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의 기술’로 전설의 협상가가 되어 돌아온 이제훈

협상의 기술

배우의 자질 중 목소리가 가진 지분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 보여지는 게 직업인 배우인지라 비주얼이 가장 중요할 거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배우는 보여지는 것만으로는 그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보는 이들을 그 역할에 몰입하게 만들어야 하고 그가 하는 말과 행동에 설득되게 해야 한다. 여기서 진짜 중요해지는 건 목소리다. 중저음의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은 똑같은 대사도 달리 들리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제훈은 바로 그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가 매력적인 배우가 아닐 수 없다. 그의 목소리를 듣다보면 뭐든 설득될 것 같은 신뢰감이 느껴진다. 

 

최근 드라마 ‘협상의 기술’은 그래서 이제훈이라는 배우가 가진 이 신뢰감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M&A 전문가로서 전설의 협상가로 불리는 윤주노라는 인물이 그가 맡은 역할이다. 그는 위기에 처한 산인그룹을 회생시키기 위해 돌아온 M&A 팀장으로 ‘백사’라 불린다. 하얀 머리 때문에 붙은 이름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행동하기 전에 ‘백 번 생각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별명이다. 그는 과거 함께 일했던 오순영(김대명) 변호사와 탁월한 암산 능력을 가진 곽민정(안현호) 그리고 신입 인턴이지만 학창시절 주식 투자 동아리 회장까지 했을 정도로 나름의 능력을 갖춘 최진수(차강윤)로 팀을 꾸려 본격적인 M&A에 들어간다.

 

협상가의 첫 번째 덕목은 어떤 상황에서도 속내를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인지 윤주노는 거의 표정이 없고 말하는 톤도 거의 변화가 없다. 협상이 마무리되어 계약을 하는 당일에 갑자기 틀어진 계약 취소 상황에서도 그는 감정을 좀체 드러내지 않을 정도로 차분하다. 문제가 생기면 일단 그 문제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곰곰이 그 해결책부터 차근차근 찾아나가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일견 망한 것 같은 협상에서도 그는 막판에 상황을 뒤집는 놀라운 결과들을 만들어낸다. 협상가의 두 번째 덕목은 냉철하면서도 담대한 대응이다. 제 아무리 아픈 제 살이라고 해도 결과를 도출해내기 위해서는 과감하게 도려내는 차분하고도 대담한 선택이 요구된다. 그는 산인그룹의 중심이 건설업이라는 걸 알면서도, 바로 그 건설을 먼저 M&A 하겠다고 선언한다. 파는 물건은 사는 이들도 그 가치를 인정해야 제값을 받을 수 있다는 걸 냉정하게 판단한 결과다. 그리고 이 윤주노가 보여주는 협상가의 세 번째 덕목은 비즈니스 그 이면에 사람을 본다는 점이다. 윤주노는 이커머스에 진출하기 위해 택배왕을 만든 차차게임즈라는 게임회사를 인수하는 과정에서 이 자질을 발휘한다. 모두가 비즈니스에 집중할 때 그는 그 게임 개발자가 왜 그런 게임을 만들게 되었는가 하는 그 마음을 들여다봄으로써 끝끝내 그 회사를 인수하는 결과를 도출해낸다. 

 

이제훈은 이 윤주노라는 협상가의 캐릭터를 구축해내기 위해 이 세 가지 덕목을 드러내는 연기요소들을 보여준다. 어떤 상황에서도 바위처럼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모습과, 모두가 반대하는 상황 속에서도 과감하게 나서서 그들을 하나하나 설득해가는 모습 그리고 차가운 모습 이면에 슬쩍 슬쩍 드러나는 따뜻한 인간미가 그것이다. 이런 요소들은 이제훈이 지금껏 해왔던 연기 필모를 들여다 보면 그 다양한 얼굴들 속에 이미 들어 있었던 것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이를 테면 영화 ‘건축학 개론’의 그 순하고 순수한 청년의 미소나, 드라마 ‘시그널’에서의 절박한 모습, 영화 ‘박열’의 무정부주의자가 보여주는 자유로움, ‘아이캔스피크’의 공무원 역할로 보여준 반듯함, 그리고 드라마 ‘모범택시’의 장르화된 액션 히어로의 모습과 ‘무브 투 헤븐’의 따뜻한 인간애, 게다가 ‘수사반장 1958’에서의 활극 히어로 같은 다채로운 역할들 속의 얼굴들이 그것이다. 앳된 얼굴이지만 벌써 마흔의 나이에 연기경력만 20년에 육박하는 이 배우는 그간 참 다양한 역할들을 통해 성장해오면서 이제는 여러 면들을 자유자재로 꺼내 쓸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 

 

그런데 이런 다양한 면모들을 하나로 꿰어주는 데는 앞서 말했던 이제훈의 차분하고도 진중한 목소리가 중요한 몫을 했다. 물론 거기에는 매 역할을 분석하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한 연습과 노력이 전제된 것이지만, 이제훈의 목소리는 그 노력들을 보다 효과적으로 만드는 힘을 발휘했다. 예를 들어 ‘시그널’처럼 무전기를 통해 과거와 현재가 연결되는 판타지 설정이 들어있는데, 이제훈의 진실된 느낌의 목소리는 어찌 보면 믿기 힘들어지는 이 판타지조차 믿게 만드는 힘이 되기도 했다. 또 ‘모범택시’처럼 판타지적 인물을 장르적으로 해석한 캐릭터에 특유의 현실감이 부여된 것 역시 그의 진중한 목소리가 주는 신뢰감이 큰 역할을 했다. 

 

‘협상의 기술’은 냉정함과 따뜻함의 양면을 담은 드라마다. 즉 냉정함이란 협상으로 대변되는 비즈니스의 세계를 말한다. 실로 ‘협상의 기술’에서는 같은 회사의 동료들마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배신을 저지르는 정치싸움 같은 것들이 펼쳐지는 냉정 그 이상의 비정한 세계를 그리고 있다. 하지만 진짜 협상에 이르는 힘은 그 속내를 먼저 들키면 안되는 냉정한 세계 속에서도 상대의 마음을 애써 읽어내려는 따뜻함에서 나온다는 걸 이 작품은 보여준다. 무표정한 얼굴 사이사이로 조금씩 드러나는 마음들은 그의 협상력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말해준다. 

 

연기도 일종의 협상이지 않을까 싶다. 믿고 싶어하지 않는 관객과 시청자들을 앞에 두고 믿고 싶게 만드는 협상의 과정이 그것이다. 무표정할 때는 일견 차갑게 보이는 이제훈의 얼굴은 그 무표정을 거두고 살짝 미소 지을 때 보는 이들을 설레게 만들고, 숨겼던 감정을 드러낼 때 더 강력한 폭발력을 갖는다. 특히 차분하고 진중한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 그 역할이 무엇이든 우리는 이 배우에게 설득된다. 이것이 이제 20년에 다다른 연기 경력을 통해 이제훈이 갖게 된 연기 협상력이다. (글:국방일보, 사진:JTBC)

“네 덕에 나도 많이 배운다.” 김형주 ‘승부’

승부

늘 이기기만 하던 세계 최고의 국수 조훈현(이병헌). 그가 호랑이 새끼를 키웠다.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기재를 보이는 이창호(김강훈, 유아인)를 거둬 제자로 키운 것. 문제는 너무나 뛰어난 기재를 갖고 있어 제자의 성장이 순식간에 이뤄졌다는 것이고, 그래서 제자를 키운 스승이 도전을 받는 상황을 맞게 됐다는 것이다. 영화 ‘승부’는 바로 이 조훈현과 이창호의 드라마틱한 사제대결을 통해 진정한 승부의 세계가 무엇인가를 그린 작품이다. 

 

사실 영화는 실화 자체가 가진 힘에 상당부분 기대고 있다. 조훈현에게 배웠지만 결국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내 스승을 이겨버린 이창호의 등장은 당시 바둑계에 충격 그 자체였다. 1990년 벌어진 최고위전을 시작으로 이창호는 스승의 타이틀을 하나하나 빼앗았고 조훈현의 시대는 저무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절치부심해 연구에 연구를 거듭한 조훈현 9단은 91년 이창호와 치러진 대국에서 명승부를 펼치며 이기는 모습을 보여줬다. 

 

바둑에 대한 영화지만, 바둑을 몰라도 될 정도로, 사제지간이라 남다를 수밖에 없는 승부에 집중한다. 이긴 제자는 마음껏 즐거워하지 못하고, 진 스승은 좌절하면서도 그런 제자를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네 덕에 나도 많이 배운다”며 자신 역시 “언제든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인정하는 조훈현은 제자에게조차 배울 수 있다는 ‘패자의 품격’을 보여준다. 그는 “창호가 그랬듯이 이제 제가 창호한테 도전하겠다”고 말하는 스승이자 패자다. ‘제자는 스승을 이기는 것만이 참된 보답’이라고 조훈현은 늘 말했다고 한다. 조훈현은 승자도 언젠가는 패자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중요한 건 패자가 됐을 때 보여주는 품격이다. 불복을 모르는 우리의 현 정치가 한 수 배워야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글:동아일보, 사진:영화 '승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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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싹’의 가족 시대극은 KBS의 가족극과 뭐가 다를까

폭싹 속았수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만일 넷플릭스에서 현재 방영되고 있는 <폭싹 속았수다>가 KBS에서 방영됐다면 어땠을까. 상상만으로도 시청률과 화제성이 폭발했을 결과들이 떠오른다. 물론 방송의 결과란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일이므로, 상상으로 이런 예상을 해보는 일이 별 의미 없을 수는 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상상까지 동원해 보는 건, 그간 KBS가 유일하게 지속해온 가족드라마가 갈수록 고꾸라지고 시청층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이 안타까워서다. 

 

<폭싹 속았수다>를 써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기 시작한 임상춘 작가는 사실상 KBS가 낳은 작가다. MBC 단막극 <내 인생의 혹>과 SBS 단막극 <도도하라>를 쓰며 2014년에 데뷔했지만 본격 데뷔작이라 여겨지는 건 차영훈 감독과 함께했던 KBS 4부작 <백희가 돌아왔다>다. 그 후 <쌈, 마이웨이>로 대중들의 주목을 받은 임상춘 작가는 차영훈 감독과 함께 <동백꽃 필 무렵>으로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2019년 시청률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던 그 시기에도 <동백꽃 필 무렵>은 무려 23.8% 최고시청률을 기록하며 세간에 화제작으로 떠올랐다. 

 

이제 KBS가 끌어안기에는 너무 사이즈가 커진 임상춘 작가가 올해 새로 가져온 <폭싹 속았수다>는 그래서 넷플릭스에서 방영됐다. 600억짜리 대작이고 스타 드라마 감독인 김원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다. 캐스팅도 아이유에 박보검은 물론이고 문소리, 박해준에 나문희, 김용림, 염혜란, 정해균, 오정세, 엄지원, 백지원 등등 한 마디로 미친 존재감 아닌 연기자들이 없다. 사이즈가 커졌다는 말이 딱 실감나는 작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작품의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임상춘 작가의 세계가 얼마나 가족 서사를 깊이있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실감하게 된다. 게다가 <폭싹 속았수다>는 그 가족 서사에 6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시대의 흐름을 애순의 어머니 광례(염혜란), 애순(아이유, 문소리), 그리고 애순의 딸 금명(아이유)으로 이어지는 3대의 이야기로 풀었다. 시대극의 요소가 들어간 것이다. 

 

시대극과 가족드라마는 사실 과거 지상파 드라마의 대표적인 장르들이었다. 하지만 가족에서 개인 서사에 더 관심을 갖게 된 시대의 변화와, 미디어의 변화, 지상파의 제작환경 변화 등과 맞물려 이들 장르들은 서서히 힘을 잃었던 게 사실이다. 여전히 KBS만 가족드라마(주말드라마)와 시대극(<오아시스>나 <오월의 청춘> 같은)을 시도하고 있지만 반향만 예전만 못하다. 

 

그런데 그 이유가 그저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바뀐 시대에 맞는 시대극과 가족서사가 뒷받침해주지 못했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이다. <폭싹 속았수다>를 보면 우리 시대에 맞는 가족서사와 시대극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고, 또 그 힘 또한 강력할 수 있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실제로 넷플릭스는 <폭싹 속았수다>를 통해 중장년 구독자층의 시청 시간이 늘어났다고 한다. 이제 구독료만이 아니라 광고 수익을 목표로도 하고 있는 넷플릭스로서는 이러한 시청 세대의 폭이 늘고 있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KBS 같은 지상파가 가족서사와 시대극 같은 어찌 보면 공영방송에 어울리면서도 지금의 트렌드에 맞는 서사들을 발굴해내는 일이 OTT를 흉내내 장르물에 뛰어든다거나 하는 것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는 걸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중들이 가족드라마를 점점 외면하는 건, 가족서사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져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여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가족서사만을 적당한 클리셰로 범벅해 보여주는 가족드라마들에 질렸기 때문이다. 얼마든지 새롭고 참신하며 감동도 주는 가족서사가 가능할 수 있다는 걸 <폭싹 속았수다>의 임상춘 작가는 일련의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런 작가와 서사를 발굴하려는 노력, 어쩌면 여기에 현 지상파들이 가진 딜레마를 풀 열쇠가 있지 않을까. (사진:넷플릭스)

임상춘 작가의 고단한 서민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 대한 국내외 반응이 뜨겁다. 또한 작품을 쓴 임상춘 작가에 대한 관심도 커지고 있다. <쌈마이웨이>부터 <동백꽃 필 무렵>을 거쳐 <폭싹 속았수다>로 이어지는 임상춘의 세계는 일관되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폭싹 속았수다

흙수저 인생들의 고군분투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아이유)은 제주 해녀의 딸로 자라났다. 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셨고 엄마는 새아버지와 살면서 애순을 시댁에서 살게 했다. 그나마 그 집이 먹고 살기 때문이었는데, 그 곳에 얹혀 살던 애순은 어린 나이에도 사실상 식모 역할을 했다. 그 사실을 알고는 엄마가 애순을 다시 데려가지만 그 엄마도 스물 아홉의 나이에 생을 등졌다. 결국 열 살 먹은 애순은 새아버지의 아이들을 돌보며 소처럼 밭을 일궈 양배추를 팔아 생계를 이었다. 본래 지긋지긋한 섬을 떠나 육지로 가서 대학도 가고 시인이 되는 게 꿈이었지만 고단한 삶은 그걸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단한 삶을 계속 버텨낼 수 있게 해주는 건 늘 애순 옆에 딱 달라붙어 그 고단한 삶을 위로해주는 관식(박보검) 같은 따뜻한 인물이 있어서다. 섬놈에게는 절대 시집가지 않겠다고 했지만 애순은 관식과 결혼하고 드디어 행복을 느낀다. 시인이 되는 꿈은 접었지만 너무나 예쁜 아이들을 보며 애순은 후회하지 않는다. 관식 또한 마찬가지다. 운동선수가 되는 게 꿈이었지만, 그 무쇠 같은 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기꺼이 헌신한다. 물론 아이가 사고로 죽는 결코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겪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들은 서로를 의지해가며 살아간다. 

 

<폭싹 속았수다>는 바로 이런 지극히 평범해보이는 흙수저 인생들의 삶을 깊이 들여다본다. 애순과 관식 같은 인물은 사실상 6,70년대를 살았던 부모 세대들의 쉽지만은 않았던 삶을 대변한다. 물론 제주라는 환경이 다르지만, 그 격동의 세월에 어떻게든 가난을 벗어나 살아보겠다고 했던 그 세대의 마음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가진 것 없어 살 집 하나 얻는 것조차 몸이 부서지게 일을 해야 가능했지만, 서로를 응원하고 지켜봐주는 가족이 있어 그 난관들을 뚫고 나왔던 그들의 삶을 촘촘하게 그려낸다. 지나고 나서 보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고 나아가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는 현재가 그들의 고군분투에 의해 가능했다는 것을 드라마는 자연스럽게 담아낸다. 대단한 입지전적인 인물의 성공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비범한 이들의 출세담도 아닌 평범한 흙수저 인생들의 고군분투가 <폭싹 속았수다>에서는 너무나 드라마틱한 인생 모험담으로 그려진다. 때론 쨍쨍 내리쬐는 햇볕처럼 아팠지만 때론 따뜻한 봄날의 행복도 겹쳐져 있던 인생 모험담. 

 

소외된 이들을 바라보는 임상춘 작가의 따뜻한 시선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과 관식이라는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위대하게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임상춘 작가의 일관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는 단초다. <쌈마이웨이>에서 그 시선은 스펙이 없어 변방으로 밀려난 채 살아가는 흙수저 청춘들을 들여다 봤다. 아버지가 흙수저면 그 삶이 대물림되는 청춘들이 마주한 세상의 벽은 결코 넘기 쉽지 않은 것이었지만, 그 변방에서 이들은 새로운 길을 열어간다. 태권도 국가대표를 꿈꾸던 고동만(박서준)은 격투기 선수로 나서고, 뉴스데스크 앵커를 꿈꾸지만 현실은 백화점 인포 데스크에서 일하는 최애라(김지원)는 방송국 대신 지방행사를 뛰고 격투기 전문 아나운서가 된다. 즉 <쌈마이웨이>는 스펙이 없다는 이유로 ‘쌈마이’ 취급 하는 세상 속에서 이 건강한 청춘들이 서로를 의지해가며 ‘마이웨이’를 걸어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소외된 이들이 살아내고 버텨내는 생활 생존서사는 임상춘 작가의 세계가 일관되게 관통하고 있는 것들이다. 그래서 임상춘 작가의 세계는 늘 중심이 아닌 변방이 배경이다. <쌈마이웨이>가 지방 소도시에서 살아가는 청춘들을 그렸다면, <동백꽃 필 무렵>은 옹산이라는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그 곳에 어린 아들과 함께 들어와 까멜리아라는 술집을 운영하는 동백(공효진)의 삶을 그렸다. 외지인인데다, 예쁜 얼굴에 술집 운영을 하는 미혼모라는 동백의 배경은 편견을 만들고 마을 사람들의 곱지 않은 시선을 받는다. 하지만 그 와중에 촌므파탈 용식(강하늘)의 동백에 대한 순애보는 그녀가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된다. 마을 사람들도 차츰 동백을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용식과의 달달한 로맨스가 이어진다. 연쇄살인범 까불이의 등장으로 동네는 흉흉해지지만 그럼에도 마을 사람들의 연대는 이 위기들을 극복하는 힘이 된다. 가장 힘겨운 시기를 거쳐야 비로소 꽃이 피어난다고 하던가. <동백꽃 필 무렵>은 동백 같은 편견으로 고통받은 모든 이들에게 그 힘겨움이 ‘꽃이 피어나기 위한’ 고난이라고 위로해주는 드라마다. 

 

전 세계가 주목할 독보적인 임상춘 작가의 세계

<폭싹 속았수다>는 이러한 임상춘 작가의 세계가 훨씬 깊어졌다는 걸 실감하게 한다. 제주 해녀의 삶을 토속적이면서도 거친 제주 방언의 특색을 더해 그 삶의 신산함을 드러내는 대목은 ‘문학적인’ 느낌마저 준다. 대사의 표현에서도 이런 면모들이 드러난다. “그러게 복어를 왜 건드려? 독으로 버티고 사는 걸.” 같은 대사로 애순의 엄마 광례(염혜란)의 삶을 단적으로 표현해낸다거나 “명치에 든 가시 같은 년” 같은 대사로 광례가 애순을 얼마나 애닳게 생각하는가를 표현해내는 점들이 그렇다. 

 

시인을 꿈꿨던 애순이 쓴 시들도 예사롭지 않다. ‘점복 팔아 버는 백환./ 내가 주고 어망 하루를 사고 싶네’ 같은 기막힌 구절이 돋보이는 어린 애순의 시 ‘개점복’이나, 나이 들어 이제 시인의 꿈을 버린 지 오래지만, 백일장에 장사하러 나왔다가 애순이 쓴 ‘추풍’이라는 시도 그렇다. ‘춘풍에 울던 바람/ 여적 소리내 우는 걸,/ 가만히 가심 눌러/ 점잖아라 달래봐도/ 변하느니 달이요./ 마음이야 늙겠는가’ 나이 들어 이제 인생의 가을을 맞이한 애순이 봄날의 그 꿈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 걸 담아낸 이 시에서는 어쩌면 임상춘 작가도 한때 꿈꿨을지 모르는 문학소녀의 모습이 어른거린다. 

 

이번 <폭싹 속았수다>는 넷플릭스를 통해 공개됐다는 점에서도 임상춘 작가에게는 새로운 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간 임상춘 작가는 줄곧 KBS에서 작품을 공개해왔다. 즉 어찌 보면 가장 로컬의 색채가 묻어나는 방송국에서 작품을 해왔던 셈이다. 임상춘 작가 특유의 끈끈한 가족 서사의 매력이 KBS라는 플랫폼과 어울려 <동백꽃 필 무렵> 같은 작품은 최고 시청률 23.8%(닐슨 코리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제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OTT를 통해 공개되는 <폭싹 속았수다>는 어떨까. 가장 로컬적인 콘텐츠가 글로벌할 수 있다는 걸 지금껏 증명해온 넷플릭스에 임상춘의 세계는 확실한 시너지를 내고 있다. 공개 2주차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시리즈 비영어 부문에서 2위에 올랐다. 한국은 물론이고 브라질, 칠레, 멕시코, 터키, 필리핀 베트남을 포함한 총 41개국에서 톱10 리스트에 랭크된 것. 제주를 비롯한 한국의 현대사 같은 낯설 수 있는 로컬 색깔들이 묻어나는 작품이지만, 부모와 자식 관계나 부부 관계 같은 보편적인 인간관계의 서사가 담겨 있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작품이어서다. 

 

특히 소외된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깊이있게 천착함으로써 그 삶을 위대한 모험담처럼 그려내는 임상춘 작가의 세계는 비정한 자본주의의 틀에서 고통받는 많은 이들에게 한바탕 씻김굿 같은 눈물을 통한 거대한 위로가 아닐 수 없다. 세계가 주목할만한 작가의 탄생이다. (글:시사저널, 사진: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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