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바라보는 두 시선, <무신> vs <닥터 진>

 

사극의 시간은 어디로 흐르는 걸까. MBC 주말극으로 나란히 방영되고 있는 <무신>과 <닥터 진>은 같은 사극이라도 역사를 바라보는 완전히 다른 시각을 갖고 있다. <무신>은 고려 무신 정권 속에서 노예로 전락했다가 후에는 최고의 위치에까지 오르는 김준이라는 역사 속 실존인물을 다루고 있다. 초반의 격구 에피소드에서는 '글래디에이터'류의 스토리가 들어가면서 퓨전사극적인 요소를 보이지만 이 사극은 지극히 정통 사극의 궤를 따라가고 있다.

 

 

'닥터 진'(사진출처:MBC)

실제 역사의 인물인데다 중간 중간에는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는 내레이션까지. 그래서 정통사극의 대가 이환경 작가는 "퓨전사극과는 전혀 다른 감동"을 약속하기도 했다. 그만큼 역사적 고증에 철저하고 또한 역사적 사실에 기대는 바가 크다는 얘기다. <무신>은 이미 퓨전화 되어버린 사극의 흐름을 어쩌면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셈이다. 역사로의 회귀.

 

반면 <닥터 진>은 <무신>과는 전혀 다른 역사에 대한 시각을 갖고 있다. 사실 사극이라고 말하기도 애매한 이 작품은 타임리프라는 시간의 벽을 뛰어넘는 이야기 설정이 들어가 있다. 현대를 살아가던 천재적인 신경외과의 진혁(송승헌)이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른 채 조선시대로 떨어지게 된다. 조악한 조선시대의 의료환경 속에서 죽어가는 민초들을 살려내기 위해 동분서주하면서 진혁은 진정한 인술의 길을 가게 된다는 얘기다.

 

흥미로운 건 <닥터 진>에 실제 역사적 인물인 흥선대원군 이하응(이범수)이 등장한다는 사실이다. 진혁은 이하응에 의해 목숨을 빚지기도 하는데, 마침 이하응의 아들이 괴질에 걸려 쓰러지게 되자 진혁은 그를 구하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 아들이 바로 훗날 즉위한 고종이다. 즉 이 작품은 현재의 주인공이 역사 바깥에서 그것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 속으로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역사를 만들어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어찌 보면 허구가 역사를 재구성하고 있다는 것.

 

<무신>과 <닥터 진>이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이처럼 그 거리가 멀다. <무신>이 여전히 역사라는 시간과 공간의 굴레에 붙잡혀 있다면, <닥터 진>은 그 벽을 뛰어넘으려고 한다. 즉 타임리프가 적용된 <닥터 진> 같은 사극은 과거를 운명적으로 따르기보다는 현재적 시각으로 과거를 바꿔보려는 과감한 시도를 하고 있다. 즉 현재로 넘어온 주인공이 과거의 문제를 현재를 통해 해결하려는 시도를 보이거나(<옥탑방 왕세자>가 그렇다), 과거로 간 주인공이 거기서 겪는 일들을 통해 현재를 다시 보는 관점을 갖는 것이다.

 

역사란 알다시피 민족주의와 국가주의 시대에 가장 중요한 학문으로 다뤄졌다. 그 나라의 역사는 그 민족이 가진 저력과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하지만 이제 점점 민족주의나 국가주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 우리가 대하고 있는 위기는 국가나 민족 간의 문제보다 더 크다.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들이란 얘기다. 이러한 글로벌한 문제의식은 로컬한 역사주의가 가진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다.

 

<무신>을 보면서 몽골에 대항한 우리 민족의 끈질긴 모습에 자긍심을 느끼다가도 자칫 민족주의에 너무 매몰되는 것 같은 그 느낌이 퇴행적인 인상을 남기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닥터 진> 같은 사극은 그런 점에서 역사주의라는 특수성을 따르기보다는 인간을 바라보는 보편성에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것은 각자 판단할 일이다.

 

하지만 <무신> 같은 실제 역사의 한 부분을 극화한 작품에서조차 역사 그 자체보다 보편성을 가진 이야기에 대한 욕구가 묻어나는 건 현재 역사가 서 있는 위치를 잘 말해준다. 어쨌든 본래 역사를 다루던 사극이라는 장르가 역사주의를 넘어서 이젠 보편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변화다. <닥터 진>은 그 변화의 가장 앞에 서 있는 사극이고 <무신>은 어쩌면 그 변화의 끝단에서 여전히 변화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한 사극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어떤 사극이 더 당신의 마음을 끄는가. 이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면 자신이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박>, 당장의 웃음보다 중요한 것은

 

'이게 진짜 뭐하는 건지...' <1박2일>이 인제로 떠난 예능인 단합대회에서 코끼리코를 열 번 돌고 바늘에 실을 꿰는 예능올림픽(?)을 이수근이 할 때 깔리는 자막. '예능인 단합대회'라는 기치를 내건 것처럼, <1박2일>은 아예 대놓고 몸 개그로 웃음을 만들어보겠다 작정했다. '이게 뭐하는 건지' 하는 자막에는 웃음을 주기 위해 이런 짓까지 하고 있다는 '노력'의 의미와, 이런 짓까지 해야 한다는 '자조'의 의미가 섞여 있다.

 

 

'1박2일'(사진출처:KBS)

실제로 이런 대놓고 하는 몸 개그가 웃기긴 하다. 뭐 그다지 생각할 필요도 없고 그저 무너지는 출연자들을 보며 웃기만 하면 되니까. 어지럼증에 몸을 비틀대면서도 열심히 바늘을 꿰려는 이수근의 모습이나, 아예 바늘을 찾지 못하는 김종민의 모습은 우습다. 뒤로 삼단 뛰기, 손에 신발을 꿰고 손으로 제기를 차면서 발을 동시에 들어 올리는 예능 제기차기도 모두 재밌다. 하지만 어딘지 부족하다. 한참 웃긴 웃었는데 별로 남지가 않는다.

 

의미를 얘기하는 게 아니다. 그 웃음이 맥락이 되어 그 날을 기억하게 하는 하나의 스토리라인이 없다는 얘기고, 또 그런 스토리 속에서 새롭게 발견되는 캐릭터가 없다는 얘기다. 캐릭터와 스토리가 생기지 않는 게임은 반복되면 질릴 수밖에 없다. 당장의 웃음의 허기는 채울 수 있지만, 앞으로의 지속적인 웃음 텃밭을 만드는 데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많은 게임의 덫에 걸려버린 리얼 버라이어티쇼들이 바로 당장의 웃음의 허기를 채우려다 결국 무너져 내렸다. '패밀리가 떴다'는 그 형식의 특징 상 게임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와중에도 시즌1이 꽤 괜찮은 흐름을 가질 수 있었던 건 유재석이라는 발군의 캐릭터 발굴 MC가 있었기 때문이다. 시즌2에 와서 그 중심이 사라져버리자 캐릭터도 보이지 않게 되었고, 그러자 스토리 없는 게임만 반복됐다. 결국 종영되고 말았다.

 

'천하무적 야구단'은 괜찮은 소재의 리얼 버라이어티쇼였다. 초반 캐릭터가 잡혀나가는 단계는 그 어느 예능 프로그램보다 그 뛰어난 성장 가능성을 보였다. 하지만 중반 이후부터 야구경기에 몰두하기 시작하면서 스토리가 점점 사라졌다. 결국 예상보다 일찍 종영되었다. '청춘불패'는 시즌1에서 꽤 괜찮은 호응을 얻어냈다. 한 시골마을에 정착하면서 그 마을 사람들과 어우러져가는 스토리가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즌2에 와서 점점 추락하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아예 시골 이야기는 없고 시골 게임 버라이어티가 되어가는 중이다. 위험한 상황이다. '청춘불패' 시즌2는 재미뿐만 아니라 명분도 잃었다.

 

그렇다면 <1박2일> 시즌1의 게임은 뭐가 달랐을까. 먼저 시즌1은 게임을 하는 이유부터가 자연스러운 스토리 위에 놓여 지기 마련이었다. 그저 자 이제부터 게임합시다, 하고 모여 게임을 하는 인위적인 상황이 아니고, 먼저 게임을 하게 되는 동기를 만들어낸다. 강호동이 나영석 PD와 팽팽한 대결구도를 갖는 것은 이 스토리를 좀 더 쉽게 하기 위함이다. 제작진의 압제(?)에 한번 이겨보자는 연기자들의 의기투합이 이어지고 나면 게임은 그 맥락 위에서 보이게 된다.

 

경기 자체나 결과가 뭐가 중요할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경기의 흐름에 따라 생겨나는 캐릭터와 이야기들이다. 족구 경기를 하나 해도(심지어 그게 저질이라도) 시즌1에서 더 주목도가 높았던 건 단지 복불복이란 설정 때문이 아니다. 그 게임을 하면서 계속 제작진과 연기자들 사이에 쌓여진 스토리가 전제되기 때문에 게임은 하면 할수록 재미가 있을 수 있었다. 이것은 시즌2의 '예능인 단합대회'가 보여준 게임과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게임 하나를 하더라도 인위적인 느낌이 아닌 자연스러운 흐름을 타려면 누군가 이를 촉발할 수 있는 구심점이 있어야 한다. 이른바 '악역'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1박2일> 시즌1에서는 강호동이 그 역할을 했고, 또 때로는 나영석 PD가 그 역할을 했다. 강호동이 짜증을 내고, 나영석 PD가 얄미울 정도로 "땡!"을 외칠 때, 게임은 그저 게임이 아니라 그 안에 스토리를 갖게 되었다.

 

결국 <1박2일> 시즌2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이런 악역을 자처할 캐릭터다. 그것이 연기자들이든 아니면 제작진이든 누군가 나서는 사람이 있어야 미션 구조로 되어 있는 이 버라이어티쇼의 이야기 흐름이 자연스러워진다. 이게 없으면 그저 해야 하는 게임을 하는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또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 자체의 결과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과정에서 끊임없이 캐릭터를 뽑아내는 자세가 요구된다. 예능인 단합대회에서 연기자와 제작진이 한 족구대회가 밋밋했던 것은 이 자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족구대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건 경기를 한 연기자나 제작진보다 오히려 본래 심판 캐릭터(?)를 갖고 있던 조명감독이었다.

 

<1박2일>은 시즌2에 들어와 안타깝게도 많은 외적인 악재를 겪었다. 그러면서 시청률도 뚝 떨어졌다. 최재형 PD는 인터뷰를 통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피력했다. 그간은 뭐든 시도하는데 주저함이 있었지만, 이제는 뭐든 할 수 있지 않느냐는 것. 하지만 뭐든 하는 것이 게임 같은 보다 편한 웃음 만들기가 돼서는 안 된다. <1박2일>만이 가진 여행의 묘미를 제대로 가져올 수 있는 스토리를 발굴해야 되고, 게임에서도 게임 자체보다는 캐릭터에 몰두해야 한다. 당장의 웃음보다 장기적인 관점의 이야기 흐름을 만들어야 <1박2일>은 본래의 궤도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추적자>에 이어 <유령>까지, 사회극 선전의 이유

 

'네 손이 일 년 전에 지은 죄를 기억해.'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의 음악이 장중하게 흘러나오면서 모니터 화면에 써지는 글귀, 그리고 살인, 현장 온 벽면을 가득 메운 저주의 글자들... 사이버 범죄를 소재로 다루는 <유령>의 이 장면들은 이 드라마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을 해준다. <유령>은 사이버 범죄에 대한 복수극이다.

 

 

'유령'(사진출처:SBS)

일상적으로 올리는 댓글 하나, 추측에 의한 근거 없는 소문의 양산, 끝없는 루머로 행해지는 스토킹에 가까운 집단행동들... 사실 사이버 세상에서 매일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 많은 일들이 어떤 실제 결과로 이어지는가에 대해 사람들은 둔감하다. "설마 악플했다고 사람을 죽입니까?" 한영석(권해효) 경사의 이 대사에는 악플이라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들어가 있다.

 

'신효정 놀이 동영상'이 말해주듯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누군가에게는 놀이가 된다. 이것은 또 거꾸로 누군가의 놀이(댓글 같은)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신효정에게 진실을 요구한다'는 이른바 신진요 카페는 우리가 타블로 사건에서 봤던 '타진요'의 드라마적 재현이다. 제 아무리 사실과 그 증거자료를 내놓아도 그것이 오히려 끊임없는 루머로 재생산되며 피해자를 고통스럽게 했던 그 사건.

 

<유령>의 가해자, 팬텀(Phantom)은 이 상황을 거꾸로 되돌려 놓는다. 손가락 몇 번 놀리면 누군가에게 저주를 퍼부을 수 있는 노트북이 거꾸로 그 당사자에게 저주를 쏟아 붓는다. '네 손이 일 년 전에 지은 죄를 기억해', '죽어' 같은 글귀들이 모니터에 떠오르면서 자신의 저주가 똑같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공포의 경험, 그리고 살인. 살인 현장 벽에 써진 댓글들은 마치 이 죽어가는 가해자(누군가를 죽게 한)이자 피해자(살해당한)의 상황조차 비웃곤 하는 인터넷 상의 댓글들을 닮아 있다.

 

<유령>의 팬텀이 저지르고 있는 빗나간 복수극은 그런 의미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역할 바꾸기를 드라마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 누군가는 스스로 목숨을 버리고 마는 그런 일들은 사실 우리네 현실에서 이미 여러 번 목도되었다. 하지만 그 사건을 접하면서도 '뭐 그렇다고 목숨을 버려?'하고 또 다른 의구심을 품었다면, <유령>은 그 의구심에 뒤통수를 치는 드라마다. 저들의 사건이자 저들의 불행으로 여겨졌던 것들을 우리들의 사건이자 불행으로 되돌리는 작업.

 

흥미로운 건 본격적인 사회적 코드를 보여주면서 <유령>에 대한 관심도 급상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 2회 동안 수목극 꼴찌의 시청률을 기록하던 <유령>은 3회만에 <아이두 아이두>를 넘어섰다. 이것은 저 <추적자>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극이 갖는 힘이다. <추적자>가 우리네 정의의 현실을 끄집어냄으로써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면, <유령> 역시 우리 사회가 가진 디지털 세상의 뒤안길을 아프게 들여다봄으로써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사회극이 선전하는 건, 아프게도 우리가 처한 현실이 그리 녹록치 않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이두 아이두>나 <신사의 품격> 같은 달달한 멜로들이 고개 숙이고 있는 건 사회극이 제시하는 현실 앞에 이런 멜로들은 너무나 비현실적인 세계처럼 여겨지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쨌든 <추적자>에 이어 <유령>까지 이어지는 사회극에 대한 깊은 대중들의 관심은 이제 드라마에 있어서도 허황된 이야기보다는 좀 더 사회현실을 함의할 수 있는 다양한 소재를 요구하고 있다는 얘기이기도 할 것이다.

<추적자>, <부러진 화살>에 <도가니>를 더한 듯

 

마치 <부러진 화살>과 <도가니>를 합쳐놓은 듯한 공분이다. 수차례 자동차로 깔아뭉개져 살해당한 수정(이해인)의 범인 PK준(이용우)의 재판에서 수정은 오히려 상습적으로 마약을 복용했다는 오명이 덧붙여졌고, PK준은 단지 사고였지만 그래도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는 식의 거짓 발언으로 양식 있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PK준을 추종하는 팬들은 그의 진술에 눈물까지 흘렸고,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수정은 악플로 두 번 죽음을 당했다.

 

 

'추적자'(사진출처:SBS)

수정을 위해 뭐든 돕겠다던 학교는 아마도 상부로부터의 압력을 받은 듯, 수정의 탄원서를 거부했다. 수정의 엄마 송미연(김도연) 앞에서 곤혹스러운 얼굴로 서 있는 교사에게 뒤편에 선 교장이 고개를 가로젓는 모습은 저 <도가니>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만들었고, 법정에서 진실이 유린되고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이 기막힌 장면은 저 <부러진 화살>을 떠올리게 했다.

 

인권은 사라지고 권력이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세상에서 힘없는 억울한 서민들을 바라보는 건 힘겨운 일이다. 자신이 대선에 나가기 위해 이 사건을 덮으려는 인면수심의 강동윤 의원(김상중)이 마치 세상을 구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노숙자들 앞에 나서는 모습이나, 복직 투쟁을 위한 촛불 시위를 하는 자리에 나서 "권력이 생기면 단 한 줄의 법 조항만 바뀌면 모두 복직할 수 있다"며 기부쇼를 통해 후원금을 모으는 모습은 보는 이를 답답하게 한다.

 

"저의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라는 그 말에 속아 심지어 피해자의 아버지인 백홍석(손현주)마저 믿고 싶어지는 현실이라니. 인면수심의 가해자들에 의해 딸을 저세상으로 보낸 그들은 이제 그 가해자들을 보호하려는 권력자들로 인해 두 번째 가해를 당하는 중이다. 눈앞에서 자신의 딸을 죽인 PK준이 병보석으로 풀려나는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떨까. 억울하고 안타까운 마음에 자꾸만 눈앞에 죽은 딸이 보이는 엄마의 마음은 또 어떻고.

 

자신의 출마가 서민들을 위함이라고 강변하는 자들은 사실 권력욕에만 미쳐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이고, 서민들은 너무나 각박하고 힘겨운 현실에 그만 그들의 달콤한 거짓말을 믿고 싶어진다. "대한민국 정치는 국민들에게 거짓말만 해왔습니다. 저 강동윤이는 진실만을 말하겠습니다."라고 외치는 정치인의 모습이 어딘지 낯설지 않다. 진심을 알아달라고 딸의 일기장을 잔뜩 가져와 법관에게 읽어달라고 간청하는 엄마의 모습이나 죽은 딸의 억울함을 벗기 위해서라면 뭐든 하겠다는 아버지의 결연한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하지만 현실은 그 아버지가 무릎이 꿇고 도움을 청한 그 의원이 사실은 가해자라는 사실이다.

 

<도가니>와 <부러진 화살>이 만든 신드롬은 한편으론 씁쓸한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추적자>는 그 현실을 낱낱이 우리 눈앞에 펼쳐 보여준다. 거기에는 대선 때만 반짝 서민의 일꾼이 되는 정치인들이 있고, 자신의 권력을 위해서는 눈앞의 진실을 호도하는 법조인들이 있다. 또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들에게 무릎을 꿇고 간절하게 도움을 청하는 우리들의 자화상도 들어 있다.

 

<추적자>는 결국 사회가 보호하지 못하는 인권을 지키기 위해 한 아버지의 부성애가 거대권력과 대결하는 드라마다. 사망신고서에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아버지'라고 쓰며 애써 법을 믿었던 한 아버지가 진실이 유린되는 현실을 보고 분노하고 스스로 주먹을 들게 되는 것. 아마도 여기에 공감하지 않을 이는 없을 것이다. 학교가 외면한 탄원서를 아이들이 모아 법정에 보내지만 바로 기각되는 현실, 가해자가 본인도 괴로워하는 피해자로 둔갑하는 법정,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누군가를 지지해보지만 그가 사실은 이 힘겨운 상황을 만든 주범이라는 안타까운 현실...

 

"내가 우리 수정이가 어떤 딸인지 어떤 아인지 이 세상 사람들 다 알도록 내가 할게." 딸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 때문에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으로 쓰러져 있는 아내에게 이렇게 다짐하는 아버지 백홍석은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가난한 아버지들의 마음을 대변한다. 드라마의 내용이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드는 <추적자>. 그래서 이 드라마만의 강력한 힘이 만들어지는 곳은 드라마 속보다는 오히려 현실이다. 답답하고 억울한 현실이 <추적자>라는 드라마에 더 집중하게 하는 것. 이것이 이 드라마를 그저 드라마로 보기 어렵게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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