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류 vs 반한류

최근 들어 한류에 대한 의견들이 분분하다. ‘한류열풍 4년 만에 이뤄낸 1억불에 달하는 무역흑자!’, ‘올해를 신한류를 이뤄내는 해로 삼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낸 문화관광부.’ 같은 핑크빛 전망이 있는 반면, 한편에서는 ‘이미 한류는 끝났다’, ‘한류는 애초에 없었고 욘사마만 있었다’, ‘반한류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는 어두운 전망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박진영 JYP엔터테인먼트 대표는 “이제 한류라는 국가상표를 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한류라는 상표에 민족주의가 붙으면서 발생하는 주변국의 ‘반한류’ 움직임을 의식한 것이다.

대중문화에 붙은 한류라는 태극마크
박진영씨는 이후에도 한 일간지에 ‘내가 애국자라고’라는 칼럼을 통해 굳이 ‘대중문화에 한류라는 이름으로 태극마크를 달아야 하겠냐’며 강한 어조로 한류라는 이름 하에 고개를 들고 있는 민족주의 흐름을 경계했다. 그는 연예인으로 ‘우리나라 문화 알리기’보다는 ‘이웃나라와 친해지기’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이것은 이제 과거 노골적인 민족주의적 색채를 띠던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우리 문화’자체를 알리는 데도 상대방을 자극하지 않는 고도의 전략들이 요구된다는 말이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드러나는 민족주의 경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지금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배타적 민족주의적 정서를 통해 흥행의 한 요소로 끌어들이기에 가장 적당한 나라가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소위 ‘한일전’이라고 하면 제 아무리 비인기종목이라 하더라도 피끓는 감정으로 보던 스포츠경기의 흥행요소와 같다. 김진명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 남북이 공조해 일본에 핵미사일을 날리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보면 좀 과하다 할 정도이다. 물론 과거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최근 개봉했다 실패한 ‘한반도’의 경우에서 읽을 수 있듯이 배타적 민족주의에만 기대서는 자국에서도 해외에서도(이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상품가치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작년 한 해 TV 드라마를 채운 것은 다름 아닌 ‘고구려 사극들’이다. 중국의 ‘동북공정’을 공공연히 거론하며 제작한 이들 드라마를 가지고 한류상품을 만든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아니 오히려 이 드라마들은 반한류의 기류를 형성해 여타의 드라마 수출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러니 작년 한 해 우리가 한류라는 태극마크를 달아 해외에 판매할 수 있는 상품은 적을 수밖에 없고 그 적은 수마저도 이런 기류 속에서 판매부진을 낳을 수밖에 없다.

한류에 포함된 상품논리
우리나라에서 만든 문화상품에 우리의 민족적 정서가 들어가지 않을 수는 없다. 아니 오히려 그 민족적 정서 속에서 보편성을 찾아낼 때 세계와 소통할 수 있는 우리의 컨텐츠가 나올 수 있다. 이것은 거의 상식에 속하는 이야기다. 그럼에도 박진영씨가 스스로를 “애국자가 아닌 배신자”라 자칭하며 미국에서 음악을 만들 때 한국인임을 철저히 숨기며 만든 “흑인음악 속에 한국은 없었다”고 강하게 말하는 이유는 뭘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할 것은 ‘한류’라는 단어가 단지 ‘우리 문화’가 아닌 ‘우리의 문화상품’을 지칭하는 것이란 점이다. 즉 ‘한류’에는 그 안에 상품논리가 들어가 있다. 박진영씨의 글은 바로 이 상품에 대한 이야기며, 그 상품이 세워야할 전략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은 ‘우리 민족 최고’식의 사고방식으로 만들어진 대중문화는 절대 해외마켓에 내놓을 수 없다는 말이다. 이제 문화컨텐츠의 규모가 점점 커지면서 자국내의 시장만으로는 그 규모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세계 시장을 노릴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제 생존의 문제이다. 이런 마당에 굳이 반감을 가지게 하는 상품들을 만들 필요가 없다는 논리다.

만일 박진영씨의 글이 이런 해외를 겨냥한 문화상품전략에 대한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자칫 위험한 발언이 될 수 있다. 말 그대로의 ‘국적 없는 문화’는 의도하든 하지 않든 현재 거대자본과 세계적인 유통망과 힘을 가진 소위 선진대중문화의 세계화를 공고하게 해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은 좋지만 현실은 더 복잡하다. 따라서 우리는 싫더라도 현실적으로 냉정하게 해외 시장을 노리는 상품의 하나로 한류를 볼 수밖에 없다.

한류 속에 내포된 반한류
우리는 이 지점에서 처음 한류가 태동했던 곳으로 되돌아 가볼 필요가 있다. ‘한류’는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단어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네 드라마가 마구 들어오는 현상을 우려하면서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단어다. 그러므로 ‘한류’에는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이 들어있으며 그 자체로 ‘반한류’를 내포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한류가 세계적으로 흐르고 넘칠 때일수록 우리는 좀더 조심해야 하는 것이 상품 마케팅으로서는 더 유리하다.

게다가 한류는 특정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그저 문화종사자들이 열심히 컨텐츠를 생산하면서 자연스럽게 얻어진 결과이다. 그러니 여기에 어떤 목적이 가미된다면 그 때부터 컨텐츠는 자연스러움을 잃고 이지러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시장경제 논리와 마찬가지다. 잘 움직이는 시장에 국가가 손을 대면 경제는 어지러워진다. IMF에 각종 사건 사고들이 빈발하는 사회에 살아가면서 민족적 자긍심에 목말라 있는 우리에게 한류라는 냉수는 그 갈증을 해소시켜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아이템이다. 그러나 국가가 나서서 한류의 등을 두드려주는 것 자체가 문제의 씨앗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래도 이것을 민족주의로 포장하고 싶은 욕구들이 꿈틀댈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문제는 ‘과잉된 한류’이다. 우리 스스로 한류 한류 외치게 된 것은 어느 정도 조장된 결과이다. 그러니 이제는 굳이 우리 입으로 한류를 들먹이지 말고 좀더 차분하게 할 일을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하면 한류라는 막연한 태극마크에 기대 안이하게 제작했다 실패하는 사례도 줄어들 것이다. 완성도 높은 작품성에 승부한다면 민족적인 색채를 띤다해도 특별히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명성은 우리가 떠들고 다닌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닌 타인의 입에 의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지난 ‘100분 토론’은 ‘베르테르 효과’를 우려하게 될 정도로 계속되는 ‘연예인 자살’문제에 대해 다뤄졌다. 파급효과가 클 수 있는 연예인의 자살은 단지 연예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 하에 이뤄진 이 토론에서 쟁점으로 다뤄진 것들은, 왜 이런 자살이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가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시작해 그것이 개인의 문제인가 아니면 사회와 스타시스템, 무한경쟁 등이 복합적으로 얽혀있는 구조적인 문제인가였다.

논의에 의하면 연예인들을 자살로 내모는 이유 중 하나로 그 직업상 포장된 이미지와 실제의 자신 사이에 괴리가 크다는 점을 들었다. 사생활이 노출되면서 즉각적으로 피드백을 가져오는 미디어 환경 변화 또한 이유 중 하나였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보았을 때, 연예인이라는 특성의 한 면인 ‘상품화된 사람’의 문제로 보인다.

고인이 된 유니, 정다빈씨의 공통점으로 가장으로서 가족을 돌봐야 하는 압박감에 인기 하락 국면을 맞이했다는 것, 또한 성형 논란 이후 안티팬의 악성 댓글이 급증했다는 점 등을 들었는데, 이것은 사실 대부분의 연예인들이 공통적으로 갖는 고충이기도 하다. 소위 ‘잘 나갈 때’는 자신의 상품화가 아무런 문제를 만들어내지 않지만, 갑작스레 자신의 상품가치가 떨어질 때, 상실감은 바로 그 상품화된 자신에 대한 자조감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에 자신의 의지와 전혀 상관없이 논란에 휩싸여 악플의 공격을 받게 되면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상품은 외모적인 측면을 더욱 강조하는 여배우에게 더 가중된다. 패널로 참여한 김일중 방송작가에 의하면 “여배우들은 연기도 해야하고, 요조숙녀 같은 사생활을 가져야 하며, 게다가 섹시함을 갖춰야 하고 또한 소녀가장으로서의 역할도 해야하며, 공인으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여기에 자연미인으로서의 이미지까지 가져야 하는 실제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부역”에 시달리고 있다. 그렇다면 연예인들이 그렇게 된 데는 상품가치를 만들려는 기획사들 때문인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요구하는 상품구매자 즉 팬들 때문인가.

이것은 사실 어느 쪽의 문제가 아니라 연예인이라는 특정직업인을 사이에 두고 이루어지는 기획사와 상품구매자들 간에 공조에서 비롯된다. 한 패널이 말한 것처럼 “기획사의 역할은 라디오 스타의 안성기 역할”처럼 낭만적이지 않다. 기획사의 존재이유는 대중의 입맛에 맞는 연예인이라는 상품 개발과 그 개발된 상품을 활용한 이윤 창출에 있다. 물론 여기에는 이미지 관리 같은 연예인의 관리 부분이 들어가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품으로서의 이미지 관리다.

어찌 보면 연예인의 길로 들어서는 그 순간부터 본인들은 자신의 이미지를 상품화할 각오를 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 상품화되는 것이 물건이 아닌 사람이라는 것이다. 최불암씨는 “상품화되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사명감이나 본분 같은 걸 가져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연예인을 연예 상품이 아닌 한 사람으로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상품이미지로서의 관리뿐만 아니라 그로 인해 고통받는 한 사람으로서의 관리도 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관리 주체가 기획사가 되든 스타 스스로가 되든, 사람으로서의 관리가 이루이지지 않으면 결과적으로 상품의 종말로 이어질 수 있다.

영화평론가이자 심리학자인 심영섭씨는 ‘우울증 관리 시스템’을 도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연예인들이 마음놓고 상담을 할 수 있는 창구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우울증이라는 정신질환을 우리네 대중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질환자를 괴물 보듯 하는, 그래서 정신병원을 출입하는 것을 절대로 숨기려하는 사회적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아마도 연예인들이 우울증 상담을 선뜻 하기 어려운 것은 바로 이런 점들 때문일 것이다.

연예인 자살에 대해 다뤄진 ‘100분 토론’에서 드러나지 않게 논의된 것은 바로 상품으로서의 연예인과 인간으로서의 연예인 사이에 벌어진 대립이다. 자에 더 많은 방점이 찍혀지길 기대하며, 상대적으로 더 빈발하는 우울증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연예인들이 나오길 기대한다. 어쩌면 연예인들의 이런 적극적인 모습이 우울증에 대한 우리의 편견을 깨줄 수도 있지 않을까.

냉정과 열정 사이에 선 의사

생사의 갈림길에 선 의사와 환자들이 엮어 가는 본격병원드라마, ‘외과의사 봉달희’. 이제 본격적인 봉달희(이요원 분)의 위기국면이 시작된다. 그것은 처음부터 예고되었던 일이다. 이 모든 환자들을 자신의 동생처럼,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아이처럼 여기는 ‘인간적인 의사’라는 존재는 이상일 뿐, 현실은 아니다.

봉달희가 “의사도 사람이에요”라고 말할 때, 안중근(이범수 분)이 “누가 의사가 사람이래?”라고 되묻는 건, 감정이 들어간 판단은 오히려 환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말처럼 “너무나 살리고 싶은 환자가 있어 더 빨리 낫게 하려고 수치 이상의 항생제를 쓰면” 결국 환자는 죽게되는 것이다.

그래서 죽게되는 환아가 동건이다. 1차 항암치료에서 별다른 암세포의 변화를 보지 못하자 좀더 강력한 2차 항암치료를 강행했던 동건이는 일시적인 회복을 보이고는 결국 암세포의 급작스런 전이로 사망하게 된다. “왜 내게 희망을 주었냐”는 동건에게 “그래도 이겨낼 수 있다”고 2차 항암치료를 강권한 봉달희는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감정이 개입된 판단’으로 결국 환자의 죽음을 앞당기게 했던 것.

재미있는 것은 여기에 동건의 담당의로서의 조문경(오윤아 분)의 최종 결정이 개입되어 있다는 점이다. 조문경은 사망자컨퍼런스에서 자신은 이제 둔감해져 사라진, 열정을 갖고 있는 봉달희가 부러워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녀는 의사가 환자에 대한 열정으로 기적을 바라는 것은 잘못된 판단으로 환자를 괴롭힐 뿐이라는 점을 명확히 한다.

설상가상으로 위급환자를 돌보다 혈관이 터져 죽게 하자 봉달희는 공황상태에 빠진다. 그녀는 그 두 환자의 죽음을 동일선상에서 보게 된다. 병원에 나오 그녀를 두 남자가 찾아온다. 이건욱(김민준 분)은 집 앞까지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고, 안중근은 자신만의 버럭 스타일로 봉달희를 사망자컨퍼런스에 나오게 만든다. 여기서 안중근은 봉달희에게 그 두 죽음의 의미가 다르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동건의 경우에는 봉달희의 열정이 문제가 되었지만, 그 후에 사망한 위급환자는 제대로 된 판단과 처치를 다 했지만 사망했으므로 의사로서는 할 일을 다 했다는 판단을 내려준 것이다.

사실 우리는 ‘열정적 인간’과 ‘냉정한 의사’를 봉달희와 안중근, 전공의와 전문의, 신참의사와 고참의사로 나누어 보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안중근의 판단을 통해 그 둘은 서로 다른 존재가 아니라 한 고민하는 의사 속에 내재된 두 가지라는 걸 깨닫게 된다. 결국 봉달희에게도, 안중근에게도 이 두 가지는 공존한다는 것. 이것이 공존하기 어려운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의사라는 직업의 특성상 자신의 판단이 환자를 즉각적인 삶과 죽음으로 갈라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드러운 남자, 이건욱의 걱정이나 버럭 남자 안중근의 채찍질 그 어느 것도 낙오자가 되는 위기에 처한 봉달희를 구해내지는 못한다. 봉달희를 낙오자의 길에서 빠져나오게 하는 건 다름 아닌 자신을 고통스럽게 한 환자들이다. 병원에 있는 환자들이 제대로 처치를 받고 있는가를 자꾸만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길을 가다 우연히 본 기흉 환자를 응급처치하는 봉달희는 다시 의사의 길로의 복귀를 예고한다.

결국 의사를 의사답게 만드는 것은 환자가 아닐까. 안타까운 환자 앞에서 인간적인 열정에 휩싸이다가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냉정한 판단을 해야하는 의사라는 직업 속에서 봉달희는 물론 안중근의 면면이 새롭게 보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늘 환자와 전공의들 앞에서는 냉정한 모습을 보이지만 환자 옆에서 잠든 봉달희의 어깨에 아무도 모르게 옷을 덮어주는 열정을 갖고 있는 안중근에서 의사의 진면목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봉달희와 안중근이 전혀 다른 듯 하면서도 같은 류의 의사로 보이는 이유다.

영화와 현실의 벽을 넘는 ‘그놈 목소리’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을 다룬 ‘그놈 목소리’는 여러 모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영화다. 아버지가 뉴스앵커라는 설정 이외에는 거의 실제상황과 같게 만들어진 이 영화는 강력범죄가 끊이지 않던 1990년대로 시간을 되돌려놓는다. 그리고 아릿한 기억 속에 뉴스의 한 장면으로 보고 스쳐지나갔던 한 아이를 떠올리게 만든다.

한경배와 관객에게 남 일이었던 것
아이러니하게도 영화는 뉴스앵커 한경배(설경구 분)가 한 아이의 유괴 살해사건을 소개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제 한시도 아이를 마음놓고 내보낼 수 없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심각한 얼굴로 이렇게 말하지만, 화면 밖에서는 함께 진행하던 여 아나운서와 농담을 주고받는 한경배 앵커는 그러나 그것이 자신의 일이 될 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 때까지 그것은 불행한 사건이지만 내 일이 아닌 남 일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영화를 보기 직전까지 관객의 상황과 동일하다. 故 이형호 유괴 살해사건은 한경배 앵커가 뉴스의 하나로 생각했던 것처럼 관객들에게도 지나간 하나의 뉴스에 지나지 않았다. 영화는 어찌할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는 유괴된 상우의 부모들과, 이와는 전혀 상반되게 지긋지긋할 정도로 무능하고 무책임하기까지 한 타인들을 극적으로 대비시킨다.

당사자들만 내 일로 여기는 사회
과학수사보다는 몸으로 때우는 잠복수사에 이골이 난 김욱중(김영철 분) 강력계 형사는 오히려 ‘그놈’에게 붙잡히고, 노반장(송영창 분)은 감으로 엉뚱한 인물들을 혐의자로 잡아 심문한다. 그들은 목소리 분석이나 필체 분석을 통한 과학수사를 무시해버린다. 그들이 입만 열면 냉소적인 목소리로 ‘과학수사’를 떠들어대는 것은 당시 과학수사라는 것이 실종 상태였다는 걸 거꾸로 보여준다.

그러니 상우의 부모는 이 형사들을 믿을 수가 없어진다. 그래서 직접 돈 가방을 들고 ‘그놈’이 시키는 대로 따르며 보내달라고 애원하는 것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다. 그런데 이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를 위해 동분서주하는 상우의 부모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들은 너무나 많다.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들로 시간에 맞춰 ‘접선장소’로 갈 수 없는 장면들은 여러 번 반복된다.

그러나 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급한 건 당사자뿐이다. 타인들은 이 유명한 앵커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하고 사진을 찍으려고만 든다. 아무도 모르게 ‘그놈’과의 약속장소로 나가버린 아내를 찾기 위해 교회로 뛰어드는 한경배에게 사람들은 자초지종 같은 것을 묻지 않는다. 그저 “이러시면 안된다”, “여기는 교회다”라며 밖으로 내쫓는 게 일이다.

당신이 불편하지 않았던 것은
그런데 영화는 그다지 처음부터 관객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아마도 실제 사건의 당사자들이 얽혀 있는 만큼 좀더 극적인 연출을 배제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진짜 영화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영화 탓이라기보다는 관객의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연출 속에서 어느 정도는 의도된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그 영화 속에서 타인의 불행을 방관 내지는 ‘남 일’ 취급하는 사람들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느끼게 되는 순간부터 마음은 조금씩 불편해진다. 그것은 도대체 저 평범한 부부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 저토록 고통받아야 하고, 우리는 왜 그 고통을 남 일처럼 방관하고만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다.

남 일이 내 일이 되는 순간
그리고 이미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는 참으로 요령부득의 불편함과 안타까움이 커질 수밖에 없다. 저 애타게 뛰어다니는 모습이 결국은 아무런 소득도 없는 절절한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 차츰 ‘남 일’이 아닌 ‘내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차가운 시신으로 돌아온 아이의 아버지이자 앵커인 한경배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는 앵커로서 아이의 죽음에 대해 감정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진술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그 선을 넘어버린다. 아마도 그 순간 TV 뉴스를 잠깐 본 사람이 있다면 그들은 우리가 애초에 영화관에 들어서기 전이나 혹은 한경배가 타인의 유괴사건을 보도하던 그 때의 마음처럼 “저건 뭐야?” 하는 정도로 그 눈물을 흘리는 앵커를 바라봤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화를 처음부터 보아온 관객으로서는 그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을 재간이 없다. 영화 속의 사건은 그 순간, ‘남 일’에서 ‘내 일’이 된다.

영화가 현실이 되는 순간
한경배가 “범인을 잡을 수 있게 한번만 도와주세요”하며 오열하는 동안, 영화는 그 때를 놓치지 않고 커다랗게 자막을 올려놓는다. ‘지금부터 이 소리를 귀기울여 들어주십시오.’ 여기서 영화는 그 안전한 스크린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갑자기 현실로 파고든다. 언제든 돈 내고 보거나 보지 않거나 선택할 수 있는 영화라는 ‘남 일’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이 영화는 이렇게 ‘남 일’을 ‘내 일’로 들여다볼 것을 촉구한다. ‘그 놈 목소리’는 점점 현실과 동떨어진 ‘남 일’의 환타지가 되어 가는 최근의 우리네 영화들 속에서 오랜만에 ‘내 일’로 보여지는 ‘쓸 모 있는’ 영화다. 이 영화를 보면서 불편했던 분들이 있었다면 최소한 이 영화는 제 가치를 해낸 것이다. 여러분은 어떤가. ‘그놈 목소리’는 여전히 ‘남 일’인가. 아니면 ‘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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