 하드코어를 보여주던 이소룡 영화와는 다른 것이다.

성룡의 코미디 쿵푸처럼 ‘쿵푸 팬더’가 이런 가족영화의 틀 속에 쿵푸 영화의 액션을 잡아넣을 수 있는 가장 큰 요인은 그 폭력을 비웃는 생활인의 시선이 코미디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젓가락 쿵푸’로 대변되는 ‘생활의 무술’이다. 음식을 먹기 위해 젓가락으로 서로 쟁탈전을 벌이는 이 ‘젓가락 쿵푸’는 이미 성룡의 전담 사부였던 소화자 시절부터 하나의 전형화된 쿵푸영화의 시퀀스로 자리잡아왔다. 이 ‘먹고살기 위한’ 무술이라는 개념은 그간 쿵푸영화가 가진 폭력성을 거꾸로 비웃는다.

‘취권’이나 ‘쿵푸 팬더’에는 엄청난 괴물 같은 적이 등장하는데, 그들과 맞서기 위해 피나는 무술 수련을 하는 아군도 있다. 하지만 결국 그 괴물을 물리치는 건, 생활에서 유리된 도장이나 산 속에 파묻혀 무술 수련을 해온 자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술 수련이 된 자가 된다. 따라서 이들에게 특정한 비급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당연하다. 생활이나 본능 그 자체가 비급이기 때문이다. 술에 취하거나(취권), 희노애락(소권괴초)을 느끼는 것이 무술로서 승화되는 성룡의 액션처럼, ‘쿵푸 팬더’는 뚱뚱이 팬더곰 포의 식욕과 똥배가 쿵푸 액션의 전면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성룡의 코미디 쿵푸나 ‘쿵푸 팬더’는 바로 그 비장한 무술 수련을 비웃는 쿵푸로 승부함으로써, 생활을 최고의 지위로 끌어올리면서 현대인들의 공감을 얻게 된다. ‘쿵푸 팬더’를 보면서 단지 어린이 영화라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동물 애니메이션과 동물 동작을 흉내낸 쿵푸의 찰떡궁합 만남에 즐거워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린 시절 성룡의 ‘사형도수(뱀의 동작을 무술로 만듬)’를 열광하던 자신을 떠올리고,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 가족이 함께 본 영화 속에서 ‘생활’이라는 공통의 공감을 가지는 체험은 유쾌하기 그지없는 일이니 말이다. 어쩌면 아이들은 가장의 똥배에서 어떤 생활의 공력을 느끼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디지털 시대의 아날로그 영웅들

1982년 극장가는 두 명의 할리우드 액션스타들로 들썩거렸다. 그 한 명은 후에 아이콘이 될 모자를 쓰고 손에는 채찍을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머리를 헝겊으로 질끈 동여맨 채, 손에는 달랑 대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바로 ‘레이더스’의 인디아나 존스(해리슨 포드)와 ‘람보’의 존 람보(실베스타 스텔론)다. 그들의 무기가 말해주듯이 이들은 말 그대로 몸과 몸이 부딪치는 정통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이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현재, 이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은 여전히 건재하다. 인디아나 존스와 람보는 ‘크리스탈 해골의 왕국’과 ‘라스트 블러드’라는 부제를 각각 달고 다시 극장가에 걸려졌다. 최근 돌아온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은 이들만이 아니다. 이미 ‘다이하드 4.0’으로 건재함을 과시한 존 매클레인(부르스 윌리스) 역시 26년의 세월 동안 절대로 죽지 않는(die hard!) 면모를 보여주었고, 1977년에 탄생한 최고령의 록키 발보아(실베스타 스텔론)는 최근 동명의 영화 속에서 여전히 매운 주먹을 과시했다.

007 시리즈에서 그 주연배우가 계속해서 바뀌었던 걸 생각해보면, 영화와 함께 똑같이 나이를 먹어왔고, 그 나이 그대로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이들은 특별한 존재들이다. 즉 캐릭터와 배우가 뗄래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다른 배우로는 대체가 되지 않는 존재들이다. 또한 배우들에게 있어서도 이 캐릭터들은 배우인생 전체의 이미지를 형성한 바가 크다. 바로 이 점, 배우와 캐릭터가 시너지를 이루고 있는 지점이 무려 30여년 간이나 같은 배우로 시리즈가 지속될 수 있는 전제조건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전제조건에도 불구하고 현재에 그것이 의미가 없다면 영화는 공염불이다. 혹자들은 이들의 귀환이 이 액션 히어로들의 탄생을 보았던 3,40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것일 뿐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설득력 있는 해석은 액션 자체의 향수가 맞을 것이다. 최근 들어 액션은 디지털과 만나면서 ‘테크노’라는 수식어를 갖고 화려한 CG를 앞세워 너무나 깔끔해지는 경향이 있다. 디지털이 이제 고민하는 것은 선명하고 깔끔한 화질이 아니라, 조금 거칠고 흔들리더라도 리얼한 영상이다. 디지털이 거꾸로 아날로그를 꿈꾼다는 말이다.

바로 이 점에서 이 아날로그 액션 히어로들은 자신의 입지를 세운다. ‘다이하드 4.0’에서 디지털 테러에 대항할 수 있는 이들은 컴퓨터 전문가들만이 아니다. 오히려 컴퓨터 자체를 부숴 버리는 아날로그 히어로가 더 효과적일 때가 있다. 이것이 존 매클레인이 여전히 힘을 발휘하는 지점이다. ‘록키 발보아’에서 록키는 급변하고 변질되어 가는 세태를 권투라는 스포츠를 통해 개탄하며 옛 가치로의 복귀를 주창하는 영웅으로서 기능하며, ‘람보4’에서 존 람보는 자신의 아날로그적 가치를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 인권 사각지대에 놓인 미얀마라는 정글을 선택한다.

또한 최근 개봉한 ‘인디아나 존스4’는 시대를 과거로 되돌려 시리즈 본연의 재미요소들을 고스란히 복원해낸다. 이 시리즈의 재미는 냉전시대의 국가 간의 유물 찾기 경쟁에서 비롯되는데, 그 냉전의 당사국이 독일 나치에서 소련으로 바꿔놓음으로서 그 대결구도를 유지한다. 인디아나 존스가 이미 고인이 된 헨리 존스(숀 코넬리)의 사진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세월의 흐름을 감지할 수 있지만 인디아나 존스의 액션은 과거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노익장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 캐릭터 자체가 그다지 힘에 의존한다기보다는 지성과 유머감각에 의지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귀환한 영웅들이 보여주는 옛날 액션은 이른바 작금의 테크노 액션이 보여주지 못하는 진중함과 리얼함을 담보하면서 지금의 세대들까지 열광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마치 어디서든 손쉽게 영상을 접하는 시대에, 과거의 영사필름을 볼 때 느끼는 실감 같은 것이다. 세월의 무게에 조금은 힘겨워 하고 조금은 둔하지만 그래도 이 아날로그 영웅들의 귀환이 반가운 것은, 이제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것마저 손쉽게 그래픽으로 처리되는 세상에서 오히려 땅에 발을 붙박고 뛰어다니는 진짜 사람이 그리운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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