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보다 망나니, 이토록 다크한 김은숙과 송혜교라니

더 글로리

“난 왕자님은 필요 없어요. 난 왕자가 아니라 나랑 같이 칼춤 춰줄 망나니가 필요하거든요.” 문동은(송혜교)이 주여정(이도현)에게 선을 긋는 이 대사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글로리>의 색깔을 분명히 드러낸다. 그리고 이건 그간 판타지와 멜로를 오가는 작품을 줄곧 써왔던 김은숙 작가와 멜로 퀸으로 자리매김해온 송혜교가 이 작품을 통해 건네는 일종의 선언 같은 것이다. 달달한 멜로를 기대했다면 그건 섣부른 기대일 뿐이라고. 이 작품은 피가 철철 흐르고 살점이 문드러져 그 상처의 고통이 화면 바깥으로 전이되어 올 정도의 살풍경한 폭력과 복수가 그려질 것이라고. 

 

박연진(신예은)과 그 패거리들로부터 심각할 정도의 학교폭력을 당했지만, 그 누구도 고교시절의 문동은(정지소)을 그 지옥에서 구해주지 않았다. 모두가 방관했고, 심지어 선생님은 친구들끼리 그럴 수도 있는 일을 왜 키우냐며 피해자인 문동은의 뺨을 때렸다. 엄마조차 돈 앞에서 딸이 당한 폭력을 방치했다. 온 몸이 박연진 패거리들 때문에 맞고 찢어지고 심지어 지져져 흉터 아닌 곳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지만 그 누구도 금수저 부모를 둔 박연진과 그 패거리들이 문동은에게 저지르는 폭력을 막아주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던 문동은은 한겨울 차가운 강물 앞에도 서보고, 한 발만 나서면 이 모든 고통이 사라질 수 있을 것 같은 건물 옥상에도 서보지만 그 순간 ‘꿈’을 가져보려 한다. 그 꿈은 바로 ‘박연진’이다. 어차피 죽을 거면, 또 사는 게 지옥이라면 혼자 죽지 않고 혼자만 지옥에 사는 게 아니라 저들과 함께 죽어 함께 지옥불에 떨어지겠다는 꿈. 문동은은 이제 복수의 일념 하나로 버텨내며 검정고시를 거쳐 대학을 가고 과외 선생을 하며 돈을 벌면서 저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계속 주시한다. 그러면서 아주 오래도록 철저한 복수를 계획하고 하나씩 실천해 나간다. 

 

<더 글로리>는 전형적인 복수극이지만, 그렇다고 속 시원한 사이다 판타지만을 보여주는 그런 드라마는 아니다. 대신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문동은 이라는 인물과 그의 복수의 시선을 통해 하나하나 촘촘히 그려나간다. 한 사람의 삶 전체를 망가뜨렸던 가해자들이고, 또 현재도 여전히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저들은 부자라는 이유로 명품에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호화로운 삶 속에서 살아간다. 꿈은 없는 자들이 꾸는 거라며 자신의 꿈은 그저 ‘현모양처’라고 말했던 박연진은 잘 나가는 건설사 대표 하도영(정성일)과 가정을 꾸려 어린 딸과 단란하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문동은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하면서, 반짝반짝 빛나는 것처럼 보이던 저들의 삶의 추악한 실체들이 까발려지기 시작한다. 직접적으로 가해자를 처단하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 그들의 욕망이 서로를 파탄으로 만들고 또 그 과정에서 실체가 공개됨으로써 ‘사회적 죽음’을 만들어내려는 문동은의 복수극은 어딘가 다르다. 그건 이 사회가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갑과 을로 나뉘어 돌아가는 두 세계의 폭력을 드러내는 일이다. 

 

가진 자와 못 가진 자는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을 때는 가진 자가 못 가진 자 위에 군림해 갖은 폭력을 일삼지만, 못 가진 자가 복수를 계획할 때는 상황이 정반대가 된다. 가진 게 없어 잃을 것도 없는 문동은이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는 박연진을 압도할 수 있는 이유다. 게다가 문동은은 살려고 복수하는 것이 아니다. 같이 죽고 싶은 것이다. “우리 천천히 말라죽어 보자. 연진아. 나 지금 너무 신나.”

 

<더 글로리>라는 복수극은 처절하고 자극적이지만 김은숙 작가의 은유적 설정들이나 대사들은 그 복수극에 울림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건축가가 꿈이었던 문동은이 복수를 시작하면서 이를 바둑에 비유하는 장면이 그렇다. 바둑은 “자기 집을 잘 지으면서 남의 집을 부수면서 서서히 조여 들어와야 한다”고 주여정이 설명하자 마치 그것이 자신의 복수방식이라는 듯 “마음에 든다”고 문동은이 말하는 것. 

 

게다가 압권은 그 대사를 거의 웃지 않는 얼굴로 무심하면서도 섬뜩하고 그러면서도 슬픔을 머금은 낮고 처연한 목소리로 연기해내는 송혜교의 연기다. 그 연기가 더해져 자극적인 복수극에 어떤 품격 같은 것이 만들어진다. 잊지 않기 위해서 웃지 않는다는 이 인물이 그래서 가끔 그를 돕는 강현남(염혜란) 앞에서 웃는 모습을 슬쩍 드러낼 때 그 웃음은 그간 송혜교가 출연했던 그 어떤 멜로보다 더 가슴에 와 닿는다. 

 

최근 들어 학교폭력은 드라마의 주요 소재로 자리했다. 그만큼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있다는 이야기다. <더 글로리>는 물론 문동은이 하나하나 저 가해자들을 향해 압박해가는 복수극의 묘미가 담겨 있지만, 그 밑바닥 깊숙이 이 인물로 대변되는 피해자와 약자들의 상처를 들여다보려는 작가의 시선도 느껴진다. 김은숙 작가도 송혜교 배우도 지금껏 보지 못한 새로움을 담고 있지만, 그 새로움이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사진:넷플릭스)

뮤지컬 영화 선입견 깬 ‘영웅’, 그 압도적인 감동의 이유

영웅

뮤지컬 영화는 안된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선입견이 있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주는 몰입감을 극 중 노래나 춤이 오히려 깨버리는 결과가 종종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것은 뮤지컬 자체가 익숙하지 않은 대중들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대사를 하다 노래를 하는 광경이 주는 이질감이 낯설어 생겨나는 결과다. 

 

게다가 이미 오래도록 무대에 오른 뮤지컬 공연이 원작이라면? 원작을 가진 작품들이 갖는 숙제처럼 원작과의 비교가 부담으로 다가온다. 이미 뮤지컬로 본 작품을 굳이 영화관에서 또 봐야 하나 하는 질문이 따라온다. 또 뮤지컬은 극장을 찾아갈 때부터 관객들이 그 형식을 기대하지만,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이 극장에서 뮤지컬을 보는 경험은 기대를 깨는 일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윤제균 감독의 <영웅>은 다르다. 눈이 하얗게 쌓인 벌판을 눈보라를 뚫고 걸어 나가는 안중근(정성화)의 스펙터클한 광경으로 문을 여는 이 뮤지컬 영화는 그 장면만으로 원작과는 다른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체감시킨다. 실로 그건 중간 중간 등장하는 스펙터클만이 아니다. 공연장에서 배우들이 펼치는 연기는 노래와 동작 정도를 통해 그 감정이 전해지지만, 영화는 그 배우가 노래하며 흘리는 눈물과 비장한 얼굴 표정, 떨림 하나하나까지 포착함으로써 감정을 극대화시킨다. 

 

또 장면이 교차되거나 판타지를 더한 환상적인 연출도 가능해진다. 그런 연출과 편집은 뮤지컬과는 달리 영상에 스토리텔링을 더해주고, 장면 전환에 있어서도 속도감을 부여한다. 이처럼 영화만이 갖는 강점들을 <영웅>에 가져온 윤제균 감독은 이를 통해 뮤지컬과 영화 사이의 간극을 메워버린다. 실로 뮤지컬을 봤던 필자의 경험을 빌어 단언하건대, 뮤지컬도 좋지만 영화가 주는 감동은 뮤지컬을 압도한다.

 

안중근을 소재로 하는 스토리 역시 <영웅>이라는 작품에 선입견을 만든다. 이미 너무나 많이 알려진 역사적 사실들이라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제균 감독은 <영웅>을 통해 안중근을 전기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인물로만 그리지 않았다. 윤제균 감독이 가장 잘 하는 것이지만, 그는 이 작품 속에서 독립을 위해 투신하는 투사들을 모두 웃고 울고 농담도 하는 사람냄새 나는 인물로 그렸다. 

 

시작은 ‘단지동맹’을 하는 안중근과 동지들의 비장함으로 열지만, 금세 영화는 이들이 만두가게에서 보여주는 너무나 평범하면서도 웃음이 터지는 일상적인 면면을 담는다. 윤제균 감독이 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밝힌 바지만, <영웅>은 소재만으로도 숨이 턱턱 막히는 긴장감과 비장미로 채워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다. 그래서 윤제균 감독은 그 사이사이에 숨통을 틔워주는 이완의 요소가 필요했다고 했다. 그건 주효했다. 영화는 비장함과 동시에 따뜻함과 유쾌함이 더해져 감정을 요동치게 만든다. 윤제균 감독이 잘 하는 ‘감정적 롤러코스터’에 올라타게 만든다. 

 

여기에 뮤지컬 영화가 갖는 노래는 이러한 감정들을 더욱 극대화한다. 정성화는 말할 것도 없고 김고은, 박진주 같은 배우들은 노래 잘 하기로 이미 유명하지만, 이들은 <영웅>에서 그저 노래를 위한 노래를 부르는데 머물지 않는다. 영화이기에 더욱 그것이 강조된 것이겠지만, 이들은 노래 또한 연기의 하나로 풀어낸다. 정성화의 비장함은 기막힌 노래실력과 더불어 부릅뜬 눈빛만으로도 관객들을 압도하고, 김고은의 노래는 하나의 절규가 되어 듣는 이들의 폐부를 찢는 듯한 소름을 안긴다. 여기에 때론 귀엽고 때론 우습다가도 때론 아프디 아픈 박진주의 노래도 빼놓을 수 없다. 

 

특히 안중근의 어머니 조마리아 역할의 나문희가 부르는 ‘사랑하는 내 아들, 도마’는 그 유명한 편지 속 문구 “항소는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짓이니 그냥 죽어라”라는 대사와 함께 절절한 엄마의 마음을 담아 관객들의 가슴을 휘저어 놓는다. 제 아무리 뮤지컬로 몇 차례를 봤고, 이 내용을 소설이나 역사를 담은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 전해 들었어도, 나문희의 노래 앞에서는 누구나 펑펑 눈물이 터질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영웅>이 담고 있는 안중근의 서사는 세 면모가 겹쳐져 있다. 하나는 독립운동을 위해 기꺼이 한 목숨을 던지는 의사 안중근의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한 부모의 아들이자 아내의 남편이자 아이들의 부모인 인간 안중근의 모습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마치 예수가 죽을 것을 알면서 고뇌하면서도 그걸 외면하지 않고 기꺼이 그 곳을 향해 걸어 나가는 구도자이자 메시아 같은 도마 안중근의 모습이다. 이 세 면면은 <영웅> 속 안중근을 비장하면서도 인간적이고 그러면서도 숭고한 인물로 각인시킨다. 

 

최근 극장은 굳이 그 곳을 찾아야 하는 이유를 제시해야 될 상황에 놓였다. <아바타:물의 길>이 그 이유로 스펙터클한 체험을 제시하고 있다면, <영웅>은 시각적, 청각적 체험은 물론이고 감정적 체험까지를 제시하고 있다. 극장 체험이 결코 아깝지 않은 영화다. 심지어 뮤지컬을 봤던 관객일지라도. (사진:영화'영웅')

‘카지노’, 최민식의 인생 도박 모험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이유

카지노

역시 최민식은 최민식이다. 3회까지 첫 공개된 디즈니+ <카지노>는 한 마디로 최민식의 아우라가 전편을 장악하고 있는 드라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은 단단함과, 깡패들 사이에서 보여주는 살벌함과 더불어, 최민식 특유의 쓸쓸하고 처연한 정서가 더해져 <카지노>의 주인공 차무식(최민식)은 종횡무진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툭하면 사고를 치고 교도소에 들락거리는 깡패 아버지와 그에게 돈도 뜯기고 연일 두드려 맞으면서 기구한 일생을 살아온 어머니 사이에서 거친 삶과 동시에 인간적인 연민도 가진 인물, 차무식. 그의 80년대와 2000년대를 넘나드는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카지노>의 서사다. 그는 어쩌다 필리핀까지 가게 되어 그 곳에서 카지노를 운영하며 대부가 되는 인물로, 그 과정은 마치 인생이라는 도박판 위에서 그가 순간순간 던지는 레이스에 가깝다. 

 

시청자들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이 인생 도박 모험의 롤러코스터를 바로 이 차무식이라는 인물을 통해 체험하는 짜릿함을 경험하게 된다. 당시에 수백억씩 되는 돈을 주무르는 욕망의 레이스도 있지만, 돈과 연결된 범죄의 어두움과 거기서 나올 수밖에 없는 살벌한 누아르적 분위기도 빠지지 않는다. 최민식이 대단하다 여겨지는 건, 이 차무식이라는 인물에 입체적인 얼굴을 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건 친구들에게는 끈끈한 친구의 얼굴이지만, 여지없이 살벌한 범죄자의 얼굴이기도 하고 때론 어머니를 한없이 가엾게 바라보는 아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래서 시대를 뛰어넘어가며 이 여러 얼굴을 프리즘처럼 보는 와중에 시청자들은 자연스럽게 그 모험의 여정에 참여하게 된다. 여기에 그의 과거에 깃들인 복고적 풍경들과 사건들이 향수를 자극하고, 이미 그 시대를 겪었던 이들이라면 차무식이 하는 어떤 선택들이 일으킬 결과를 어느 정도는 예감하면서 보게 되는 기대감도 커질 수밖에 없다. 도박, 폭력이라는 소재 자체가 자극적이지만 <카지노>에 감성적인 요소를 부여하는 건 차무식의 이런 다차원적인 얼굴이다. 최민식의 아우라가 <카지노>를 쥐락펴락하며 끌고 가는 힘이 되는 이유다. 

 

스타일로 보면 <카지노>에는 여러 결들이 겹쳐져 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 같은 누아르적 분위기가 묻어나고, 마치 <나르코스> 같은 다큐 영상을 보는 듯한 실감나는 연출이 더해져 있다. 또 80년대와 2천 년대를 오가며 당대의 시대적 풍경을 담아내는 지점에서는 <파친코>가 떠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카지노>를 <카지노>로 만드는 건 역시 최민식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거칠면서도 감성적인 정조가 <카지노>만의 차별적인 색깔을 부여한다. 

 

물론 최민식 이외에도 <카지노>에는 벌써부터 존재감을 제대로 보여주는 배우들이 즐비하다. 무식의 아버지 역할의 김뢰하는 물론이고 무식의 청년시절을 연기한 이규형, 필리핀에서 무식과 카지노 동업을 시작하는 민석준 역할의 김홍파, 국세청 조사 팀장 강민정 역할의 류현경, 무식의 진정한 은사로 짧지만 강력한 존재감을 보여준 진선규 등등 조연들의 활약이 빛난다. 그 누구보다 무식이 필리핀에서 만난 상구 역할의 홍기준은 <카지노>가 발견해낸 보석같은 배우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진짜 본 게임에 들어올 배우들은 아직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이동휘, 손석구, 허성태, 김주령 같은 향후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되는 대목이다. 

 

3회만 먼저 공개되었지만 이미 서사의 몰입감은 다음 주를 못내 기다리게 만들 정도로 촘촘하게 쌓였다. <범죄도시>를 연출한 강윤성 감독은 액션 연출만 잘 하는 줄 알았는데, 인물의 감정을 촘촘히 그려내면서 서사를 쌓아가는 실력도 만만찮다는 게 느껴진다. 이 정도면 작품으로서는 분명 모두가 기대할만한 수작이다. 과연 디즈니+가 가장 기대했던 만큼, 그만한 파장과 화제를 불러일으킬 작품이라는 건 분명해졌다. 그간 좋은 작품을 내고도 생각만큼 주목받지 못했던 디즈니+가 이번에는 다른 결과를 낼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사진:디즈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매운 드라마에 지쳤다면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아이를 키울 때 보리차를 다시 만났다. 열이 나고 많이 아프면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갓 지은 밥에 보리차를 잔뜩 붓고 두 시간 약한 불에 끓였다. 그 밥물을 먹였다. 하루나 이틀 그러고 나면 다시 식욕이 도는 지 제대로 먹기 시작했다. 곁에서 기다리고 서 있어야 한다. 넘치면 안 되니까....”

 

한석규의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가 먼저 마음을 잡아 끈다. 너무 담담해서 레시피를 설명하는 것처럼 들릴 정도지만, 그가 정성을 들이며 이렇게 만드는 음식에는 아내에 대한 깊은 마음이 담겨있다. 창욱(한석규)의 아내 다정(김서형)은 대장암 말기다. 수술을 원치 않는 다정은 창욱에게 자신을 챙겨달라고 요청한다. 두 사람은 별거 중이었지만, 사정을 듣게 된 창욱은 기꺼이 집으로 들어와 다정의 식사를 챙긴다. 건강식으로.

 

왓챠 오리지널 시리즈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가 갖고 있는 서사는 최근 OTT들이 내놓고 있는 자극적이고 매운 맛과는 거리가 멀다. 지극히 담담하고, 일상을 담백하게 담아낸다. 서사라고 하면 말기암 때문에 다정을 챙기는 창욱이 만드는 음식들을 통해 두 사람이 나누는 결코 뜨겁지는 않지만 따뜻한 부부애가 중심에 서 있고, 별거해 집을 나갔던 창욱에 대해 그다지 좋은 감정을 갖고 있지 않았던 아들 재호(진호은)와 창욱이 조금씩 마음을 여는 이야기가 더해져 있다. 물론 재호와 여자 친구 사이에 벌어지는 풋풋한 사랑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한석규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는 이 드라마를 대하는 마음부터 다르게 만든다. 편안한 마음으로 한껏 어깨의 힘을 빼고 드라마가 보여주는 담담한 일상을 들여다보게 해준다. 그런데 그 담담해서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는 일상에 드라마는 깊은 삶의 통찰을 심어 놓는다. 예를 들어 ‘그리운 설날 떡국’이라는 부제를 단 4화의 경우, 떡국 이야기를 꺼내면서 ‘그리움’이라는 삶의 본질을 통찰한다. 

 

오래도록 운영해왔던 출판사 일을 더 아프기 전에 후배에게 물려주려 하는 다정의 마음은 헛헛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12월31일 굳이 회사를 찾아가는 길이 새삼스럽다. 그 길에 운전대를 잡아준 남편에게 이 길이 “그립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굳이 남양주에 있는 동생 같은 저자에게 책을 직접 갖다 주겠다고 한다. 사실은 남편과 그렇게 함께 드라이브 하며 데이트  기분을 좀더 내고 싶어서다. 

 

남양주에게 저자를 만나는 사이 다정은 창욱에게 젊어서 갔었던 장칼국수집에서 점심을 먹으라 한다. 그 곳을 찾아가는 창욱의 마음이 또 새삼스럽다.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서다. 주문한 장칼국수를 기다리며 창욱의 심사가 내레이션으로 깔린다. 그런데 그 내용은 ‘금식’과 ‘그리움’에 대한 이야기다. 

 

“금식은 금식할 때보다 먹기 시작할 때가 더 힘들다. 몸이 받아내지 못할 먹을거리를 머리는 끝없이 기억으로부터 끌어올리기 때문이다. 가벼운 병이라면 한두 주쯤 금식하고 다시 먹기 시작할 때 잘 조절하면 씻은 듯이 낫기도 한다. 하지만 암과 싸우는 사람이라면 일 년이나 혹은 그 이상을 몸은 그리움과 싸워야 한다.” 먹었던 기억이 만들어내는 그리움. 결국 그리움은 굳이 아플 걸 알면서도 쌓아가는 아름다운 기억들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그 시각에 여자친구와 서해에 일몰을 보러 온 재호는 “남들은 해맞이 하러 정동진 간다는데 우리는 거꾸로 왔네”라고 한다. 그러자 여자친구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가는 해 보내주는 사람도 있어야지”라고 툭 던진 말에 재호는 눈물을 쏟아낸다. 암 투병하는 엄마 생각 때문이다. 오래도록 엄마와 가졌던 그 좋은 기억들은 재호에게 더 깊은 그리움으로 남을 게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정은 창욱에게 설날에 먹을 떡국거리를 사자고 한다. 그러면서 창욱의 어머니가 해주셨던 떡국을 먹고 싶다고 한다. 굴을 넣어 국물을 낸 떡국의 그 맛은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의 기억으로 살아있다. “배고픈 만큼이나 그리움은 간절함을 불러일으킨다. 누가 그리움의 고통을 이겨낼 수 있을까. 간절히 그리던 것을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는 불안은 사람을 약하게 만든다. 그리움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 매일 그리워할 기억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었다.” 

 

강창래의 동명 에세이를 원작으로 하는 작품인 만큼, 문학적인 서사가 압권인 드라마다. 지치고 힘든 현실 앞에서 더 큰 자극 속으로 들어가 그 현실을 잊고픈 마음이 크지만, 이 드라마는 더 채워 넣기보다는 덜어내고 그 빈자리를 담담한 생각들로 채워 넣는 것으로 지친 마음을 다독여준다. 그러고 보면 이 드라마는 앞서 내레이션에 담긴 밥에 보리차를 넣고 끓인 ‘밥물’을 닮았다. 자극에 너덜해진 속을 차분히 가라앉혀 보이지 않던 일상 속에 담긴 삶의 비의를 바라보게 해주는 그런 드라마. 매운 드라마들에 지쳤다면 이 슴슴함에 반드시 빠져들 거라 확신한다. (사진:왓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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