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을 좇는 ‘추격자’, 그 흥행의 이유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의 물결. 인파로 복잡한 거리에서 만나는 남녀. 그리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차. 골목길. 담벼락에 대충 세워지는 차. “차를 저렇게 세우면 어떻게 하냐”는 사내의 말, “금방 나올 건데요”하는 여자의 답변. 하지만 이어지는 담벼락에 오래 방치된 듯 보이는 차에 가득 달라붙어 있는 출장안마사 명함들. 이 짧지만 함축적인 영상의 연결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상황과 영화 전체의 분위기를 압축해 설명한다. 누군가 사라졌고, 그 사내는 여자의 실종과 관련이 있다는 것.

원경에서 잡을 때는 일상적인 거리의 풍경이었던 것이 차츰 가깝게 심도를 잡아가자 특정한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 영상 구성의 효과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나쳤던 거리에서 어쩌면 우리가 희대의 살인마와 옷깃을 스쳤을 지도 모를 아슬아슬함을 전해주기도 하며, 그렇듯 타인으로서 극장문에 들어선 관객을 영화 속 사건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 있다. 이 원경에서 점점 가까운 곳으로 옮아가는 카메라는 이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단순하지만 효과적인 장치다. 그리고 거기에는 출장안마소를 차려놓고 여자를 파는 비열한 인간, 엄중호(김윤석)의 시선이 겹쳐진다.

사라진 여자를 엄중호가 좇는 첫 번째 이유는 돈 때문이다. 그에게 여자란 돈을 벌어다주는 존재 그 이상이 아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억지로 손님에게 보내진 미진(서영희) 역시 마찬가지. 엄중호가 미진과 막연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미진을 찾아 헤매던 엄중호는 미진을 근거리에서 보게되고, 미진이 희대의 살인마에게 붙잡혔다는 심증이 갈수록 마음은 더 절박해진다. 그 근거리에서 엄중호는 돈으로서의 미진을 좇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미진을 좇게 된다. 이것은 엄중호의 시선에 포획 당한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마치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범인을 추격하는 엄중호가 쉬지 않고 달릴 때, 그 마음은 고스란히 관객들에게도 전이된다.

카메라가 점점 원경에서 근경으로 다가가면서 엄중호의 시선이 달라지듯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지나치듯 보았던 인물들을 역전시켜 놓는다. 이 영화 속에는 엄중호, 지영민(하정우), 그리고 경찰, 이렇게 세 부류가 부딪치는데, 초반부 아무런 사전 설명 없이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인상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정반대로 바뀌어 나간다. 한없이 비열해 보였던 엄중호에게서 인간적인 면을 발견하게 되는 반면, 겉보기에 마음 여린 사내로 보이던 지영민은 희대의 살인마로 변신한다. 경찰은 그 직업상 무언가 사건해결에 도움이 되어야 하지만 상황은 거꾸로다. 경찰이 하는 일이란 엄중호가 기껏 잡아놓은 살인마를 풀어주는 것이다.

이 역전된 상황은 저 ‘괴물’이 보여주었던 상황을 반복적으로 그려낸다. 괴물(지영민)이 있고, 괴물에게 딸을 잡혀 애타게 괴물을 추격하는 강두네 가족들(엄중호)이 있는데, 오히려 이를 도와주어야 할 경찰은 강두를 감금해버리는 상황. 따라서 이 유사한 구조가 말해주는 것은 우리네 사회가 가진 문제의 본질은 늘 같다는 것이다. 무능한 정부, 그 정부에 의해 만들어진 괴물, 그리고 그 괴물과 정부 양쪽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는 서민이 구조의 본질이다.

그러나 ‘추격자’가 ‘괴물’과 다른 점은 괴물의 실체가 사람이라는 점이다. 한강변으로 뛰쳐나와 사람들을 습격하는 괴물은 나타나기만 해도 그것이 괴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도심 속, 그 사람들 속에 꼭꼭 숨어있는 지영민이라는 괴물은 찾아내기가 어렵다. 따라서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원경에서 근경으로 지영민을 추격하는 것이고, 그 추격하는 엄중호를 쫓아다니는 것이며, 그 엄중호의 변해가는 마음을 포착하게 되는 것이다.

흔히들 ‘추격자’가 ‘살인의 추억’을 닮았다고 하지만 ‘추격자’는 ‘괴물’의 구조 또한 닮았다. 나홍진 감독이 밝힌 바대로 봉준호 감독의 작품들은 ‘추격자’의 전범이 된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일까. ‘추격자’에 대한 평단과 대중들의 열렬한 호응 또한 ‘살인의 추억’과 ‘괴물’을 닮은 것은. 한국영화가 어렵다는 이 시기에 불쑥 나타나 가슴을 뛰게 만드는 괴물 같은 나홍진 감독의 출현이 반가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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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보4’, 람보는 여전히 유효한가
 
‘람보’는 겉으로 보기엔 미국이 결국 패퇴할 수밖에 없었던 베트남전의 또 다른 트라우마를 다루는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영화의 재미는 그러한 사회적 이슈보다 근육질의 람보 1인이 수백 명에 달하는 적수들과 싸워 하나씩 물리치는 전형적인 액션 속에 있기 때문이다. 즉 베트남전에서 패배했지만 미국을 상징하는 람보는 여전히 건재하고 오히려 더 강해졌다는 메시지가 그 속에는 들어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여기서 람보가 다수의 적들과 싸우는 전술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형지물을 이용해 치고 빠지는 저 베트남의 정글에서 그들이 혹독하게 경험한 그 게릴라 전술. 이 영웅이 보여주는 액션의 재미는 바로 이 게릴라 전술에서 나오는데 이것은 그 때까지의 전형적인 미국 액션영웅의 면모와는 다르다. 미국식의 액션영웅이란 저 ‘코만도’의 아놀드처럼 잔뜩 챙겨간 무기를 신나게 쏘아대는 액션을 선보여왔다.

하지만 그것은 베트남이라는 정글 속에서는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베트남의 정글이란 몸집이 작은 베트남인들에게는 요새처럼 굳건한 방패막이 되어주지만 몸집 큰 미국인들에게는 한 걸음 내딛기 어렵게 만드는 족쇄가 된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의 패인은 전력과 화기 때문이 아니고 바로 그 베트남의 자연환경 때문이다. 종종 전쟁이 생태주의와 맞서게 되는 것은 베트남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미국이 나무를 고사시키기 위해 뿌린 고엽제와, 밀림을 순식간에 불태워버리는 레이팜탄으로 상징화된다. 따라서 베트남전을 소재로 하는 영화 속에서 정글에 대한 미국의 공포는 ‘프레데터’처럼 아무리 화기를 쏟아 부어도 눈에조차 띄지 않는 적으로 그려지곤 한다.

이렇게 보면 람보가 보여주는 게릴라 전술 역시 미국이 가진 베트남에 대한 열등감을 거꾸로 보여주는 것이 아닐 수 없다. 그 덩치가 크면 클수록, 또 힘이 좋으면 좋을수록 그것은 거꾸로 그 열등감의 크기 또한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럼에도 ‘람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떻게든 정리되어야할 베트남전에 대한 정신적 트라우마를 ‘람보’가 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베트남의 힘에 대한 인정이고 그를 통해 더 힘을 얻게 되었다는 람보 신화의 창출이다. 이렇게 미국의 한 시골마을에서 힘을 얻은 람보는 ‘람보2’에 와서 직접 베트남으로 날아가고, ‘람보3’에서는 아프카니스탄으로 달려간다. 미국과 분쟁하는 지역의 해결사가 되어 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람보4’는 어떨까. 람보는 왜 노익장을 이끌고 미얀마의 분쟁지역으로 달려갔을까. 미국은 한때 마약소탕 작전의 일환으로 미얀마 정부를 지원한 일을 빼고는 국제적인 비난 이상으로 미얀마와 대립한 적이 없다. 전쟁조차 치르지 않았으니 어떤 트라우마도 없는 그들이 왜 람보를 그 곳으로 보냈을까. 혹 미얀마의 정글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바로 이 부분에서 ‘람보4’가 기존의 람보 시리즈와는 맥을 달리하는 영화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람보4’에는 람보 특유의 정글 게릴라 액션이 등장하지 않는다. 물론 인질 구출작전에서 정글을 달려나가는 람보의 모습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주화력은 과거 미국 액션 히어로들이 들고 있던 기관포다. 따라서 ‘람보4’의 액션 장면에서는 유독 총알과 폭탄에 맞아 파편처럼 날아가는 신체 절단 장면들이 많이 등장하는데, 단순 과격한 액션은 전쟁의 끔찍함을 보여주긴 하지만 아쉽게도 람보 시리즈 본연의 맛을 상당부분 상쇄시켜버린다.

‘람보4’는 여전히 미국이 어떤 액션 히어로를 희구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더 이상 람보는 아니라는 걸 보여준다. 즉 저 수많은 이라크전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들을 통해 드러나듯이 전쟁은 더 이상 영웅을 탄생시키는 낭만적인 공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첫 번째 피(First blood)로 시작했던 ‘람보’가 이제 마지막 피(Last blood)로 람보를 고향으로 귀환시키는 길, 한때 영웅이었지만 이제는 나이든 람보의 발길이 무겁고 쓸쓸한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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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생순’, 핸드볼을 닮은 아줌마들

그동안 많은 스포츠를 다루는 영화들이 포착한 것은 이 땅의 마이너리티였다. ‘슈퍼스타감사용’의 패전처리투수 감사용이 그렇고, ‘이장호의 외인구단’의 외인구단이 그러하며 ‘말아톤’의 초원이와 ‘맨발의 기봉이’의 기봉이가 그렇다. 최근작으로 다큐멘터리로서 놀라운 흥행을 거둔 ‘비상’의 인천유나이티드FC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소외되거나 주목받지 못한 변방의 인물들이다.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하 우생순)’의 여자 핸드볼팀 역시 이런 견지에서 보면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점이 분명히 있다.

그들은 경기장에서 감사용이나 외인구단처럼 늘 꼴찌를 해왔던, 그래서 한번의 우승을 위해 노력하는 선수들이 아니며, 초원이나 기봉이처럼 장애를 이겨내고 평범함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들이 아니다. 물론 인천유나이티드FC처럼 최하위팀도 아니었다. 그들은 경기장에서만큼은 시작부터 늘 최고였고 이미 올림픽 2연패의 주역들이었다. 이 점은 임순례 감독에게는 여러 모로 의미부여가 가능한 지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것은 늘 평가절하 되어온 여성, 특히 결혼한 아줌마의 이야기이기도 하며, 실력이 아닌 돈의 논리로 인기종목은 더 인기를 끌고 비인기종목은 더 소외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는 이들의 ‘박수 받지 못하는 우승’, ‘우승하자마자 해체되는 팀’에서부터 시작된다. 술자리에서 이제 갈곳이 없어진 팀원들이 신세한탄을 할 때, 최고의 선수였던 미숙(문소리)이 가장 당연한 듯 상황을 받아들이는 점은 아이러니다. 그만큼 미숙은 오랜 핸드볼 경기를 통해 포기를 밥먹듯 살아왔던 셈이다. 하지만 그 포기는 핸드볼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팀은 해체돼도 직원대우를 해준다는 말에 그래도 그게 어디냐며 “정직원이겠죠”하고 미숙이 물었을 때, 그녀는 이미 당연히 비정규직이란 점을 예감하고 있었던 셈이다. 일상으로 돌아간 그들의 삶은 핸드볼과 닮아있다.

경기 때문에 생리 조절을 하기 위해 약을 복용한 탓에 불임이 되어버린 정란(김지영), 일본에서는 잘나가던 감독이지만 국내에 와서는 이혼녀라는 이유로 감독대행에서 경질되고 선수로서 뛰어야 하는 혜경(김정은), 그리고 남편 때문에 빚쟁이에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어 늘 경기장에 아들을 데리고 다녀야 하고 한편으로는 생계를 위해 뛰어야 하는 미숙은 핸드볼 경기 그 자체와 동일한 처지다. 게다가 그들은 핸드볼 팀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다. 이른바 아줌마들이라는 편견, 구시대적 방식을 고수하는 늙다리로 후배들에게나 감독에게서 모두 비아냥을 듣는다.

그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핸드볼이다. 비인기 종목으로서의 핸드볼은 생계를 어렵게 했고, 그럼에도 핸드볼을 떠날 수 없는 삶을 만들었다. 수많은 편견과 무관심 속에서 자학적인 포기가 일상이 된 그들이 다시 그 지긋지긋한 핸드볼 팀으로 모여든 이유는 그들에게 있어 핸드볼만이 그들의 심장을 뜨겁게 해준 진짜 삶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편견 어린 세상과 싸움을 시작한다. 일상 속에서의 남성들과 주목받는 인물들이 그러한 것처럼, 상대는 신체조건이 월등히 좋은 유럽선수들이다. 그들과 대항하기 위해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과학적인 훈련 따위가 아니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경기 속에서 이미 알고 있다. 그 방법은 ‘더 빨리 뛰고 더 많이 뛰는 것’뿐이란 것을.

이미 싸우는 방식도 알고 있고 그 방식으로 이겨본 경험도 있는 최고의 선수들이 다시 모여 고군분투하는 이 영화가 하려는 이야기는 헐리우드 식의 ‘노력하면 된다’는 교훈담이 아니다. 이 영화는 포기에 대한 영화다. 마지막 경기를 앞둔 상황, 늘 걸림돌이던 남편의 음독으로 경기를 포기하고 돌아가려던 미숙이 전화를 한다. “미안한데. 나 포기하지 않을 거야. 그러니까 너도 포기하지마.” 그녀는 오랜 음지 생활 속에서 습관화 되어버린 포기, 희생 같은 것들을 그 순간 뛰어 넘는다. 포기를 넘어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그 순간,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은 도래한다. 그러니 경기의 승패 따위는 이미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감독이 말하는 것처럼 이미 그들은 결과가 어떻게되든 그들 생애 최고의 순간을 보여준 것이다.

임순례 감독의 탁월한 전략은 그들 생애 최고의 순간을 최고의 연출로 보여준다. 자칫 감정 과잉이 될 수도 있었던 영화는 그녀의 전략대로 다큐멘터리적인 차가움을 유지하면서 오히려 영화에 진정성을 부여한다. ‘핸드볼은 팀 플레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 아닌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라는 지칭한 것처럼 은근히 기분 좋은 연대의식을 부추긴다. 막연히 알고 있던 여자 핸드볼선수들에 대한 선입견을 갖고 극장문을 들어선 관객들은 후배선수들과 감독의 시선을 공유하면서 차츰 변모하고, 마지막 순간에 가서는 “내가 대한민국 아줌마들 안 믿으면 누굴 믿어”라고 말하는 감독과 같은 입장이 된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면서 흘러나오는 실제 선수들과 감독의 다큐 영상으로 영화는 현실로 슬금슬금 걸어나온다.

그래서일까. 등장하는 실제 감독이었던 임형철 감독이 당시에 힘겨웠던 그들에 대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억누를 때, 똑같은 감정이 되는 것은. 그 때 당시 인생 최고의 순간을 경험한 감독처럼 그 영화를 보고 일어나는 마음 한 구석이 훈훈해지는 것은. 그리고 뒤늦게 우리네 생애 최고의 순간을 생각해보게 하는 것은. ‘우생순’은 그 성패와 상관없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온 몸을 던져 노력하던 그 순간이 우리 생애의 최고라고 말하는 영화다. 당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느냐고 되묻는 영화다.

귀로 보는 영화 ‘원스’

“때론 ‘음악’이 ‘말’보다 더 큰 감동을 전할 수 있다.”
지난 9월 10개관으로 개봉했던 ‘원스’는 13주차가 되면서 20개관으로 확대 개봉되었고 20만 명의 흥행에 육박하고 있다. 제작비가 1억4천만 원에 불과한 독립영화로 보면 이 영화의 흥행은, 더 많은 물량이 투여되는 기획영화들이 거둔 약 500만 명의 흥행에 버금가는 성공을 이룬 셈이다. 그 성공의 이유는 바로 존 카니 감독의 말과 다르지 않다. ‘원스’는 음악이 우리 인생에 주는 최고의 선물들을, 그 순간들을 86분 짜리 영상에 담아 전하는 음악에 관한, 음악에 의한, 음악의 영화다.

음악의 기적1. 노래의 진심이 다른 마음에 닿는 순간
사람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잘 아는 사람도 아닌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전하는 마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그 마음이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그 순간은 음악이 기적을 만드는 지점이다. ‘원스’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남자는 자신의 상처 입은 마음을 절규하듯 노래한다. 노래란 본디 상처를 어루만지는 자기 위안과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그 노래는 누군가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 그런데 혼자 마음을 다독이던 그 순간, 그 마음의 노래를 알아듣는 사람이 나타난다. 이것은 음악이 우리에게 전하는 기적적인 순간이면서 우리네 인생에서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사랑의 메타포이기도 하다.(OST. Say it to Me Now)

음악의 기적2. 음악이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순간
그렇게 만난 그들은 한 악기점에서 피아노와 기타 선율 속에 노래를 담아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길거리에서 기타 하나 들고 절규하는 가난한 남자와, 피아노가 없어 맘씨 좋은 악기점에 잠깐 들러 피아노로 마음을 위안하던 가난한 여자는 아무런 설명 없이도 음악만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고단한 삶 속에서 그 고단함을 버티게 해주는 것이 다름 아닌 음악이며 악기라는 공감대 때문이다. 가사의 내용을 음미하지 않아도 서로의 목소리와 악기의 선율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영화 속 장면은 감동적이다. 그 노래와 연주가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기 때문이다. 이 기적적인 순간은 음악이 아니라면 영화 한 편을 통해서도 설명되기 어려운 장면이 아닐까. 눈이 아닌 귀로 보는 영화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OST. Falling slowly)

음악의 기적3. 음악으로 마음을 전하다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이 만든 곡을 주고 여자가 거기에 가사를 붙이는 이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백미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곡을 내준다는 것은 어쩌면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되지만, 영화 속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곡을 건넨다. 자신은 도저히 가사를 붙일 수 없을 것 같다며. 하루가 끝나고 다들 잠든 시간에 어두운 불빛에 의지해, 남자가 주고 간 CD플레이어를 들으며 여자는 곡에 가사를 붙인다. 그리고 CD플레이어에 소모된 건전지를 다시 사기 위해 딸의 소중한 저금통을 털고 파자마 차림으로 가게를 찾는 장면은, 그녀의 남편에 대한 마음과 그 마음을 담는 것을 허락한 남자가 주고간 곡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OST. If you want me)

음악의 기적4. 함께 노래하다
남자와 여자가 길거리의 음악가들을 모아 녹음실을 빌려 노래를 CD에 담는 장면은 이제 둘 사이에 흐르는 공감대와 사랑의 노래를 이제 세상을 향해 들려주겠다는 실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시큰둥하던 엔지니어의 귀를 활짝 열게 만들고, 시간이 돈인 녹음실에서의 밤샘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그들의 음악은, 영화 속을 빠져나와 현실에 선 관객들의 마음마저 움직이게 한다. 밤샘 끝에 남자와 여자의 손에 쥐어진 CD는 몇 개에 불과하지만 그 CD에 담겨진 노래는 그들이 함께 노래했던 기적 같은 순간들과 마음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어느 것에도 비교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이로써 그들은 서로 헤어지지만 영원히 음악 속에서 하나가 된다. 이미 마음이 정해졌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언제든 부르면 달려갈 것이라 노래하는 남자처럼. (OST. When Your Mind's Made Up)

현실 속에서 음악이란 때론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도 찾으면 그 마음을 보듬어주는 우리네 삶의 치유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돈도 아니고, 화려한 영상도 아니며, 놀라운 스토리도 아닌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가난한 자들에게 더욱 공평한 음악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가난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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