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애보도, 이민호보다 수지 후폭풍이 거센 까닭

 

이민호와 수지. 대한민국 청춘 남녀들에게 이 두 사람의 열애보도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 있다. 특히 이민호의 경우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까지 비상한 관심을 보일 정도다. 홍콩 여배우 원영의는 이 열애보도가 나간 후 기쁘면서도 슬프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만큼 국내를 넘어 범 아시아적인 팬덤을 가진 스타들이다.

 

사진출처: 영화 <건축학개론>

그만큼 이 두 사람의 열애사실이 가져올 파장은 적지 않다. 그것은 이 두 사람이 만인의 연인처럼 이미지화되어 있고 그 이미지가 그들의 상품적인 가치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해온 일련의 광고 속에는 이런 이미지들이 상품 속으로 투영되어 소비되는 그 화학작용이 들어가 있다. 그러니 이제 만인의 연인에서 특정인의 연인이 된 두 사람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파장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번 열애보도에서 그 후폭풍은 수지에게 더 크게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열애사실이 보도된 이후 수지의 소속사 주가는 요동을 쳤다. 열애설이 나온 후 주가가 뚝 떨어졌고 그 사실을 인정하면서 주가는 다시 회복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항간에 수지는 JYP엔터테인먼트를 먹여 살리는 존재처럼 알려지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수지가 JYP의 실적에 어느 정도의 지분을 갖고 있다는 건 분명한 사실이다.

 

열애보도가 이민호보다 수지쪽에 더 많은 후폭풍이 생기는 이유는 이 두 사람의 활동과 무관하지 않다. 이민호는 꾸준히 드라마와 영화로 자기만의 콘텐츠 영역을 구축해왔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로 스타덤에 오른 이민호는 이후에도 <시티헌터>, <상속자들> 등을 통해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왔다. 게다가 최근에는 영화 <강남1970>을 통해 새로운 연기영역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중국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게된 건 다 이런 연기에 몰두한 노력 덕분이다.

 

하지만 수지는 사정이 다르다. 그녀는 <건축학개론>을 통해 단순에 국민 첫사랑으로 등극한 이래 이렇다 할 콘텐츠를 선보이지 못했다. 드라마 <>, <구가의서>에 등장했지만 확실한 존재감을 만들지 못했고 그렇다고 본업인 미스에이 활동 역시 그다지 성공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수지는 <건축학개론>의 그 국민 첫사랑이미지를 CF를 통해 반복 소비해온 것이 그녀의 활동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결국 이런 상황은 이번 열애 보도로 인해 무너져버린 국민 첫사랑의 이미지가 가져올 후폭풍이 이민호보다 훨씬 클 수박에 없는 결과를 만든다. 건강하고 젊은 남녀가 만나고 사랑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이고 심지어 바람직할 수 있는 일이지만, 그들이 이미지를 통해 상품화되는 연예인이라는 입장에서 보면 이런 파장들이 만들어진다. 결국 이럴 때 중요한 건 이미지만이 아니라 자기만의 직능적인 영역을 갖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안타깝게도 수지는 이미지는 있으되 콘텐츠는 부족한 상황이다.

 

이것은 수지의 활동이 지금껏 상당 부분 왜곡되어 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콘텐츠 없이 이미지로만 굳어지는 경우 그 이미지가 언젠가 사라지는 상황이 오면(이런 순간은 당연히 도래한다) 연예인이로서의 생명 또한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어차피 연기 영역에서 만들어진 이미지라면 힘겹더라도 연기에 대한 보다 진지한 접근이 필요했다는 점이다. 이미지는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너무 오래 지속되면 족쇄가 되기 마련이다.

 

이미 열애 보도는 나왔고 그 사실은 인정되었다. 남은 건 그 파장을 제대로 수습하는 일이다. 수지로서는 이제라도 지금껏 가져왔던 국민 첫사랑의 이미지를 내려놓고 본격적인 연기 영역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거기서 우리가 보지 못했던 그녀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게 해준다면 수지는 어쩌면 이번 일을 계기로 국민 첫사랑이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위기를 기회로 살리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앵그리맘>의 선정성, 논란이 되지 않으려면

 

MBC <앵그리맘>은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다. 학내의 폭력은 물론이고 교사와 학생 간의 원조교제 교사와 조폭과의 커넥션 심지어는 교사가 조폭을 시켜 청부살해를 요청하는 장면까지 나온다. 물론 이 드라마의 배경이 되고 있는 명성고등학교처럼 심각한 폭력과 전횡에 노출된 학교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것이 일반적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결국 극화된 부분이 많고 과장된 면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앵그리맘(사진출처:MBC)'

이처럼 극화를 통한 과장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을 수 있다. 그 학교 폭력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 그 첫 번째다. 이것은 <앵그리맘>이 극화되어 있다고 해도 그 과장을 어느 정도 허용하게 만드는 근거가 될 것이다. 어쨌든 드라마가 사회의 현실문제에 경종을 울리고 있다는 건 의미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또 다른 목적, 즉 그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상황을 이끌어내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아끌기 위한 것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그것은 그저 드라마의 자극적인 소비로 치달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앵그리맘> 즉 분노하는 엄마라는 존재가 정당하려면 학교 문제에 대해 사적인 접근이 아니라 지극히 공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것이 법적 정의가 아니라 사적 복수라고 하더라도 사적인 의미로 흐르게 되면 자극을 위한 자극으로 치달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첫 회에 조강자(김희선)라는 엄마는 이러한 학교 폭력 문제에 분노하는 존재로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드라마가 진행되면서 조강자가 학내 폭력의 뒤편에 서 있는 조폭 안동칠(김희원)과 사적으로 얽힌 사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드라마의 이야기는 엉뚱한 방향으로 틀어지고 있다.

 

안동칠의 동생과 조강자가 사귀는 사이였고 그걸 반대하던 안동칠과 엎치락뒤치락하다가 그 동생이 칼에 맞아 죽는 사고를 당했던 것. 이런 사적인 상황의 우연한 연루는 드라마의 개연성을 떨어뜨릴 뿐만 아니라, 공적인 존재로서의 조강자라는 엄마의 행동을 지극히 사적인 행동(과거의 사건과 연루된)으로 보이게 만드는 위험성이 있다.

 

신문지상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학교 폭력의 실상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 그 이상이다. 그러니 그런 실상을 조금 극화해 드라마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정당한 기획의도가 있다면 무리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기획의도가 엉뚱하게 흐르거나 공적인 의미를 상실하고 사적인 이야기에 치중되기 시작하면 드라마는 학교 폭력의 실상을 보여준다는 빌미로 자극과 선정성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그것은 심지어 학생들에게 부정적인 교육효과를 만들 수도 있다. <앵그리맘>이 위험해지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딸의 복수를 위해 엄마가 주먹을 드는 이야기는 우리네 교육 현실에서 공감가지 않는 건 아니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흐를 위험성도 있다는 얘기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인물이 있다. 그는 바로 박노아(지현우)라는 선생님의 존재다. 그의 아버지인 판사 박진호(전국환)는 분재를 하며 아들에게 자신은 이렇게 잘못된 가지를 치는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교사는 햇볕이나 비 같은 존재여야 한다고. 잘못 자라고 있다고 해도 햇볕을 늘 비추고 비는 늘 내려주기 마련이라고. 즉 교사라는 존재가 아이들을 판정하고 재단하는 인물이 아니라 모든 걸 받아주는 존재여야 한다는 얘기다.

 

<앵그리맘>은 학교 폭력에 대한 두 가지 접근방식을 보여주는 드라마다. 그 하나는 조강자로 대변되는 방식으로 부조리한 현실에 주먹으로 맞서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박노아로 대변되는 방식으로 그런 학생들을 사랑과 배려로 끌어안는 것이다. 전자가 드라마적 판타지와 쾌감을 선사한다면 후자는 드라마의 의미를 담아낸다. 박노아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종말에 이른 학내 상황에 아이들을 태워줄 방주를 짓는 존재다.

 

<앵그리맘>은 자칫 선정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다분한 드라마다. 어느 순간 공적인 의미를 상실하거나 자극적인 상황으로 기울게 되면 드라마는 균형을 잃을 위험성이 크다. 조강자만큼 박노아가 중요해지는 건 그래서다. 이 두 인물의 균형이 적절히 이루어질 때 드라마는 재미와 의미를 모두 가져갈 수 있을 것이다.

 

대중들이 다중이 강균성에 빠져든 까닭

 

화장실 급한 JYP, 갓 태어난 박정현, 하동균의 모창을 한다면서 갑자기 왜 이러셩하며 저팔계로 넘어가고, 정인을 흉내 내다 꼬부랑 할머니의 모습을 연출한다. 요즘 예능 대세로 불리는 강균성에게는 확실히 지금껏 우리가 봐왔던 예능인들의 개인기와는 사뭇 다른 무언가가 숨겨져 있다.

 

'비정상회담(사진출처:JTBC)'

사실 성대모사나 모창 같은 개인기라는 것 자체가 현재의 예능에서는 공룡화되어가는 과거의 유물이다. 그런데 이 강균성의 개인기는 다르다. 보면 볼수록 또 다른 개인기를 자꾸 보고 싶게 만든다. 그것은 강균성의 모창은 기존 우리가 봐왔던 여타의 개인기들과 달리 반전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똑같은 걸 흉내 내려 하지 않고 심지어 비슷하지 않은 것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흥미로워진다. 우리가 늘 봐왔던 <K팝스타>의 심사위원으로 앉아 있던 JYP화장실이 급하다라는 수식어를 덧붙였을 때 나오는 독특한 지점은 우리가 보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들이다. 누군가의 모창이 비슷한 점을 강조한다면 강균성의 모창은 비슷한 듯 보이지만 다른 점을 강조한다.

 

여기서 돋보이는 건 강균성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다층적인 모습이다. 그가 다중인격으로 불리는 건 짧은 순간에도 계속해서 색다른 모습들이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는 차분해 보이다가도 갑자기 특유의 음하하하하-”하는 웃음과 함께 어딘지 악동 같은 느낌으로 돌변하는가 하면 난데없이 팔굽혀펴기를 하는 듯 보이더니 특유의 음란(?)’한 동작으로 좌중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그의 다중인격적인 모습은 모창과 어우러질 때 독특한 쾌감을 선사한다. 우리가 생각한 연예인의 이미지를 모창을 통해 무너뜨릴 때 그 권위적 요소들이 해체되어 버린다. 그가 조현아를 흉내 냈을 때 대중들이 느낀 건 통쾌함이었다. 모사는 근본적으로 원본의 권위를 해체하는 힘을 지녔다. 강균성은 본능적으로 그 힘을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JTBC <학교 다녀오겠습니다>에서 강균성은 때 아닌 언니 포스로 앉아 여고생들에게 남자아이돌들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았다. “샤이니는 정말 실력이 좋다”, “빅스 정말 착하다고 자신이 봤던 그들의 실체를 얘기하고는 갑자기 거기 앉아 있는 여고생들의 외모를 추켜세웠다. ‘눈이 예쁘니 쌍꺼풀 수술 하면 안된다거나 마치 코를 세운 것처럼 높다는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강균성을 언니 캐릭터로 만들어주었다.

 

그런데 이 다중인격에 대해서 왜 대중들은 비난이 아닌 열광을 쏟아내는 걸까. 사실 최근 들어 다중인격은 대중문화 콘텐츠의 한 트렌드를 이루기도 했다. MBC <킬미힐미>SBS <하이드 지킬 나> 같은 드라마가 동시간대에 다중인격을 소재로 다뤘다는 건 우연치고는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다중이는 KBS <개그콘서트>의 박성호가 일찍이 캐릭터화해 웃음의 코드로 선보인 바 있다.

 

그러고 보면 <무한도전> 식스맨 특집에 후보로 나온 유병재 역시 강균성과 비슷한 다중심리를 보여준 바 있다. 그는 식스맨이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가 곧바로 하고 싶다는 얘기를 반복하며 종잡을 수 없는 심리상태를 보여줘 웃음을 주었다. 겉으로 하는 행동과 마음의 소리가 달라지면서 생겨나는 이 균열은 보는 이들에게 반전과 공감의 웃음을 자아내게 해준다.

 

최근 들어 대중문화 전반에서 다중인격을 소재로 한 콘텐츠들이 많아지고 이를 캐릭터화 하는 인물들이 나오고 있는 건 현대인들이 가진 불안 심리를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여기에는 다중인격을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도 한 몫을 차지한다. 다중인격은 그저 비정상의 이상한 성격이 아니라 어찌 보면 솔직한 모습이라고 여겨지는 것이다.

 

불안한 현실 속에서 다중인격은 그 누군가의 특정한 이상 징후가 아니라 사회 전반에 나타나는 징후처럼 받아들여진다. 일관된 자아를 유지하기가 좀체 어려운 현실에서 한 가지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오히려 가식처럼 여겨진다는 점이다. 그래서 강균성의 다중인격에 열광하는 대중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지금 현재 우리 사회가 가진 불안 정도를 가늠하게 된다. 강균성의 다중인격은 그 불안심리에 대한 공감이고, 나아가 권위적인 사회에 대한 도발과 해소의 욕구이기도 하다.

 

 

<위플래쉬>, 열정이 사라진 시대에 예술이란

 

드럼이란 악기가 이토록 매력적이었나. 암전된 화면에 마구 두드려대는 드럼 소리가 고조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위플래쉬>라는 영화는 그 긴장감을 쉴 틈 없이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다. 최고의 드럼 연주자가 되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앤드류와, 천재의 열정이 사라진 시대에 천재를 끄집어내기 위해 혹독한 한계를 제자들에게 시험하는 플렛쳐 교수의 재즈 음악을 사이에 둔 치고 박는 한판 승부는 관객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진출처: 영화 <위플래쉬>

교육 윤리의 잣대로 바라보면 <위플래쉬>는 대단히 불편한 영화다. 플렛쳐 교수의 스파르타식 밀어붙이기는 자칫 그 선을 넘게 되었을 때 제자에 대한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플렛쳐 교수가 만들어내는 그 스트레스 속에서 손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온몸이 땀으로 샤워를 하는 것조차 스스로 감수해내려 한다. 실로 그 스트레스는 한계 속에서 인간의 천재성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그렇게 만나게 된 천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음악의 희열을 경험하게 한다.

 

하지만 그런 교육 윤리의 불편한 잣대를 벗어나 <위플래쉬>를 바라보면 이 단순하면서도 굵직한 영화의 미적 체험에 놀라게 된다. 영화는 드럼처럼 청각을 두드리다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더니, 온몸에 분노의 아드레날린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그것이 폭발되는 강렬한 느낌을 제공한다. 재즈는 이 영화의 중요한 반쪽이지만 영화는 그것을 미화하거나 아름답게 꾸미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앤드류라는 또 하나의 드럼이 겪는 고통스런 예술의 과정을 드러내 보여줄 뿐이다.

 

눈치 챘겠지만 <위플래쉬>에는 두 개의 드럼이 존재한다. 하나는 앤드류가 치는 드럼이고, 또 하나는 플렛쳐 교수가 두드리는 앤드류라는 드럼이다. 플렛쳐 교수는 앤드류를 두드려 놀라운 재즈 연주를 끄집어내려 한다. <위플래쉬>라는 영화의 제목은 더블 타임 스윙 주법으로 완성된 영화 속 재즈 곡의 제목이지만, ‘채찍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플렛쳐 교수는 전설적인 재즈 드러머 버디 리치의 탄생이 그의 열정을 끄집어낸 사건(?)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버디 리치를 끝까지 몰아붙이게 하고 거기서 그만의 음악적인 성취를 만든 것이 누군가의 채찍질덕분이라는 것. 그는 이렇게 벼랑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 채찍질이 사라지면서 진정한 재즈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개탄한다.

 

<위플래쉬>는 열정이 사라진 시대에 다시금 예술을 얘기한다. 그것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떤 힘겨운 과정을 겪어 완성되는가를 보여준다. 실로 재즈 드럼 연주라는 조금은 대중들에게 낯설 수 있는 소재를 갖고 이토록 강렬한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건넬 수 있다는 사실은 <위플래쉬>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을 가늠할 수 있는 이유다.

 

심지어 달관세대라는 기괴한 표현까지 나오는 이 시대에 열정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무언가 거대한 벽으로서 존재하는 플렛쳐 교수는 결코 바람직한 인사는 아니다. 하지만 그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서 그 상황을 오히려 역전시켜 분노와 광기를 예술로 뽑아내는 앤드류의 열정은 보는 이들의 피를 끓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제 앤드류가 스틱을 쥔다. 그리고 거꾸로 플렛쳐 교수를 향해 드럼 연주를 통한 채찍질을 날린다. 우리를 두드리고 몰아붙이는 것들이 우리를 한계로 몰아세울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들이 쥔 스틱을 내 손으로 쥐어야 하지 않겠는가. <위플래쉬>는 열정이 사라진 시대의 우리들을 재즈 드럼 연주라는 예술을 통해 채찍질의 고통을 뛰어넘는 희열을 맛보게 해주면서 그 안에 우리네 현실까지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다. 이러니 입소문이 날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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