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욕하면서 봤던 드라마

욕하는 것만큼 쉬운 비평이 없다고 한다. 흠을 잡아내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일까. 2006년 시청률 상위의 드라마들은 대부분 욕을 먹었다는 것. 그것은 분명 그럴만한 소지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어쩌면 욕을 먹는다는 건 그만한 기대감이 컸다는 반증은 아니었을까. 올 가장 화제가 된 SBS‘하늘이시여’, KBS‘소문난 칠공주’, MBC‘주몽’을 예로 들어, 많은 욕을 먹었으나 시청률은 높았던 드라마들의 논쟁점과 완성도, 중독성 등을 체크해보자. 혹 욕에 가려져 보지 못한 미덕을 발견하게 될지 누가 아는가. 어쩌면 시청률과 욕의 상관관계가 밝혀질 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늘이시여’, 논란드라마의 정수를 보여주다
지난 12월13일 민주언론시민연합에 의해 올해의 나쁜 방송으로 꼽힌 SBS ‘하늘이시여’는 논란드라마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본때를 보여준 드라마. 방영되기 전부터 자신의 친딸을 며느리로 맞아들이는 시어머니와 호적 상 외삼촌을 사랑하는 조카의 관계 설정으로 ‘패륜 드라마 논란’을 일으켰다. 이영희 PD는 이에 대한 해명과 함께 “친 피붙이와 같이 키운 아들을 실제 친 피붙이인 딸과 결혼시키는 이 딜레마가 이 작품이 시청자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셀링 포인트(selling point)다”라고 덧붙여 사실상 논란드라마가 핵심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지난 해 9월10일 13.5%의 시청률로 시작한 ‘하늘이시여’는 2회부터 ‘분장사 비하 발언’으로 논란거리를 만들었다. 이후 배득(박해미 분)의 악녀 열연으로 조금씩 시청률을 높여간다. 11월 통산 18.4%의 안정된 시청률을 확보한 ‘하늘이시여’는 10회 연장 방영을 결정한다. 이것이 첫 번째 연장이다. 그리고 1월 특정 운동기구의 특징과 사용방법 등을 무려 5회에 걸쳐 방영하는 간접광고로 방송위원회로부터 법정제재를 받는다. 또한 어릴 때 헤어졌던 친딸을 나중에 며느리로 삼는다는 이야기의 기본 구조가 일본작가 렌조 미키히코의 84년작 단편소설 ‘어머니의 편지’와 유사하다며 표절 의혹에 휩싸인다.

이러한 논란에 힘입어(?) 1월 21.5%의 시청률을 확보한 ‘하늘이시여’는 2월 25.4% 시청률을 기록하며 75회로 연장을 결정한다. 두 번째 연장이다. 드디어 3월 28.8%의 시청률로 전체 시청률 1위를 차지한 이 드라마는 4월에 다시 81회로 연장을 결정한다. 세 번째 연장. 그 와중에도 논란은 계속되어 치위생사 비하발언이 불거진다. 5월에 30%대를 넘긴 ‘하늘이시여’는 다시 4회 연장을 결정하고, 6월에는 행정중심 복합도시 건설청장이 직접 출연해서 불거진 ‘국정 홍보 논란’이 벌어진다. 드라마가 종반으로 향하면서 친딸을 며느리 삼는 문제에서 더 나아가, 홍파(임채무 분)와 영선(한혜숙 분)의 결혼 등으로 논란은 더 커져갔다. 여기에 무리한 설정에 따른 등장인물들의 어이없는 죽음으로(홍파의 처 은지와 배득의 친구 소피아) 이른바 살생부 논란이 이어졌다. 이로써 7월에 40.2%의 시청률로 ‘하늘이시여’는 욕하면서 보는 드라마란 오명을 남기고 종영했다.

제2의 ‘하늘이시여’, ‘소문난 칠공주’
4월에 시작된 ‘소문난 칠공주’는 시청률 50%를 넘긴 ‘바람은 불어도’(1996), ‘애정의 조건’(2004), ‘장밋빛 인생’(2005)등에서 성공을 보여준 문영남 작가를 내세워 주말 볼만한 가족드라마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놨다. 그 기대감 때문이었을까. 단 한 달만에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한 ‘소문난 칠공주’는 5월 드디어 그 본 모습(?)을 드러낸다. 덕칠(김혜선 분)의 자극적인 애정신 묘사가 나오더니, 급기야 임신한 딸을 질질 끌고 가는 장면이 방영된 것이다. 바로 그 다음주에는 덕칠의 바람피는 장면을 목격한 남편 구수한(이대연 분)이 덕칠의 뺨을 때리는 장면과 이혼만은 안 된다며 덕칠이 자신의 손으로 자기 뺨을 때리는 장면이 방송됐다. 여기에도 모자라 덕칠 앞에서 구수한이 룸살롱 접대부들을 끌어안은 채 덕칠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시키는 장면이 나왔다. 이 정도 되면 주말 온 가족이 단란하게 모여 앉아 볼 수 있는 드라마는 포기한 것이다.

논란에도 불구하고 시청률은 계속 올라 7월 29%를 넘어 8월 33.6%의 시청률을 기록한다. ‘소문난 칠공주’는 비장의 카드를 꺼내놓는다. 겁탈장면이 무분별하게 방송되는가 하면, 설칠이 친딸이 아니라는 출생의 비밀이 노출되면서(친부의 죽음이 나양팔과 관련이 있지만) 자신을 키워준 부모를 원수라고 표현하고 분노하는 대목이 나와 억지스럽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9월에 여타의 논란 드라마와 마찬가지로 30회 연장방영(총 80회)을 발표했고, 특정 제품의 간접광고로 권고조치를 받았다. 9월에 특히 논란을 많이 일으킨 인물은 셋째딸 미칠(최정원 분). 그녀와 시댁의 트러블이 자극적으로 방영되며 시청률을 35%대로 높였다. 이제 거의 포기하면서 관성으로 보게 되는 이 중독적 드라마는 한동안 이혼이나 여성비하 문제를 드러내며 40%대 고지를 향해 달려간다. 그리고 12월에 들어 미칠의 이혼사실을 알게 된 어머니(김해숙 분)가 “사위자식 개자식”이라는 대사를 내보네 막말논란을 일으켰다. 이로써 제2의 ‘하늘이시여’라는 명성(?)을 얻은 ‘소문난 칠공주’는 ‘주몽’의 시청률을 위협하며 순항(?)중이다.

완성도에 대한 논란, ‘주몽’
위 두 편의 드라마가 주로 억지설정이나 자극적인 진행 등으로 논란을 일으켰다면 ‘주몽’의 논란이 위치한 지점은 이것들과는 다르다. ‘주몽’은 주로 드라마의 완성도에 대한 논란이 많이 일었던 점으로 미루어 높아진 기대치에 미치지 못한 결과로 생긴 논란으로 보는 게 옳다.

‘주몽’이 처음 직면한 문제는 역사고증 논란이었다. 등장인물의 의상이 중국풍이며, 건축물도 조선시대 양식이고 고조선이 한나라의 철기문명에 멸망했다는 드라마 도입부 설정은 거짓이며, 주몽과 소서노, 예씨 부인의 삼각관계가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는 점 등 퓨전사극이 가진 논란거리에 휩싸인 것이다. 그러나 ‘주몽’은 5월 첫방영에서부터 7월 말까지 단숨에 37%대의 시청률을 기록하면서 호평을 받았다. 그런데 그때부터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이른바 ‘소금산 에피소드’에서 실망한 누리꾼들은 8월 부영이 중도하차하자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다 9월에 들어 함량미달 전투신 스케일 논란이 고개를 쳐들었다. 주몽이 이끄는 별동대의 스케일이 고작 십수 명에 불과하다는 점은 300억 드라마라는 명성을 무색하게 했다. 그리고 40%대의 장벽을 맞은 ‘주몽’은 ‘주몽없는 주몽’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통해 그 고지를 가볍게 넘어선다. 이 즈음 방송시간을 10분씩 더 잡아 광고수익을 높였다는 방송시간 편법운용 논란이 불거졌다.

그리고 10월에 들어서 여타의 논란드라마처럼 ‘주몽’도 슬슬 연장에 대한 논의가 일어났다. 이미 45%대의 시청률을 확보한 상태였다. 완성도에 대한 비판 여론도 깊어져 중순에는 ‘주몽은 납치 전문 판타지 드라마’라는 오명을 얻기도 했다. 11월은 한달 내내 연장에 대한 논란이 이어졌다. 최완규 작가의 연장불가 발언, 송일국의 연장 불가 선언, 그러나 약 2주도 되지 않아 송일국과 최완규의 연장 수용으로 이어지면서, 12월1일 송일국 20회 연장 최종 합의로 연장은 결정되었다. 포커스를 송일국의 입에 맞춤으로서 시청자들의 의견은 교묘하게 무시되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 이른바 ‘신물3종세트’논란이 이어지면서 이제는 사극으로서의 주몽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욕과 시청률과 완성도의 함수관계
위의 세 드라마를 하나로 싸잡아 이야기할 수는 없다. 논란의 포인트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주몽’의 경우, 시청자들의 더 높은 완성도에 대한 주문으로 논란을 이해할 수 있지만, ‘소문난 칠공주’의 경우에는 기대감보다는 극중 자극적 설정들에 대한 혐오감 내지 분노가 논란의 이유였다. 여기에 ‘하늘이시여’는 이러한 드라마 내적인 논란은 물론이고 외적인 논란까지 덧씌워 논란드라마의 정수를 보여주었다.

당연히 욕을 많이 먹는 드라마는 시청률이 높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그만큼 많이 보고 관심도 많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층위는 존재한다. 그것은 의도성의 문제다. ‘주몽’은 의도했다기보다는 자연스레 불거져 나온 것으로 보이지만, 나머지 두 드라마는 애초부터 의도했다는 혐의가 짙다. 그것은 최초 설정 자체부터 논란의 씨앗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들 드라마들을 모두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실 소재와 설정과 주제가 비정상적이고 자극적이라는 면을 빼놓고 보면, ‘하늘이시여’의 완성도는 높은 편이라 말할 수 있다. 우리네 가족관계가 가지고 있는 어찌할 수 없는 혈연의 끈끈함을 이 드라마는 정곡으로 찌르고 있다. 반면 ‘소문난 칠공주’는 완성도 면에서 여러모로 떨어진다. 이 주말극이 일일극의 느낌을 주는 것은 그때그때 임기웅변적인 사건 전개가 눈에 띄기 때문이다. 한편 ‘주몽’은 어느 정도의 완성도를 가지고 있지만 시청자들의 더 높은 기대치에는 못 미치는 것 같다.

당연히 욕 또는 시청률은 완성도와 별 관계가 없다. 다만 욕이나 시청률이 관계가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중독성이다. 이 세 드라마는 모두 고른 중독성을 갖고 있다. 아무리 이성적으로 나쁘다 판단되어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논란드라마가 확보하려는 궁극적인 것은 바로 이 중독성이라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시청률과 완성도는 마치 비례하는 것처럼 오인되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라는 점이다. 시청률과 비례하는 건 중독성이다.

◆ 논란일지
하늘이시여
2005  9월10일 : 첫 방영
  9월11일 : 분장사 비하 발언
10월23일 : 배득의 이해할 수 없는 신데렐라 괴롭히기
11월16일 : 10회 연장 결정
2006   1월4일 : 간접광고로 방송위원회로 부터 법정제재
  1월19일 : 렌조 미키히코의 작품 표절 의혹
  2월27일 : 75회로 연장결정
  4월11일 : 81회로 연장결정
  4월24일 : 치위생사 비하발언
  5월20일 : 4회 연장결정
  6월5일 : 행정도시 홍보 논란
  6월17일 : 소피아의 죽음으로 살생부 논란
12월13일 : 민주언론시민연합 올해의 나쁜 방송 선정

소문난 칠공주
2006   4월1일 : 첫 방영
  5월22일 : 자극적 애정신 묘사/ 임산부 논란
  5월27일 : 룸살롱 시퀀스 논란
  8월2일 : 겁탈장면 방송
  8월13일 : 설칠의 키워준 부모 원수 발언 논란
  9월5일 : 80회로 연장결정
     9월 : 방송위, 마루제품을 간접광고로 권고조치
  9월25일 : 미칠의 시댁 트러블 설정 논란
12월10일 : 사위자식 개자식, 막말 논란

주몽
2006   5월1일 : 역사고증 논란 시작
  5월15일 : 첫 방영
  5월31일 : 방송시간 연장 논란(10분 더)
  7월25일 : 소금산 에피소드 논란
  8월7일 : 부영 중도하차 논란
  9월5일 : 함량미달 전투신 스케일 논란
  9월6일 : 예소야 송지효 캐스팅 논란
  9월13일 : 주몽 없는 주몽 논란
  9월18일 : 소탄등에 대한 고증 논란
  9월26일 : 방송시간 편법운용으로 광고이익 증가 논란
  10월9일 : 연장성 논란 시작
10월17일 : 납치 전문 판타지 드라마 논란
11월12일 : 최완규 연장 불가
11월15일 : 송일국 연장불가
11월27일 : 송일국 연장 수용
11월28일 : 최완규 연장 수용
  12월1일 : 송일국 20회 연장 최종 합의
  12월5일 : 신물3종세트 논란

답은 신파²이 아닌 사랑과 욕망의 방정식

MBC 수목 드라마, ‘90일, 사랑할 시간’은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현지석(강지환 분)이 죽기 전 세 달 동안 옛 애인과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의 이야기다. 현지석과 그의 옛 애인 고미연(김하늘 분)이 각각 결혼을 한 유부남, 유부녀라는 점에서 이 드라마는 불치병 코드에 불륜 코드까지 뒤섞여 있는 셈이다. 어느 하나만 소재로 잡아도 신파의 혐의가 짙어지는 이 드라마. 그래서 이 드라마는 두 개의 자극적인 소재를 합쳐 두 배의 신파극을 연출했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 만일 신파로 끌고 가려 했다면 불륜이나 불치의 코드는 더 많이 가려지고 숨겨졌어야 옳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일찍부터 현지석과 고미연의 불치, 불륜의 이야기를 당사자들은 물론이고, 현지석의 아내, 박정란(정혜영 분)과 고미연의 남편, 김태훈(윤희석 분)에게 드러내놓는다. 따라서 드라마는 불륜과 불치가 이끄는 신파로 흐르지 않고 이 극한적 상황, ‘90일, 사랑할 시간’이란 실험대 위에 올라선 ‘네 인물의 사랑과 욕망 방정식’을 보여준다.

사랑이냐 욕망이냐 그것이 문제
프로이트는 <쾌락원리를 넘어서>에서 욕망을 충족시키는 유일한 대상은 죽음뿐이라고 했다. 이 말은 이런 말도 된다.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건 욕망이지 욕망은 채워지지 않는다. 욕망은 미망이고 허상이다. 하지만 그것이 실재가 아니기에 우리는 또한 살아가게 된다. ‘90일, 사랑할 시간’이 네 명의 등장인물에게 제시하는 건 바로 이 죽기 전 남은 90일 간의 시간이다. 그들에게 갑작스레 던져진 이 시험은 그들을 사랑과 욕망 사이에서 방황하게 만든다.

현지석은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끼는 그 순간, 자신의 삶이 잘못되었다고 느낀다. 남은 시간이라도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과 보내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고미연에게 달려간다. 그런데 그것은 과연 그가 바라던 사랑이었을까. 막상 고미연을 만난 그는 그것이 사랑인지 욕망인지 헷갈리게 된다. 그녀의 행복을 위해서 가만 내버려두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 한 순간이라도 진정한 사랑을 불태워야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고미연 역시, 자신에게 헌신적인 남편 태훈을 버리고 현지석에게 달려간다는 것이 욕망인지 사랑인지 알 수가 없다. 이것은 정란이나 태훈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남편과 아내가 사랑한 사람이 자신이 아닌 타인이었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 그렇다고 얼마 남지 않은 삶, 이미 진실도 알아버린 상황에 그들을 붙들고 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일까. 혹시 그건 자신의 욕망일 뿐 아닌가.

당신은 정말 잘 하고 있나요
현지석과 고미연은 자신들을 붙들고 있는 현실에서 도망치려하는 중이고, 정란과 태훈은 자신들을 떠나려는 현실을 붙잡아매려는 중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고민한다. ‘과연 내가 제대로 잘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말이다. 이로써 드라마는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얄팍하고 깨지기 쉬운 것인가를 보여준다. 극화된 것은 우리의 긴 삶을 90일이라는 시간에 가둔 것뿐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 삶 속에서의 사랑과 욕망이라는 주제로 의미가 확장된다. 그들은 거기 욕망이 있다고 생각하면 달려갈 것이고, 그 욕망이 충족되는 순간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하지만 어쨌든 그들은 그 욕망으로서 살아간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이 네 사람의 사랑과 욕망 줄다리기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죽음뿐이다. 이 방정식을 통해 드라마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는 것 같다. 당신은 정말 잘 하고 있나요.

영화감독 브랜드 시대

당신은 어떤 브랜드의 영화감독을 좋아하나요? 어쩌면 앞으로 영화를 골라보는데 이런 질문들이 기준이 될 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영화감독이 가진 브랜드 이미지가 영화의 성패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는 시대다. 올 한해 우리 영화의 성적표를 보면 작품성이나 상업성 이외에 영화감독의 이미지 또한 흥행에 관건이 되었던 징후들을 읽을 수 있다. 그렇다면 올해에는 어떤 브랜드 이미지를 가진 감독들이 어떤 영화를 들고나와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휴머니스트, 이준익
올 한 해 가장 주목받은 감독은 이준익이다. 작년 말에 개봉한 ‘왕의 남자’가 1230만 명이란 대기록을 세우면서 브랜드 가치를 최대로 높인 이준익 감독. 그 정도면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갈 만 했다. 좀 쉬어가면서 대작을 준비할 만도 했던 이준익 감독은 올 9월 예상을 깨고 조금은 평범한 ‘라디오 스타’를 들고 돌아왔다. 1천만 관객 동원 감독의 작품이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어깨에 힘을 쭉 뺀 이 작품은 1백만 관객을 동원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이준익의 휴머니스트 브랜드 이미지를 만드는데는 충분했다. 늘 소외되고 주목받지 못하는 마이너리티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담아내는 감독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괴물, 봉준호
봉준호 감독은 대중성과 작품성 양쪽의 줄을 놓지 않는 감독. 그간 영화계와 관객 모두에게 주목받아온 감독이다. 전작 ‘살인의 추억’에서 대중적인 형사물을 바탕으로 시대적 비의를 담아내는 작품성을 보이며 그 가능성을 예감케 한 바 있다. 영화 ‘괴물’은 역시 그 연장선상에 서서, 괴수영화의 재미에 독특한 풍자의 세계를 그려 넣으면서 올 최다관객을 집어삼켰다. 봉준호는 장르의 변용을 통해 그로테스크하면서도 독특한 재미를 주는 감독으로 괴물의 이미지를 고스란히 갖고 있다. 

타짜, 최동훈
영화 ‘타짜’로 하반기 영화관을 달구었던 최동훈 감독은 스타일리스트다. 작가주의 감독이라기보다는 주어진 작품을 최대한 멋지게 만들어내는 장인이라 할 수 있다. 전작 ‘범죄의 재구성’이 스타일에 비해 내러티브가 떨어지던 단점을, ‘타짜’에서는 허영만의 원작이 커버해주면서 영화는 폭발력을 얻었다. 그 역시 봉준호 감독의 괴물 이미지처럼, 저 현란한 손 기술로 상대를 정신 없게 만드는 타짜를 닮았다.

마케터, 강우석
강우석 감독의 이미지는 마케터이다. 그의 작품의 성공 요인은 종종 영화 자체보다는 마케팅에서 찾아진다. ‘실미도’가 그렇고 ‘한반도’가 그렇다. 이 민족주의를 자극하는 소재들은 적당한 영화적 설정들로 포장되어 영화 시장에 나온다. 억지스런 느낌이 강하지만 어쩔 수 없이 보게되는 그런 영화들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기억에서 사라진다는 것.

지능적인 파이터, 류승완
류승완은 이제 저 주먹과 발길질이 오가는 액션 영화에서 자신만의 무공을 완성해가고 있는 듯 하다. 누구나 그 이름을 떠올리면 액션을 떠올리는 감독이 된 것이다. ‘짝패’에서 보여준 그의 액션이 여타의 것들과 다른 점은 한국적이라는 것. 중국식의 뻥도 없고 일본식의 비장함도 없는 약간은 개싸움 같지만 리얼한 그것이 류승완표의 액션이다. 또한 그 액션이라는 재미의 결에 이제 차차 사회적 내러티브를 넣으려는 의도가 보이는 지능적인 파이터다.

빅 마우스, 김기덕
아마도 브랜드 이미지를 가장 잘못 구축한 감독이 김기덕일 것이다. 영화감독의 브랜드 이미지가 영화에 어떤 악영향을 미치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감독이다. 물론 자신을 그렇게 만든 것은 우리네 영화환경이라고 뒤집어 말하지만, 그것조차 관객들로부터 외면되는 감독이다. 그렇게 된 데에는 영화 전편에 흐르는 불쾌한 이미지들이 한 몫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후기 작품에서는 그런 경향이 많이 줄고 전작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되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 강력하게 남은 이미지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영화로가 아닌 말로 더 주목을 끄는 불행한 감독이 되었다.

천재적인 백수, 홍상수
홍상수 감독이 위치한 이미지는 천재와 백수 사이의 그 어떤 것이다. 그의 영화가 가진 이미지는 무언가 나른하고 일상적이며 지루하지만 그 속을 뚫어지게, 집요하게 쳐다보면 무언가를 발견해내는 그런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의 발견’이 가진 룸펜의 느낌이 관객들에게 그다지 어필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해변의 여인’ 역시 일상을 다루는 영화. 전작과 달리 홍상수식 유머로 대중성이 확보된 영화이기고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대부분의 관객들은 홍상수 감독의 이미지가 부담스러운 모양이다.

박찬욱표, 박찬욱
박찬욱 감독이 새롭게 들고 나온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이견이 많지만 대체적으로는 긍정적으로 보는 것 같다. 복수시리즈의 끝에 새로운 작품 ‘박쥐들기 전 간주곡 정도로 만들었다는 이 작품은 그러나 그 완성도에 있어서 박찬욱표라고 붙이기에 충분한 영화다. 애매모호한 화법과 낯선 영상을 만들어내는 그만의 스타일은 이제 그의 영화에 ‘박찬욱표’라는 이니셜을 붙이게 만든다.

더 많은 관객유발자들이 나오길
이밖에도 주목할만한 감독으로는 ‘비열한 거리’의 유하가 있다. 그는 시인이라는 출신성분에서도 드러나듯 톡톡한 내러티브의 맛을 잘 살려내는 감독이다. 올 들어 새롭게 주목받는 감독으로 ‘사생결단’의 최호, ‘구타유발자들’의 원신연이 있다. 최호 감독은 이소룡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사생결단’의 그 독특한 스타일이 눈에 띄는 감독이고, 원신연은 아직은 매니아적이지만 독특한 작품세계를 예감케 하는 감독이다.

스크린쿼터의 위기감 때문이었을까. 유달리 우리 영화가 많았고, 성공작도 많은 반면,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진 작품들도 많았던 한 해였다.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감독들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영화의 폭이 다양하고 넓어진다는 뜻도 된다. 그 많은 감독들의 브랜드 중에서 여러분들은 어떤 색깔의 감독을 선택할 것인가. 영화감독도 브랜드 시대다.

고구려 사극들이 동시에 각 방송사에서 터져 나오다보니 묘한 일들도 벌어진다. 세 편의 고구려 사극 중, MBC 드라마 ‘주몽’이야 그 역사적 시기가 동떨어진 데다 방영요일도 달라 그다지 큰 영향은 없다. 하지만, 주말 저녁 시간대의 KBS ‘대조영’과 SBS ‘연개소문’은 다르다. 이 두 드라마는 역사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는 데다 같은 요일, 비슷한 시간대에 방영되기 때문이다. 두 드라마가 영향을 주고받는 그 중심에는 바로 연개소문이란 인물이 있다.

‘연개소문’엔 없고, ‘대조영’엔 있는 것은?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는 ‘연개소문’과 ‘대조영’은 초기 이야기 설정 부분에서 엉뚱한 인물들에 초점이 맞춰졌다. SBS 사극 ‘연개소문’은 청년기로 들어서면서 연개소문보다는 수양제쪽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했다. 한 회분에서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시간은 고작해야 10분을 넘지 않는데, 훨씬 많은 시간이 수양제에게 할애되었다. 그것은 사극을 끌어가는 구심점으로 젊은 연개소문의 힘보다 수양제의 그것이 더 강력했기 때문이다. 최근의 상황을 보면 ‘연개소문’이란 제목이 무색할 지경이다.

반면 KBS 사극 ‘대조영’은 정통사극을 표방하며 대조영이란 인물이 차곡차곡 극의 힘을 쌓아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중간에 대조영만큼 강력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대중상, 양만춘, 연개소문이 그들이다. 그들 중 최근 최후를 맞이한 연개소문의 힘은 ‘대조영’이란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구심점이 되었다. 실제 아버지인 대중상보다 연개소문이 더 대조영의 아버지 같이 그려지는 것은 그 힘을 어느 정도 주인공에게 분산해 가지려는 드라마의 의도일 것이다. 그것은 또한 ‘그의 최후로 인해 고구려가 무너진다’는 극 본연의 설정에도 부합하기 때문에 연개소문의 드라마 장악력은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연개소문이란 역사적 인물은 SBS 사극 ‘연개소문’엔 없고 KBS 사극 ‘대조영’엔 있는 인물이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 역할을 맡은 연기자들의 공력 또한 중요한 요인이 됐다. ‘연개소문’에서 수양제 역할을 맡은 김갑수는 광기 어린 황제의 모습을 그려내며 사극의 또 다른 재미인 ‘강한 적’의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한편 ‘대조영’에서 연개소문 역할을 맡은 김진태는 카리스마 연기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보여주고 인상적인 최후를 맞았다.

‘대조영’의 연개소문 사망 그 후
이렇게 해서 두 사극에서 동시에 존재하던 한 연개소문은 사라졌다. 그런데 ‘대조영’에서 죽은 연개소문의 유령이 SBS 사극 ‘연개소문’ 주변을 어슬렁거린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그것은 ‘대조영’의 연개소문이 살아있을 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을까. 만일 ‘대조영’ 없이 단독으로 ‘연개소문’이 방영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연개소문이란 역사적 인물이 어디서도 각인되지 않는 상황에서 지금처럼 주인공 없는 '연개소문'이란 드라마를 시청자들이 얼마나 참을성을 갖고 봐줄 수 있었을까.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연개소문’에는 없는 연개소문이 같은 시간대 ‘대조영’에는 있었다. ‘대조영’을 통해 역사적 인물인 연개소문에 대한 강한 호기심을 유지할 수 있었고, 그것은 역할을 다하고 사망한 뒤에도 여전히 남았다. 그리고 이제 몇 회분이 지나면 사람들이 기대하는 유동근의 연개소문을 보게 될 터이니, 사실 이 연개소문 없는 ‘연개소문’의 시기를 메워준 것은 ‘대조영’의 공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대조영’의 카리스마들, ‘연개소문’에서 기대된다
비슷한 소재를 같은 시간대에 양 방송사에서 방영하는 것은 때론 혼동을 낳게 만들며 이것은 비판의 소지가 충분하다. ‘대조영’의 양만춘을 보다가 ‘연개소문’의 양만춘을 보면서 헷갈리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혼동에 의해 ‘연개소문’은 톡톡한 이점을 얻게 되었다. ‘대조영’에서 우리는 이미 대조영만이 아닌 양만춘, 대중상 같은 여러 장수들의 매력적인 카리스마를 목격했다. 그러니 지금 저 ‘연개소문’에서 나오는 젊은 양만춘에게 어찌 관심이 가지 않을까.

이것은 저 드라마 ‘주몽’의 시청자들이 RPG 게임처럼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되는 주몽에 매료되었던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대조영’에서 등장한 카리스마들이 하나의 예고편 역할을 해주었다면 우리는 ‘연개소문’에서 그들의 성장과정, 혹은 성장한 모습을 기대할 것이다. 반면 ‘대조영’은 이제 이 카리스마들을 떨구고 자신만의 외로운 길을 새로 개척해나가야 되는 불리한 상황이 됐다. 하지만 결과를 속단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연개소문’에 새롭게 생긴 이 기대감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것은 더 깊은 실망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늘 새롭게 시작해야 하는 ‘대조영’은 오히려 홀가분하게 맘껏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두 사극의 향방이 자못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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