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시하고, 웃기고, 울리는 몸

‘색즉시공2’가 보여주는 몸은 섹시하다. 볼륨감 넘치는 몸들이 유혹적인 표정과 자세로 관객들을 자극한다. 살과 살이 부딪치고 거기서 토해져 나오는 환희의 비명소리는 관음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하지원이 떠나간 자리에 서게된 송지효의 몸은 귀엽게 톡톡 튀고, 전라연기를 펼친 이화선의 몸은 관능적이다. 전편에 이어 출연한 신이는 거침없는 화장실 유머를 날리며 섹시한 웃음을 유발한다. 때론 상황전개 자체가 지나칠 정도여서 자칫 여성들의 몸을 성적 대상으로 비하했다는 심각한 지적을 받을 만하지만, 영화 속에서 비하되는 건 여성들만이 아니다. 이 영화 속에서 남성들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깨지고 비하되는 존재다. 화장실 유머가 그러하듯이 그 대상에는 성별이 없다. 비하되는 것은 이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청춘의 몸이다.

그러나 ‘색즉시공2’가 몸이 보여주는 섹시함만을 재미로 제공했다면 에로물 그 이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색즉시공2’는 여기에 몸 개그를 접목한다. 주인공인 은식(임창정)과 경아(송지효)가 각각 몸이 강조되는 활동을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작에서 그것이 차력과 에어로빅이었다면 이번에는 K-1과 수영이다. 그들은 대학생이지만 말보다는 몸으로 웃긴다. 은식은 몸이 처할 수 있는 대부분의 굴욕적인 상황들을 보여준다. 그가 늘 반쯤 쳐진 피곤한 눈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몸의 욕구를 억누르려 할 때 웃음은 터져 나온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화장실 유머의 재연에 가까운 섹시한 몸 개그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슬퍼진다. 이것은 마치 아낌없이 망가지며 몸 개그의 진수를 보여주던 개그맨이 어느 순간 눈물을 보일 때 그 강도가 더 높아지는 것과 같다. 은식의 몸 개그는 사실 뭐하나 가진 것 없고 오로지 몸뚱어리 하나뿐인 미래가 불투명한 청춘의 몸부림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멜로로 빠진다. 전작이었던 1탄보다는 그래도 덜 신파적인 2탄의 멜로지만 여전히 맨 몸 하나로 세상과 겨루는 건 슬프다. 이것은 저 ‘바보들의 행진’의 병태에서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청춘들의 아픔이다.

웃기면서도 울리는 이 청춘영화를 통해서 임창정은 제 몸에 맞는 옷을 찾아 입은 듯하다. 임창정의 연기는 종종 이 웃음과 눈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부분에서 빛이 난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를 영화화한 ‘비트’에서 환규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 임창정의 연기는 몸 개그와 눈물을 혼합한 그 지점에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너무 진지하거나 너무 가벼운 역할 속에서는 그의 진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색즉시공2’에서의 은식은 그런 면에서 임창정의 연기결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역할로 보인다.

‘색즉시공2’는 몸이 보여줄 수 있는 세 가지를 보여주는 영화로 적당히 섹시하고, 적당히 웃기며, 적당히 슬프다. 특별한 기대감을 갖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기대 없이 본다면 확실한 재미를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네 몸이 보여주는 세 가지 양태를 통해 청춘의 한 때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뜻밖의 수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음악... 진심이 닿지 않을 곳은 없다

제작비 1억4천만 원에 촬영기간은 고작 2주, 게다가 남녀 주연배우는 연기경험 전무의 뮤지션들로 만들어진 독립영화 ‘원스’. 작은 몸집(?) 때문에 미국에서도 2개관에서만 개봉됐던 이 영화는 80일 만에 140여 개 관에서 볼 수 있는 초대박 영화가 되었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 10개관에서 개봉했던 영화는 현재 16개관으로 늘어났고 지금까지 독립영화로서는 좀체 거두기 힘든 16만여 명의 관객을 끌어 모았다. 도대체 그 흥행의 이유는 무엇일까. 스토리? 캐릭터? 아니면 연출?

가난한 영화 ‘원스’가 성공한 이유
‘원스’는 거의 스토리가 없는 영화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남자와 그의 음악을 알아차린 여자가 만나고 서로 음악을 나누면서 사랑을 키우다가 이별한다는 흔하디 흔한 이야기다. 드라마틱한 인물들의 만남이나 구성도 없고 캐릭터를 살리기 위한 시퀀스나 극적 상황도 없다. 게다가 카메라는 어떠한 연출의 묘도 살리지 않으며 그저 묵묵히 이 두 남녀를 따라다니기만 한다. 이것을 극영화라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이 영화의 진짜 흥행 이유는 무엇일까.

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깔린 음악을 지목한다. 노래가 너무 좋아서 듣다보면 눈물이 날 지경이란다. 영화를 봤던 이들이 서둘러 음반가게로 달려가 OST를 사는 바람에 이 영화의 음반은 지금까지 2만5천여 장에 달하는 유례 없는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영화의 주연남녀가 유명한 인디밴드 ‘더 프레임즈’의 보컬이자 기타리스트인 글렌 한사드와, 작사가이자 작곡가인 마르게타 이글로바라는 점은 분명 이 영화의 성공에 훌륭한 영화음악이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단지 그것뿐일까. 영화를 보러간 관객들의 마음을 단지 음악 하나로 사로잡았다는 것은 어딘지 부족해 보인다.

‘원스’, 영화와 음악의 진심이 보이는 영화
‘원스’는 진심 하나로 승부한 영화다. 그 진심은 음악에 대한 진심이기도 하고 영화에 대한 진심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은 연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진짜 마음을 담아 노래하고 생활한다. 카메라는 연출이란 화장을 덕지덕지 하기보다는 그저 진정성 하나로 이들을 담아낸다. ‘원스’는 진정한 음악을 하는 가난한 예술가의 진심을 담는다.

상심으로 절망적인 남자는 거리에서 자신의 마음을 담아 노래하고, 여자는 그 마음을 알아차린다. 가난한 삶 속에서 음악은 그들에게 구원이자 유일한 행복이자 소통의 창이 된다. 가난한 여자가 가끔 들러 피아노를 치곤 하던 악기가게에서 남자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남자가 만든 곡에 가사를 붙이는 담담한 장면이 감동적인 것은 그네들의 진심이 관객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영화의 진심이기도 하다. 몇 백 억의 돈을 들여 만들어진 블록버스터가 수백 개의 극장을 잡고 상영되는 현실 속에서 가난한 영화의 선택은 화려한 연출이나 멋진 배우, 기상천외한 스토리가 아닌 영화에 대한 진심 하나였다. 따라서 가난하지만 영화에 대한 진지한 눈 하나로 통할 것이라는 믿음은 영화에 다큐멘터리 같은 성격을 갖게 만들었다.

‘원스’가 우리 가요계, 영화계에 시사하는 점
진심을 담아 성공을 거둔 ‘원스’는 불황의 늪에 빠진 작금의 우리 가요계와 영화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가요계는 불황의 원인으로 수많은 마케팅 분석 자료들을 쏟아내고 있다. 불법 다운로드되는 시장상황과, 디지털 음원을 갖고 있는 이동통신사, 유통사의 문제, 상업적으로만 무장한 기획사 등등 이 자료들의 분석은 틀린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마케팅적인 분석들은 또한 ‘누구 탓’을 지목하기 위한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정작 자신들은 음악에 대한 애정을 저 ‘원스’만큼 가지고 있는지 반문하고 싶다.

작금의 가요계는 음악에 대한 애정과 절실함보다, 마케팅 분석에 따르면 기본을 할 수 있다는 상업적 성공에 더 관심이 있는 건 아닐까. 대자본이 문화를 좌지우지하는 상황 속에서 정해진 안무에 맞춰 인형처럼 춤을 춰대는 상품화된 가수들만 양산되고, 설 무대가 없어진 노래하는 가수들은 급기야 개그를 해야하는 현실이 그걸 말해준다.

이것은 비단 가요계만의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영화계가 쏟아내는 엄청난 기획작품들이 감독의 진심을 전하기보다는 몇 백 개의 개봉관을 잡았는지, 또 몇 백만 명의 관객이 들었는지에 더 관심을 보이는 것도 가요계의 현실과 마찬가지다. 감독을 자신의 작품세계를 구축하고 관객들과 나누는 작가로 보지 않고, 기획된 작품의 공장장으로 만들어버린 대자본이 오히려 영화계의 불황을 낳은 것은 아닐까.

음악이든 영화든 그것을 만드는 사람이 작품이 아닌 상품을 만들 때, 그걸 향유하던 문화인들은 구매자로 전락한다. 문화를 향유하려는 대중을 구매자로 만들어버리는 현실 속에서 대중들은 짜 맞춘 성공방정식 속의 기획상품들에 질려있다. 가요계와 영화계는 왜 저 ‘원스’의 성공이 보여주는 음악과 영화 자체가 가진 진심의 힘을 믿지 못하는 것일까. 영화든 음악이든 진심의 힘이 닿지 않을 곳은 없다는 것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본 ‘불한당들’과 독립영화의 가능성

다음은 서울의 한 귀퉁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서울독립영화제 단편 경쟁 부문에 출품된 장훈 감독의 ‘불한당들’이란 영화의 장면들. 윤성호 감독(‘은하해방전선’의 그 윤성호 감독이다)은 안산공단에서 살아가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인터뷰한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 감독의 카메라가 갑자기 이들을 도시의 한 주점으로 불러들이면서 이 페이크 다큐 형식의 영화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된다.

월드컵의 열기로 가득한 그 곳에는 왠지 인종적인 편견이 담배연기처럼 자욱하고, 급기야 화장실에 간 한 베트남 노동자와 시비가 붙은 사내는 그걸 말리려는 이 다큐멘터리 감독의 팔뚝을 물어뜯는다. 황당한 것은 사내를 비롯해 주점 안의 한국인들이 모두 좀비로 돌변하는 것. 외국인 노동자들은 이 광기의 한국인 좀비들을 BB탄이 아닌 은단을 넣은 장난감 총을 쏘면서 탈출한다.

우리나라에 팽배한 집단적 광기를 월드컵의 이상 열기와 외국인 노동자 문제에서 포착하면서 좀비영화라는 참신한 틀로 가져온 이 영화는 재치 있는 위트와 유머가 잘 버무러진 수작. ‘서울독립영화제2007’의 ‘다른 영화는 가능하다’라는 슬로건과 잘 어울리는 독립영화다.

모든 영화들이 저 월드컵 열기의 광기처럼 똑같은 영화의 틀 속에서 극장에 걸려질 때, 독립영화들은 안산공단 같은 좁은 독립영화전용관에서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꿈꾸며 찾아온 외국인 노동자처럼 가난을 자양분 삼아 반짝거려왔다. 가끔씩 “여기엔 왜 왔냐”는 틀에 박힌 질문들을 갖고 오는 다큐PD들처럼 “왜 이런 영화를 만드느냐”는 생뚱맞은 질문을 받기도 하면서.

그러니까 기존 장르와 문법에 익숙해 좀체 ‘다른 피부색의 영화’에 알레르기 반응을 갖고 있는 나 자신이 사실은 불한당인 셈이다. 몇 백 만이 들었다는 수치에 떼를 지어 다니며 그 숫자를 더해주고 있을 때, 저 한 구석에서는 이 좀비들을 피해 숨어 있던 ‘다른 영화’들. 하지만 그들은 그저 피해 다니는 존재가 아니라 좀비들과 맞서는 존재다. 좀비들에게는 반대로 불한당 같은 존재다. 독립영화란 실로 ‘다른 영화’라는 BB탄으로 기존 영화문법에 익숙해져버린 두개골을 기분 좋게 날려버리는 영화가 아닐까.

월드컵 광기의 밤이 끝난 새벽. 겨우 살아남은 이 노동자들이 텅 빈 광화문 네거리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마지막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마치 생계라는 죽음의 문턱을 넘으며 독립영화라는 한 가지로 버텨온 감독들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관객을 찾는 것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관습적인 틀에 박혀 무언가 신선한 충격을 원한다면 기꺼이 저들이 쏘는 유쾌한 BB탄에 머리를 내줄 일이다. 서울독립영화제는 이 달 30일까지 중앙시네마 인디스페이스에서 열린다.

‘색, 계’와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이 예술적인 이유

‘야한 것’과 ‘예술적인 것’은 상반된 것일까. 왜 똑같이 적나라한 성기 노출을 해도 어떤 것은 포르노가 되고 어떤 것은 예술이 될까. 그것은 ‘노출을 위한 노출’인가 아니면 ‘작품의 통일성 속에서 반드시 드러나야 하는 노출’인가의 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이안 감독의 ‘색, 계’와 ‘실낙원’의 작가 와타나베 준이치의 동명의 소설을 영화화한 ‘사랑의 유형지’는 분명 야하긴 하지만 후자에 속할 것이다. 이 두 영화는 정말 야하다. 예술적으로.

‘색, 계’의 노출, 합일될 수 없는 육체의 경계를 그리다
아무리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에 빛난다 해도, 또한 이안 감독의 작품이라 해도, ‘색, 계’의 무삭제 개봉은 지금까지의 우리네 상황을 두고볼 때 파격적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가위질 없이 제대로 볼 수 있게된 건 정말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색, 계’는 노출 신을 잘라내면 이해할 수 없는 영화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살과 살의 부딪침만으로 가장 적확하게 표현될 수 있는 이 영화는 그 교접의 욕망을 나타내는 ‘색’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인간이란 존재의 ‘계’를 그리고 있다.

영화가 그리고 있는 것은 인간을 둘러싼 수많은 ‘경계들’이다. 그것은 크게는 일본과 중국이라는 나라 사이의 경계이기도 하고, 홍콩이라는 동서양 문화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 배경으로 제시되는 경계 속에서 왕치아즈(탕웨이)와 이(양조위)는 스파이와 스파이가 제거해야할 남자로서 마주 서게 된다. 왕치아즈는 그 남자와 마주하기 위해 수많은 자신 속의 경계를 넘어선다. 정조를 버리고 막부인이란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의 경계를 넘은 왕치아즈는 자꾸만 이에게 빠져들면서 자기존재의 경계에서 서성댄다. 그러니 이 경계의 최전선은 왕치아즈와 이가 교접하지만 하나가 될 수 없는 살의 경계이다. 이로써 ‘색, 계’의 노출은 가장 파격적이면서도 가장 주제를 압축하는 예술로 승화된다.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  사회적 규범을 넘는 사랑을 그리다
‘사랑의 유형지’는 여러 모로 와타나베 준이치의 ‘실락원’을 닮았다. 사회적 규범을 넘어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져드는 불륜남녀는 급기야 사랑의 파국으로 치닫는다. “날 사랑한다면 날 죽여줘요”라고 말하는 후유카(테라지마 시노부)는 결국 그녀를 사랑하는 키쿠지(토요카와 에츠시)의 손에 웃으며 죽음을 맞게된다. 영화는 이미 사회적 규범을 넘어 저질러진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랑과 그것을 법이라는 잣대로 난자해버리는 현실을 병치시킨다. 살인자로 기소된 소설가인 키쿠지는 후유카와의 불꽃같은 사랑을 문학적인 틀로 설명하지만 법은 끔찍할 정도로 그 사랑을 더러운 불륜과 살인으로 몰고 간다.

이미 벌어진 살인사건 후 키쿠지의 조서와 회고담으로 구성된 영화는 사회적 규범은 물론이고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사랑의 힘을 그린다. 따라서 사회적 잣대와 치열한 대결구도를 갖는 영화는 그 반대급부로서 거침없고 열정적으로 사랑하는 두 남녀를 세운다. 이들의 안타까운 살들의 부딪침은 결국 이 사회 속에서 이루어지지 못할 사랑의 끝이 죽음임을 암시한다. 결국 죽음으로서 사랑을 얻은 후유카는 그 어느 것으로도 막을 수 없는 인간의 위대한 사랑을 그려낸다. ‘사랑의 유형지’의 정사 신은 절정과 죽음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인간의 조건을 상징적으로 담는다.

노출은 그것이 예술적인 맥락 속에서 보여질 때 가장 파격적이면서 효과적인 메시지 전달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인간의 몸이란 그저 생식과 정욕만을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한 사회와 긴밀하게 연관된 인간의 안타까운 존재까지 담고 있기 때문이다. 똑같이 노출된 맨살이라 해도 어떤 경우 절망적이고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몸이라는 유한한 틀이 가진 비극성 때문이다. 몸은 슬프고 그 안에 대부분의 철학적이고 사회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것이 ‘색, 계’와 ‘사랑의 유형지’의 노출이 야하면서도 예술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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