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두>, 뻔한 로맨틱 코미디 아니네

 

또 김선아표 로맨틱 코미디의 반복이려니 했다. <아이두 아이두>라는 애매모호하기 이를 데 없는 제목도 한 몫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형적인 골드미스 황지안(김선아)에 변변한 직업조차 없는 루저 연하남 박태강(이장우), 게다가 삼각관계로 얽히는 누가 봐도 100점짜리 남편감 산부인과 의사 조은성(박건형) 그리고 직장 내 적수이자 이 멜로의 변수로 등장하는 회장 딸 염나리(임수향)까지. 뭐 하나 공식에서 벗어나는 것이 없어 보였다.

 

 

'아이두 아이두'(사진출처:MBC)

하지만 웬걸? 그저 잘 나가보이던 황지안의 실체가 보이면서 드라마는 의외의 방향으로 선회하기 시작한다. 한영어패럴의 차기 사장 후보로까지 지목될 정도로 일에서 성공한 그녀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루저 박태강과 그다지 다를 게 없는 숙맥 중의 숙맥. 게다가 덜컥 그 루저와의 실수로 아이까지 갖게 된다. 일과 사랑. 로맨틱 코미디의 이 오랜 두 주제는 주로 일을 갖지 못한 신데렐라가 사랑을 쟁취함으로써 일의 성취까지 이루게 되는 그런 흐름을 보여왔다. 하지만 <아이두 아이두>는 이미 일에서 성취한 여성이 어떻게 사랑까지 쟁취해가는가를 보여준다.

 

황지안과 박태강. 이 두 인물은 이 시대의 성공한 골드미스와, 이제 취업전선에도 뛰어들지 못하고 방황하는 청춘을 각각 대변한다. 박태강처럼 스펙도 없고 일자리도 없으며 당연히 사랑은 언감생심인 이들을 좀 과한 표현으로 루저라고 부르듯이, 골드미스에 일에서 최고의 위치까지 오르게 되었지만 그럴 듯한 남자 한 번 제대로 만나보지 못하고 결혼은 포기상태에 심지어 폐경 위기까지 맞게 된 황지안은 사랑에 있어서 루저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니 일과 사랑에서 서로의 빈자리를 갖고 있는 황지안과 박태강은 모두 루저 탈출의 꿈을 갖고 있는 셈이다.

 

로맨틱 코미디가 사회성을 띄기 시작하는 것은 점점 많아지고 있는 워킹우먼들에게 결혼과 임신이 여전히 너무나 무거운 짐으로 다가오는 현실을 이 드라마가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왜 일하면서도 사랑하고, 결혼과 육아를 동시에 할 수는 없는 걸까. 어쩌면 이것은 이 새로운 현실에 처한 워킹우먼들의 판타지일 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여성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조은성 같이 성공한 남자들이 독신을 고집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결혼과 육아가 지우는 현실적인 무게는 남자나 여자나 마찬가지다. 물론 여성들은 그간 완고하게 사회생활에서 암묵적으로 굳어져온 임신과 일에 대한 편견이 더 깊을 수밖에 없지만. 어쨌든 이 드라마에서 조은성 같은 성공한 독신주의 남자가 변화하는 모습은 이 사회적인 문제가 그저 여성들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대변해준다.

 

<아이두 아이두>라는 제목은 그래서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흔히 로맨틱 코미디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결혼해줄래?(Will you marry me?)"하고 물었을 때 여자 주인공이 머뭇대다가 하는 답변. 바로 "아이두 아이두(I do I do)"가 그것이다. 그런데 이 제목은 또한 한글 그대로 '아이도' 가지면서 일의 세계에서도 성취할 수 있는 상황은 요원한 것인가를 묻는 것이기도 하다.

 

부하직원인 워킹맘 마성미(김민희)는 이 일과 사랑이 공존할 수 없게 만드는 현실의 결과를 보여준다. 매일 같은 야근으로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없는 이 12년차 맞벌이 워킹맘은 아이가 그린 가족 그림에 정작 자신과 남편은 없고 햄스터가 그려진 것을 발견한 후 절망한다. '햄스터보다 못한 엄마'가 그들의 현실이다. 그런 마성미의 입장을 백분 이해하면서도 황지안은 그녀에게 포기하지 않을 것을 권고한다. 그것은 어쩌면 황지안 자신의 포기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두 아이두>는 이 중의적인 제목처럼 과연 일과 사랑을 모두 쟁취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과거의 로맨틱 코미디에서도 일과 사랑은 늘 핵심적인 주제였지만, <아이두 아이두>는 그것을 막연하게 얘기하지 않는다. 실제적인 워킹맘의 문제와 결혼, 임신, 낙태의 문제까지 거침없이 화두로 올려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을 그저 그런 로맨틱 코미디로 치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웃음 뒤에 쓰디 쓴 현실감. 이것이 <아이두 아이두>가 그려내는 멜로의 실체다.

<추적자>에 숨겨진 명쾌한 복수의 공식

 

제목이 <추적자>이니 당연히 추적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딸과 아내를 모두 잃고 이 비뚤어진 정의를 바로 잡고자 법 바깥으로 나온 백홍석(손현주)이다. 추적하는 사람이 있으니 당연히 도망치는 자도 있다. 백홍석의 딸, 백수정(이혜인)을 뺑소니친 장본인 서지수(김성령), 사건을 덮어주는 대가로 정계 진출을 거래하고는 가까스로 살아난 백수정을 결국 죽이도록 시킨 서지수의 남편 강동윤(김상중), 그리고 이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가족 그 자체보다는 자신의 지위와 이익을 더 챙기는 서지수의 아버지이자 강동윤의 장인인 서회장(박근형)이 그들이다.

 

 

'추적자'(사진출처:SBS)

<추적자>의 힘이란 결국 진실을 세상에 공표하기 위해 쫓는 자와 그것을 필사적으로 덮기 위해 할 수 있는 뭐든 저지르는 진짜 범인들 사이의 간극에서 나온다. 백홍석은 이 과정에서 심지어 서지수를 납치하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물론 이것은 당연한 과정이다. 너무 쉽게 잡히면 극의 힘은 빠지고 만다. 그러니 손에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거리감이 드라마의 몰입감을 만들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런 단순 구조는 드라마를 뻔하게 만들 수도 있다. 결국 백홍석은 진실을 밝히게 될 것이고, 서지수나 강동윤 그리고 서회장은 그로 인해 법의 심판을 받거나 정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게 이러한 추격 장르의 공식이다. 이 공식이 흐트러지면 드라마는 문제작이 된다. 드라마의 차원을 넘어서서 일반 대중들이 공분을 자아내게 할 정도의 <추적자>에서 공식을 흐트러뜨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렇다면 너무 뻔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이 도망치는 자들 사이에 또 다른 대결구도가 세워져있기 때문이다. 강동윤과 서회장이 대립하고 서지수는 처음에는 서회장과 같은 편에 서 있다가 강동윤이 자신을 위해 백수정을 죽였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의 편으로 돌아선다. 서회장은 자신의 아들인 서영욱(전노민)을 해외 도피 생활하게 만든 강동윤을 용서하지 못한다. 그 분노는 강동윤 편에 선 자신의 딸조차 버릴 정도다. 그는 납치된 딸을 구해 달라 요청하는 강동윤에게 "그 애는 이제 내 딸 아니다. 니 마누라다."라고 말한다.

 

서회장의 이런 초강수에 서지수와 강동윤은 한호그룹 불법승계사건의 증거가 들어있는 비밀회의록을 공개하겠다고 밝힌다. 이미 이들은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다. 서회장이 강동윤에게 했던 말을 강동윤은 다시 서회장에게 되돌린다. "이제 지수는 장인어른의 딸이 아닙니다. 제 아냅니다." 서회장과 강동윤의 대립구도는 그 과정에서 생겨나는 많은 변수들을 만든다. 이것이 백홍석의 추적을 뻔하지 않게 만드는 이유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지점은 가족이라는 틀을 염두에 두고 봤을 때, 서회장과 강동윤, 서지수라는 백홍석의 가족을 파탄낸 인물들이 자신의 가족들도 스스로 파탄내고 있다는 점이다. 딸이 납치돼도 눈 하나 깜박 하지 않는 서회장이나, 그런 서회장과 그 아들인 서영욱의 비리를 공개하겠다고 나서면서 "이제 할 말이 있으면 자신을 찾아오라"는 강동윤은 더 이상 가족이 아니다. 다만 정치에 대한 욕심과 자신의 부에 대한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일 뿐이다.

 

애초에 백수정이 사고를 당했을 때, 그들이 보인 반응들은 한 사람의 생명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탐하는 모습이었다. 바로 이 사람보다는 욕망에 충실한 태도가 결국은 자신들의 가족을 파탄 내는 동인이었다는 것. 한 가족을 파괴한 그들은 바로 그 욕망 때문에 자신들도 파괴한다. 이 얼마나 명쾌한 복수의 공식인가.

 

사실 백홍석이 바라는 것은 단순한 복수가 아닐 것이다. 만일 복수였다면 눈앞에 납치해온 서지수를 당장에 죽이면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대신 강동윤으로 하여금 진실을 밝히라고 했다. 백홍석은 복수가 아니라 정의를 되찾고 싶은 것이다. 그렇다면 복수는? 그것은 이미 서회장과 그 가족들이 서로를 물고 뜯고 있는 이 과정을 통해 행해지고 있는 셈이다. 누가 누구를 복수할 수 있으랴. 결국 자신이 한 행동이 다시 자신에게로 돌아올 따름이 아닐까.

<정글2>, 출연자의 진가를 찾아주는 예능

 

그 사람의 진가는 위기에서 나온다고 했던가. <정글의 법칙2(이하 정글2)>가 발견한 건 야생의 정글만이 아니다. 그 야생의 환경 속에서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사람들의 진가다. <정글2>에 출연한 이들은 그들이 이 프로그램에 나오기 전과 후에 확실한 이미지 변화를 갖는다. '이 사람에게 저런 면모가 있었어?' 하고 묻게 되는 예능, 바로 <정글2>다.

 

 

'정글의 법칙2'(사진출처:SBS)

김병만의 야생 적응력이 남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고 해도 저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높은 야자수를 타고 올라가 야자를 따는 모습은 그렇다 치고, 뭐든 필요한 것이 있으면 뚝딱 뚝딱 만들어내는 야생 맥가이버 같은 면모는 달인과는 또 다른 풍모였다. 특히 <정글1>이 거의 모든 걸 김병만에 의지했던 것과 달리, <정글2>로 넘어와 추성훈 같은 인물이 투입되자 김병만만의 장점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힘이 아니라 요령이 남다른 김병만은 추성훈과 비교해 '도구의 인간(?)'이었다. 물고기를 잡는 것도 처음에는 작살 같이 뾰족하게 만든 나무로 찌르다가 잘 안되자 이른바 퍼 올리는 방법을 찾아냈다. 빗물을 모으기 위해 특별한 기구를 고안해내기도 하고 매번 지형지물을 이용해 집을 짓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정글2>가 보여준 김병만의 새로운 진가는 그가 묵묵하게 행동으로 가족(?)을 챙기는 모습이다. 그에게서는 어느새 족장의 풍모가 풍기고 있다.

 

추성훈은 몸이 앞서지만 특유의 매너로 똘똘 뭉쳐 있는 캐릭터다. 뭔가 일이 안될 때 신경질을 내기도 하지만 악의나 뒤끝은 없는 사나이 중의 사나이. 강인해 보이는 단단한 몸 뒤편에 숨겨진 부드러운 면모를 추성훈은 <정글2>를 통해 보여주었다. 의외의 예능감의 소유자로 어색한 한국말은 그를 근육질의 초딩 같은 반전 캐릭터로 만들어주고 있다.

 

리키 김은 <정글2>를 통해 재발견된 캐릭터. <출발 드림팀>을 통해 그 강인한 승부욕은 정평이 나 있었지만,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바른 모습과 의외로 넘치는 정은 그의 새롭게 발견된 면모다. 파도에 제작진들이 바다에 빠졌을 때 제일 먼저 바다로 뛰어든 리키 김의 모습은 그가 얼마나 가족에 대한 정서를 갖고 있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노우진은 <정글>에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그저 달인의 보조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않았다. 하지만 정글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그의 모습은 이 프로그램이 예능이라는 것을 새삼 확인시켜줄 정도였다. 또 상대방을 위해 묵묵히 자신을 희생하는 모습은 역시 달인이 있기 위해서는 노우진 같은 인물이 옆에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다. 불을 피울 때 김병만과 추성훈이 정작 대결하듯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지만, 그 나무를 모기를 물려가면서도 놓지 않고 버텼던 것은 바로 그였다.

 

포기의 아이콘이라는 캐릭터를 갖게 된 광희 역시 <정글>로 인해 존재가치를 한껏 높인 인물이다. 그저 개념 없이 웃기려고만 하는 아이돌이라고 여겨졌었지만, <정글>은 그런 막내 같은 광희를 한 차원 성숙되게 만든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사실 모두가 김병만이나 추성훈이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아마도 광희 같은 어찌 보면 우리를 닮은 캐릭터가 있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이 가진 야생성은 더 부각될 수 있었을 것이다.

 

<정글2>에 새롭게 투입된 유일한 여성 출연자인 박시은은 의외의 털털한 모습과 때론 누나 같고 때론 엄마 같은 편안함을 보여주었다. 여성으로서 정글이라는 환경이 얼마나 힘들었겠는가는 누구나 아는 사실일 게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여성만이 가진 섬세함과 부드러움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박시은은 여실히 깨닫게 해주었다.

 

위기의 순간에 가봐야 그 사람의 진가가 비로소 보인다고 한다. 정글이라는 야생의 환경은 그래서 그 속에 던져진 인물들을 다시 보게 만든다. 김병만의 성실성이나 추성훈의 매너, 리키 김의 정이나 노우진의 배려심 그리고 황광희의 성장과 박시은의 편안함은 그렇게 발견된 것들이다. <정글2>는 그래서 야생의 적응과정이 주는 재미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발견되는 인물들의 새로운 면모가 또 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프로그램이다.

<무걸>이 살 길과 <무도>에 대한 예의

 

<무한걸스>의 지상파 입성은 과연 약일까, 독일까. 첫 방송에 쏟아지는 반응들은 <무한걸스>가 앞으로 갈 길이 평탄치 만을 않을 거라는 걸 예상케 한다. 호평과 혹평이 갈라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것은 그 이면에 <무한도전>이라는 거대한 예능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다.

 

 

'무한걸스'(사진출처:MBC)

<무한도전>을 무려 20주 동안 보지 못한 팬이라면 <무한상사>를 그대로 패러디한 <무한걸스>의 첫 방송인 <무걸출판사>가 반가웠을 수 있다. 즉 <무걸출판사>를 보면서 <무한도전>의 공백을 잠시나마 채울 수도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제 아무리 내놓고 패러디하는 것이라고 해도 <무한걸스>가 <무한도전>이 될 수는 없다. 그러니 또한 실망할 수밖에.

 

<무한걸스>는 <무한도전>의 여성판으로 기획된 전형적인 케이블형 프로그램이다. 즉 <무한걸스> 독자적으로 서 있다기보다는 본래 <무한도전>의 패러디 성격이 짙기 때문에 지상파, 그것도 주말 저녁이라는 황금시간대에는 어울리기가 어렵다. 어디서 본 듯한 아이템들을 여성판이라는 미명 하에 반복 생산하는 것을 경쟁이 치열한 주말 저녁에 굳이 챙겨볼 시청자가 얼마나 있겠는가.

 

케이블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무한도전>의 팬들이라면 자연스럽게 <무한걸스> 역시 <무한도전>의 곁가지로서 즐길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무한걸스>를 보면서 우리는 <무한도전>을 늘 떠올린다. 이것은 <무한걸스>가 가진 가장 큰 힘이지만, 또한 가장 약한 단점이기도 하다. <무한걸스>는 <무한도전>을 업고 있을 때 도드라지지만, 홀로 서야할 때는 초라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무한도전>은 내용 그 자체보다도 그 매번 시도되는 소재나 형식 실험에 더 열광하는 프로그램이 아닌가. <무한걸스>의 첫 아이템이 <무한도전> 패러디라는 것은 그래서 어쩌면 이 프로그램이 가진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새로운 도전이나 실험이 아니라, 이미 <무한도전>이 시도했던 것들을 가져와 여성의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 <무한도전>을 비교점으로 가진 팬들에게 지상파 프라임타임대에 들어온 <무한걸스>가 좋게 보일 리가 만무하다.

 

<무한걸스>가 지상파에 발을 딛는 그 시기도 좋지 않았다. <무한걸스>가 <무한도전> 20주 결방으로 인한 팬들의 갈증을 채워주기보다는 마치 빈 자리에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는 듯한 인상을 만든 것. 물론 <무한걸스>의 제작진이나 출연진에게 그런 의도가 있을 리 없다. 하지만 편성이란 그 자체로 때론 모든 이야기를 해주기도 하는 법이다.

 

기왕에 <무한걸스>가 지상파에 들어오겠다고 했다면 더 도전적인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었다. <무한도전>이 시도하지 않았던 아이템들을 갖고 와 마치 짝퉁이 진짜를 넘어서겠다는 자세를 보였다면 오히려 흥미로웠을 수 있다. 지금까지의 케이블에서 보여주었던 <무한걸스>를 싹 잊게 만드는 좀 더 과감하고 도전적인 면모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현재 <무한걸스>는 두 가지 시선에 붙잡혀 있다. 하나는 <무한도전>의 공백이 주는 갈증을 채워줄 수 있다는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것도 없이 대충 따라하면서 <무한도전>의 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시선이다. 그러나 이 두 시선 어느 것도 <무한걸스>에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무한걸스>는 좀더 <무한걸스>만의 세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무한도전>에서 빠져나온 프로그램이지만 그렇다고 <무한도전>을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본래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이 '도전'이라는 하나의 주제만 같을 뿐, 매번 거의 완전히 다른 형식들을 실험하는 프로그램이 아닌가. 그렇다면 <무한도전>을 제대로 여성판으로 만들어내는 입장에서도 지상파에 입성한 <무한걸스>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독자적인 형식과 소재의 실험에 도전해야 한다. 그것이 <무한걸스>가 살 길이고, 또한 <무한도전>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