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보이’, ‘괴물’을 잇는 ‘추격자’의 영웅

‘추격자’에 대한 칸의 반응이 심상찮다. 도대체 ‘아이언맨’처럼 몸에 잔뜩 무기들을 장착하고 하늘을 날아오르는 영웅도 아니고, ‘인디아나 존스’처럼 채찍 하나와 명석한 두뇌, 그리고 놀라운 순발력으로 고대의 유물들을 찾아내는 영웅도 아닌, 그저 보도방 여자를 미친 듯이 찾아 헤매는 이 중호(김윤석)라는 소시민적인 영웅의 어떤 점이 세계의 이목을 매혹시켰을까.

‘올드보이’, ‘괴물’에 이어 ‘추격자’가 내세우는 영웅은 역시 서민이다. 그것도 평범 이하거나 때론 비열하기까지 한 서민. 이 평범한 서민들은 어느 날 비범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그 사건을 해결하기는커녕 점점 나락 속으로 빠져 들어간다. ‘올드보이’의 오대수(최민식)는 평범한 샐러리맨으로 살아가다가 갑작스런 납치 감금으로 15년 동안의 감금을 당하며, ‘괴물’의 강두(송강호)는 순식간에 한강에 출몰한 이상한 괴물에게 금지옥엽 딸을 납치 당한다. ‘추격자’의 중호 역시 평범한 보도방 사장에서 괴물 같은 살인마에게 납치된 미진(서영희)을 찾기 위해 달리고 달리는 추격자가 된다.

즉 이들 우리네 서민들을 영웅으로 만드는 것은 평범한 일상을 깨는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대개가 납치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소중함을 잘 느끼지 못했던 것이 (납치로 인해) 사라질 때, 이 서민들은 그 소중한 평범함을 찾기 위해 뛰기 시작한다. 그것은 오대수에게는 세월 속에 지워진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이며, 강두에게는 딸이고, 중호에게는 미진이다. 그 소중함이 가족이나(유사가족을 포함) 자기 자신 같은 일상의 가치를 조명할 때, 이 서민적 영웅은 휴머니티를 좇는 영웅이 된다. 거창한 것이 아닌 최소한 인간이라면 반드시 그래야 할 만한 일을 하는 영웅이 탄생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종종 이 영웅들에게는 눈에 보이는 적보다 보이지 않는 적이 더 무섭다는 점이다. ‘올드보이’에서 오대수는 자신을 감금한 적을 찾아다니는데 대부분의 시간을 소비하지만 결국 진짜 적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괴물’과 ‘추격자’의 강두네 가족과 중호는 눈에 보이는 괴물이나 살인마보다 더 무서운 것이 이런 괴물들을 은폐하고 축소하려는 공권력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이 사회적인 메시지는 우리네 서민적인 영웅들만이 가진 특징이다.

그리고 이 서민적인 영웅들은 헐리우드의 영웅들과는 상반되게 미션에서 실패하게 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적은 잡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을 그렇게 뛰게 만들었던 소중함을 잃고 만다는 점에서 실패이다. ‘올드보이’의 오대수는 자신의 과오를 알아채고는 기억을 지워버리려 하고, ‘괴물’의 강두나 ‘추격자’의 중호는 결국 괴물 혹은 살인마에게서 납치된 그녀들을 구해내지 못한다. 바로 이 실패의 지점은 이 영웅들의 행보에 사회적 메시지와 함께 리얼리티를 구축해내는 힘이 된다.

이 결과가 아닌 과정을 주목하게 만드는 영웅들은 헐리우드의 영웅들과는 색다른 면모를 갖게된다. 영화는 끊임없는 추격의 과정을 그리는데 목표의 성공과는 상관없이 바로 그 추격의 이유, 즉 휴머니티가 이들 영웅의 특징이 된다는 점이다. 전 지구적 담론으로 허황된 영웅상을 정치적 논리와 섞어 세계에 배포하는 헐리우드식의 영웅을 유치하다거나 식상하다고 느꼈던 관객이라면 이 지극히 가족적이며 자성적인(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다는 면에서) 반영웅이 가진 인간적인 면모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올드보이’, ‘괴물’에 이어 ‘추격자’에 쏟아지는 일련의 세계적인 관심은 이제 새로운 영웅상의 탄생을 예고하는 징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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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에 포위된 청춘들, 혹은 우리들의 자화상

술이 잔뜩 취해 비틀대며 들어온 호스트 승우(윤계상)는 화장실 변기에 대고 토악질을 해댄다. 한 번, 두 번.... 구역질이 끄집어올린 욕망의 덩어리들이 입에서 뿜어져 나온다. 그 날 그가 마신 술은, 과거 별 볼일 없었으나 상전벽해한 부동산으로 대한민국 1%가 된 옛친구들이 준 불평부당함이 독처럼 퍼진 술이었다. 왜 누구는 갑자기 부자가 되고 왜 누구는 갑자기 날선 세상에 던져져 몸뚱어리 하나를 파는 대가로 욕망의 언저리만 핥으며 살아가야 하나. 이 구토의 장면이 ‘비스티 보이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다면 아마도 그 이유는 승우가 가진 불평부당함과 조우하는 어떤 구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비스티 보이즈’는 자본주의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가장 일상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것들을 세밀하게 보여줌으로써 구역질을 나게 만드는 영화다. 따라서 이 영화를 잘 생기고 멋진 호스트들이 벌이는 욕망의 질주와 그 끝장 정도로 본다면 치정극으로 치닫는 후반부의 스토리라인이 맥없어질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그렇게 쿨한 스타일을 추구하는 영화가 아니며 어찌 보면 오히려 그 쿨함의 이면에 숨겨진 좀스러움을 드러내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호스티스와 호스트들이 벌이는 관계의 뒤섞임은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자본주의라는 상황 속으로 넣어지면 상식이 된다. 이 비논리적인 관계는 이렇다. 자본의 주인에게서 자신의 욕망을 얻어내기 위해 봉사하는 호스티스 혹은 호스트들은 자신이 욕망을 얻는 순간(자본을 얻는 순간), 자본의 주인이 되고싶어 한다. 호스트들이 우르르 호스티스들이 있는 룸살롱에 몰려가 질펀한 술판을 벌이고, 호스티스들이 호스트들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 욕망의 유희를 즐기는 이 반복된 상황 속에서 자본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순환된다.

그 속에서 이들의 모습이 하나의 소모되는 육체로 보여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장면 속에서 그들은 끝없이 담배를 태우고 술을 마시며 섹스를 팔거나 사면서 육체를 소비한다. 그러니까 이 세계 속에 들어온 이들은 자본이라는 장작불을 계속 지피기 위해 소비되어야 하는 장작들이다. 관계는 오로지 자본의 논리 속에서만 세워진다. 승우의 누나인 한별(이승민)과 함께 살아가는 재현(하정우), 그리고 재현의 소개로 호스트일을 시작한 승우 이 둘의 관계는 재현의 표현처럼 ‘가족’이 되지 못한다. 그들 사이에는 ‘마이킹(선불금)’이나, ‘공사(돈을 갈취하는 것)’같은 불순한 단어들이 떠다니면서 언제든 관계를 자본 위에 세울 틈을 노리기 때문이다.

이 돈의 역할 놀이는 인간을 중심으로 두고 보자면 역겨운 것이 분명하지만, 돈이 권력이 되는 자본주의 상황 속에서는 절실한 현실이 된다. 그러니 그렇게 쿨하고 멋져 보이던 승우가 지원(윤진서)에게 “왜 그렇게 칫솔이 많아?”하고 반복해서 물을 때, 터져 나온 웃음 속에는 분명 자본의 사회 속에서 쿨하게 살길 강요받으며 살아왔던 관객들의 허허로운 마음을 건드리는 면이 있다. 언제든 사람이 아닌 돈을 선택하는 재현이 이 자본의 사회 속에서 무한히 방전되는 장작으로 이미 굳어진 인물이라면, 이제 딱히 좋지만은 않은 호스트의 진짜 삶에 뛰어든 승우는 그 과정 위에서 갈등하는 인물이다.

정말 무서운 것은 이 무한히 서로가 서로를 소비시키는 관계 속에서 그들의 분노가 향하는 지점이다. 그것은 사실은 자본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놀라운 체계지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그들에게는 그것이 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승우의 칼이 시스템이 아닌(예를 들면 호스트바나 룸살롱의 자본주들) 엉뚱한 곳을 향하는 것은 이 시스템의 정교함을 거꾸로 말해주는 대목이다. 아쉬운 점은 영화가 그 시스템으로 표상될만한 인물을 세워놓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다만 막연하게나마 네온사인이 가득한 도시풍경과 여기저기 복잡하게 얽혀있는 도심의 길들을 포착함으로써 그 안에 점처럼 존재하는 인물들을 포위하고 있는 자본의 냄새를 풍길 뿐이다.

그러니 그 포위된 공간 속에서 승우가 변기를 붙잡고 토해낸 것은 단지 술이 아니다. 그것은 그가 꾸역꾸역 삼켜 넣은(혹은 누군가 삼키게 한) 욕망의 덩어리들이다. 그리고 몸이 소화시키지 못하는 그 욕망의 덩어리들을 토해내면서 흘러내리는 눈물이 어디 승우만의 것이랴. 사실상 이 시스템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어느 누구든 깊은 밤 술 취해 돌아가는 길에 어느 전봇대 옆에서 그런 경험을 안 해본 이가 있을까. ‘비스티 보이즈’는 그러니까 슬프게도 이 자본의 세상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러니 욕망의 대상으로서 ‘비스티 보이즈’를 보기를 원했던 관객이라면 끝에서 발견한 이 찝찝함의 정체에 난감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찝찝함으로의 방향수정은 어쩌면 감독의 의도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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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와 버려진 신발, 그리고 서민들

어느 동네나 유명한 바보 한 명쯤은 있게 마련. 그 바보를 만났을 때, 당신은 어떻게 했나. 그냥 그런 존재는 없는 것처럼 지나쳐버렸던가. 너무 더러운 그 모습에 벌레 쳐다보듯 피했던가. 혹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눈앞에서 꺼지라고 했던가. 대부분은 이것들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당혹스럽게도 당신이 지나치거나 벌레 보듯 도망쳤던 바로 그 바보가 주인공이다.

신발을 닮아버린 바보, 승룡이
영화 ‘바보’의 바보, 승룡이(차태현)는 늘 맨발이다. 그 맨발을 지켜주던 낡은 신발이 있지만 칠칠치 못하게 늘 잃어버리고 만다. 구멍난 낡은 신발은 바로 바보 승룡이 자신을 닮았다. 어린 시절, 연탄가스 사고로 아버지를 잃고 자신마저 바보가 되었으며, 그런 바보에게 어머니는 동생마저 맡기고 떠나지만 정작 승룡이는 웃을 뿐이다. 절대로 울지 않는다며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들을 기꺼이 감당한다. 마치 가장 낮은 곳에서 묵묵히 세상의 더러움을 막아주고 소중한 발을 보호해주면서도 늘 버려지는 신발처럼.

바보는 늘 버려져왔다. 부모에게서 버려졌고(물론 부모는 승룡이를 버리지 않았고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승룡이 혼자 남겨졌다는 의미에서), 자신이 돌봐주지만 자신을 싫어하는 동생 지인이(박하선)에게도 버려졌다. 영화가 굳이 그걸 보여주진 않지만 가족이 이럴진대 타인은 오죽할까. 그런데 이 버려진 바보, 버려진 신발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있다. 그것은 어릴 적 친구였던 지호(하지원)와 상수(박희순)다. 지호(하지원)는 바보와의 재회에서 버려진 승룡이의 신발을 주워온다. 의사인 지호의 아버지는 승룡이가 어디 아프지는 않는지 늘 찾아와 문진을 해준다. 자신이 태워먹은 학교 피아노 때문에 대신 누명을 쓰고 학교를 떠난 승룡이에게 깊은 죄의식을 가지고 있는 상수(박희순)는 늘 바보 곁을 맴돌고 기꺼이 자신의 신장을 승룡이의 동생에게 떼어준다. 그들은 바보의 맨발 같은 삶에 신발이 되어주는 사람들이다.

영화가 주목하는 것은 그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길거리에 버려진 더럽고 낡은 신발 같은 바보 승룡이의 마음이다. 바보라는 단어가 가진 두 가지 의미, 즉 덜떨어졌다는 부정적 의미와 착하다는 긍정적 의미는 작품에 의해 주목된 승룡이를 통해 전자에서 후자로 바뀌어 나간다. 그리고 거기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약삭빠르지도 못하고 거짓말도 못하며 누군가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내주는 바보의 위대성이다.

모든 이들을 위해 웃으며 선택하는 바보의 죽음은 마치 예수의 희생을 연상케 한다. 그의 죽음을 통해 많은 이들은 다시 태어나게 되는데, 지호는 비로소 다시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게 되고, 상수와 희영(박그리나)은 술집생활을 청산하고 각각 토스트 가게와 은행안내원을 하게 되며, 동생 지인(박하선)은 새 생명을 얻게된다.

진심을 전하는 반복의 힘
영화가 바로 이 바보가 가진 진심의 힘을 전달하는 방식이 흥미롭다. 그것은 어눌하지만 반복되는 진술과 장면들을 통해서다. 바보는 많은 어휘를 알지 못하지만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함으로써 그 말의 무게를 더한다. 상수에게 “동생을 돌봐달라”는 말을 반복해서 말할 때, 처음에는 지나쳤던 것이 차츰 정색하며 받아들이게 되는 것처럼 영화는 이런 반복의 문법을 통해 관객에게 진심을 말한다. 이것은 강풀의 만화가 가진 장점과도 일맥상통한다. 강풀은 여러 마디의 말보다 단 한 마디의 반복되는 말로 전하는 말의 힘을 아는 작가다.

학교에서 아픈 동생을 업고 가려는 바보를 막아서며 당신 누구냐고 묻는 선생에게 “얘는 제 동생이구요, 저는 지인이 오빠 승룡이에요”라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화법은 마지막에 와서 바보의 사망신고를 하러 온 지인이가 동사무소 직원에게 반복해서 “이 사람은 제 오빠구요. 저는 이 사람 동생이에요”라는 화답으로 돌아온다. 이 반복의 힘은 대사를 통해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다. 고물상 아저씨의 승룡이네 집으로 신발을 던지는 장면의 반복은 이 영화의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면서 인상적이다.

버려진 신발을 계속해서 주워와 주인에게 돌려주는 그 고물상 아저씨와, 지인이의 반복된 진술은 모두 타인으로 극장에 앉아 있는 우리에게 어떤 행동까지를 요구하는 힘을 발휘한다. 이제 더럽고 비천하며 어딘가 덜떨어진 사람으로서만 치부하던 낮은 사람들에게 대한 선입견은 이 즈음에 와서는 나의 오빠이자 나의 동생, 친구, 가족 같은 일이 되어버린다. 지인의 대사와 고물상 아저씨의 장면은 세상에 버려진 나와는 하등 상관없어 보이는 비천한 사람들의 죽음이 사실은 바로 나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준다.

바보에게 빚진 당신의 삶
‘바보’가 그려내고 있는 것은 진짜 육체적인 장애를 겪는 바보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거기에는 주목받지 못하고 매일 매일이 힘겹지만 불평 없이 누군가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바보들을 위한 이야기가 들어있다. 그리고 그것은 힘없고 가난하며 태생이 다르다는 이유로 계층적 차별의식에 차별 당하면서도 늘 이 땅의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기꺼이 그 일에 뛰어들었던 우리네 착한 서민들을 닮았다. 사실상 지금 우리가 숨쉬며 버젓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이 땅의 수많은 바보들, 승룡이들이 있기 때문이 아닌가.

영화는 바로 우리가 삶을 빚진 그들에 대한 채무의식을 승룡이라는 인물을 통해 환기시킨다. 그러니까 승룡이가 하는 일거수 일투족은 거꾸로 우리가 승룡이에게 저지른 그 죄의식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에 버려진 수많은 낡은 신발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아무런 항변도 없이 자신을 아낌없이 희생하고는 버려진 그 신발들을 귀하게 주워서 주인에게 던져주는 영화 속 고물상 아저씨의 마음이 되는 것은 우리 모두 그 버려진 것들에게 빚진 바가 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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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격자’의 엄중호와 ‘노인을 위한...’의 안톤 시거

최근 주목받고 있는 ‘추격자’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기묘하게도 유사한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들이다. 거기에는 희대의 살인마가 등장하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즉 이 영화들은 모두 고전적인 형사물이나, 스릴러에 단골로 등장하는 ‘추격과 도망’이라는 장르적 모티브를 잘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이 영화들은 그 장르적 틀 위에서 어떤 의미망을 포착하려 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추격자’에서 추격자는 보도방을 운영하는 전직형사 엄중호(김윤석)이고 도망자는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이것은 정반대다. 추격자는 희대의 살인마인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이고 도망자는 그다지 선해 보이지만은 않은 모스(조쉬 브롤린)다. 한쪽은 살인범이 쫓기고 또 한쪽은 정반대지만 둘 다 나쁜 놈이 나쁜 놈을 쫓는다는 설정은 유사하다. 물론 여기서 형사는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늘 뒤늦게 나타나는 존재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두 영화가 모두 추격하는 자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인데, 그 추격자는 도망자보다 더 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는 감정이 없는 살인마다. 반면 엄중호는 희대의 살인마인 지영민에 비해 약할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늘 지영민을 구타하고 도망치게 만드는 인물은 다름 아닌 엄중호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여기에는 변수가 작용한다. 센 놈이 약한 자를 잡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그 변수가 작용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어려워진다.

‘추격자’에서 그 변수는 무능한 공권력이다. 엄중호는 그 탁월한 동물적인 감각으로 지영민을 떡 하니 경찰서 안에까지 끌고 가지만, 경찰은 눈앞에 혐의가 분명한 살인자를 버젓이 거리로 내보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변수는 조금 철학적이다. 그것은 안톤 시거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인자로서 자신만의 룰을 따르는 자이다. 그런데 그 룰은 어떤 인과가 있는 것이 아닌 우연의 산물이다. ‘추격자’의 지영민은 포획한(?) 미진(서영희)에게 “네가 살아서 돌아가야 할 이유를 말해봐”하고 묻지만 안톤 시거는 그런 이유는 묻지 않는다. 대신 동전던지기로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정할 뿐이다.

물론 지영민은 그 이유가 타당하면 살려주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물적인 본능일 뿐이다. 그러니 그 이유로 충분한 “딸이 있어요”라는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안톤 시거는 감정을 배제한 채 철학적인 사변을 통해 운명을 결정한다. 따라서 그는 동전이 정하는 우연에 따를 뿐이다. 인과과정으로 수사를 하는 형사들에게 인과가 없는 그는 좀체 추격하기 어려운 존재다. 어찌 보면 그는 인과관계에 잔뜩 얽매여 있는 사회적 그물망을 벗어나 있는, 그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절대 자유의 사냥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안톤 시거 역시 그 우연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그를 옭아매는 것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보안관 같은 법망이 아니라 그 우연 자체다. 쫓고 쫓기고 하던 추격전이 결국 누가 잡히고 누가 죽었다는 식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걸 다 해치워버린 안톤 시거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으로 끝내는 것은 바로 이 우연의 법칙 속에서 그 무엇도 허무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전언이다. 결국 이 추격전이라는 우리네 삶의 메타포는, 어느 날 우연히 현장에서 돈을 발견한 모스가 그 날 밤 물 한 모금을 전해주러 갔다가 우연히 발각되고, 살인자에게 쫓고 쫓기는 과정 자체가 허무하게도 필연이 아닌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추격자’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리고 있는 추격전은 그 긴박하고 흥미진진한 과정 속에 각각의 메시지를 포착한다. ‘추격자’는 엄중호라는 추격자를 내세워 그 일면 견고해 보이는 사회적 시스템의 무능함을 추격하는 격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안톤 시거라는 추격자를 내세워, 우연의 법칙 속에 무력하기만 한 필연적 삶의 시스템을 추격하는 격이다.

이 두 영화가 흥행에 있어 전혀 상반된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전국 극장가를 거의 장악하고 있는 ‘추격자’가 곧 200만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CGV 인디영화관에서만 개봉하고 있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1만5천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관객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관객수의 차이는 물론 개봉관 수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역시 추격하는 그 대상 때문이 아닐까. 우리네 관객들은 무능한 정부에 대한 사변적이지 않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비판이,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는 철학적 사유보다는 더 마음에 와 닿나 보다. 어쨌든 두 영화 모두 요즘 들어 보기 드문 수작인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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