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봉우리 우화가 환기시키는 것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한도전'(사진출처:MBC)

이것은 하나의 우화다. 높이 90미터의 스키점프대 꼭대기에 깃발이 하나 꽂혀 있고, ‘무한도전’ 멤버들 전원은 그 경사를 올라가야 된다. 지금껏 ‘무한도전’이 제시했던 미션들과 비교해보면 지극히 단순하다. 하지만 이 단순한 미션의 과정이 보여주는 장면들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왜? 그 과정이 자꾸만 다른 현실들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한도전’의 이 단순한 미션과정을 보며 느낀 감동의 실체는 바로 여기에 있다.

오르는 길은 하나지만 그 길을 오르는 이들은 천차만별이다. 다리 부상으로 미션에 참가하지 못한 정형돈은 말 그대로 ‘성대투혼’의 응원을 벌여주고, 유재석은 그 특유의 체력과 순발력으로 제일 먼저 정상에 오른다. 하하와 노홍철이 가까스로 정상에 오르지만 거구의 정준하와 나이 많은 박명수는 자꾸만 밑으로 미끄러진다. 그건 꼭 오르고 올라도 제자리로 되돌아가는 시지프스의 신화를 보는 것만 같다.

결국 제일 먼저 정상에 오른 유재석이 줄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 정준하에 이어 박명수를 끌어올린다. 도무지 오르지 못할 것 같아 거의 포기상태에 이른 길에게 유재석은 아이젠을 풀어주고 그래도 오르지 못하자 심지어 줄을 놓고 맨 밑으로 다시 내려간다. 다시 올라와 뒤에서 길을 밀어주기 위함이다. 미안해하는 길에게 “포기만 하지 마라”는 유재석은 결국 길과 함께 동료들이 끌어주는 줄을 잡고 다시 정상에 오른다.

마침 배경음악으로 깔린 이적의 ‘같이 걸을까’는 이 우화 같은 장면에 울림을 더해준다. ‘길을 잃은 때도 있었지. 쓰러진 적도 있었지. 그러던 때마다 서로 다가와 좁은 어깨라도 내주어 다시 무릎에 힘을 넣어 높은 산을 오르고 거친 강을 건너고...’ 이 노래가 전해주는 ‘같이’라는 의미는 말 그대로 포기하지 않고 같이 오르고 또 오르는 ‘무한도전’ 멤버들의 훈훈한 장면들과 어우러졌다.

이 우화가 환기시킨 것은 무엇이었을까. 지병과 배고픔에 ‘남은 밥’이라도 달라는 쪽지를 남긴 채 저 세상으로 떠난 고 최고은 작가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 생활고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작년 말 숨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고 이진원씨가 떠오르는 건? 지금도 장벽처럼 놓인 사회로의 좁은 통로 앞에서 절망하고 있을 수많은 청춘들이 생각나는 건? 비정규직이라는 이름으로 폭력적인 대우를 생계란 이름으로 받아들이고 있을 노동자들이 아른거리는 건? 도대체 왜일까. 이 ‘무한도전’이라는 우화의 세계 속에 찍혀지던 ‘우린 원래 평균이하이니까’라는 자막이 못내 눈에 밟히는 이유는?

물론 ‘무한도전’이 의도적으로 이런 우화를 그려낸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웃음을 전제로 우연히 해보자던 미션에서 갑자기 피어난 웃음기 사라진 감동적인 이야기는 결코 연출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돌발 상황 속에서 피어난 멤버들의 동료애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는 프로정신이 만들어낸 합작품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의 이런 비의도적인 장면들이 가끔 우화처럼 그려지고 사회적 현실을 떠올리게 하며 그로 인해 우리 가슴을 파고드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여기에는 독특한 ‘무한도전’만의 심지어 카프카적인 색채가 돋보인다.

가상의 설정이나 놀이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그 속에 리얼한 멤버들의 반응을 담아내는 방식은, 완전히 가상의 세계처럼 보이면서도 보는 이마다의 현실을 자꾸만 떠올리게 만드는 카프카식의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이게 가능한 것은 그 가상의 상황 속에서도 목숨을 거는 멤버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무한도전’은 그렇게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끊임없는 우화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우화는 현실에 닿아있어 우리의 마음을 속절없이 울린다.

시사랭크쇼 '열광', '명작스캔들', 코멘트로 즐거워지는 토크쇼

사용자 삽입 이미지

'명작스캔들'(사진출처:KBS)

코멘테이터(commentator). 쉽게 말해 '해설자'다. 흔히 우리가 보는 코멘테이터는 스포츠 해설가다. 경기를 보면서 흐름과 전략 등을 짚어주고 전체의 맥을 그려준다. 코멘테이터가 얼마나 중요한 지는 축구경기를 볼륨 없이 보면 단박에 알아차릴 수 있다. 어떤 사안에 대한 해설은 그 사안 자체를 더 즐기게 해준다.

그런데 최근 들어 방송에 이 코멘테이터의 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다. 물론 지식이나 정보를 제공하는 프로그램에서 코멘테이터들은 늘 등장해왔다. 하지만 정보에 재미가 겹쳐지면서 코멘테이터로 방송 출연하는 전문가들은 정보만이 아니라 재미까지 전해주고 있다.

시사랭크쇼 '열광'은 아예 엔터테이너에 가까운 코멘테이터들의 각축장이다.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의 저자이자 명지대 여가문화연구센터 소장인 김정운 교수는 깊이 있는 해설과 함께 재치 있는 예능감으로 정평이 나 있다. '열광'은 시사를 소재로 끌어온 예능 프로그램으로 이러한 예능감을 가진 코멘테이터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이 프로그램에 함께 출연하는 팝 칼럼니스트 김태훈은 독특한 캐릭터의 소유자다. 거의 모든 사안들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을 정도로 '잡학의 달인'으로 불리는 그는 방송 내내 쉴 새 없이 이야기에 토를 단다. 심지어 김정운 교수가 혀를 내두를 정도. "얘기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게 오히려 더 힘들다"고 할 정도로 재치 있는 코멘테이터로서 자리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시사랭크쇼 열광'(사진출처:tvN)

클래지콰이의 호란 역시 독특한 코멘테이터다. 연세대 심리학과 불어불문학을 전공한 그녀는 겉보기에는 섹시한 이미지를 풍기지만, 일단 어떤 사안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하면 그 누구보다도 지적인 변신을 보여준다. 사실 코멘테이터로서 이런 양가적인 모습을 모두 갖추기란 쉽지 않다. 무엇보다 진지함과 솔직함이 그녀가 던지는 코멘트의 매력이다.

최근 KBS에서 새로 시작한 '명작스캔들' 역시 코멘테이터들의 프로그램이다. '열광'에 이어 이 프로그램에도 출연하는 김정운 교수는 조영남과 함께 그 날 그 날 소개되는 명작들에 대한 재치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명작을 놓고 다차원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는 독특한 이 프로그램의 형식 상, 다채로운 코멘터이터들은 필수적이다. 드가의 '스타'를 놓고 발레리나 김주원의 코멘트를 듣는 건 흥미로운 일이다. 미술관에 도슨트(Docentㆍ안내인)가 명작 감상에 깊이를 더해주듯이 '명작스캔들'의 코멘테이터들은 좀 더 즐겁게 명작에 빠져들게 해준다.

코멘테이터들의 시대가 오는 이유는 그 어느 때보다 정보에 대한 지적인 갈증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제 정보는 더 이상 배워야할 어떤 것이라기보다는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따라서 지식은 물론이고 끼로 무장한 코멘테이터들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예능보다 재미있는 해설이 가능해진 요즘, 시사나 교양 프로그램 역시 고리타분함을 벗어던지고 부쩍 대중들에게 다가오고 있다. 코멘테이터가 코멘테이너(코멘테이터+엔터테이너)로 넓혀져 가는 과정. 어쨌거나 대중들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두분토론', 희화화된 캐릭터가 가진 장점

사용자 삽입 이미지

'개콘-두분토론'(사진출처:KBS)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힌다. 그죠?" 여자가 당당해야 나라가 산다는 여당당의 김영희는 개그콘서트 '두분토론'에서 매번 이 멘트로 말문을 연다. 남자는 하늘이라고 주장하는 남하당 대표 박영진의 전 근대적인 남성우월주의 발언들 때문이다. 박영진은 "여자들이-", "건방지게-" 같은 남녀 차별적 발언을 거침없이 던져댄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그것도 모자라서 뭐?"하고 되물으면서 여성들의 행동을 비아냥거린다.

사실 이런 박영진식의 말투는 여성들 입장에서는 듣기조차 싫은 기분 나쁜 얘기들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박영진이 이런 여성 비하 발언을 쏟아낼 때마다 관객에서는 남녀 할 것 없이 웃음이 터져 나온다. 마치 자신들에게 욕을 하는데 그걸 보며 웃는 격이다. 도대체 왜 이런 반응이 나올까. 박영진이 보여주는 캐릭터가 여성들을 비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실의 남성 우월적 태도를 가진 남자들을 비하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같으면 이런 얘기가 심지어 개그의 소재로 나온다는 것만으로도 여성단체들의 비판을 받았을 것이다. 그 때는 박영진의 이런 얘기들이 농담이 아니라 그 자체로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박영진이 연기하는 캐릭터는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유물이 되었다. 물론 여전히 그 과거에 묶여 지내는 이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그런 남성들은 가족에서건 사회에서건 비난받기 십상이다. 이 개그가 공개적으로 보여지고 김영진식의 발언에 심지어 웃음을 던질 수 있는 건 전적으로 달라진 남녀 관계에서 비롯된다.

반면 매번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여당당의 김영희는 이런 전 근대적인 남성에게 어이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자기가 발언할 시간이 돌아오면 거침없는 공격을 해댄다. 남자들이 뭔가 했다는 식으로 하는 행동에 대해 여성적인 입장에서 "대단한 ○○○ 나셨다 그죠?"하며 반문한다. 그 때마다 역시 남녀 관객 모두가 웃음을 터트린다.

김영희의 발언에 터지는 웃음은 박영진의 그것과는 결이 다르다. 박영진이 주는 웃음은 희화화된 자기 캐릭터에서 나오지만, 김영희가 주는 웃음은 그런 구시대적 캐릭터에 맘껏 비난을 쏟아 붇는 그 속 시원함에서 나온다. 그 속 시원함은 여성들에게만 해당하는 얘기가 아니다. 젊은 남성들이라면 권위적인 나이든 세대가 보이는 행동에 똑같은 불편함을 느끼기 마련이다. 김영희의 촌철살인은 그 권위를 순식간에 해체시키며 어떤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두분토론'은 남녀가 싸우는 것처럼 되어 있지만 사실은 둘 다 권위를 해체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기조 위에 서 있다. 여기에 남녀 간의 다른 심리가 바탕에 깔리고, 각종 토론이 가진 공허함에 대한 풍자가 곁들여지니 금상첨화다. 물론 어떤 면에서 보면 박영진이 스스로를 희화하며 마구 쏟아내는 남성우월적 발언들 속에는 위축된 남성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한 기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희화화된 캐릭터 위에 서있을 뿐이다.

남녀의 심리를 소재로 하는 개그는 늘 있어왔다. 하지만 '두분토론'은 좀 더 직설적인 발언대 위에 서 있다는 점에서 훨씬 강하다. 하지만 심지어 위험하다싶은 발언조차 과감하게 풀어내질 수 있는 희화화된 분위기는 이 코너가 가진 최대의 미덕이다. 그 바탕 위에서 남녀는 서로 싸우는 것 같지만 때론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한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이 말해주는 우리 사회

사용자 삽입 이미지

최고은 감독의 '격정소나타'

'그 동안 너무 많은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창피하지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어서 남는 밥이랑 김치가 있으면 저희 집 문 좀 두들겨 주세요.' 어째서 이렇게 예의바르게 마지막 쪽지를 남겼을까. 화가 날 법도 한데, 그녀는 왜 오히려 창피하다고까지 말하며 쪽지를 남겼을까. 왜 그냥 밥도 아니고 남는 밥이라도 달라고 했을까. 며칠 째 아무 것도 못 먹은 사람이 어쩌면 이다지도 반듯할 수 있었을까.

지난달 말 경기 안양시 월세방에서 지병과 배고픔에 시달리다 급기야 운명을 달리한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씨가 남긴 마지막 쪽지는 우리에게 아픈 질문을 던진다. 도대체 21세기에 굶어죽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시나리오 작가라면 그래도 선망의 대상으로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는데, 도대체 지금은 어떤 일들이 벌어지길래 이런 말도 안되는 불상사가 일어나는 걸까. 이것은 과연 시나리오 작가군에 한정된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 땅에 예술을 하는 젊은이들에게 모두 통용되는 이야기일까. 어쩌면 앞뒤 꽉 막힌 삶을 버텨내야 하는 88만원 세대 전체의 비극일까. 비정규직으로 통칭되는 이 사회의 부조리일까. 혹 이 모든 것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낸 우리 사회의 가려져왔던 비극은 아닐까. 이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이고 더 많은 비극적인 일들이 화조차 내지 못하고 간 최고은씨처럼 당연하게 벌어지고 있는 건 아닐까.

사실 영화판에서 일을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안다. 영화 시나리오 작가에게 영화판이 얼마나 척박한 곳인가를. 1년 내내 시나리오를 붙들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는 작업을 하고 고작 300만원이란다. 그런데 실제 영화판 얘기를 들어보면 그나마 300만원이라도 받는 건 다행이라는 얘기까지 나온다. 영화감독으로 데뷔했기 때문에 그 정도라도 받는다는 얘기다. 뭐 하나 명함 내밀 것 없이 영화가 좋아 이 판에 뛰어든 젊은이들은 그런 용돈(?)조차 없다고 한다. "한 번 해봐"하고 부추기고, 곶감 빼먹듯이 아이디어란 아이디어는 모조리 빼서 투자자들에게 던져놓고는 잘 안되면 "네 실력 탓"이라고 말하는 게 부지기수란다.

상황이 이러니 영화판에서 오로지 시나리오만을 쓰겠다고 나서는 젊은이들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다. 그래서 입봉이 걸려있는 연출 파트쪽에서 일을 하는 감독 지망생들이 시나리오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계약금이라는 것도 거의 없다고 한다. 한 달에 30만원에서 50만원 정도를 착수금조로 몇 달 주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 있다. 그러다 영화화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유야무야되기 마련이다. 그나마 나은 편이 감독인지라, 시나리오 작가는 물론이고 스텝들도 대부분 감독이 되려고 안간힘을 쓴다. 딱히 감독이 꿈이어서가 아니라, 감독이어야 그나마 살아갈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판에 비일비재한 부조리한 일처리 방식들은 악명 높기 이를 데 없다. 마치 대단한 거라도 주는 것처럼 취업에 목마른 영화 지망생들을 꼬드겨 아이디어만 쏙 빼먹고 버린다거나, 3개월 찍고 제작비로 얼마를 주겠다고 약속을 하고는 6개월이고 1년이고 계속 찍으며 다 찍어야 돈을 준다고 한다거나, 마치 금방이라도 영화화 될 것처럼 시나리오 작가를 부추기고는 몇 년 동안 작가를 오도 가도 못하게 묶어놓는다거나... 이것은 시스템이 부조리하다기보다는 아예 시스템 자체가 부재한 상황이다. 그래서 업계에 있는 젊은이들은 차라리 회사 같은 시스템이라도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봉이 적더라도 어떤 룰이라도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신진들이 사회에 진출하는 길이 막혀있는 건, 단지 영화판만의 일이 아니다. 상대적으로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드라마 작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각종 공모에서 당선되었다고 해도 드라마판에서 이런 신예들이 뚫고 들어갈 수 있는 곳은 거의 없다. 신진들이 그나마 숨통을 틜 수 있었던 단편 드라마들은 점점 사라지고 있는 추세다. 무엇보다 새로운 신인들에 투자를 하기보다는 이미 뜬 기성작가들에만 몰려드는 제작 분위기는 큰 문제로 지목된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이런 투자 개념 없이 대박만을 노리는 상황을 "비겁한 짓"이라고 꼬집는다.

실제로 현재 방영되는 드라마들 속에서 신예 작가를 찾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엄청난 수의 기획안들이 편성을 잡아내기 위해 방송사로 속속 들어오기 때문에, 이런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는 이미 검증된 작가들만이 겨우 그 바늘구멍을 뚫기 마련이다. 이건 작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배우들도 마찬가지다. 톱 배우들은 여기저기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로 바쁘지만 신인 배우들은 새롭게 자리를 차고 들어갈 여지가 점점 없어지는 추세다.

툭하면 불거져 나오는 가요계의 불공정 계약 문제 역시 이런 신인들을 마치 소모품처럼 활용하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아이돌이 되려는 가수 지망생들은 넘쳐나고 그들을 키워내는 기획사의 문은 좁기 때문에 계약이 불공정하다고 해도 일단 채용만 되면 이를 기꺼이 감수할 수밖에 없는 것. 대형기획사들은 그래도 그나마 과거보다는 시스템이 갖춰지고 있는 편이다. 팬들이나 대중들의 자신들이 좋아하는 가수에 대한 관심이 이 기획사 시스템에까지도 넓혀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들의 사랑을 먹고사는 기획사의 생리상 이를 외면하기는 쉽지 않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씨

하지만 가요계 전체를 들여다보면 기획사 중심의 가요판에 가려진 그림자가 암울하게 드리워져 있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뇌출혈로 작년 말 숨진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의 이진원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그토록 깊었던 것은 우리 사회 청춘들 앞에 놓여진 장벽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굳이 88만원 세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작금의 청춘들은 기성사회로의 진입로가 막혀져 있다. 그리고 이것은 대중문화 전반에도 똑같이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다. 이렇게 된 이유로 사회가 자본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돈을 쥔 자본주들이 신인을 키워내기보다는 이미 진출한 기성인(기성작가, 기성배우, 기획사 가수, 경력자들)들에게 몰두하고 그러다보니 사회 전체를 지탱하는 젊은 피들이 고갈되고 있다는 얘기다. 심지어 문화계까지도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머니게임이 된 상황 속에서, 심지어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는 것은 이 사회가 얼마나 젊은 희생을 담보로 굴러가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당장에는 한류다 OECD다 하면서 승승장구 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이 사회가 신인들의 사회 진입 없이 얼마나 갈 수 있을까. 한 젊은 시나리오 작가의 죽음은 88만원 세대, 비정규직, 청년 실업 같은 작금의 청춘들이 맞닥뜨리고 있는 현실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도대체 언제까지 젊은 희생을 담보로 갈 것인가. 최고은씨가 남긴 쪽지가 가슴 아프고 심지어 화가 나는 건, 그 죽음 앞에서까지 여전히 그 고통을 내면화하는 것이 당연한 듯 보여주는 반듯함 때문이다. 왜 그녀는 화라도 내지 않았던가. 아니 어떤 현실이 그녀를 화조차 내지 못하고 마치 자기 잘못처럼 여기게 만들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녀의 죽음은 이대로 놔두면 장차 벌어질 대중문화의 죽음을, 또 나아가 사회의 죽음을 준엄하게 경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