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예인들의 영역파괴, 더 이상 성역은 없다

KBS '생방송 뮤직뱅크'의 한 풍경. '인디언 보이'를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부르는 MC몽과 화려한 춤과 노래를 선보이는 몇몇 아이돌들 사이로 이색적인 얼굴이 보인다. 본래부터 가수를 꿈꾸다가 개그맨이 되었고, 그 관성 때문이었는지 유난히 '고음불가'나 '야야야 브라더스' 같은 음악 개그를 선보였던 개그맨. '1박2일'의 앞잡이, 이수근이다. 그는 새로 낸 싱글앨범 '해피송'의 타이틀곡 해피송을 불렀다. 잠시 후, 가요프로그램에서는 보기 어려운 또 한 명의 얼굴이 무대에 올랐다. '주몽', '이산'에서 특유의 굵직한 연기를 보여주었던 견미리. 그녀는 1집 '행복한 여자'를 내고 가수 데뷔를 했다. 음악 프로그램 속에 들어온 개그맨과 연기자. 그 풍경은 이색적이지만 이미 더 이상 이상한 풍경은 아니다.

우리는 이미 '1박2일'이나 '패밀리가 떴다'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개그맨과 가수, 그리고 연기자들이 공존하는 모습을 봐왔다. 거기에서는 개그맨 이수근과 함께 MC몽이 형 동생 해가며 1박2일간 포복절도의 여행을 떠난다. 그러니 '생방송 뮤직뱅크'에서의 MC몽과 이수근이 같은 프로그램에 서는 모습이 우리에게 익숙할 수밖에. 그런데 '1박2일'에서 이들과 함께 여행을 떠나는 인물 중에는 '찬란한 유산'에서 한효주와 가슴 떨리는 멜로를 보여주었던 이승기도 있다. 가수이면서 예능 프로그램에서 활약하면서 동시에 드라마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승기는 작금의 연예인들에게 일어나고 있는 영역 파괴(?)를 상징처럼 보여주는 인물이다.

드라마를 보면 이제 가수들의 주연급 캐스팅은 일반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아가씨를 부탁해'의 윤은혜, '태양을 삼켜라'의 성유리, '혼'의 이진은 아예 가수활동에서 연기활동으로 선회했고, '드림'의 손담비, '혼'의 티아라 지연, 또 앞으로 방영될 '맨땅의 헤딩'의 유노윤호는 가수이면서 연기에 도전하는 인물들이다. 한편 개그맨들의 드라마 출연도 예외적인 일은 아니다. '선덕여왕'에서 뛰어난 감초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류담, '스타일'에서 에디터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개그맨 한승훈이 대표적이다.

이렇게 연예인들이 자기 영역을 넘어서 타 분야까지 넘나드는 퓨전 경향은, 연예인 당사자들과 프로그램 제작자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면서 생겨난 것이다. 연예인 입장에서 보면 과거 이미지는 겹치지 않아야 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졌었지만 신비주의가 지나간 리얼리티 세상에서 이런 사고방식은 수정되었다. 연예인도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 즉 다양한 얼굴들이 존재하는 것이고, 연기든 노래든 개그든 그것은 하나의 퍼포먼스일 뿐이라는 것을 대중들은 인식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박예진이 정극에서 멜로 연기를 하면서, 동시에 ‘패밀리가 떴다’에서 웃음을 주는 것은 자연스럽고 또 솔직한 모습이 되었다. 하나가 아닌 복합적인 이미지가 오히려 호감을 준다는 이야기다.

한편 제작진들은 영역 바깥의 인물들이 갖고 있는 인지도와, 새로운 영역 속에 들어왔을 때의 신선함을 주목했다. 개그맨이 버라이어티쇼를 하는 것은 당연한 어떤 것으로 치부되는 반면, 가수나 배우가 버라이어티쇼를 하는 것은 새로운 호기심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영역 속에서 그 영역에 익숙해진 이들은 리얼이 대세인 현재의 쇼 속에서 자칫 인위적인 모습을 연출할 가능성이 높다. 차라리 그 분야의 프로보다는 타 영역에서의 프로(따라서 그 분야에서는 아마추어가 되는)가 오히려 각광받는 상황은 연예인들의 영역 파괴 열풍에 불을 지피고 있다.

이러한 영역파괴의 경향에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잘 나가는 특정 연예인에 대한 집중도가 그만큼 높아진다는 것은, 이제 새롭게 진입하려는 신진 연예인들에게는 커다란 장벽으로 작용한다. 한 분야에서 성공하면 타 분야까지도 영역이 넓어지지만, 이것은 결국 몇몇 연예인들이 대부분의 프로그램을 장악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한다. 드라마에서 젊은 배우들의 입지는 점점 좁혀지고 있는데, 그것의 한 원인은 가수들의 드라마 진출에서 찾을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리얼 버라이어티쇼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개그맨들의 입지가 줄어드는 것과 마찬가지다. 한편 ‘무한도전’의 ‘강변북로 가요제’ 앨범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가수로서의 성공이 음악적인 성취보다 이러한 이벤트적인 요소에 좌지우지된다는 허탈감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영역파괴의 경향은 바꿀 수 없는 흐름이다. 따라서 이 변화를 거부한다는 것은 아예 연예 생태계에서 살기를 거부하는 것과 마찬가지가 된다. 앞으로 연예인은 말 그대로의 ‘탤런트(talent : 재능을 가진 사람을 뜻함)’의 의미를 가지게 될 가능성이 높다. 만능 엔터테이너가 되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달라진 생태계는 벌써부터 거기에 맞는 탤런트들을 포진시키기 시작했다.

‘혼’을 담은 문제작, 왜 마침표를 못찍었나

“사람들은 작은 것에는 분노하지만 큰 것에는 분노하지 않아. 왜? 허락되어 있지 않으니까.” 백도식(김갑수)은 진정 분노해야할 대상에는 분노하지 않고 엉뚱한 것에 분노함으로써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인간들을 비웃는다. 그러면서 불쑥 정치 이야기를 꺼내든다. “그래서 정치를 좀 해보려구 해.” ‘혼’에서 악역을 맡고 있는 백도식이란 인물의 대사를 들여다보면 이 드라마가 그저 공포극에 머무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정의는 법을 이길 수 없거든.” 법과 정의에 대한 그의 대사는 아프게도 현실이다. 그러니 법을 이길 수 없는 피해자들은 법 외부의 힘으로 가해자들을 응징하려 한다. ‘혼’이라는 공포물의 탄생은 바로 이 지점에서 비롯한다. 가해자들에게 당한 피해자들이 같은 방법으로 잔인하게 가해자들에게 복수한다는 것. 그리고 그 방법으로 혼령의 힘을 비는 빙의와 처단자로서의 연쇄살인을 동원한다는 것이 이 드라마 스토리텔링의 핵심이다.

연쇄살인범을 연쇄살인 하는 이야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이미 ‘덱스터’라는 미드를 통해 보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원혼이 복수를 하는 것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것은 그 많은 ‘전설의 고향’ 귀신이야기의 단골메뉴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한 군데 얽혀있는 것은 새로운 것이다. 프로파일링 기술을 가진 신류(이서진)가 혼령에 빙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하나(임주은)를 이용해, 법으로 이길 수 없는 살인범들을 제거해나가는 이야기는 확실히 신선한 면이 있다.

게다가 공포 코드 이면에 사회적인 부조리를 넣어 그 공감의 울림을 키운 것도 이 작품을 명품으로 만든 요인이다. 우리는 사람(물론 살인범들이지만)이 혼령보다 더 무섭고, 그 사람을 혼령이 처참하게 죽이는 것에 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놀랍게도 우리가 그런 경험이 통용되는 사회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우리는 혼령에 감정이입하는 경험을 하게 되며, 여기서 공포는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분노가 자리하게 된다. 무섭기보다는 화가 나고, 살인을 막아야 된다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저런 자는 죽어도 싸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공포물이 사회극이 되는 순간이다.

그런데 바로 이것은 저 백도식이 경고한 부분이다. 엉뚱한 분노가 결국은 자신을 망치게 된다는 것. 이것은 예언처럼 들리고, 결국 그 예언에 따라 모두가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된다. 결말에 있어서 신류와 건일(정시우)의 죽음은 공포극으로 본다면 지나치게 허무하게 보인다. 무언가 힘 한 번 쓰지 못하고 죽은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백도식은 그 누구에게도 응징을 당하지 않했다. 그는 스스로 건물에서 밖으로 뛰어내렸고, 거기에서도 살아나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공포극의 틀 안에서 보면 이 드라마는 공포의 끝장, 즉 절대 악의 죽음, 문제의 해결 등이 보여지지 않은 채 끝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을 사회극의 틀로 보면 말이 달라진다. 신류와 건일의 허무한 죽음은 흔한 말일 수 있지만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고, 또 가해자가 피해자가 되는 그 복수의 순환을 통해 인간이 인간을 처단한다는 것이 가진 부조리함을 드러낸다. 그것에 분노하며 결국에는 이성을 잃어버리는 하나는 이 복수의 비극적인 순환이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뉘앙스를 준다. 게다가 사라져버린 백도식은 “정의는 법을 이길 수 없다”고 그가 말한 바 있는 그 현실을 그대로 우리 앞에 들이민다. 결국 아무 것도 해결된 것 없이 현재 상태로 돌려놓은 이 결말은 사회극으로서는 그 울림이 크다. 해결된 것은 없지만, 우리는 그 과정을 목도했고, 결국 현실의 문제는 드라마 같은 판타지가 서둘러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혼’은 사회극을 꿈꾼 공포극이다. 겉으로 공포극의 외관을 하고는 사회의 치부를 드러내는 드라마다. 그러니 공포극으로서는 여러 모로 그 장르가 갖는 재미를 빗겨간 면이 있다. 하지만 ‘혼’은 충분한 사회극으로서의 재미를 주었던 드라마다. 적어도 공포와 현실이 어떤 연관관계를 가지는지, 이 드라마는 충분히 보여주었다. ‘혼’은 마침표를 찍지 못하고 미완에 남았지만, 그 시도만큼은 충분히 인정되어야 하는 드라마다.

‘아가씨를 부탁해’, ‘태양을 삼켜라’, ‘천만번 사랑해’

어딘지 2% 부족한 드라마들이 있다. 그저 보고는 있지만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설정과 장면들이 나올 때면 왜 이걸 보고 있어야 하는 생각이 드는 드라마들. 시청률은 그다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더 좋아질 것 같지도 않은 드라마들. 어째서 이런 어정쩡한 드라마들이 나오는 것일까.

‘꽃보다 남자’의 아류작(?), ‘아가씨를 부탁해’
‘꽃보다 남자’의 아류작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아가씨를 부탁해’. 실제로 이 드라마는 ‘꽃보다 남자’가 갖고 있는 소구점들을 거의 똑같이 활용하고 있다. 먼저 판타지에서나 볼 법한 초부유층의 환상을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인 것이 똑같다. 하인들과 집사들, 거의 성을 연상시키는 집, 잘 빠진 스포츠카에 패션쇼를 연상시키는 등장인물들의 화려한 의상까지, 이 드라마는 ‘꽃보다 남자’가 드라마라는 틀을 거대한 판타지 공간으로 만듦으로써 하나의 광고판 기능을 하게 했던 그 장치를 그대로 가져왔다.

캐릭터도 성별만 바뀌었지 성격까지 똑같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이민호)가 여자로 바뀌어 강혜나(윤은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하려는 이야기는? 변함없는 멜로다. 윤상현이라는 매력적인 배우가 서동찬 역으로 등장해 강혜나의 집사 역할을 하며 멜로의 감정을 키워나가고 있지만, 그런 이야기 역시 ‘꽃보다 남자’가 금잔디(구혜선)를 통해 못된 부잣집 자제 길들이기를 했던 그 말괄량이 길들이기의 모티브를 그대로 따고 있다. 인물과 배경 그리고 사건까지 유사하니 그 달달한 맛은 있지만 이 드라마만의 엣지가 부족하다. 시청률이 안 오르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해 보인다.

제2의 ‘올인’, ‘태양을 삼켜라’
‘태양을 삼켜라’는 제2의 ‘올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남자들의 세계를 다루는 드라마들이 늘 내세우는 야망과 복수의 코드는 ‘올인’이 했던 이야기의 연장선이고, 배경인 제주도와 카지노 도박의 세계 역시 판박이다. 인물들 역시 어디선가 봐왔던 캐릭터들이다. 늘 이런 드라마에 존재하기 마련인 재벌 장민호 회장(전광렬), 그 회장의 망나니 후계자 태혁(이완), 그 태혁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대신 감방에도 들어가는 정우(지성),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 서서 멜로를 연출하는 수현(성유리). 게다가 그 주인공인 정우가 사실은 장민호 회장의 아들이라는 출생의 비밀까지.

드라마가 여기저기서 무수히 봐왔던 익숙한 코드들을 조합한 느낌을 준다는 점은, 이 드라마가 가진 스케일과 화려한 볼거리를 무색하게 만든다. 새로운 스토리가 없는 볼거리는 맥락 없이 이어지고, 결국 스토리까지 잡아먹는다. 게다가 이 드라마는 ‘올인’에서 이야기를 더 절절하게 만들어준 이병헌과 송혜교 같은 배우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딱히 연기의 문제라기보다는 캐릭터가 가진 식상함이 배우들의 연기마저 삼켜버리는 형국이다. 이 정도의스케일과 이 정도의 제작비를 투여하고 20%에도 도달하지 못하는 이유는 자명하다. 새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찬란한 유산’이여 다시 한 번(?), ‘천만번 사랑해’
한편 새로 시작한 SBS 주말드라마 ‘천만번 사랑해’는 여러 모로 ’찬란한 유산‘의 코드들을 가져왔다. ‘천만번 사랑해’는 대리모 문제를 내세워 우리네 사회가 가진 핏줄의식을 다시 한 번 끄집어내려 하고 있다. ‘찬란한 유산’에서 유산을 통해 문제제기 되었던 핏줄의식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는 것. 그것 자체는 잘못된 것이 없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찬란한 유산’의 성공방정식을 거의 따라가고 있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부재가 만들어내는 가족의 파탄, 배다른 자식이 겪게 되는 고난과 역경, 그 역경을 일으켜줄 재벌집 아들의 존재 등등. 유사한 코드들이 곳곳에서 보여진다.

다른 점이 있다면 ‘찬란한 유산’이 자극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심지어 자식을 내쫓는 계모 같은) 드라마 분위기가 늘 밝은 톤을 유지했던 것에 비해, 이 드라마는 전체적으로 자극 쪽으로 흐르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 드라마는 이제 시작이기 때문에 모든 걸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이 드라마가 주말이라는 시간대에 ‘찬란한 유산’이 거둔 성공을 다시 거두려 한다면, 자극적인 소재와 보편적인 정서 사이에 균형 있는 이야기를 구사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어디서 본 듯한, 그러나 어딘지 2% 부족한 드라마들의 탄생은 이미 확고히 성공한 드라마들의 성공 코드들을 다시 활용하려는 데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른바 장르라는 것은 바로 그 성공 코드의 재배열이 주는 이미 기대된 결과를 확인하는 반복적인 즐거움에서 탄생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장르에도 변주의 즐거움이라는 것이 있다. 타 드라마와는 확실히 다른 한 가지는 분명 갖추고 있어야 그 드라마만의 존재이유는 그제야 성립되는 것이 아닐까. 이 드라마들이 바로 그 존재이유를 찾아서 부족한 2%를 채우기를 기대한다.

 병풍이거나, 민폐거나 어쩌다 아버지들은?

드라마 세상이 바로 현실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현실을 어느 정도는 반영한다. 언제부턴가 드라마 속에 아버지들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현실에서 자꾸만 좁아져가는 아버지라는 위상을 가늠하게 한다.

아버지는 집 담보까지 집어넣었지만 결국 망한 회사 앞에서 망연자실해 하고, 그 회사를 버리고 야반도주해버린 사장 앞에서 쓰러져버린다(SBS '천만번 사랑해). 이혼하고 다른 남자에게 간 어머니를, 수선집을 하는 아버지는 "자기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보냈다며 그래도 여전히 생각이 난다고 쓸쓸하게 말한다(SBS '스타일').

이것은 전통적으로 남성 시청자들의 몫이었던 사극에서도 마찬가지다. '선덕여왕'에서 덕만(이요원)과 천명(박예진)의 아버지인 진평왕(조민기)은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는 무능력한 왕이자 아버지다. 그는 미실(고현정)의 권력 앞에 딸을 버리고, 심지어 명백히 살해된 천명의 죽음 앞에서도 그 죽음이 사고였다고 말하는 인물이다.

아버지가 실종된 드라마 세상은 어느새 여자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 세상 속에서 남자들은 여성들의 간택을 받는 인물로 등장하거나, 향수어린 과거의 가치에서 허우적대는 인물로 그려진다. '꽃보다 남자' 이후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내조의 여왕', '아가씨를 부탁해' 같은 드라마 속에서 남자들은 하나 같이 부자에 꽃미남으로 등장하지만, 그것은 대부분 여성들의 취향이 반영된 것이다.

한편 남자의 세상을 그리고 있는 '드림'이나 '태양을 삼켜라', 그리고 종영한 '친구' 같은 작품 속에서 거친 남자는 지금 시대와는 아무런 공감을 일으키지 않는 향수로 그려진다. 그들은 여전히 성공에 목말라 하고 있고, 그 성공을 위해 사투를 벌인다. 미래의 성공보다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작금의 가치관에서 보면, 그들의 사투는 안쓰럽게만 보일 뿐이다. 도대체 왜 그들이 그렇게 아등바등 살아가는지 잘 공감이 가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이다.

젊은 남자들조차 여성의 대상이 되거나, 과거의 향수 속으로 숨고 있는 이 상황 속에서, 이제는 나이 들어 고개 숙인 아버지라는 존재는 더더욱 자리할 곳이 없어졌다. 아버지는 드라마 세상 속에서 병풍으로 존재하거나, 혹은 젊은이들의 민폐로서 기능한다. 드라마는 본질적으로 그 시대의 감정이입할 대상을 나이와 성별을 넘어 포진시키는 경향이 있다. 아버지의 실종과 그 실종된 아버지에 대한 무관심은, 현실의 아버지들이 서 있는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이제는 한발 물러나 가족들 틈에서도 늘 뒷전에 앉아계시는 아버지들은, 그나마 소일거리로 찾아보는 드라마 속에서조차 감정이입할 대상을 찾기 어려운 상황이다. 시대는 달라졌고, 남성성보다는 여성성의 사회로 변모하고 있다. 그 달라진 사회를 반영하는 드라마가 과거 억압되었던 여성들을 살려내고, 마초적이기만 하던 남성들을 여성성 가득한 남성들로 그려내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과거의 세계에 던져놓거나, 현실의 패배자로서만 그려지는 아버지의 존재는 문제가 있다. 지금 시대에 맞는 아버지 상은 도대체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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