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치>, 어설픈 CG보다 급선무는

 

<전우치>가 첫 선을 보였다. 전우치라는 새로운 사극의 소재가 갖는 신선함과 차태현이라는 배우가 주는 기대감 때문인지 첫 방 시청률은 좋은 편이다. 단번에 15%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했다. 하지만 시청률과 다르게 반응은 썩 좋은 편이 아니다. 먼저 <전우치>라는 도술을 쓰는 존재를 그려내는데 있어 필수적인 CG가 기대 이하라는 평이다. ‘사극 버전 벡터맨’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전우치'(사진출처:KBS)

물론 CG의 완성도가 떨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액션이 갖는 무게감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CG가 아니라 촬영과 연출의 문제일 수 있고, 또 대본이 가진 장르적인 문제일 수도 있다. 전우치가 도술을 부리는 존재이기 때문에 내놓고 판타지를 보여주는 건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다. CG에 확실히 자신감이 있거나 그만한 투자가 이뤄졌다면 모르겠지만 영화도 아닌 드라마에서 그런 CG는 맞지도 않고 효과도 별로 없다.

 

드라마는 결국 볼거리보다는 스토리와 캐릭터에 천착하는 장르다. 영화 <전우치>가 화려한 CG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신나는 한 판 놀이로 성공할 수 있었다고 해도, 그런 방식이 드라마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드라마는 눈보다는 마음이 움직이게 해야 된다. 게다가 <전우치>는 한 시대의 영웅을 그리는 서사가 아닌가. 그렇다면 대중들이 희구하는 영웅의 요소가 그 안에 들어 있어야 한다. 과연 이 사극의 전우치(차태현)는 우리를 가슴 떨리게 하고 마음 한 구석을 속 시원하게 풀어주는 그런 영웅일까.

 

첫 회에서 보여준 이 영웅에게서는 그런 소명의식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탐관오리들이 학정을 펼친다거나 그래서 억울하게 죽어가는 민초들이 있다거나, 혹은 전쟁이 벌어져 외세가 쳐들어와 온 나라를 쑥대밭을 만들었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썩은 정치적 관료들 때문에 백성들이 피폐한 삶을 산다거나 하는 그런 현실을 끄집어낼 요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대신 전우치의 개인사가 어설픈 CG와 함께 액션으로 보여졌을 뿐이다.

 

율도국에서 사랑했던 무연(유이)이 강림(이희준)에 의해 최면에 빠져버리고 전우치를 죽음으로 내몰았던 사건이 첫 회의 가장 큰 스토리다. 그리고 그렇게 죽어가는 전우치를 살려낸 스승이 조선을 혼란에 빠뜨리려는 강림을 막으라는 말을 남기고 죽음으로써 앞으로 이 사극이 하려는 이야기의 대부분을 해버렸다는 것이다. 전우치는 결국 조선을 넘보는 강림을 제압하고 무연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 안간힘을 쓸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질문은 전우치라는 영웅의 존재의미이기도 하다.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포졸들에게 쫓기다가 숨기 위해 닭으로 변신함으로써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그런 틀에 박힌 도술 시퀀스를 보고 싶은 것이 아니다. 또 <매트릭스>와 <와호장룡>에서 나왔던 몇몇 액션 장면들을 따라하는 걸 보고 싶은 게 아니다. <전우치>라는 고전소설의 주인공에게 지금의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이 현실의 갈증을 빗대어 풀어줄 영웅의 서사다.

 

이제 겨우 첫 발을 디딘 것에 불과하지만 CG보다 더 시급한 것은 이 전우치라는 캐릭터가 어서 빨리 민초들을 구원하는 소명의식을 갖게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놀라운 볼거리로 승부할 것이 아니라면(이것은 전술했듯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지만) 좀 더 명쾌한 대립구도 속에 과거가 아닌 지금 현재 대중들이 갖고 있는 갈증을 사극의 형식으로 담아내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전우치>는 자칫 B급 CG장르에 머물 위험성이 있다.

이런 시청률 추산을 왜 하나

 

불과 2,3년 전과 비교해도 작금의 시청률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이런 변화는 특히 드라마에서 두드러진다. 과거 같으면 기본이 20%에서 시작해 잘된 작품은 4,50%를 넘기기 일쑤였던 사극의 시청률이 대표적이다. <마의> 같은 이병훈 사단의 웰메이드 사극도 겨우 17%의 시청률에 머물러 있다. 종영한 <신의>도 10%대 시청률에 머물렀고 <대풍수> 역시 한 자릿수 시청률이다. 물론 이 작품들은 완성도에 그만한 문제가 있었다고 지적할 수 있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낮은 시청률의 원인이 온전히 작품의 문제만이었을까.

 

'추적자'(사진출처:SBS)

흔히들 사극이 죽었다는 얘기들을 하지만 사실상 죽은 건 드라마 전체의 시청률이다. 일일드라마나 주말드라마를 빼놓고 20%를 넘기는 드라마가 귀하게 되었다. <착한남자>처럼 극성 강하고 완성도도 높은 드라마도 18% 시청률로 종영하는 상황이다. 사극이 죽었다고까지 표현된 데는 과거 높은 시청률을 올렸던 잔상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 낙폭이 상대적으로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일 뿐이란 얘기다.

 

이런 사정은 예능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몇 년 전만 해도 20%를 넘어 30%에 육박하는 예능 프로그램들(<1박2일>이 그랬고 <무한도전>도 그랬다)이 있었지만 지금은 주말 예능에서조차 20%를 넘기는 프로그램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개그콘서트>가 그나마 20%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니 주중 예능 시청률은 더 상황이 안 좋다. 토크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월요일 밤 예능들은 언젠가부터 10% 시청률 기록도 버거운 상태가 되었다. 도대체 왜 이런 시청률 대폭락이 일어난 걸까.

 

시청률이 이렇게 뚝 떨어진 것은 콘텐츠가 질적으로 하락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시청률 산정 방식이 점점 현실성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방송 시청 패턴이 TV 중심에서 인터넷, IPTV, 모바일 등으로 다양화되고 있다는 건 이미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에 속한다. 하지만 지금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이런 변화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AGB닐슨미디어리서치를 예로 들면 현재 시청률 산정은 매일 전국 13개 지역, 3천여 가구를 대상으로 시청률을 산출해낸다고 한다. 각 가구에 설치된 피플미터기(시청률 산출기)를 통해 실시간으로 수치가 집계되는데 이 해당 시간 콘텐츠 자료를 통합하는 방식으로 시청률이 산출되는 것. 물론 과거에는 이런 산정방식이 어느 정도 유효했을지도 모른다. 그 때는 TV 방송을 본다는 것이 브라운관 앞에 앉아있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였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미 인터넷을 통한 다운로드로 방송을 보는 시청층들도 상당히 많아졌고, 시간에 맞춰보기보다는 IPTV를 통해 자유롭게 자기가 보고 싶은 시간에 보는 이들도 많아졌다. 또 최근에는 모바일이 확산되면서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방송을 보는 이들도 상당히 많다. 이렇게 방송을 보는 방법이 다양화되었는데 여전히 오로지 TV에만 맞춰져 있는 시청률 산정은 달라진 시청자의 기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편향적인 시청률은 광고의 잣대가 되기가 어렵다. 실제로 시청률과 광고가 비례적으로 올라가던 시대도 저물고 있다. 즉 시청률이 제아무리 40%를 넘긴다고 해서 광고가 더 많이 붙지 않는다는 것. 또 반대로 시청률이 10%에 머물고 있어도 광고를 완판하는 드라마들이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서 상반기에 방영되었던 <추적자> 같은 경우는 시청률이 10%대에 머물러 있었는데, 종영까지 광고가 완판된 사례다. 이 드라마는 국민드라마라는 칭호까지 받았는데 그것은 시청률은 조금 낮았지만 화제성이 엄청나게 높았기 때문이다. 이제 ‘국민’이라는 수식어의 기준도 시청률에서 화제성으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다.

 

문제는 이러한 시청률 산정 기준이 가져오는 폐해가 적지 않다는 점이다. 지금의 시청률 산정 기준으로는 TV 방송 프로그램을 급격히 노화시킬 수밖에 없다. TV를 통해 보는 시청층이 중장년층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1일 AGB닐슨미디어리서치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10년 사이에 10-30대의 시청률은 절반 이상이 줄었다고 한다. 2002년 13%였던 이들 세대의 평균 시청률이 올해는 5%대에 머물고 있다는 것. 이제 현재의 시청률 산정 기준은 고작 중장년층들의 기호만을 반영하고 있다는 얘기다.

 

이른바 막장드라마라고 불리는(여기에는 젊은 층들의 비아냥이 섞여 있다) 전형적인 과거의 자극적인 코드들을 답습하는 드라마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이러한 시청률 산정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 이들 소위 막장드라마들의 주 시청세대는 중장년층이기 때문이다. 출생의 비밀이나 불치병, 기억상실, 신파 같은 코드들은 중장년층의 향수를 자극하는 아이템들이다. 결국 젊은 세대의 기호를 전혀 반영하지 못하는 현재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방송 콘텐츠가 질적으로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정체되는 현상을 만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것은 한류 콘텐츠의 퇴보로도 이어질 수 있다. 지금 같은 중장년층에 편향된 시청률에 좌지우지되는 방송 환경 속에서 젊은 세대들의 눈에 걸맞는 새로운 시도들이 지속적으로 이뤄질 수 있을까. 회의적이다. 시청률 산정에는 포착되지 않는 화제성 높은 젊은 드라마들을 마니아 드라마로 치부하는 것은 방송 콘텐츠에서 젊은 세대를 소외시키는 행위다. 세상에 마니아 드라마가 어디 있는가. 단지 작금의 시청률 산정이 그 기호를 반영하지 못할 뿐이다.

 

중요한 건 이제 중장년층들조차 이렇게 다양화된 시청패턴에 적응하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들은 여전히 방송을 TV로 보는 것을 편안하게 여기지만, 이미 90년대 인터넷을 경험한 3,40대의 경우 인터넷 시청이나 모바일 시청이 낯선 일이 아니게 되었다. 또 이른바 본방사수라는 실시간 시청보다 자신이 편안한 시간에 보는 ‘다시보기’ 시청 패턴도 점점 늘고 있는 추세다. 결국 지금의 시청률 산정 방식은 중장년층의 기호조차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재의 시청률 산정 기준이 나이든 세대의 기호만을 반영하고, 따라서 그런 방송 프로그램들만 높은 시청률이란 왕관을 쓰고 더 많아지는 것은 자칫 TV콘텐츠의 보수화로 이어질 수 있다. 결국 이렇게 되면 볼 것 없는 젊은 세대들은 TV가 아닌 다른 매체를 통한 콘텐츠를 찾아갈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TV의 사망선고나 다름없다. 지금의 미디어 발달 속도로 볼 때 이런 이탈의 속도 또한 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커다란 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전 세대의 기호를 반영하지 못하고, 광고 산정 기준도 되지 못하며 그저 고정적인 TV 시청층의 취향만을 보여주는 이런 시청률 추산을 왜 하는 걸까. 설마 여기에도 매체를 하나의 정치적인 도구로 바라보는 구태적인 시선이 들어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의 유명무실한 시청률 산정 기준은 빠른 시일 내에 달라져야 한다. IT 강국, 한류를 전면에 내세우는 우리에게 이 두 분야가 합쳐질 수 있는 인프라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니 이제 그 인프라 위에 제대로 거기에 맞는 콘텐츠를 세울 수 있는 새로운 평가방식이 등장해야 한다.

<K팝스타2>, 대중들의 기대 채워준 까닭

 

<K팝스타2>의 첫 무대는 약 1660만 조회수를 기록한 자타공인 유튜브 스타 제니석의 탈락이었다. 지난 시즌1의 top10이 이구동성으로 우승후보로 지목한 인물. 하지만 그녀의 노래에 대해서 박진영은 “노래로는 스킬이나 테크닉이 부족한 게 아니”지만, “자기만의 색깔? 자기 목소리로 무슨 말을 하려는 그 느낌”이 없다고 했다. 그리고 <K팝스타2>가 다른 오디션과 다른 점을 말했다. “노래를 못하더라도 자기만의 목소리로 뭔가를 말하려고 하는 그걸 우리가 보고 나머지는 저희가 힘을 합쳐서 노력해서 만들어가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게 다른 오디션 프로와 다른 점이에요.”

 

'K팝스타'(사진출처:SBS)

양현석 역시 제니석이 노래는 너무 잘하지만 “처음과 중간과 끝이 다 똑같다”며 기승전결이 없어 지루한 것이라고 평했다. 그리고 그 역시 제니석의 노래가 “아마도 유튜브 스타일일지는 모르겠지만 K팝스타는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두 번째 나온 김우진 역시 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경력을 가졌지만 “너무 일관적으로 단순한 창법”이고 “너무 노래를 하려고 하는 꾸밈”이 있으며 심지어 “노래대회를 나가다 보니까 노래대회용 노래를 부르게 된 것 같다”는 혹평을 듣고는 탈락했다.

 

백아연과 비슷한 음색을 가진 문희원, 아델 노래를 부른 한상희, 허스키하고 소울풀한 목소리를 가진 김명주는 모두 지난 시즌 top3(박지민, 이하이, 백아연)와 비교되면서 탈락하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보아는 탈락의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저희가 너무 시즌1 top3와 비교해서 참가자들이 많이 힘들었을 거예요. 그런데 저희가 찾는 건 제2의 박지민, 이하이, 백아연이 아니에요.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고 자기만의 색깔이 있는 그래서 그 색깔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그런 친구들을 찾느라 조금 많이 탈락하신 거 같아요.”

 

<K팝스타2>가 처음 보여준 것은 이 오디션 프로그램이 여타의 오디션과 어떻게 다른가 하는 점이다. 심사위원들이 제니석이 탈락할 때 일관적으로 얘기한 것처럼 <K팝스타>는 가창력만 좋은 가수를 뽑는 오디션이 아니다. 노래는 좀 못해도 자기만의 색깔이 확실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원석을 찾는 게 <K팝스타>만의 다른 점이라는 것. 이것은 작금의 오디션 난립의 환경 속에서 <K팝스타>가 정확히 읽어낸 대중들의 감성이라고 할 수 있다. 대중들은 이제 가창력에 지쳐버렸다. 기성가수들에게도 찾아볼 수 없는 무언가 색다르고 개성적인 자신만의 목소리를 가진 이들을 찾는다는 것. 이것이 바로 대중들이 이제 오디션 프로그램에 원하는 것이라는 걸, <K팝스타2>는 정확히 읽은 것이다.

 

여기에 <K팝스타2>는 시즌1과의 선도 확실히 그어버렸다. 박지민, 이하이, 백아연으로 기억되는 시즌1. 하지만 그들과 비슷한 창법이나 스타일을 가진 참가자들은 모두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심사위원들 역시 시즌1을 경험한 후 시즌2에 대한 기대감이 높아졌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아니 이게 애매한 게 뭐냐면 시즌1때는 그게 충격적이었고 신선했는데 시즌2때는 우리도 눈이 높아져 버리니까 어려워.” 보아가 끝없는 탈락의 연속 속에서 넋두리처럼 던진 이 말 속에는 대중정서와 맞닿는 부분이 있다. 시즌1보다 높아진 눈은 대중들도 마찬가지다. 심사위원과 대중의 눈높이가 맞춰지는 이 부분에서 시즌2에 대한 새로운 기대감이 열린다.

 

그리고 이어서 보여준 무대들은 그 기대감이 어떻게 실제 참가자들을 통해 보여지는가 하는 점들이다. 싸이의 <챔피언>을 독특한 리듬으로 편곡해서 율동까지 섞어 부른 메롱 소녀 최예근, 박진영을 좋아한다는 감정전달이 뛰어난 감성적인 발라드의 최영수, 파워풀한 보이스에 감미로운 목소리까지 겸비한 곰돌이 푸를 닮은 소울 보컬 윤주석, 그리고 마지막으로 첫 방송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부족함이 전혀 없었던 남매 천재 어쿠스틱 듀오 악동뮤지션(이수현, 이찬혁). 특히 노래가 얼마나 유쾌하고 즐거운 것인가를 알려준 악동뮤지션의 자작곡 <다리꼬지마>는 이 오디션 프로그램이 지향하는 바를 정확히 보여주었다.

 

양현석은 악동뮤지션의 노래를 빌어서 이렇게 표현했다. “정형화된 가수들을 대중들도 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난립한 오디션 프로그램들 속에서 오디션 트렌드는 한 물 갔다는 통념을 깨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물론 실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매력과 개성을 먼저 찾는 <K팝스타2>는 그래서 오디션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들의 새로운 기대감을 다시 채워주었다. <K팝스타2>는 확실히 달랐다.

<최후의 제국>이 대선주자들에게 건네는 말

 

도대체 무엇이 우리의 마음을 울렸을까. SBS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 <최후의 제국>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는 단 몇 분도 필요하지 않았다. 남태평양 솔로몬 제도의 아주 작은 섬 아누타에서 촬영을 마치고 떠나는 제작진들을 향해 원주민들이 통곡을 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우리 주변의 누가 죽음을 맞이한다고 해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도시인들에게 그저 이별이 아쉬워 통곡하는 원주민들의 모습은 당혹스러움을 넘어 충격에 가까웠다.

 

'최후의 제국'(사진출처:SBS)

아마도 제작진도, 그 장면을 보는 시청자들과 똑같은 마음이었을 게다. 그들은 처음에는 멍해졌다가 차츰 그 통곡이 그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진심이라는 것을 느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을 것이다. 어느새 그 울림이 닿은 제작진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고, 그 장면을 본 시청자도 마찬가지의 감동을 느끼게 되었다. 어떤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특별한 말이 오고갔던 것도 아닌 그저 진심을 담은 마음 하나만으로 그들은 뜨거운 인간애를 보여주었다.

 

<최후의 제국>. 영어 제목은 <The Last Capitalism>으로 ‘최후의 자본주의’를 뜻한다. 즉 자본주의의 위기를 다루는 이 다큐멘터리는 왜 그 멀고도 먼 외딴 섬 아누타까지 찾아갔을까. 그것은 아누타 섬이 자본주의에 의해 돈으로 모든 가치가 평가되는 세상과 정반대되는 가치를 보여주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제작진 앞에서 펑펑 눈물을 흘리는 그들이 보여준 것은 같은 인간으로서의 깊은 공감이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그 공감의 가치는 서로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존의 가치로 이어지고 있었다.

 

돈이면 안 되는 것이 없는 자본주의의 세계는 아누타 섬과는 정반대의 디스토피아를 보여준다. 돈으로 가치 매겨지는 세상은 자신의 몸매 관리를 위해 대리 수유모를 사는 부자 엄마와 당장 벌이를 하기 위해 자신의 자식 대신 남의 대리 수유모가 되는 가난한 엄마를 이어주었다. 급격한 자본의 물결이 몰아닥쳐 신흥 부자계급이 생겨난 데다, 멜라민 분유 파동으로 모유에 대한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중국의 새로운 풍경이다. <최후의 제국>은 이 풍경에 대해 묻는다. 과연 돈은 모성도 대체할 수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미국 오하이오주의 한 고등학교는 수업에 빠지지 않고 숙제를 잘 해온 학생들에게 돈을 준다. 제 아무리 청소년 범죄를 줄이고 고등학교 졸업장을 주려는 학교의 고육지책이라고는 해도 이런 교육은 결국 학생들에게 돈이 최고라는 인식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이 가치의 본말이 전도된 교육은 과연 이 학생들이 살아갈 세상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그 결과는 세계 제일의 경제대국이라는 미국이 34개 OECD 국가 중 빈곤율 4위라는 충격적인 보고에서 드러난다. 다큐멘터리는 플로리다주의 모텔에서 살아가는 굶는 아이들을 조명하며 이 아이들이 왜 이런 불행에 처하게 됐는지를 꼬집는다.

 

아마도 그토록 멀리 떨어진 아누타 같은 외딴 섬까지 찾아가서야 비로소 자본이 아닌 인간을 찾아냈다는 것은 그 자체로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계의 불행을 보여주는 대목일 것이다. 1%의 부와 99%의 가난. 미국에서 월가를 점령했던 그 유명한 “우리가 99%다”라는 구호가 생각나는 지점이다. 이 전 지구적인 위기 상황을 만들어낸 자본주의의 불편한 풍경들은 우리로 하여금 경쟁과 이기심보다 중요한 공존의 가치를 떠올리게 만든다. 돈이라는 번쩍거리는 괴물에 가려 바라보지 않던 그 불편한 진실을 우리 눈앞에 들춰냄으로써 급기야 공감하게 만드는 <최후의 제국>은 그래서 그 어떤 거창한 정상들의 회의나 연설보다 더 우리를 울리는 힘을 발휘한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대한민국이라는 우리가 현재 당면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하다. 양극화가 극에 달하고 있는 지금, 저 미국의 풍경이 어찌 우리와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대선에 즈음하여 모든 대선 주자들이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지만 이것이 단순한 수사에 머무르면 안 될 것이다. <최후의 제국>은 따라서 우리 사회에서 제대로 된 가치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게 만들고 또 실천에 옮기게 만드는 기폭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돈에 미친 세상에 던지는 다큐의 일침. 이것이 <최후의 제국>이라는 명품다큐가 보여주는 가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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