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개 국제영화제 수상, 최다개봉관 개봉 왜?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는 독립장편 극영화로는 이례적으로 로테르담, 도빌,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8개에 달하는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역시 독립장편 극영화로는 역대 최다개봉관인 50여 개 스크린에서 개봉되었다. 영화를 정식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 양익준 감독이 각본, 연출, 주연까지 북치고 장구치고 한 이 영화가 흔한 상업영화들처럼 세련될 리는 만무다. 게다가 영화 찍다 돈이 없어 촬영이 중단되자 전셋집까지 빼서 했을 정도니 돈 냄새가 날 리도 없다. 영화가 친절한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다. 시작부터 욕설과 폭력으로 시작해 끝까지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욕을 들으면서도, 또 심지어 아버지와 자식을 패는 패륜적인 폭력을 보면서도 때론 웃음이 터지고 때론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똥파리’가 그리는 세계는 당연하게도(?) 화장실 같은 세상이다. 거기에는 살벌한 낙서처럼 휘갈겨진 욕설이 일상의 언어처럼 쏟아져 나오고, 어디서 생긴 지도 모르는 분노가 변의처럼 폭력으로 불끈불끈 솟아나온다. 상훈(양익준)은 그 세상에 사는 똥파리다. 이른바 떼인 돈을 받아주는 그의 직업의 세계는 더럽기가 똥 같은 곳이다. 빚을 진 자들 중에는 맞아도 쌀만한 인간들(예를 들면 상훈의 아버지같이 가정폭력을 일삼는)도 즐비하다. 상훈은 자신의 이런 짓거리 역시 더럽다 생각하는 인물. 같이 데리고 다니는 똘마니들에게 왜 폭력을 휘두르지 않느냐며 주먹질을 해대다가도, 그들이 정작 일(?)을 할 때면 그들을 향해서도 폭력을 휘두른다. 그의 주먹은 동료와 적을 나누지 않는다. 그것은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폭력으로 동생과 어머니까지 죽게 하고 감방에 들어갔다 출소한 아버지에게 “든든히 먹어야 맞을 수 있다”고 말하고 발길질을 해댈 정도. 그런 그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연희(김꽃비)가 나타난다. 그들이 서로에게 감정을 느끼는 과정에는 여느 영화 속에서 보았던 그런 알콩달콩함은 없다. 만남부터 상훈의 주먹질로 시작하고 일상적 대화 속에는 듣기 불편할 정도의 욕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처음에는 불편했던 욕들이 차츰 듣다보니 익숙해지고, 어느 순간에는 그 욕 속에 숨겨진 이들의 애절한 속내들이 보여지면서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월남전 참전으로 후유증을 겪는 아버지로 인해 똑같은 폭력에 내둘러진 연희는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런 그녀를 보는 상훈은 한번도 느끼지 못했을 기대고픈 마음을 갖는다.

영화가 프레임 속으로 보여주는 공간은 이 ‘똥파리’들의 세상에만 집중되어 있다. 카메라는 인물을 포착할 때도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있는 듯한 거북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마치보기에도 섬뜩한 사람이 코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부담감을 준다. 카메라는 이들의 비극적인 순환이 반복되는 세상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똥칠을 해대는(그렇게 하도록 시스템화된) 과정을 조명해준다. 연희와 상훈은 보이지 않는 폭력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서로의 살을 물어뜯는 비정한 세상(비참한 삶을 사는 똥파리 상훈이 역시 비참한 삶을 사는 빚쟁이들의 돈을 폭력으로 받아내는)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상훈을 이 똥파리들의 세상에 붙잡고 있는 회사(?) 사장(그는 상훈의 친구이기도 하다)은 분명 이 시스템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지만, 그를 통해 이 폭력의 세상을 연출해낸 시스템의 장본인들은 끝까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끝까지 이 낮은 자들의 세상을 비추는 동안, 관객들은 이 프레임 바깥의 세상이 궁금하게 된다. 그리고 프레임 바깥의 그 어떤 시스템이 프레임 안의 똥파리들의 비극적인 삶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그 똥파리들이 해대는 욕과 폭력은 하나의 안타까운 몸부림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 더러운 세상에 대한 정밀묘사는 영화의 진심을 전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국적성을 지워버리는 효과도 있다. 하긴 이런 세상의 풍경이 어디 특정 국가의 문제일까. 각종 세계 영화제의 관심은 그걸 에둘러 말해주는 대목이다.

불황기, 삶을 성찰하는 다섯 편의 영화들

불황기여서일까. 유난히 삶을 돌아보는 영화들이 눈에 띈다. 이미 독립다큐영화로서는 상상못할 대성공을 거둔 '워낭소리'는 물론이고, 또다른 독립영화의 맛을 보여주는 '낮술', 미키 루크라는 배우와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더 레슬러', 나이를 거꾸로 먹어가는 한 인물을 통해 시간과 삶을 성찰하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그리고 심지어 슈퍼히어로 영화지만 정의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왓치맨'까지.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 그 현실을 관조하게 해주는 이 영화들이 가진 삶에 대한 각기다른 시선들은 무엇이었을까.

'워낭소리', 당신의 노동은 숭고하다
'워낭소리'의 그 잔잔한 울림은 소가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나가는 그 노동으로부터 울려퍼진다. 때론 바보처럼 우직하게 숨쉬듯 해온 노동이 달라진 세상 속에서 무화되는 어느 순간은 늘 아련한 노동의 아우라가 피어오르기 마련. '워낭소리'는 우리네 아버지들이 해왔던 노동이자, 이제는 사라져버린 진짜 노동을 소 걸음으로 찬찬히 되새겨보게 해주는 영화다. 영화가 전하는 말, "당신의 노동은 숭고하다"는 그 말은 불황을 살아가는 작금의 사람들의 가슴을 울릴만 하다.

'낮술', 기대와 배반의 삶 그래도 웃는다
'낮술'은 우리네 삶에 존재하는 욕망의 아이러니를 낮에 마시는 술의 그 분위기에서 포착해내는 영화다. 삶의 욕망이 가지게 마련인 기대감은 곧 배반감으로 돌아오게 마련. 낮술에 취해 한바탕 유쾌한 웃음을 던지고 난 후에 남는 것은 이 끝없이 반복되는 삶에 대한 관조다. 기대와 배반의 반복은 그러나 그 과정을 이어나가는 유머감각으로 인해 절망에 빠지지 않게 된다. '낮술'은 낮술 한 잔이 주는 쓰디쓴 현실을 웃음으로 전화시키고 그것을 통해 우리네 일상이 그 한바탕 낮술과 다르지 않다는 얘기를 해준다.

'더 레슬러', 육체는 슬프다 하지만 연민은 사절이다
'더 레슬러'는 한때 잘 나가던 프로레슬러였으나 이제는 남루해진 육신이 버거운 랜디(미키 루크)의 이야기면서, 한때 섹스심볼의 아이콘이었던 배우였으나 이제는 망가진 육체를 던져 연기하는 미키 루크 자신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물론 프로레슬링은 그들이 말하는 '작전'에 의해 짜여진 쇼이지만 살과 살이 부딪치고, 피와 살점이 튀기는 링 위에서의 쇼는 리얼이다. 이것은 연기자의 상황과 정확히 일치하고, 더 확장해서 보통 사람들이 해나가는 노동과 다르지 않다. 그 노동 속에서 나이들어가는 육체는 슬프다. 하지만 이 영화가 대단한 것은 그 슬픈 육체에 보내는 연민마저 헤드락 한 판으로 날려버리는 그 쿨함에 있다.

'벤자민 버튼...', 거꾸로 돌려도 시간은 흐른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원래대로 돌아갔으면, 하는 인간의 욕망. 전쟁에서 죽어 돌아온 자식을 앞에 둔 부모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고, 시간에 종속되어 늙어가다 이제는 죽음만을 눈앞에 기다리는 노인의 마음이 그러할 것이다. 이 영화는 거꾸로 나이를 먹어가는 벤자민 버튼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그러한 욕망이 실현됐을 때 과연 우리는 시간을 넘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진다. 원작소설이 가진 유쾌함은 데이빗 핀처 특유의 진지함으로 바뀌어 영화는 오히려 시간에 종속되어버리는 벤자민 버튼의 상황을 보여준다. 거꾸로 돌려도 시간은 흐른다는 이 영화가 보여주는 시간의 무차별성은, 아마도 이 영화의 초반부 전쟁터에서 전사한 이 땅의 아들들을 다시 고향으로 되돌리기 위해 거꾸로 돌아가는 영상을 끼워넣은 데이빗 핀처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영화 또한 아무리 거꾸로 돌려도 시간에 종속되기 마련이니까.

'왓치맨', 세상은 구원할만큼 가치가 있는가
그래픽 노블의 정수라고 불려온 '왓치맨'은 세계를 위협하는 적과 그 세계를 구원하는 신적 존재가 등장하는 수퍼히어로 등식 속에 끼워넣어지는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에서 적은 악당이 아니라 바로 인류이고, 수퍼히어로는 구원자라기보다는 고뇌하는 인간에 가깝다. 유일한 초월적 존재(신은 아니고 초인에 가깝다) 닥터 맨해튼은 왜 자신들이 인간을 구원해야 하는가 하는 의구심에 빠진다. 세상을 구원할 수는 있어도 인간의 본성을 바꿀 수는 없다는 슈퍼히어로의 비관적 고민은 그간 선과 악으로 간단하게 판단해왔던 정의의 개념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왓치맨'은 슈퍼히어로 영화로서 진지한 질문을 던졌던 '다크나이트'의 계보를 잇는 영화다.

불황이 가져온 불안은 자신의 삶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욕망하게 만든다. 가벼운 주머니로 짧게 나마 현실을 빠져나와 그 현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이들 영화들이 가치를 갖는 이유다.

노동 실종의 시대, 노동의 가치를 말하다

개봉 15일만에 5만 명의 관객을 넘어선 ‘워낭소리’. 독립다큐영화로서 단 7개관 개봉으로 시작한 이 영화가 32개관으로 극장을 늘려가며 관객들의 폭발적인 찬사를 받을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항간에는 2007년 10개관 개봉에서 시작해 점점 개봉관을 늘려가며 22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은 ‘원스’ 성공과 비교하며, 그 흥행속도가 오히려 ‘원스’보다 빠르다는 장밋빛 전망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극영화가 아닌 다큐영화로서 ‘워낭소리’가 거두고 있는 이 놀라운 성적은 ‘원스’의 기염을 넘어서는 면이 있다. 도대체 무엇이 이 영화에 이다지도 폭발적인 반응을 만드는 것일까.

사라져 버린 부리는 소, 달라진 소의 실존
‘워낭소리’에서 최원균 할아버지(80)는 이미 노쇠해버린 소를 대체할 젊은 소를 찾기 위해 소 시장을 찾아간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에게 “부리는 소 있어?”하고 묻지만 그들은 그런 할아버지를 이상하게 바라본다. ‘부리는 소’, 즉 일하는 목적으로 기르는 소는 이제 거의 없기 때문이다. 후에 소가 일을 할 수 없게 된 소를 팔기 위해 소 시장에 나온 할아버지가 5백만 원 정도로 소의 가치를 매기자, 모두가 껄껄 웃으며 “그런 가격으론 못 팔아요. 일만 한 소는 고기가 질겨서 못 먹어요.”라고 말한다.

시장에서 소의 가치는 ‘일’이 아니라 고기가 되는 ‘중량’으로 판단되는 이 상황은 이 다큐멘터리 영화가 보여주려는 노동 실종 시대를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소의 달라진 실존이 드러나는 이 대목과 함께 영화는 시종일관 할아버지와 소가 함께 농사짓는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남들이 기계로 모를 심고 농약으로 해충을 잡고, 기계로 수확할 때 할아버지는 무모하리 만큼 그 모든 일을 소와 자신의 손으로 해나간다. 말 그대로 ‘소처럼 일하는’ 이들을 보며 이삼순 할머니(77)는 연실 혀를 끌끌 차며 달라진 세상 속에서 여전히 소를 고집하는 농사를 짓는 소를 닮아버린 할아버지와 소를 안타까워한다.

최원균 할아버지의 ‘소를 이용한 농사’는 단지 ‘소’라는 자리에 ‘트랙터’나 ‘농약’ 같은 단어를 단순히 대치하는 것으로 바뀔 수 있는 그런 단순한 의미가 아니다. ‘소를 이용한 농사’란 그 소와 함께 밭을 가는 사람이 있어야 함을 뜻하고, 그 소가 먹을 꼴을 유지하기 위해 농약을 치지 않는 농사를 지어야 함을 의미한다. 소와 함께 지내야할 우사가 있어야 하고, 병이 들면 수의사를 불러 고쳐주기도 해야 하는 그런 농사를 말한다. ‘일하는 소’는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라 하나의 동반자가 되는 것이다.

사라진 소, 사라진 노동, 사라진 아버지
차들이 쌩쌩 달리는 도로 옆을 할아버지를 태운 수레를 끌고 위태롭게 걸어가는 소, 트랙터가 질주하며 순식간에 일을 해버리는 논 한 옆에서 힘겹게 농사를 짓는 할아버지와 소. 이 풍경을 찾는 일은 의도적으로 그 대상을 찾아 헤맨 이충렬 감독에게도 그다지 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한다. 전국을 거의 뒤지다시피 해서 이 다큐멘터리의 주인공들을 찾아냈다는 이 일화는 작금의 사라져버린 일하는 소의 달라진 실존을 증언해준다.

사라진 소가 의미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라진 노동이다. 이제 노동이라고 하면 컴퓨터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는 일이 대부분이 되어버린 시대에, 이 일하는 소가 전하는 사라진 노동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이 일하는 소의 죽음과 그 소가 죽기 전에 할아버지에게 선물처럼 남겨놓은 엄청난 양의 노동 앞에 현대인들의 무장해제되는 것은, 약삭빠르고 영리해진 세상 속에서 이 바보스러울 정도로 우직한 소가 전하는 노동의 신성함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신성한 사라진 노동의 끝자락에서 어렴풋이 고개를 드는 얼굴이 바로 우리네 아버지들의 얼굴이다. 그 노동은 바로 우리들의 아버지들이 해왔으나 이제는 시대에 의해 거세되어 폄하되어버린 과거의 가치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소와 할아버지의 실존을 다룬 이 영화는 우리네 아버지들의 실존이기도 하다. ‘워낭소리’에 쏟아지는 폭발적인 찬사는 불황의 된서리를 맞아 점점 더 영악해지기만 해가는 사회 속에서 바로 이 오래 전 사라져버린 아버지들이 해온 정직한 노동이 전하는 감동에 현대인들의 마음이 움직였기 때문이다. 죽어 사라진 소를 바람이 흔드는 워낭소리를 통해 할아버지가 추억하듯이, 영화관을 나서면서도 귓가에 끊임없이 울리는 ‘워낭소리’가 대중들의 입을 타고 귀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어른까지 사로잡는 ‘벼랑 위의 포뇨’, ‘볼트’

이제 애니메이션을 애들 것으로 치부하던 시대는 지났다. 아이들에게 연말연시 영화 보여주겠다고 가서는 제가 신나서 웃고 또 감동 받아 우는 모습은 더이상 낯선 풍경이 아니다. 최근 개봉한 두 편의 애니메이션, ‘벼랑 위의 포뇨’와 ‘볼트’. 무엇이 어른들까지 웃기고 울렸을까.

물고기 포뇨, 인어 포뇨, 사람인 포뇨도 다 좋아요!
역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아이들은 물론 어른들까지 환호하게 만드는 ‘벼랑 위의 포뇨’. 아이들은 그 귀여운 물고기소녀 포뇨와 소년 소스케의 얼굴 표정, 몸짓, 말투 하나하나에 매료된다. 이것은 마치 아이들이 처음으로 작은 물고기를 어항에 키웠을 때, 가지게 되는 수많은 감정들, 즉 호기심과 애착 그리고 책임감 같은 것을 이 애니메이션이 포뇨라는 캐릭터로 구현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세계 속에서 물고기는 때론 사람처럼 말을 하고, 때론 사람 그 자체가 되기도 한다. 이것은 미지의 세계가 많은 아이들의 상상력과 호기심의 세계이자, 아직까지 이해관계 자체가 없는 순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보고 어른들이 난감해 할 때, 아이들은 그것을 그대로 껴안는다. 물고기인 포뇨가 지상으로 등장할 때, 휘몰아치는 파도는 어른들에게는 두려움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설렘이기도 하다. 포뇨가 소스케에게 달려가는 그 설렘. 특별한 말도 필요 없이 달려가 안기는 것만으로 충분한.

소스케가 좋아 무조건 육지로 달려나온 포뇨와, 물고기든, 인어든, 사람이든 상관없이 그저 포뇨가 좋다고 말하는 소스케. 그 순수의 세계는 그래서 지나치게 이해관계로만 얽혀 살아가는 어른들의 가슴을 울린다. 이것은 한번 더 생각해보면 인종과 국가와 종교와 언어 같은 것으로 서로를 구획하며 심지어 전쟁까지 일삼는 어른들의 세계에 대한 정중한 경고이기도 하다. 하물며 아이들도 이럴진대, 다 큰 어른이라는 사람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경고. 그것이 또 한번 아프게 어른들의 가슴을 울리게 만든다.

내 슈퍼 멍멍으로 널 박살내주마!
‘볼트’는 합병된 디즈니-픽사의 저력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 일단 아이들이 환호할만한 애완견, 그것도 초능력으로 악당들을 물리치는 슈퍼견이 주인공이니 다소 복잡할 수 있는 스토리도 단박에 잡아당기는 흡입력이 만들어진다. 영화 초반 마치 매트릭스를 연상케 하는 슈퍼견 볼트와 그 주인 페니가 적들과 벌이는 한판 대결은 아이들용 애니메이션이라지만 어른들까지 짜릿한 액션의 쾌감을 느끼게 해준다. 볼트의 슈퍼 멍멍(폼을 잡고 멍멍 짖는 것) 하나면 수백 대의 자동차와 헬기가 마치 폭풍에 휘말린 듯 날아가 버리니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저 개가 주인공인 슈퍼히어로 영화를 따라가지 않는다. 슈퍼견 볼트가 사실은 영화 주인공이며, 영화의 리얼리티르 살리기 위해 영화 세트장을 한번도 벗어나지 못하고 살아왔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영화는 슈퍼히어로 영화에서 ‘트루먼쇼’의 아이들 버전으로 바뀐다. 이로써 영화는 환상 속의 삶에서 실제의 삶으로 내동댕이쳐진 볼트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면서 성장하는 과정을 그려나간다.

조금은 우울한 일이긴 하지만, 이것은 어린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가졌던 환상의 세계가 조금씩 깨져나가면서 현실의 세계로 안착하는 그 순간을 포착한다. 하늘을 난다거나, 엄청난 속도로 달린다거나, 소리 한 번 지르는 것으로 모든 것을 날려버리는 슈퍼히어로물들이 여전히 어른들에게도 꿈꾸게 만드는 그 환상의 세계. 하지만 영화는 바로 그 꿈을 꾸고 있어 현실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유쾌함을 내내 유지함으로써 그걸 보는 어른들의 마음까지 울린다. ‘슈퍼멍멍’은 환상일 뿐이지만, 바로 그 슈퍼멍멍 같은 꿈이 있어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이란, 현실의 세계 속에 매몰되어 살고 있던 어른들에게 그 반짝였던 환상과 꿈의 세계를 흐뭇하게 떠올리게 만든다.

애들 영화라고? 근데 왜 웃고 울었을까.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것이 아이들 영화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처럼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세상을 호기심으로 바라보며 지나쳐왔던 그 아이들 시절의 꿈들이 거기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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