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 외주화 검토 후폭풍이 말해주는 것

 

공식적인 발표도 아니다. 아마도 회의석상에서 잠깐 나온 얘기였을 것이다. 하지만 MBC 김재철 사장이 <무한도전>을 외주화하는 것을 검토할 수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대중들은 공분했다. 외주화를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무한도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무려 19주째 결방을 참으며 파업에 들어간 <무한도전>을 지지하는 대중들의 그 마음. 그 마음이 간단히 무시되었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사실 <무한도전>의 외주화는 현실성이 거의 없다. 물론 물리적으로는 가능하다. 김태호 PD 대신 대체인력을 투입하고, 아마도 김태호 PD가 없는 <무한도전>에 참여하지 않을 MC들을 역시 대체인력으로 채우고 대충 도전이랍시고 흉내 내서 무늬만 <무한도전>으로 꾸려서 방영한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게 어디 <무한도전>인가. 그건 아무 것도 아닌 프로그램일 뿐이다.

 

이것은 그간 <무한도전>이 어떻게 성장해왔는가를 생각해보면 간단히 이해되는 일이다. <무한도전>은 대중들과 함께 커왔다. MC들도 <무한도전>을 통해 성장했고, 프로그램도 같은 성장곡선을 그렸다. '대한민국 평균 이하'였던 그들은 이제 자타가 공인하는 국내의 최고 연예인들이 되었다.

 

그만한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능이라는 틀을 깨고 나와 끝없이 이어진 도전들. 단 몇 분 간의 실력을 보이기 위해 엄청나게 해온 보이지 않는 노력과 준비들. 그들은 이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전혀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댄스 스포츠를 했고 봅슬레이를 했으며 심지어 프로레슬링을 했다. 때론 다치기도 하고 너무 힘겨워 눈물이 쏟아지면서도 애써 웃으며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왜? 그것이 시청자들과의 약속이기 때문이었다. 시청자들은 도전함으로써 조금씩 성장해가는 그들을 보며 위안을 받았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지지는 스스로에 대한 지지이기도 했다. 도전하면 반드시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만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 적어도 그 진심은 전해진다는 전언. <무한도전>의 도전정신은 어찌 보면 그저 포기하며 살아갈 수도 있었던 대중들을 각성시킨 면도 적지 않다.

 

<무한도전>이 걸어온 이 길은 어쩌면 MBC가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기 위해 걸어왔던 길과도 다르지 않다. 갖은 외압 속에서도 꿋꿋이 할 말을 하는 MBC의 도전정신에 대해 많은 대중들이 지지했고 그래서 MBC는 성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작금의 MBC를 보라. 과연 대중들이 지지할 수 있을 만큼 제대로 된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외주로 대충 채워지고 있는 프로그램들에 대해 대중들은 지지를 거두고 있다. <무한도전> 외주화에 대한 생각은 MBC가 현재 걷고 있는 길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무한도전>은 따라서 일개 프로그램 하나가 아니라, 대중들과의 약속이고 대중들이 함께 참여하고 움직이는 유기체 같은 존재다. <무한도전>이 뭔가 도전하면, 대중들은 거기에 맞춰 호응해준다. 심지어 제작진들이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조차 예리한 대중들은 발견하고 부여하며, 프로그램은 그것들을 모두 끌어안는 열린 자세를 유지한다. 이 대중과의 공조는 <무한도전>이 프로그램 그 이상인 이유다.

 

<무한도전>은 방송사가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적어도 그 방송사가 대중들과의 공감을 생각하고 있다면 그래서도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은 사실 <무한도전>만의 일이 아니다. 그 어떤 프로그램이라도 방송사가 대중들을 무시하고 휘두르기 시작한다면 그 방송사는 존재 의미를 잃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한도전>의 파업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는 그래서 거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대중들이 MBC의 파업을 생각하는 것과 맞닿아 있다.

 

<무한도전>에 대한 외주화 발언만으로도 일파만파의 공분이 일어나는 것은, 작금의 MBC를 바라보는 대중들의 정서가 무엇인가를 잘 말해준다. 대중들의 지지가 없는 <무한도전>이 <무한도전>이 아니듯이, 대중들의 공감 없는 방송사도 방송사로서의 기능을 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한도전> 외주화 발언의 후폭풍은 현재 외주화되고 있는 MBC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 되고 있다.

<나가수2>의 박명수, <불후2>의 전현무

 

<나는 가수다2>의 박명수와 <불후의 명곡2>의 전현무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 기성가수들이 하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MC라는 것이고, 안타깝게도 어느 정도 정착되어가고 있는 이 두 프로그램에서 유일하게 비판받는 이들이라는 점이다. 또한 내외적인 문제들과 겹쳐서 심지어 '위기'라는 얘기가 솔솔 흘러나오고 있다는 점도 비슷한 점이다. 박명수는 그의 캐릭터의 근간을 세워주고 있는 <무한도전>이 장기 결방하면서 힘겨워졌고, 전현무는 초반 밉상 캐릭터가 캐릭터에 머물지 않고 비호감으로 돌아서고 있다는데서 어려워졌다.

 

 

'나는 가수다'(사진출처:MBC)

박명수와 전현무는 모두 네거티브 이미지를 쓰는 예능인들이다. 박명수는 특유의 버럭 캐릭터를 구축하고 나이나 성별을 넘어서 전천후로 공격하는 특유의 개그 스타일을 갖고 있다. 전현무 역시 깐족을 넘어서 밉상 캐릭터를 통해 이른바 '미운 짓'으로 웃음을 주는 스타일이다. 네거티브 방식을 쓰는 개그는 그것이 캐릭터로 포장될 때 용인되기 마련이다. 그것이 실제 진심이라면(진심처럼 느껴진다면) 그 개그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박명수의 이 네거티브를 중화시켜주고 그것을 캐릭터화 해주는 존재는 유재석이다. 그래서 박명수는 유재석과 함께 콤비를 맞출 때 최고의 기량을 보여준다. <무한도전>은 그런 점에서 박명수에게는 캐릭터 이미지의 텃밭과 같은 곳이다, 이 곳에서 생겨난 캐릭터들이 있기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에서의 공격형 개그 역시 그의 독특한 캐릭터로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최근 <무한도전> 장기 결방은 박명수의 이런 중화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버렸다.

 

그런 그에게 <나는 가수다2>의 MC는 더 무거운 짐을 얹은 셈이다. 박명수가 버럭 캐릭터를 유지하려면 그것을 상대방이 받아주어야 하는데, 알다시피 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가수들은 그런 여유가 없다. 그들이 오로지 생각하는 건 최고의 무대를 선사하기 위해 자신을 준비시키는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박명수가 툭툭 던지는 공격형 멘트는 호응하기 어려운 구석이 있다. 그렇게 뚝뚝 멘트가 끊기기 시작하면 토크는 썰렁해진다. 당연히 진행은 덜컥거릴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한다. 박명수의 이미지가 배려 없는 캐릭터가 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이라는 특성 상 가수들이 최대의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당연할 텐데, 박명수가 툭툭 던지는 멘트들은 몰입을 방해하는 인상을 준다(실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시청자들에게 느껴진다는 얘기다). 결국 최고의 무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에서 박명수는 도움을 주기보다는 방해꾼의 이미지가 생길 수밖에 없다.

 

이런 방해꾼의 이미지는 <불후의 명곡2>의 전현무도 마찬가지다. 김구라가 잠정 은퇴한 그 빈 자리를 채우게 된 전현무는 출연한 가수들이나 음악과는 상관없는 엉뚱한 이야기를 툭툭 던지거나, 난데없는 자신의 개인기를 선보임으로써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을 연출한다. 즉 이 대기실에서 주목되어야 할 이들은 가수들이어야 하는데, 전현무 스스로 자신을 주목시켜려 노력하는 인상을 만든다는 점이다.

 

이것은 김구라가 하는 방식과는 정반대라는 점에서 전현무에게 더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진다. 김구라는 토크쇼 같은 데서 개인기를 선보이는 MC들(여기에는 박명수도 들어있다)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는 지 모르겠다"고 비판한 적이 있다. MC는 오로지 게스트와의 관계에서만 존재해야지 스스로 자신을 부각시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당연한 얘기다. 음악 프로그램에서는 가수들이 주인공이다. 그들을 돋보이게 하고 그날의 노래를 더 기대하게 하는 방식으로 토크가 이어져야지 당장 개인기로 자신이 웃기려는 건 프로그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나는 가수다2>의 박명수나 <불후의 명곡2>의 전현무, 두 사람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말하는 입이 아니라 듣는 귀다. 자신의 멘트를 조금 더 하려는 욕심보다 게스트를 돋보이게 해주는 배려의 마음이 더 필요하다. 그리고 이것은 이 두 프로그램에서만의 일이 아닐 것이다. 앞으로 박명수나 전현무가 제 위치를 찾아가기 위해서는 치고 들어가는 공격형 멘트나 깐죽댐으로서 웃음을 주는 밉상 짓과 함께, 때론 진심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이 필요하지 않을까. 위기는 기회라고 했다.

<추적자>가 추적하는 것은... 잃었던 아버지

 

사실 최근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어딘지 클리쉐에 발목이 잡힌 듯한 인상이다. IMF 이후 줄곧 콘텐츠 속의 아버지들은 고개 숙인 남자, 허리 휘는 가장, 그래도 꿈을 꾸려는 아저씨들, 그것도 아니라면 가족 식탁의 한 구석을 차지하고는 있지만 그다지 가족사에 영향을 주지 않는(혹은 못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사실 이런 클리쉐는 어찌 보면 목소리를 내는 순간 어딘지 권위적인 상으로 오해되기도 하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을 대변한다. 지금은 그래서 아버지 부재의 시대처럼 보인다.

 

 

'추적자'(사진출처:SBS)

그런 의미에서 <추적자>의 아버지 백홍석(손현주)은 지금까지 봐왔던 아버지와는 확실히 다른 면모를 갖고 있다. 지금껏 고개를 숙이고 한쪽에 있는 듯 없는 듯 있던 아버지의 틀을 깨고 제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점. 세상의 온갖 부조리 앞에 무릎 꿇고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소주 한 잔에 시름을 털어내던 아버지와는 다른, 그 부조리에 분노하고 싸우고 있는 아버지라는 점. 이것이 기존 아버지들과는 다른 백홍석이란 아버지의 면모다.

 

여기서 떠오르는 영화 두 편이 있다. 그것은 <아저씨>와 <마더>다. 이 두 영화는 제목처럼 모두 사회 내의 특정 부류, 즉 아저씨라고 불리는 이들과 엄마라고 불리는 이들을 세워두고는 그 클리쉐를 뒤집는다. 남자라면 그렇게 불리는 것이 싫게만 여겨지는 아저씨라는 어딘지 늙수구레한 이미지는 이 <아저씨>라는 영화에서는 반전요소다. 이 영화 속에서 원빈이 옆집 소녀를 위해 조폭들을 하나 하나 깨부술 때, 아저씨라는 클리쉐도 부서졌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마더>는 기존 모성애로서 주로 소비되던 엄마라는 클리쉐를 극단까지 밀어붙여 그 섬뜩한 본능으로까지 바꿔놓는 영화다. 이 영화는 엄마와 모성애라는 이름으로 그저 당연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여왔던 그 이미지를 깬다. 그런데 이 두 영화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이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언가 외부의 공격에 의해 그간 웅크려왔던 본성이 밖으로 터져 나오는 것. 그 과정에서 이들 존재의 새로운 면모가 포착된다.

 

<추적자>는 그런 점에서 그 안에 <아저씨>도 <마더>도 갖고 있는 드라마다. 기존 아버지로 그려졌던 그 쓸쓸한 뒷모습의 아버지만이 아닌, 그 안에 숨겨진 분노를 마침내 드러내는 그런 아버지. '세상 어차피 다 그런 거야' 하고 세파에 찌들어 살아오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저 스스로 세상과 타협하고 고개를 숙이며 살아왔던 그 아버지에게 가족은 최후의 보루인 셈이다. 그런데 그 가족이 여지없이 파괴되었다면?

 

이 백홍석이라는 아버지가 드러내는 절망과 분노에 수많은 대중들이 공감하게 된 것은 작금의 사회적 상황이 아버지들에게 똑같은 절망과 분노를 느끼게 하기 때문일 게다. 가족과 사회를 위해 자신의 행복을 저당 잡히며 살아왔지만, 결국 남은 건 자신을 퇴출시키는 사회의 비정함과 점점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아버지들의 권위, 그리고 가진 자들에 의해 여전히 농단당하는 좀체 바뀌지 않는 세상이 주는 절망감과 분노.

 

흥미로운 것은 바로 이 분노하는 순간, 아버지의 존재감이 살아나고 있다는 점이다. 생계를 위한다는 핑계로 사회의 부조리 속에 타협하며 살아가던 아버지는 이제 그 사회와 싸워나가는 새로운 존재로 각인된다. 백홍석이라는 아버지는 그렇게 아버지 부재의 시대를 깨치고 새로운 아버지의 상을 그려내고 있다.

 

아저씨의 이미지를 깨버린 원빈과 엄마의 이미지를 바꿔놓은 김혜자가 있었다면 아버지의 이미지를 일소하는데 단연 도드라지는 손현주라는 배우가 있다. 사실 손현주는 그 연기의 스펙트럼이 대단히 넓은 배우지만, 어딘지 수더분한 이웃집 아저씨나 착한 아버지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반전은 더 효과적이다. 마치 모든 어머니상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김혜자가 <마더>의 충격을 주었던 것처럼.

 

그런데 왜 작금에 이르러 이처럼 분노하는 아버지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이 생겨난 걸까. 그것은 아마도 사회의 웬만한 충격에도 끄덕 않던 아버지들 역시 그 맷집의 한계에 다다랐다는 반증은 아닐까. <추적자>의 백홍길이라는 아버지를 보며 자기 일처럼 분노했거나, 아니면 그 아버지를 기꺼이 응원했다면 이미 우리가 생각해왔던 아버지상에 균열이 생기고 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추적자>가 추적하는 것은 어쩌면 그 잃었던 아버지의 모습인지도.

먹먹한 <닥터 진>, 막막한 현실에서 나온다

 

<닥터 진>은 허구다. 이 사극의 핵심 장치인 타임 리프(시간을 뛰어넘는 것)가 그걸 말해준다. 그러니 조선시대에 괴질(콜레라)로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수액을 주사하기 위해 링거(?)가 등장한다거나 천재적인 신경외과의 진혁(송승헌)이 끌과 정으로 뇌수술을 하고, 인공호흡으로 사람을 살리는 그런 장면들에 리얼리티를 운운한다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중요한 것은 이 이야기가 뭘 말하려고 하는가 하는 점이다. <닥터 진>이 이 조선시대까지 날아가서 하려는 이야기는 조선에 있지 않다. 바로 현재 우리들이 살아가는 현실에 있다.

 

 

'닥터 진'(사진출처:MBC)

'이 여인은 말에 치였던 그 때 아들을 구하고 죽었어야 하는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역사는 한번 정해지면 결코 변하지 않고 흘러가는 것일까. 하지만 저 사람들에게 역사니 운명이니 그런 거창한 말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저 살아남아야 하는 사람들을 모른 척 할 수 없다. 핑계를 댈 수도 없다. 나는 이 아픔을 치료해야 한다. 그것이 내 운명이다.'

 

진혁의 이 내레이션은 이 드라마가 가진 생각을 잘 말해준다. 도성에서도 밀려나와 토막이라는 빈민촌에서 그저 죽지 못해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 진혁의 말처럼 이들에게 역사니 운명이니 하는 거창한 말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더 중요한 것은 생존해야 한다는 것. 드라마가 굳이 조선까지 가서 그렇게 누군가의 손길 한 번 제대로 받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을 가난한 이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것은 이 판타지가 주는 감흥이 현재의 현실에도 그만한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죽음보다 사는 게 더 두려운 토막촌 사람들, 저들끼리는 호의호식하면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 가난한 이들을 보살펴주기는커녕 격리하고 급기야는 마을 전체를 불질러버리는 권력자들. 이 가난한 자는 더 가난해지고 권력자들은 더 권력을 누리는 이야기적 정황은 작금의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청춘들은 성장의 사다리가 끊겨버린 현실에 절망하고(이 드라마의 김경탁(김재중)이란 서출을 떠올리게 한다), 현실에서 밀려난 우리네 가장들은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성 싶은 고통스런 삶 속에 내몰려 있다. 그럼에도 정치인들은 저들 살 궁리만 한다. 민생은 없고 권력욕만 있다.

 

이 드라마 속 진혁이란 인물은 그래서 이 암흑의 현실 속으로 뛰어 들어온 메시아 같은 판타지다. '상것들'이라 천대받으며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벌레 같은 삶에 뛰어든 이 진혁이란 인물은 제 온 몸을 던져 그들을 살려내려 한다. 그러다 정작 자신이 괴질에 걸려 쓰러지자 그는 그들이 느낀 고통과 두려움을 실감한다. '이런 것이었어. 이것이 바로 콜레라였어. 그들이 느꼈던 고통, 두려움이 몸 안으로 들어온다. 무섭다. 미치도록 무섭다. 이렇게 죽고 싶지 않아..' 이런 공감은 진혁이 얼마나 인간적인 메시아인가를 드러낸다.

 

이 강한 현실에 대한 판타지는 이 드라마의 떨어지는 리얼리티를 상쇄하고도 남는다. 본래 판타지란 현실에 부재한 것을 꿈꾸는 것에서 나오는 것이 아닌가. 가진 자들이 호의호식하면서 말 한 마디로 서민들을 죽음으로 내몰 때, 그들을 돌보는 것은 가진 자들이 아니라 오히려 천대받는 낮은 자들이다. 토막에 쌀가마니를 챙겨오는 기생들이나, 많은 약재들을 남모르게 갖다 놓는 홍영휘(진이한) 같은 혁명가들,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로부터 밀려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량처럼 살아가는 이하응(이범수) 그리고 몰락한 양반집 규수로 아버지를 잃고 어렵게 살아가는 홍영래(박민영) 같은 이들이 그들이다. 그들은 이 희망 없는 현실에 작은 촛불을 든다.

 

"민심은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다"라며 토막을 불태우라 명령하는 김병희(김응수)와, 다 타버린 집들을 내려다보며 "집들이 불타고 사람이 죽어나가는데도 저 안(도성. 한양)에서는 아무 것도 뵈지도 들리지도 않는가 보이."하고 한탄하는 이하응의 대조적인 모습은 그래서 우리네 현실에도 울림이 적지 않다. 이것이 어디 조선시대의 이야기인가.

 

진혁이라는 가상의 판타지적인 인물이 조선까지 날아가 링거에 주사까지 만들어 서민들을 살리는 이 황당한 이야기가 왜 먹먹하게 느껴질까. 그것은 이 정도로 황당한 판타지를 꿈꾸게 하는 현실의 막막함 때문은 아닐까. 진심으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온 몸을 던지는 진혁 같은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기대하는 마음. 정녕 판타지에 그치고야마는 그런 현실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는 얘기일까. <닥터 진>이 주는 먹먹함의 실체는 그래서 이런 막막한 현실을 전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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