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밥 백선생>, 흔한 식재료의 가치

 

<집밥 백선생>에서 백종원이 얘기한대로 사실 이맘때면 처치 곤란한 것이 작년쯤 부모가 담가 보내줘 이제는 시어빠진 묵은지다. 버리기는 아깝고 그렇다고 그냥 먹기도 곤란하지만, 아마도 엄마가 해줬던 음식을 기억하는 이들은 묵은지를 이용한 김치찜이나 찌개가 그 어떤 음식보다 맛이 좋다는 걸 안다. 문제는 그 맛을 알아도 어떻게 요리해야 되는지 잘 모르고 또 엄두도 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래서 혼자 사는 이들에게 묵은지는 골칫거리일 수밖에 없다.

 


'집밥 백선생(사진출처:tvN)'

<집밥 백선생>에서 백종원이 묵은지를 재료로 들고 나온 건 그래서다. 사실 요리 좀 한다는 사람들에게 묵은지 요리가 새로운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냉장고에서 풀풀 냄새를 풍겨가며 익어가는 묵은지가 주는 고충을 마치 너무나 잘 이해한다는 듯 들고 나온 그 마음이 어떤 면에서는 시청자들을 잡아끄는 진짜 요인일 수 있다. 그래서 일단 재료 하나만으로도 나를 생각해주는 백종원의 그 마음을 읽고 나면 거기 만들어지는 요리들에 대한 호감은 더 커진다. 따라 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기는 건 그래서다.

 

이건 백종원이라는 인물의 진가일 것이다. 그의 요리는 새롭거나 특별한 것이 없다. 오히려 냉장고를 열면 어느 한 구석에 늘 있기 마련인 재료들이 그가 하는 요리의 주인공들이다. 계란을 가지고 만드는 계란 프라이가 과연 요리인가 하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겠지만 백종원은 그것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요리라는 걸 진지하게 보여준다. 그 흔하디흔한 무 한 덩어리를 갖고 무생채는 물론이고 생선 조림에 가까운 무 조림, 소고기 뭇국에 무밥까지 뚝딱 해낼 수 있다는 걸 그는 프로그램을 통해 굳이 설파하고 있다.

 

사실 재료가 없어서 요리를 못하는 건 아닐 것이다. 냉장고를 열면 누구나 계란 몇 개쯤은 있고 무 한 덩이 정도는 찾을 수 있다. 혼자 산다고 해도 엄마가 김장철이면 바리바리 싸서 보내준 김치 한 덩이쯤은 냉장고 구석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문제는 재료를 보는 우리의 눈이다. 늘 화려한 음식과 비싼 재료에만 눈이 가다보니 정작 흔하고 값싼 재료들이 저평가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먹을 게 없다는 불평은 알고 보면 흔한 재료들에 대한 무시에서 비롯될 때가 더 많다.

 

물론 백종원이 <집밥 백선생>을 통해 알려주는 일상적인 음식에 담겨진 꿀팁이 주는 효용성은 실제 매일 같이 저녁밥을 차려내는 주부들에게는 대단히 유용한 정보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백종원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은 단순히 그런 정보적인 유용성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요리를 통해 전해지는 타인에 대한 배려나 소통이 더 큰 것일 게다.

 

음식은 단지 육체적인 허기를 달래주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때로는 음식의 힘은 정신적인 허기를 달래주는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이른바 엔도르핀 디시(endorphin dish)’라는 신조어가 나오고, 요리에 셀프 힐링이라는 트렌드가 발견되는 건 그래서다. 고향을 떠나와 혼자 사는 세대들이 점점 늘면서 어쨌든 해먹어야 하는 한 끼의 밥은 그래서 육체적 허기보다는 정신적 허기를 채워주는 의미가 더 커졌다.

 

<집밥 백선생>에서 백종원은 이 엄마가 해주는 밥상의 부재를 상당 부분 자신의 방식으로 해석해내는 모습을 보인다. 어디 엄마들이 무슨 대단한 식재료로 맛을 냈던가. 그저 손에 잡히는 흔한 재료만을 갖고 어떻게 하면 맛있게 음식을 낼 수 있을까를 고심했던 것이 엄마의 밥상이 아니었던가. 흔한 식재료들에 굳이 가치를 부여하는 백종원의 음식에서는 그래서 그 서민적인 느낌과 더불어 소외된 삶들이 가진 허기를 채워주는 훈훈함이 묻어난다.

 

시어서 이제는 그냥 먹기 불편한 묵은지에는 그러나 그걸 바리바리 싸주던 엄마의 정성이 고스란히 곰삭아 있다. 그래서 물에 슬슬 닦아서 어떤 요리에나 척척 넣어줘도 맛이 날 수밖에 없다. 백종원이 <집밥 백선생>을 통해 계속 재발견시키고 가치를 새롭게 부여하는 흔한 재료들도 그걸 키워낸 누군가의 정성이 들어 있을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자라났다. 비록 지금은 냉장고 속 구석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부려진 채로 놓여져 있을 지라도 언젠가 안목 있는 이들의 손에 멋진 음식으로 만들어질 재료들처럼. 마치 묵은지가 그러하듯이.



윤은혜, 미숙한 대처방식으로 인성문제까지

 

표절 논란만큼 그 진위를 파악하기 힘든 사안도 없다. 특히 요즘처럼 하루가 멀다 하고 다양한 생각들과 아이디어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것이 인터넷이라는 저장고에 채워지고 보여지는 상황에 표절 시비는 더더욱 많아질 수밖에 없다. 사실상 우리의 뇌가 이제는 정보의 네트워크라는 공동의 뇌를 더해 무언가를 생각하고 만들어내고 있는 현실에서 완전히 새로운 것이 과연 존재하는가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사진=중국 동방TV <여신의 패션> 웨이보

그러니 표절 문제는 더 신중하게 들여다봐야 하고 그 진위가 파악되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한다. 중요한 건 이 표절 논란의 대상이 연예인처럼 주목받는 위치에 서게 됐을 때 사안의 진위와 상관없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이럴 경우 노출되어 있는 해당 연예인은 훨씬 더 소통에 신중해야 한다. 만일 표절이 아니라고 해도 표절 문제를 제기한 상대방의 입장을 최대한 수긍하고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며, 어쨌든 불거진 사안에 대해 대중들이 가질 의혹을 풀어주기 위한 소통의 노력도 필요하다.

 

하지만 자신에게 불거진 의상 표절 논란에 있어서 윤은혜 측은 그 소통 방식에 있어 너무나 미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윤춘호 디자이너가 SNS를 통해 불쾌한 심사를 드러내며 표절문제를 제기했을 때 보다 신속하게 그에 대한 입장을 보여주지 않았고, 무려 이틀이나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다 내놓은 해명에서도 상대방의 입장을 보듬어주기보다는 오히려 윤은혜라는 이름 석 자를 이용한 브랜드의 노이즈 마케팅이 아니냐는 식으로 불을 질렀다.

 

여기에 대해 윤춘호 디자이너가 왜 윤은혜가 중국 동방 TV<여신의 패션>에서 1위를 차지한 의상이 자신의 브랜드 아르케 의상을 표절한 것인가에 대해 조목조목 그 근거들을 제시한 점은 사뭇 대조되는 모습이다. 게다가 윤춘호는 윤은혜 측이 자신들과 직접 소통하지 않고 SNS에 문제제기를 한 것에 대해 노이즈마케팅의 의구심을 제기한 점에 대해서도 사실은 다르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SNS에 사안에 대해 올리기 전 윤은혜 측과 접촉을 시도했으나 애매한 해명으로 일관했었다는 것.

 

표절 논란이라는 개인의 이미지를 심각하게 훼손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해서 윤은혜 측은 너무 안이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즉 사안에 대한 대처 속도가 너무나 느리고, 게다가 그 대응방식도 오히려 상대방을 자극하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바라보고 있는 대중들이 이제는 윤은혜 개인의 인성 문제까지 들고 나오게 된 건 이러한 잘못된 소통 방식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물론 윤은혜 측의 주장처럼 표절의 의도가 없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사진으로 공개된 의상들이 너무나 비슷하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게다가 윤은혜 측이 해당 의상의 브랜드를 비교적 최근까지도 입었었던 정황까지 덧붙여졌다. 그러니 패션의 전문가가 아닌 대중들로서는 표절 문제를 제기한 윤춘호의 입장에 상당 부분 동조할 수밖에 없다.

 

윤은혜 측은 대중들에게 이런 의구심이 있다는 걸 인지해야 하지 않을까. 사실 표절 논란 자체보다 더 심각한 건 그래서 대중들이 갖게 될 입장을 먼저 들여다보지 않는 태도의 문제다. 사실 연예인들에게 언제든 논란은 벌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논란이 소통의 실패를 더하게 되면 자칫 태도와 인성의 문제로까지 비화될 수 있다. 논란이야 시간이 지나면 어느 정도 수그러들 수 있어도 인성의 문제는 결코 수그러드는 일이 없다.



<앤트맨>은 왜 작아지는 영웅을 선택했을까

 

1978년에 개봉된 <슈퍼맨>에서 슈퍼맨은 연인이 죽게 되자 지구의 자전을 반대편으로 돌려 시간을 되돌린다. 황당한 이야기지만 이렇게 시간을 되돌려 살아난 연인과 지구인들이 슈퍼맨을 환호하며 끝나는 엔딩에 그 누구도 황당무계하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그 후 30여 년이 지난 지금 슈퍼히어로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존재들로까지 나아갔다. 더 이상 지구가 좁다며 우주를 무대로 외계인들과 대적하는 슈퍼히어로가 등장하기도 하고 심지어 토르 같은 신이 영웅으로 재탄생되기도 했다.

 


사진출처:영화<앤트맨>

최근 개봉했던 <판타스틱4> 리부트를 보면 악당인 닥터 둠은 사람의 목숨 정도는 그냥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거둘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이 정도면 신이나 다름없다. <슈퍼맨>을 철학적으로 풀어낸 <맨 오브 스틸>에서 슈퍼맨은 신의 재해석이나 다름없다. 이 슈퍼히어로물에서 인간은 그저 신의 보호를 받거나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는 대상일 뿐이다. 신적인 힘을 가진 슈퍼맨은 지구를 침공해온 자신의 동족과 싸워 지구인들을 지켜낸다.

 

이 정도면 우주를 넘나들지 못하면 슈퍼히어로로서 어딘지 너무 소소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무협지에서 날아다니지 못하면 바보처럼 여겨지는 것처럼, 우주로 날아가는 슈퍼히어로들의 세상에서 지구를 전전한다는 건 어딘지 모양 빠지는 일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앤트맨>의 선택은 달랐다. 이 독특한 슈퍼히어로물은 우주를 향해 나아가기보다는 오히려 한없이 작아지는 쪽을 택했다.

 

작아지는 영웅을 선택하면서 <앤트맨>은 우리의 일상 속에 숨겨진 모험을 가능하게 한다. 일반 가정의 식탁이나 마룻바닥, 춤을 추는 파티장에서 그 밑바닥에 떨어진 앤트맨에게 사정없이 날라드는 발길질은 놀라운 미시세계의 스펙터클을 보여준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은밀하게 세상사에 관여할 수 있다는 건 오히려 작다는 것이 능력이 될 수 있다는 걸 말해준다.

 

물론 작아진 존재 하나가 세상을 바꾸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점이 많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 부족함을 채워주는 존재들이 앤트맨에게는 부여된다. 그것은 또 다른 작은 존재들, 즉 각종 개미들을 진두지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 이 부분은 앤트맨의 스펙터클에 또 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하늘을 날아다니는 날개 개미 안토니의 등에 올라타면 마치 드래곤의 등에 올라탄 중세의 기사 같은 판타지물이 연상된다. 앤트맨의 명령에 따라 셀 수 없이 많은 날개 개미들이 날아가는 장면은 그 자체로 장관이다. 또 개미들이 서로 몸을 이어 붙여 허공에 거대한 줄을 만들거나 탑을 쌓아 그 다리를 건너가는 앤트맨의 장면 또한 장관이다.

 

다양한 능력에 충성스런 부하들을 거느린 앤트맨이란 존재는 그래서 작아도 강력한 존재로서 설 수 있게 된다. 마치 곤충들이 작지만 그 많은 개체수의 협업으로 엄청난 생존력을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앤트맨이라는 영웅은 혼자 서는 영웅이 아닌 함께 하는 영웅의 면모를 보여준다. 이건 기존 슈퍼히어로물들이 물론 <판타스틱4> 같은 협업을 보여주는 존재들도 있지만 대부분 혼자 외로운 싸움을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이야기다.

 

축소 지향을 보여줘서인지 <앤트맨>은 여타의 슈퍼히어로물과 달리 무겁지 않고 유머 코드가 생생히 살아있다. 몸을 한 없이 키우거나 우주 바깥으로 날아가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작게 해 마이크로 세상의 새로운 우주를 탐험하는 이야기는 그래서 기존 슈퍼히어로물의 참신한 역발상으로 다가온다. 물론 앤트맨은 몸을 작게 하는 것만큼 크게 늘리는 방법도 알고 있다. 따라서 앤트맨이 굳이 몸을 축소하는 것에 집착하는 건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쨌든 이 축소 세계를 선택한 <앤트맨>은 바로 그 발상의 전환만으로도 충분히 성공적인 액션을 보여준다. 특히 아이들에게 있어서 이 작은 세계와 곤충의 세계가 주는 흥미로움은 기존 슈퍼히어로물의 우주보다 더 강력하게 다가올 것으로 보인다. 꼭 커지고 확대되어야만 그럴 듯하다고? 적어도 <앤트맨>의 세계에서는 그런 편견과 선입견은 불필요하다



비현실적인 사극보다 현실 같은 사회극

 

<용팔이><미세스캅>은 주중 드라마의 쌍두마차가 되었다. 월화드라마 <미세스캅>은 심지어 사극인 <화정>을 밀어내고 동시간대 시청률 1위를 달리고 있고, 수목드라마 <용팔이> 역시 20%에 육박하는 시청률로 역시 사극인 <밤을 걷는 선비>에 대한 화제조차 덮어버렸다. 전통적으로 사극에 강했던 MBC드라마가 사회극적인 요소가 강한 SBS드라마들에 밀려버렸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미세스캅(사진출처:SBS)'

그 첫 번째는 MBC 사극이 너무 지나치게 허구로 흘러가고 있다는 점이다. <화정>은 초반만 해도 여러 인물들이 저마다의 관점을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그 새로운 시도에 대한 기대감이 높았다. 하지만 정명공주(이연희)를 중심으로 세워 꾸려나가는 이야기에 근본적인 허점들이 드러나면서 이야기는 역사의 재해석을 넘어서 버렸다. 심지어 너무 심한 역사왜곡이라는 비판까지 나왔다.

 

사실 사극에서 역사 왜곡의 문제는 이제 사극이 역사보다는 극에 더 중점을 두게 되면서 조금은 지나버린 구닥다리 논란처럼 여겨진다. 하지만 최근 들어 사극은 다시 역사로 되돌아오는 느낌이다. 지나친 상상력의 개입은 그것이 역사와는 무관한 허구처럼 느껴지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한때 고개를 숙였던 KBS 사극이 <정도전><징비록>을 통해 재조명된 건 이런 허구화되어가는 사극에 대한 반작용을 잘 말해준다.

 

<밤을 걷는 선비>는 아예 판타지다. 웹툰 원작의 이 작품은 사극과 뱀파이어물을 섞어 놓은 작품. 나쁘지 않은 시도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지상파 드라마로서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어느 정도는 실패요소를 안고 시작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즉 사극에 대한 충성도 높은 중장년 시청층과 뱀파이어물이 갖는 젊은 세대의 시청층이 상승효과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너무 집중력을 분산시킨 작품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왜 유독 지상파에서 시도된 뱀파이어물들이 모두 실패했는가를 잘 말해준다. 즉 뱀파이어물은 웹툰에는 잘 맞는 장르인지는 몰라도 지상파의 본방 시청 패턴하고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이다. 게다가 현실성을 벗어나 판타지로 가는 이야기에 시청자들의 시선을 잘 가지 않는다. 물론 이준기 혼자 북치고 장구 치며 극을 끌고 나가고는 있지만 그 판타지가 현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시청자들은 찾기가 어렵다.

 

반면 SBS<미세스캅><용팔이>를 통해 들고 나온 건 사회극이다. <미세스캅>은 자본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부조리한 사회에 정의의 문제를 제기하는 작품이다. 전통적으로 형사물은 장르적 특성상 잘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지만 이 작품은 최영진(김희애)이라는 아줌마 형사 캐릭터를 중심에 세움으로써 중장년 남녀 시청자들을 모두 끌어 모았다. 무엇보다 최근 대중들의 관심사일 수밖에 없는 재벌의 문제나, 치안, 불공정한 정의의 문제에 내포된 현실을 상기시키는 정서가 이 드라마에 기폭제 역할을 하고 있다.

 

<용팔이> 역시 마찬가지다. 의학드라마의 틀을 갖고 있지만 그 바탕은 사회극의 정서를 깔고 있다. VIP 병동과 일반 병동 사이에 느껴지는 갑을 정서는 이 드라마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가장 중요한 설정이다. 속물 의사처럼 가장된 휴머니스트 김태현(주원)이 이 거대 자본과 맞서 생명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짠하고 한편으로는 공분을 일으키며 시청자들을 몰입시킨다.

 

물론 <미세스캅>이나 <용팔이>의 스토리가 현실적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다. 그것 역시 판타지를 자극하는 허구적 요소들이 들어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거기에 깔려 있는 현실을 환기시키는 정서들이다. 이 정서들은 <미세스캅><용팔이>의 허구적인 이야기가 우리네 현실을 표징한다는 느낌을 만들어낸다. 현실과 무관하게 흘러가는 듯한 <화정><밤을 걷는 선비>와는 확연한 차이다.

 

한때 잘 나가던 MBC 사극이 SBS 사회극들에 밀려버렸다는 사실은 거꾸로 우리네 서민들이 느끼는 현실에 대한 갈증을 말해주기도 한다. 하루하루가 팍팍한 삶에 우리와 무관한 저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둘 여유조차 느끼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도 우리 현실을 확인할 수 있고, 그 안에서 판타지를 통해서나마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는 사회극에 몰입하고 있다는 것. 그래서 그 사회극 속에는 지금 현실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좌절과 분노가 뒤엉켜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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