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용팝의 일베, 표절 논란, 과연 마녀사냥일까

 

시쳇말로 ‘진격의’ 크레용팝이 요즘은 논란의 크레용팝이 된 듯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이들의 이름이 오르내리지만 그것이 순전히 인기 때문만은 아니다. 일베 논란은 이미 있었지만 크레용팝의 존재감이 점점 커지면서 그 논란도 점점 거인이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걸 그룹 모모이로클로버Z를 거의 복사수준으로 표절했다는 논란까지 불거졌다.

 

'크레용팝(사진출처:크롬엔터테인먼트)'

항간에는 연일 계속 터지고 있는 크레용팝 논란을 마녀사냥으로 치부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렇게 보긴 어렵다. 마녀사냥이라면 전혀 근거 없는 이유를 갖다 붙여 집단으로 낙인을 찍는 것이지만, 크레용팝의 일베 논란이나 표절 논란이 전혀 근거 없어 보이지는 않는다. 이미 여러 차례 일베 용어를 사용한 정도가 아니라 일베를 마케팅적으로 활용하려 했던 점이 SNS 내용을 통해 드러나고 있는 상황이 아닌가.

 

표절 논란 역시 헬멧을 쓰고 트레이닝복을 입는 점이 같다는 그런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그 캐릭터 코스프레 코믹 콘셉트가 비슷하다는 점은 이 논란이 아주 근거 없다 여겨지지 않는 이유다. 물론 표절 논란까지 불거진 것은 일베 논란에서부터 비롯된 대중들과의 소통의 실패가 점점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생겨난 결과일 수 있다. 복제가 일상화된 시대에 표절은 이제 진실의 문제라기보다는 호불호의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마녀사냥’이라는 말은 이미 크레용팝 소속사 사장이 해명 글에서 먼저 사용한 말이다. 그는 ‘저희가 그냥 미우셔서 마녀사냥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시면 달게 받겠습니다’라고 썼다. 그 해명 글의 핵심적인 내용은 자신들이 영세한 기획사이고 그러다 보니 일베 뿐만 아니라 대다수 유명 커뮤니티에 가입해 ‘정보습득’을 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내용에 굳이 ‘마녀사냥’이라는 단어를 왜 사용했는지 의문이다. 이 말에는 자신들은 피해자일 뿐이고 대중들이 마녀사냥 하는 가해자라는 뉘앙스가 담겨 있다. 해명으로서 적절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또한 일베 논란이 거세지자 크레용팝의 멤버인 웨이가 트위터에 해명의 글을 남기며 사용한 ‘시안견유시 불안견유불의(豕眼見惟豕 佛眼見惟佛矣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표현도 적절했다 여겨지지 않는다. 물론 자신들에게 비판적인 특정인들을 지칭해서 사용한 말일 수 있지만, 보편적인 대중을 상대하는 연예인으로서 이런 식의 해명은 잘못된 일이다. 비판도 관심의 일종이라고 생각했다면 비판하는 이들을 모두 돼지로 몰아세우는 표현을 쓸 수 있었을까.

 

일베 논란과 표절 논란을 떼어 놓고 크레용팝이라는 우리에게는 새로운 걸 그룹 스타일과 그들이 내놓은 ‘빠빠빠’라는 곡만을 놓고 보면, 그것이 콘텐츠적으로는 꽤 괜찮은 도발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껏 우리가 봐 왔던 천편일률적인 걸 그룹의 콘셉트를 뒤집는 발상의 전환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한 번 들으면 좀체 잊혀지지 않는 ‘빠빠빠’라는 곡이 음악적으로 거둔 성과도 분명 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이 시대에 콘텐츠보다 더 중요해진 것은 대중과의 소통이다. 제 아무리 좋은 콘텐츠도 대중과 소통되지 않아 비호감이 되어버리면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게 요즘이 아닌가. 한때 잘 나갔지만 소통에 실패해 나락으로 떨어진 사례를 우리는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 티아라가 그렇고, 최근에는 비가 그렇다. 크레용팝이 지금 같은 소통방식을 계속 구사한다면 자칫 콘텐츠와 상관없이 논란만 무성한 걸 그룹으로 전락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논란들을 먼저 ‘마녀사냥’이라고 단정 짓는 순간부터 소통은 요원해진다. 그것은 연예인과 팬으로 엮어져야할 관계가 피해자와 가해자로 구획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항간에는 이제 걸 그룹의 활동도 진보와 보수 같은 이념적인 틀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상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식을 벗어난 일련의 활동들을 보이는 일베를 진정한 보수라고 보기는 어렵다(이건 보수쪽에서도 발끈할 일이 아닌가!). 즉 이것은 이념의 문제도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이 문제를 갖고 마녀사냥이니 이념의 문제니 거창하게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그저 상식의 문제다. 노골적인 성희롱과 고인에게 침을 뱉는 행위가 일상화되어 있는 비상식적인 공간과 연루되어 있으니 대중들로서는 당연히 싫을 수밖에 없는 일이 아니겠나. 물론 무명의 영세한 기획사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초반에 무리한 홍보 마케팅을 했을 수 있다. 하지만 이제 대중들의 주목을 받는 입장에서는 잡음이 생길 자그마한 대중들의 정서까지도 배려하는 관리가 필요하다. 콘텐츠에 실패하면 또 다른 콘텐츠로 승부할 수 있다. 하지만 소통에 실패하면 모든 걸 잃게 되는 시대다.

박민하, 예능보다는 연기에 집중하는 편이

 

단언컨대 영화 <감기>의 지분율이 있다면 그 절반 이상은 온전히 아역 박민하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장혁이 시종일관 뛰어다니고 수애가 발을 동동 구르며 전전긍긍하는 건 전적으로 박민하가 연기하는 미르라는 아이 때문이기 때문이다. 조금 과장되게 말하면 이 전대미문의 바이러스에 고통스러워하고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모두 이 미르라는 아이의 배경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감기>에서 아역 박민하는 이토록 중차대한 역할을 맡았다.

 

박민하(사진출처:영화<감기>)

아이여서일까. 아니면 봉준호 감독이 극찬한대로 천재 아역이라서 그런 것일까. 조금은 부담일 수밖에 없는 이 미르라는 역할을 박민하는 아무런 이물감 없이 천연덕스럽게 해냈다. 만일 아역이라고 하더라도 어떤 약간의 틈입을 만드는 연기력 부족이 느껴졌다면 그것은 이 영화 전체의 몰입을 방해했을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박민하는 틈입을 만들기는커녕 오히려 관객들이 더 극에 몰입할 수 있는 여지까지 만들어냈다.

 

초반부 여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일상적인 모습에서 시작해 차츰 긴장감을 높이는 박민하의 표정의 변화는 이 영화의 고조되는 극과 거의 동일선상에서 움직인다. 연기라고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아이의 감성을 백 프로 끌어내면서도 어떤 점이 관객들의 마음을 건드릴 지 알고 있는 듯한 여유마저 엿보이는 이 아역에게서 분명 좋은 연기자의 가능성을 발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 나이에 어떻게 이런 게 가능했을까. 심지어 연기 경력도 그다지 많지 않은 상황에서.

 

박민하의 연기는 말 그대로 극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다루려는 이야기는 그녀가 <감기>에서 어떤 연기력을 보였는가 하는 그런 점이 아니다. 이토록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아이가 왜 그 동안 심지어 대중들에게 박한 평가를 받아왔는가 하는 점이다. 그녀는 심지어 ‘안티 카페’가 생겼을 정도로 부정적인 이미지가 만들어졌다. 그것은 그녀가 ‘순수함을 잃고 너무 작위적’이라는 대중들의 반응 때문이다.

 

이제 겨우 만 6세의 아이가 <붕어빵> 같은 예능 프로그램에서 주목받고 <해피투게더>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 어른 뺨치는 모습을 보여줬을 때 대중들은 고개를 돌렸다. 그것이 아이의 모습이라고 여기기에는 너무 카메라를 의식한 행동 즉 연기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시키면 몇 초만에 뚝딱 눈물을 흘리고 노래를 부르며 울먹이고 또 금세 걸 그룹의 섹시 댄스를 흉내 내는 모습을 아이답다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런 모습은 최근 리얼 예능이 추구하는 ‘진정성’면에서는 분명 부정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만 6세의 아이에게 예능 프로그램이 요구하는 것과 연기가 요구하는 것의 차이를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것이 연기적인 면이 있었다고 하더라도(게다가 그녀는 타고난 연기자의 자질을 갖고 있다) 비판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다만 비판의 소지가 있는 것은 이제 갓 만 6세의 아이가 가진 잠재력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어른들의 배려와 관리다. 박민하라는 아이의 가능성을 알아봤다면 이 아이가 섣불리 예능 프로그램에 나가는 것이 과연 득이 될 것인가를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연기는 본업이고 예능은 그저 하는 것이라고 쉽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예능에서 만들어지는 부정적인 이미지는 연기자에게는 치명적일 수 있다. 연기자는 결국 자신의 이미지에 연기가 영향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이라도 <감기>같은 작품을 통해 박민하라는 장차 촉망되는 연기자를 발견한 것은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이라도 이 아이가 가진 연기자로서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길로 차근차근 걸어 나가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박민하에게 지금 필요한 건 잦은 예능 출연이 아니라 더 좋은 작품을 만나 연기자로서 경험해가며 조금씩 성장해가는 모습이다.

‘시청률의 제왕’이 꼬집은 <최고다 이순신>, 그 실상

 

‘이 드라마는... 달리기에 지쳐있는 우리 사회에 위로와 희망, 치유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기획되었다.’ 이 문구는 <최고다 이순신> 기획의도의 한 부분이다. 이 기획의도에는 행복이란 ‘더 많이 가진다고 더 높이 올라간다고 얻어지는 게 아니며’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건 ‘곁에 있는 사람의 소박하지만 진심 어린 사랑’이라고 밝히고 있다. <최고다 이순신>의 기획의도는 이처럼 순수하고 심지어 소박하다.

 

'최고다 이순신(사진출처:KBS)'

아마도 이것은 진짜 <최고다 이순신>이 애초에 그리려했던 것들일 게다. 하지만 25일 종영에 즈음해 이 드라마를 되돌아보면 기획의도가 무색해질 정도로 방향이 엇나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드라마가 애초 다루려던 것은 위로와 희망과 치유의 메시지였을지 모르겠지만, 실상 드라마가 계속 보여줬던 것은 막장에 가까운 엄마들의 부모로서 해서는 안될 패악이 대부분이었다.

 

이것은 어쩌면 애초에 ‘출생의 비밀’을 드라마 전체의 동력을 삼은 시점부터 어쩔 수 없는 엇나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순신(아이유)의 아버지가 그녀의 친모인 송미령을 구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부터, 아니 이순신의 친모가 그녀를 키워준 김정애(고두심)가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야기된 것이었다. 친 가족이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부터 이순신은 그래서 가시밭길을 걷게 된다. 처음에는 김정애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다음은 둘째 언니인 이유신(유인나)가 노골적으로 그녀를 구박하기 시작한다.

 

그렇게 드라마의 상반기가 지나가고 중반에 이르게 되면 이제 친모인 송미령의 패악이 시작된다. 처음에는 친모인 줄 모르고 이순신을 배신하고, 후에 친모임을 알게 된 후에는 딸의 입장은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 욕심만 채우려 하는 모습을 보인다. 놀라운 일이지만 이 이야기가 이 드라마의 전체 내용이나 다름없다. 중간에 이유신과 박찬우(고주원)의 반대를 이겨낸 전형적인 결혼이야기가 들어있고, 이혼한 이혜신(손태영)의 전남편과의 갈등과 새 남자 서진욱(정우)과의 어디서 많이 보았던 로맨스가 들어있을 뿐이다. 이렇게 새로운 내용이나 메시지 없이 달려온 50부는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어떤 가치나 의미를 창출해내지 못하는 드라마가 결국 가지려는 의도는 시청률로 귀결된다. 적당한 가족 드라마적 요소와 신데렐라 스토리를 섞고 그 안에 이른바 시청률을 위한 공식적인 설정들을 집어넣으면 괜찮은 시청률을 가져갈 수 있다는 안이한 선택. 이런 선택이 가능한 것은 이 편성 시간대가 사실상 무주공산이나 다름없는 KBS 주말 저녁 시간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 <최고다 이순신>의 안이한 선택은 그만한 보상을 얻지는 못한 것 같다. 그간의 드라마들과 비교해 보면 이 드라마의 시청률은 현저히 떨어졌다.

 

아마 처음부터 이런 드라마를 쓰고 연출하고픈 작가나 연출자는 없을 테지만 이 드라마는 애초에 특별한 아이디어나 메시지가 있었다고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는 아이유와 조정석을 캐스팅함으로써 그 힘을 만들어내려 했지만 이야기가 받쳐주지 않는 드라마는 이들의 존재감마저 그다지 키워놓지 못했다. 아이유는 늘 구박의 중심에 서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고 쳐도, 조정석 같은 연기파 배우를 캐스팅하고도 이 정도밖에 활용하지 못한 데는 대본의 결함이 심각했다는 것을 반증한다.

 

흥미로운 건 같은 KBS의 <개그콘서트> ‘시청률의 제왕’이라는 코너에서 <최고다 이순신>의 문제를 정확하게 짚어냈다는 점이다. 드라마 제작자인 박성광은 드라마가 진행되는 걸 보면서 대뜸 이렇게 말한다. “주말드라마답지 못하게 이게 뭐야? 이래서 어머니들이 좋아하겠어? 어머니들이 좋아할만한 캐릭터 넣어서 한 번 가보자! 악녀!” 이 개그코너는 드라마에서 이순신을 선배라는 입장을 이용해 교묘하게 괴롭히는 최연아(김윤서)를 패러디하면서 심지어 “어어 재수 없어!”하고 감탄사를 내뱉는 박성광을 보여준다.

 

뜬금없이 대표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이나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게 해주겠다며 보여주는 ‘엇갈림 삼종 세트’ 역시 그저 개그의 하나로 웃어넘길 수 없는 건, 그것이 실제로 <최고다 이순신>이 해왔던 시청률을 위한 장치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틀에 박힌 자극적인 공식들을 사용해 시청률이 올라가는 걸 보며 제작자인 박성광이 “아이고 재밌어. 아이고 재밌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그래서 웃음 뒤에 씁쓸함을 남긴다. 뭐가 재밌다는 말인가. 공식에 낚인 시청자들이?

 

종영에 즈음해 <최고다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이 드라마는 어떤 면에서 최고가 되고 싶었던 걸까. 물론 최고의 위치에 오른다고 최고가 되는 건 아니라는 주제를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청률에 지나치게 경도되어 틀에 박힌 공식만 반복하면서 이 드라마는 엇나가버렸다. 설마 ‘시청률의 제왕’이 보여주는 것처럼 시청률만 높으면 심지어 “재밌다” 생각하는 것일까. 이런 식이 계속된다면 주말극의 왕좌라는 자리조차 위태로워질 건 빤한 일이다.

힘빠진 <썰전>, 강용석과의 상관관계

 

강용석을 구원한 건 물론 본인이다. 그가 꽤 치밀하게 방송인이 되기 위한 수순을 밟아왔다는 것은 <슈퍼스타K4>에 참가했던 사실에서부터 알 수 있다. 누군가를 평가하던(사실은 고발하던) 입장에서 <슈퍼스타K4>의 자리는 평가받는 이미지를 부여했다. 대중들이 그를 평가하고 심지어 비난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방송에 들어오는 티켓을 부여받았던 것.

 

'썰전(사진출처:JTBC)'

하지만 강용석을 좀 더 대중들 가까이로 끌어들인 인물은 김구라다. <썰전>이라는 프로그램은 물론 ‘김구라쇼’라고 해도 무방할 법한 김구라를 위한 토크쇼지만, 그 안에서 키워진 강용석의 존재감도 무시하지 못한다. 그것이 <썰전>의 전반부를 장식하는 ‘하드코어 뉴스깨기’와 후반부 ‘예능심판자’에 김구라와 함께 강용석이 출연하는 이유일 게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강용석에 대한 반응이 예전 같지 않다. 한때 비호감 정치인의 대명사처럼 여겨졌던 그가 방송인으로서 승승장구하던 몇 달 전을 떠올려보면 지금은 그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어마어마한 악플이 달라붙는 것을 볼 수 있다. 변호사로서 또 한때 정치인으로서 경험했던 것들을 토크의 무기로 장착하고 방송인으로서도 그다지 나쁘지 않은 감을 보여주던 강용석이었지만 이 신선감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느낌이다. 어찌된 일일까.

 

가장 큰 이유는 <썰전>의 힘이 빠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강용석의 존재감을 최대치로 이끌어내며 심지어 종편 JTBC에서 방영되는 프로그램이지만 보편적인 시청층까지 확보한 프로그램이 <썰전>이 아니던가. 하지만 토크쇼가 가진 어쩔 수 없는 한계는 <썰전>에도 그대로 드리워지고 있다.

 

그나마 저력이 여전히 느껴지는 건 <썰전>의 전반부를 장식하는 ‘하드코어 뉴스깨기’다. 워낙 정치나 시사 문제를 소프트하게 예능으로 접근한 토크쇼가 부재했던 터라 이 코너가 가진 파괴력은 여전히 대중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이철희 소장과 강용석 변호사가 때론 지나치게 의견충돌을 일으켜 가운데 앉아있는 김구라를 당황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하드코어 뉴스깨기’만의 특별함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드코어 뉴스깨기’에서도 강용석 변호사의 멘트의 힘이 초반에 비해 파괴력을 잃고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초반만 해도 이 코너는 온전히 강용석 변호사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치에 대해서 때론 지나치게 사적으로 접근하는(이를테면 정치인들이 목욕탕 가는 이야기 같은) 강용석 변호사의 이야기가 워낙 참신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지 이런 식의 엉뚱한 접근이 반복되다 보니 이제는 식상해지는 느낌이다. 최근 들어 이철희 소장이 더 주목을 끄는 것은 초반 시선을 끈 강용석 변호사의 이야기가 재미는 있었을 지 몰라도 점점 알맹이가 없다는 것을 간파한 대중들의 달라진 관점 때문이다. 정치문제와 시사문제에 더 깊숙이 들어갈수록 강용석 변호사의 접근방식이 너무 가볍게만 여겨진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볼만한 부분이 많은 ‘하드코어 뉴스깨기’지만 후반 코너인 ‘예능심판자’는 그다지 확실한 재미를 뽑아내지는 못하고 있다. 허지웅 기자가 조금씩 새로운 캐릭터로 등장하고는 있지만 강용석 변호사는 지나치게 아마추어적인 감상을 심지어 막말을 섞어 자극적으로 이야기하는 방식을 보여주고 있어 대중들에게 그다지 공감을 얻어내지 못하고 있다.

 

<설국열차>를 갖고 나눈 이야기에는 강용석 변호사가 가진 한계가 드러난다. 물론 호불호가 나뉠 수 있고 또 비판적 관점을 가질 수는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자기만의 이유와 근거가 있어야 한다. “주입식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았다”면서 “어떤 것을 주입받았느냐”는 질문에 답변을 못한다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그건 자칫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 송강호가 열차의 보안설계자로 나오는데 문을 따는 방식이 “허접하다”고 표현한 것도 그렇다. 그것은 영화적 장치일 뿐이며 사실 어떻게 따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 “허접하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과하다는 인상이 짙다. 안철수 교수를 멘토 최장집 교수가 떠난 이유에 대한 이야기에서도 강용석은 거의 소설에 가까운 때 아닌 ‘운영자금문제’를 이유로 제시하기도 했다.

 

이런 식의 아무렇게나 던지는 멘트는 강용석이 잠깐 방송인으로서 만들어냈던 호감의 요소마저 지워버린다. 불성실하게 여겨질 뿐만 아니라 때로는 그가 그토록 싫어한다는 ‘가르치려는 태도’의 또 다른 이야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나아가 뭐든 자신이 던지는 말이면 대중들이 받아들일 것으로 여기는 태도로까지 보여질 수 있다.

 

비호감 정치인이었던 강용석이 방송인으로서 승승장구하는 것에 대해서 SBS 박상도 아나운서가 걱정스런 비판을 내놓았을 때 또 그걸 보고 대중들이 공감했을 때조차 강용석 본인은 아무런 입장이나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최소한 아무런 자숙기간 없이 방송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에 대한 대중들의 정서는 여전히 좋지 않다. 이런 상황에 더 많은 방송으로 승승장구 하는 모습은 방송인 강용석에게 좋은 이미지로 작용하기 어렵다. 그는 좀더 방송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안타까운 점은 강용석이 비호감으로 점점 전락하는 과정에서 그를 끌어내주고 함께 방송을 하고 있는 김구라의 이미지도 같이 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김구라의 진심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함께 방송을 하다 보니 강용석이 하는 멘트에 때로는 리액션을 해줘야 하는 과정에서 김구라가 마치 동조자 같은 인상을 준다는 점이다. 이것은 김구라로서는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닐 것이다.

 

강용석이든 김구라든 어떤 능력을 통해 방송인으로서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요즘은 능력보다는 그 사람이 주는 호감이 우선한다는 것을 먼저 생각해볼 때다. <썰전>은 지금 바로 그 능력과 호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실로 중요한 시기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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