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과 ‘오십억 게임’ 그리고 아빠 찬스

오징어 게임

“저는 너무나 치밀하게 설계 된 <오징어 게임> 속 말일뿐.” 곽상도 국민의 힘 의원의 아들 곽병채씨가 퇴직금 명목으로 50억 원을 수령했다는 사실에 대한 해명에 갑작스레 <오징어 게임>이 등장했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현재 넷플릭스가 서비스되는 전 세계 83개국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글로벌 열풍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드라마. 아마도 곽상도 의원의 아들 역시 이 드라마를 봤던 모양이다. 

 

그가 ‘오징어 게임 속 말’이라고 했던 건 이 드라마에서 기훈(이정재)은 노모의 카드를 빼내 현금 서비스를 받은 돈으로 경마를 한다. 드라마 첫 회에 등장하는 이 시퀀스는 <오징어 게임>이 앞으로 벌어질 일들을 예고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이제 456억을 두고 이른바 VIP들의 재미를 위해 경주마가 되어 죽고 죽이는 데스 서바이벌 게임이 펼쳐질 거라는 예고. ‘오징어 게임 속 말’은 그래서 기득권자들이 만들어놓은 경쟁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절박하게 목숨을 걸고 달릴 수밖에 없는 보통 서민들을 은유한다. 물론 저 경쟁 시스템을 만든 기득권자들에 대한 환멸에 가까운 냉소를 포함해.

 

하필이면 <오징어 게임>의 비유를 들었지만, 대중들은 그것이 결코 적확한 비유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도 그럴 것이 6년 근무하고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는 일이 상식적일 수 없어서다. 게다가 이런 그가 진정으로 ‘오징어 게임 속 말’처럼 절박한 청년이라 보기도 어렵다. 곽씨는 “제가 입사한 시점에는 화천대유는 모든 세팅이 끝나 있었다”며 “돌이켜 보면 설계자 입장에서 저는 참 충실한 말이었다”고 했다. 또 “한 번은 운전 중에, 또 한 번은 회사에서 쓰러져 회사 동료가 병원으로 이송하기도 했다”며 “일 열심히 하고, 인정받고, 몸 상해서 돈 많이 번 것”이라고 했다. 그가 <오징어 게임> 운운한 건, 설계자는 따로 있고 자신은 그 안에서 열심히 달린 것뿐이라는 걸 피력하기 위함이다. 

 

그는 마치 자신이 <오징어 게임> 속 기훈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한다. 드라마를 본 분들은 알 수 있듯이 기훈이 그런 결과를 얻게 되는 건 보이지 않는 설계자의 손길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운’이다. 하지만 곽씨가 하필이면 그 회사에 입사해 6년 가량 일하고 퇴직금으로 50억 원을 받은 걸 어떻게 운으로 볼까. 본인 스스로도 ‘설계자’가 있음을 얘기하고 있는 것처럼 대중들이 이 사안을 ‘아빠 찬스’로 보는 이유다. 

 

곽상도 의원은 공석에서 취준생들의 박탈감을 대변한 일이 있다. “수십 수백 대 1 경쟁 뚫고 어렵게 입사한 직원과 채용에서 탈락한 취업준비생과 그 부모들은 가슴을 치고 있다”며 문재인 정부를 비판했다. 그는 평등, 공정, 정의를 물었다. 놀랍게도 <오징어 게임>에서 456억을 두고 벌이는 게임에 룰로서 제시되는 가치들이 바로 평등, 공정 같은 것들이다. 그것을 어기면 즉결심판에 처해진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을 끝까지 보다 보면 평등, 공정 같은 가치들이 일종의 ‘선언’일 뿐, 결코 실현되는 가치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경쟁사회라는 시스템 자체가 이런 가치를 실현하지 못하게 한다. 특히 시스템 꼭대기에서 오징어 게임의 말들을 내려다보는 기득권자들의 선언과는 다른 ‘내로남불’이 존재하는 한 더더욱.

 

며칠 전 벌어진 장제원 의원의 아들 노엘 사건 역시 청년들에게 <오징어 게임>을 떠올리게 했을 게다. 무면허 운전, 음주측정 불응, 경찰관 폭행 게다가 그는 이미 음주운전 교통사고를 내서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은 상황이었다. 2017년 래퍼로 데뷔한 후 지금껏 그만큼 많은 범죄행위들이 논란을 불러일으킨 연예인도 드물다. 하지만 그는 그 때마다 버젓이 활동을 이어갔다. 이것이 어떻게 노엘이라는 한 연예인의 힘만으로 가능할까. 보통의 연예인이라면 수년을 자숙해도 복귀가 가능할까 싶은 수준이 아닌가. 여기서도 청년들은 두 단어를 떠올린다. ‘내로남불’과 ‘아빠 찬스’. 한때 조국과 그 딸을 ‘부모찬스’를 언급하며 맹공했던 장제원 의원에게 이제 고스란히 그 화살이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 

 

<오징어 게임>은 ‘오십억 게임’이 되었다. 누군가 시작한 패러디는 지금의 청년들이 느끼는 분노와 허탈감을 가득 담은 일종의 놀이처럼 확산되고 있다. 인터넷 뉴스 속 댓글들도 “미안해 아빠가 곽상도가 아니라서...”, “곽상도 아들로 못 태어난 죄”라는 글이 유행처럼 번져간다. “곽씨와 화천대유는 깐부 사이냐”, “오징어게임 참가자들은 목숨을 걸었는데, 곽씨는 무엇을 걸었나” 같은 <오징어 게임> 속 이야기를 꺼내와 분노를 표한다. 

 

지금 <오징어 게임>이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건, 그 세계에서 어떤 희망을 보고 있어서가 아니다. 대신 현실을 똑 빼닮은 그 세계를 냉소하고 있어서다. 어쩌면 우리는 저 세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습이라고 결코 믿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어떤 공정이나 평등을 부르짖는 힘 있는 자들의 목소리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마치 기훈이 설계자의 도움을 받아 살아남듯이, 태생적으로 계급이 나뉘어져 ‘아빠 찬스’가 그 사람의 ‘운’처럼 치부되는 경쟁사회 속에서 <오징어 게임>은 불쾌하지만 적어도 폭로의 쾌감을 선사한다. 

 

청년들이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는 그 정서 속에는 분노와 허탈감, 조롱, 냉소 같은 감정들이 깔려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오징어 게임>은 지금 현재 현실 버전으로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러니 그 누가 이 냉소에 공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이건 어쩌면 우리만의 이야기는 아닐 게다. 전 세계의 청년들이 <오징어 게임>의 냉소에 열광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진짜 말처럼 뛰고 또 뛰는 서민들은, 게임 바깥으로 튀어나오지 않고서는 결코 끝나지 않을 현실 버전의 경쟁 게임 속에서 몇몇 기득권자들의 즐거움(행복)을 위해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으니.(사진:넷플릭스)

‘원 더 우먼’, 갑질, 시월드, 비리, 위선에 날리는 강력한 한 방

원 더 우먼

“다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깝쳐!” 교통사고로 인해 머리를 다쳐 기억상실이 된 채 졸지에 재벌가 며느리 강미나(이하늬)가 된 비리검사이자 조폭 행동대장 외동딸 조연주(이하늬)는 꾹꾹 눌렀던 감정을 폭발시킨다. 자신이 진짜 며느리인 줄 알고, 재벌가 시월드에서 꼭두각시에 노예처럼 대접받아왔다는 걸 알게 되면서도 그러려니 했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당하기만 했던 강미나가 아니라 성공하기 위해서는 뭐든 해왔던 비리검사이자 거의 조폭급의 싸움 실력으로 그들과도 결탁되어 있는 조연주다. 그의 본성이 터져 나오며 재벌가 시댁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보란 듯이 일침을 가하는 장면은 마치 이 드라마가 패러디해 따온 제목 <원 더 우먼>의 그 슈퍼히어로를 떠올리게 한다. 

 

계속 무시하듯 장난치는 큰며느리의 아들에게 “왜 나한테만 그러냐”고 소리치고, 그런 그에게 얘가 장난 좀 한 걸 갖고 뭘 그러냐는 큰며느리에게도 똑같이 쏘아붙인다. 꼴에 남편이라고 끌어 앉히려는 한성운(송원석)에게 “이해? 말이 좋아 이해지 나보고 그냥 입 닥치고 가만있으라는 거잖아?”하고 일침을 가하고, 급기야 참지 못한 시아버지이자 한주그룹 회장인 한영식(전국환)이 큰 소리로 “조용히 못해!”하고 소리치자 주춤하기는커녕 더 큰 소리로 “언성 높은 사람이 이기는 거예요? 아니 이게 무슨 노름판도 아니고 왜 갑자기 소릴 질러요? 아이고 깜짝이야!”하고 외친다. 이렇게 일일이 한 사람씩의 공격에 맞대응하는 모습은 마치 원더우먼이 빗발치는 총알들을 팔찌로 막아내고 공격한 자들에게 되돌려 보내는 것처럼 보인다. 

 

SBS 금토드라마 <원 더 우먼>의 이 속 시원한 사이다 장면은 이 드라마가 겨냥하고 있는 카타르시스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드러낸다. 그 순간 이 독보적인 여성은 노예처럼 시월드에서 핍박받아온 그 응어리를 마치 총알처럼 쏘아댄다. 과장된 코미디로 연출되어 있지만 마침 추석 명절을 보내고 온 며느리들 중에는 이 광경이 주는 시원함이 남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여성 캐릭터가 겨냥하고 있는 건 시월드로 대변되는 가부장적 세계만이 아니다. 마침 이 여성이 살아가고 있는 곳은 며느리에게조차 갑질이 일상이 되어 있는 재벌가다. 남편은 대놓고 바람을 피고, 집안사람들은 유민그룹의 막내딸인 이 여성이 물려받게 될 유산에만 관심이 있다. 재벌가 며느리지만 가사도우미와 크게 다를 바 없는 하루하루의 스케줄을 가진 이 여성은 그래서 재벌가라는 회사의 갑질 아래 핍박받고 착취당하는 노동자 같은 위치를 드러낸다. 그러니 이 여성이 싸워나가는 건 시월드의 핍박만이 아니라, 갑질하는 세상의 핍박이기도 하다. 

 

게다가 어쩌다 재벌가 며느리 강미나가 된 이 여성의 실체는 비리검사이자 조폭인 조연주다. 그러니 기억을 잃기 전까지는 그 법 지식을 이용해 어떻게든 성공하려 애써왔지만, 이제 재벌가 며느리의 역할을 하게 된 그는 그 남다른 법 지식을 갖가지 비리와 위선으로 점철된 재벌가와 싸우는데 활용하게 된다. 물론 비리를 캐거나 혹은 후계자 승계구도 대결을 벌이는 과정에서 한성혜(진서연) 같은 적이나 조폭들의 물리적인 폭력 앞에서도 그의 잠재된 능력(?)이 튀어나온다. 저도 모르게 조폭들을 때려눕히며 “나 왜 이렇게 잘 싸워?”라고 하는 대목은 코믹하게 그려져 있지만 이 독보적인 캐릭터의 무소불위를 잘 드러내준다. 

 

사실 <원 더 우먼>은 그 흔하디흔한 ‘왕자와 거지’ 코드와 기억상실 코드를 틀로 가져왔다. 다분히 식상할 수 있는 이야기 틀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 익숙한 코드를 통해 축조해낸 무소불위의 여성 캐릭터는 단연 독보적이다. 그는 비리검사였으며 조폭이었지만 재벌가 며느리이기도 하다. 그래서 법, 주먹, 돈을 모두 쥘 수 있는 캐릭터다. 중요한 건 이런 잠재적 능력을 이 여성 캐릭터가 무엇을 하는데 쓰는가 하는 점이다. 정의의 사도 같은 캐릭터와는 멀고 적당히 속물적이지만 불의는 참지 못하는 이 캐릭터는 저도 모르게 시월드와 싸우고, 갑질하는 세상과 싸우며, 부정한 방법으로 치부해온 위선적인 기득권자들과 싸운다. 

 

물론 굉장히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의식을 드러내는 작품이라고 보긴 어렵지만, 일주일 간 갑질하는 세상에서의 갖가지 스트레스와 피로를 한 몸에 안고 주말을 맞이한 시청자들에게 한 시간 동안의 시원시원한 사이다를 날려주기에는 충분한 작품이다. 특히 이 한 여성 캐릭터에 이러한 다양한 사회의 갑질 구조를 부여한 건 이 드라마의 신의 한 수라 할만하다. 여성과 약자들의 연대적 지지가 그 캐릭터 속에 자연스럽게 부여될 수 있어서다. 아마도 최근 등장한 여성캐릭터 중 독보적인(One) 여성 캐릭터(The woman)의 탄생이 아닐까 싶다. (사진:SBS)

‘오징어 게임’, 456명과 456억 사이

오징어 게임

(본문 중 드라마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드라마를 시청하실 분들은 참고 바랍니다.) 어린 시절 공터에서는 흙바닥에 오징어 모양을 그려놓고 아이들이 오징어 게임(당시에는 오징어 가이상이라 불렸다)을 하곤 했다. 맨몸으로 공수를 나눠 부딪치는 게임은 꽤 과격했지만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를 선사했다. 밥 냄새가 몽글몽글 피어나는 저녁 시간이 되어 엄마들이 아이 이름을 불러서야 겨우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으니.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은 이 어린 시절의 게임들을 모티브로 가져와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서바이벌 게임으로 변주해낸다. 빚에 쪼들리면서도 경마 같은 도박을 통해 일확천금만을 꿈꾸는 기훈(이정재)은 이혼 당한 후 힘겹게 생업으로 버텨가는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며 딸 생일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는 처지다. 그런 그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 불쑥 게임을 제안한다. 딱지치기를 해서 이기면 10만원을 주고 지면 뺨 한 대를 10만원 값으로 때리겠다는 것. 얼굴이 벌개질 정도로 두드려맞던 기훈은 결국 딱지를 뒤집고 돈을 번다. 그리고 오징어게임에 참가할 수 있는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을 받는다. 

 

<오징어 게임>의 이 시퀀스는 이 드라마가 말하려는 세계관을 압축해 보여준다. 돈과 뺨 맞기의 등치는 앞으로 기훈이 그 낯선 곳으로 끌려가 하게 되는 오징어 게임의 핵심적인 룰이다. 456번을 달게 된 기훈은 자신이 그 게임에 참여한 마지막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고, 그 곳에 모인 456명과 돈을 놓고 서바이벌 게임을 하게 된다. 각 한 사람의 목숨은 1억 원으로 매겨진다. 그래서 한 사람이 죽을 때마다 이들이 지내는 합숙장소의 천장에 매달린 거대한 투명 공 안으로 그만큼의 돈다발이 쏟아져 쌓여간다. 456명의 목숨 값은 그래서 456억이고 끝까지 살아남는 최종 1인은 그 456억을 가져가게 된다. 

 

목숨을 건 서바이벌 게임이라는 점에서 살벌하지만, 이들이 하는 게임은 너무나 상반된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동심 게임들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에서부터 ‘구슬치기’, ‘오징어게임’ 같은 게임들이다. 요즘이야 각종 돈 들어가는(심지어 현질을 해야 하는) 인터넷, 모바일 게임들이 넘쳐나지만 당시만 해도 맨몸으로 쪽수만 맞으면 동네 어디서든 할 수 있었던 게임들. 그것도 너무 재밌어서 밤에 잠 잘 때조차 다음 날이 기다려지기까지 했던 바로 그 게임들이다. 설마 사람까지 죽이겠어 하는 의구심은 첫 게임에서 무차별 살상을 겪고 난 후부터 살벌한 현실감으로 다가온다. 동심 게임이 피가 튀고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변화해가는 것. 

 

<오징어 게임>은 방영 전부터 표절 논란이 나왔을 정도로 우리에게는 익숙한 ‘서바이벌 게임’류 콘텐츠들의 계보를 잇고 있다. 일본 영화 <배틀로얄>이 그렇고, <신이 말하는 대로>, 최근에 넷플릭스에서 서비스된 일본 드라마 <아리스 인 보더랜드> 같은 작품들이 그것이다. 마치 게임 속에 들어간 것처럼 제시되는 미션들을 해결해야 살아남는 서바이벌 게임류 콘텐츠들은 이제 계보를 얘기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이 나왔다. 이에 대해 황동혁 감독은 <오징어 게임>이 “2008년부터 구상한 작품”이라며 “유사포맷이라 언급되는 작품은 그보다 훨씬 이후에 공개됐다”고 했다. 우선권을 따지자면 이 작품이 원조라는 주장이다. 

 

표절이냐 아니냐의 문제를 떠나서 <오징어 게임>의 오리지널리티는 여기 등장하는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게임들과 이 게임에 참여하는 이들의 캐릭터와 스토리가 부여하는 한국적 정서가 아닐까 싶다. <오징어 게임>은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가상의 게임 상황을 가져오지만, 이 가상을 통해 진짜 하려는 이야기는 오히려 현실이다. 

 

구조조정을 당한 후 가게를 열었지만 실패한 기훈(이정재), 서울대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했지만 횡령과 사문서 위조로 쫓기는 신세가 된 상우(박해수), 탈북자로서 동생을 보육원에 맡긴 채 어머니를 데려오려 브로커를 썼지만 도망쳐버려 다시 돈을 벌어야 하는 새벽(정호연), 머리에 뇌종양이 자라고 있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일남(오영수), 조직의 돈에 손을 댄 일로 쫓기는 조폭 덕수(허성태), 임금체불로 실랑이를 벌이다 기계에 손이 빨려 들어간 사장의 주머니에서 돈뭉치를 갖고 도망친 외국인 근로자 알리(트리파티 아누팜) 등등. 벼랑 끝에 몰려 있는 이들은 한국 사회의 어두운 현실을 이 살벌한 게임 속으로 가져온다. 이들 모두의 현실 밑바탕에 깔려 있는 건 돈이지만 그 양상은 구조조정이나 학력사회, 탈북자 문제, 조폭, 외국인 근로자의 현실 등을 담고 있다. 

 

흥미로운 건 오징어 게임의 룰이 공정, 평등 같은 가치를 내세운다는 점이다. 그 결과에 따라 목숨이 왔다 갔다 하지만, 적어도 이 게임은 현실에서의 스펙 따위 필요 없이 공정한 기회가 주어지고, 어느 누구도 위계를 갖지 않는 평등함이 엄격한 룰로 제시된다. 물론 그건 허위다. 공정과 평등을 내세우지만 뒤에서는 인간의 장기를 밀매하는 끔찍한 비리들이 자행된다. 결국 이 세계도 겉으로 내세우는 공정과 평등 같은 가치의 룰을 따라가는 게 아니라, 죽고 죽이는 잔혹한 서바이벌의 룰을 따라간다. 그 가치 기준은 돈으로 귀결된다. 

 

가상의 게임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배신하는 이들의 면면은 그래서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한다. 게임에서 지면 즉결처분되는 상황은 그래서 우리네 현실 또한 그다지 다르지 않다는 걸 생각하게 한다. 그 곳은 지옥이지만, 그 곳 바깥도 똑같이 지옥이다. 그걸 만드는 건 이 시스템을 굴리는 자들이고, 그 동력은 돈이다. 자본화된 사회가 만들어내는 머니 게임, 즉 돈과 사람의 가치가 등치되는 그 게임이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라는 것. 

 

이야기는 빙 돌아서 다시, 아무 것도 없어도 맨 땅에 오징어 그림 하나 그려놓고 그토록 재밌게 놀 수 있었던 어린 시절의 오징어 게임과, 이제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살아남는 오징어 게임을 병치해놓는다. 누군가에겐 재미이지만, 욕망과 좌절이 덧대진 누군가에는 목숨을 걸고 하는 서바이벌이 되는 세상. 456명이 456억으로 등치되는 세상. <오징어 게임>은 그렇게 다시 우리에게 질문을 돌려놓는다. 매일 같이 생존을 위해 사회로 나가는 당신은 과연 어떤 ‘오징어 게임’을 하고 있느냐고. 그 어린 시절 순수한 재미와 몰입감을 줬던 삶의 게임인지, 아니면 그 순수함이 사라진 후 벼랑 끝에서 벌이는 욕망의 게임이지, 이 드라마는 묻고 있다.(사진:넷플릭스)

‘홍천기’, 간만에 잘 빠진 판타지 사극의 탄생

홍천기

하람(안효섭)이 볼 수 있었을 때 홍천기(김유정)는 앞을 못 봤고, 홍천기가 보게 됐을 때 하람은 앞을 볼 수 없게 됐다. SBS 월화드라마 <홍천기>의 이 설정은 홍천기와 하람 사이의 운명적인 사랑이야기를 담은 이 드라마를 더 애틋하게 만드는 장치가 아닐 수 없다.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사랑은, 서로를 동시에 보지 못한다는 사실로 인해 어떤 가림막이 세워지고 그래서 그 가림막을 뛰어넘어 서로를 알아보는 과정의 애틋함으로 피어나기 때문이다. 

 

어려서 기우제 날 우연히 만나 함께 복숭아 서리를 나서고 복사꽃 아래서 조금씩 마음을 나눴던 홍천기와 하람. 당시 앞 못 보던 홍천기는 그 날 나누었던 말과 복사꽃 향기로 하람을 기억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 기우제 날 홍천기와 하람의 처지는 정반대가 된다. 기우제의 희생 제물로 서게 된 하람의 몸속으로 마왕이 깃들고, 그걸 알게 된 삼신(문숙)이 마왕이 깨어나는 걸 막기 위해 하람의 눈을 빼앗고 그 눈을 홍천기에게 주기 때문이다. 이로써 홍천기는 눈을 뜨고 하람은 눈이 멀게 된다. 

 

세월이 흘러 장성한 두 사람은 다시 운명처럼 만나지만 서로를 단박에 알아보지는 못한다. 하지만 하람은 점점 어려서 만났던 복사꽃 아래 소녀와 홍천기가 겹쳐지고 호위무사를 통해 그가 바로 그 소녀였다는 걸 알게 된다. 하지만 복수를 꿈꾸는 그는 홍천기에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다만 한 걸음 떨어져 그를 도울 뿐이다. 그리고 드디어 홍천기도 하람이 그 때 복사꽃 아래서 만났던 소년이 아닌가 생각하기 시작한다. 

 

일종의 그림 오디션인 ‘매죽헌 화회’는 ‘본다’는 사실을 모티브로 한 <홍천기>의 성장서사와 운명적 사랑이야기가 잘 드러난 에피소드다. 그림 고수들이 모여든 가운데, ‘달빛 아래 핀 매화가 향이 그윽해, 나비가 봄이 벌써 온 줄 알고 떼 지어 날아든다’는 1차 화제의 그림으로 홍천기는 하늘로 곧게 뻗은 매화가지와 둥글게 피어오른 달 그리고 그 매화 향기를 찾아 날아든 듯한 나비를 그렸다. 하지만 그 나비 화제는 사실 양명대군(공명)이 모작의 범인을 찾기 위해 내놓은 것이었다. 

 

모두가 홍천기의 그림에 탄성을 자아낼 때 양명대군은 그 매화의 그림이 너무 과하다는 트집을 잡아 불통을 준다. 나비 그림을 통해 모작의 범인이 바로 홍천기라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이에 승복할 수 없는 홍천기가 양명대군에게 불통의 이유를 묻고 팽팽한 설전이 벌어진다. 하지만 그 때 갑자기 나타난 나비 한 쌍이 홍천기가 그린 매화 그림 위로 날아와 앉는 일이 벌어진다. 결국 그 광경을 보던 고화원 성화 한건(장현성)이 홍천기에게 완통패를 써 그를 통과시킨다. 그가 이번 그림 대회를 통해 찾으려던 ‘신령한 화공’이라는 걸 알아본 것이다. 

 

매죽헌 화회의 나비 에피소드는 자신의 진가를 알아보지 못하는 세상 앞에 선 청춘들을 위한 위로처럼 보인다. 품계와 신분을 공개하지 않고 뽑는 일종의 ‘블라인드 오디션’을 한다 했지만 결국 양명대군의 판단에 의해 당락이 결정되는 것 아니냐고 항의하는 홍천기에서 스펙사회에서 질식되어 가는 청춘들의 초상이 그려진다. 그렇게 알아보지 못하는 자신을 알아봐주는 나비 한 쌍의 이야기는 그래서 판타지지만 믿고픈 통쾌한 서사로 다가온다. 

 

또한 매죽헌 화회는 홍천기가 하람을 알아보게 되는 에피소드로 이어진다. 즉 2차 화제를 낼 주인공으로 양명대군이 하림을 지목하는데 그가 낸 화제가 홍천기의 기억 속 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것. ‘봄기운 산중에 가득하고 복사꽃 사이를 노니는 데 홀연 복숭아가 기다려져 아침저녁으로 찾는구나’. 그 화제는 다름 아닌 홍천기와 하림이 어려서 복사꽃 아래를 뛰어 놀던 그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즉 ‘보지 못한다’는 은유이자 설정은 <홍천기>에서 여러 갈래로 활용된다. 그 첫 번째는 스펙이 없다는 이유로 세상이 알아보지 못하는 청춘이라는 알레고리로 쓰이고, 두 번째는 사랑에 있어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 눈이 아닌 마음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 쓰인다. 물론 그것은 이 드라마가 소재로 삼고 있는 그림에서도 중요한 모티브다. 눈을 그려 넣어 살아 움직이게 만든다는 ‘화룡점정’의 고사를 뒤집어 그렇게 그려낸 신령한 그림에 마왕을 봉인한다는 설정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홍천기>에 등장하는 나비에는 그래서 눈 모양이 날개에 담겨 있다. 나비를 자신의 수결로 그려 넣는 홍천기는 눈을 그려 넣는(보게 만드는) 화공이다. 마왕이 봉인된 하람의 뒷목덜미에는 나비문양이 새겨져 있다. 봉인이 깨지면 나비문양이 사라지고 마왕이 깨어난다. 결국 홍천기라는 신령한 화공이 해야 하는 일은 그 마왕을 자신이 그린 그림으로 봉인하고 하람을 본래대로 되살리는 일이다. 이 판타지 설정을 잘 들여다보면, 매죽헌 화회에서 매화 그림으로 진짜 나비를 끌어들인 그 에피소드가 의미심장하게 느껴진다. 그건 향후 그가 하람의 몸에 깃든 마왕을 나비처럼 그림 속으로 끌어 들일 거라는 복선일 테니 말이다. 

 

화룡점정의 고사를 활용한 판타지 설정, 그리고 ‘보지 못한다’는 은유를 통해 그려내는 청춘들의 성장 서사와 더불어 그려지는 운명적인 사랑의 알레고리. 간만에 잘 빠진 판타지 사극의 전조가 느껴지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그러니 마왕 같은 다소 황당해 보이는 판타지에 괜스레 눈 멀지 말고, 그 판타지가 그려내려는 결코 얕지 않은 이야기에 눈을 뜰 일이다. 판타지 사극이라고 해서 현실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는 건 선입견에 눈먼 자들의 편견일 뿐이니.(사진: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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