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번 사랑해’, 심청 모티브? 신데렐라 이야기? 모성애!

‘천만번 사랑해’는 여러 가지 이야기의 모티브들이 겹쳐져 있다. 그 첫 번째 이야기의 모티브는 우리네 고전 중의 고전, ‘심청전’이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공양미 삼백 석에 팔려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심청이처럼, ‘천만번 사랑해’의 고은님(이수경)은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의 수술비를 벌기 위해, 대리모를 자청한다. 자살을 택하는 것이 비윤리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심청이의 정당성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대리모의 비윤리성은 아버지의 목숨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고은님의 정당성을 만들어준다.

결국 아버지는 살려내지만, 자신의 살을 베어낸 것 같은 대리모의 아픔은 고은님에게 천형처럼 남는다. 스스로 사랑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 하지만 이 부분에서 신데렐라 이야기가 들어선다. 죽음 앞에 서 있는 아버지를 두고도 여전히 자기들 살 궁리에만 골똘하는 계모와 배다른 언니 난정(박수진)은 ‘신데렐라’ 속의 계모와 언니들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게다가 난정이 좋아했던 현대판 백마 탄 왕자님 강호(정겨운)는 우여곡절 끝에 고은님을 좋아하게 된다.

심청의 이야기나 ‘신데렐라’의 이야기나 모두 그 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극단적인 신파와 판타지적인 해결이다. 심청은 아버지를 위해 희생하는 효녀로서 죽음이라는 바닥에서 절절한 눈물을 흘리지만, 결국 용왕에 의해 구출되어 왕후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신데렐라’는 상드리용(Cendrillon), 즉 재를 뒤집어 쓰다는 뜻에서 지어진 이름으로, 늘 부엌 아궁이 앞에 앉아 일을 해서 붙여진 것이다. 즉 이 전형적인 구박받는 며느리 같은 ‘신데렐라’는 우여곡절 끝에 왕자와 결혼하는데, 이 모티브는 현대 트렌디 멜로의 전형이 되었다.

이러한 극단적인 신파의 끝에 극단적인 판타지를 제공하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천만번 사랑해’의 핵심 모티브가 된다. 고은님은 대리모의 아픔을 숨기고, 자신은 더 이상 사랑조차 할 수 없는 죄인이라고 여기는 바닥에 내려서서 저 위에서 손을 내밀고 있는 강호를 만나게 된다. 따라서 기본적인 이야기는 이 고은님이 결국에는 자책감과 고통에서 벗어나 다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이 그 골자가 될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강호가 ‘신데렐라’ 이야기에서처럼 겉으로 보기엔 왕자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자신이 함께 살아온 엄마, 손향숙(이휘향)의 친 자식이 아니다. 그래서 집안에서도 늘 자신은 천덕꾸러기 신세로 살아온다. 이 지점에서 강호와 은님의 만남은 어떤 새로운 접합점을 갖게 된다. 그것은 모성애다. 즉 강호는 단 한 번도 살아오면서 모성을 가져본 적이 없는 인물이고, 은님은 대리모를 겪으면서 삶의 태도가 모성으로 바뀌어버린 인물이다. 강호의 모성 없는 빈자리는 은님의 모성이 채워준다.

이 지점에 이르면 이 ‘천만번 사랑해’의 이야기가 겉으로 갖고 있는 심청이나 신데렐라의 모티브는 드라마의 극적 재미를 위해 설정된 것일 뿐, 이 드라마가 하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 드러난다. 결국 은님과 강호의 행복은 다만 결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두 잃어버린 모성을 되찾아야만 행복에 이를 수 있다. 강호는 자신의 집안에서 정당한 자식으로서의 위치를 인정받아야 하고, 은님은 비밀처럼 숨겨진 대리모의 사건이 오히려 밝혀져 그 속의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천만번 사랑해’는 이처럼 복잡한 이야기들의 모티브들이 마구 뒤엉켜 있지만 결국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모티브가 갖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다. 단지 모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전격적으로 그려냈다면 아마도 이 드라마가 시청자들에게 주는 고전적인 판타지(즉 신파에서 판타지적 성공에 이르는)의 재미를 놓쳤을 테니까. ‘천만번 사랑해’는 분명 어딘가 지금 시대와는 어울리지 않는 퇴행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주말 밤의 주 시청자들에겐 이러한 고전적인 이야기들이 주는 힘을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수상한 게임을 시작하는 ‘수상한 삼형제’

‘수상한 삼형제’가 수상하다. 시작 전부터 문영남 작가라는 아우라 때문에 또 다른 막장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었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생각과는 달리 꽤 긍정적인 에너지가 넘쳐흘렀다. 특히 남자친구에게 일방적으로 차인 주어영(오지은)이 김이상(이준혁)을 통해 다시 생기를 찾는 모습은 이 드라마의 밝은 행보를 기대하게 했다. 하지만 역시 본색은 버릴 수 없는 것일까. ‘수상한 삼형제’는 서서히 그 수상한 행보를 보이면서 시청자들 사이에 논쟁마저 일으킬 정도로 강한 설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어영과 삼 년을 연애하다 차버리고는, 그녀가 김이상과 가까워지게 되자 질투를 느끼고 그 사이에 다시 끼어들게 되는 왕재수(고세원)는 이름처럼 왕재수다. 드라마 속의 삼각관계라는 것이 거기서 거기라고 여겨질 지도 모르지만 이 삼각관계는 지나치게 극적으로 만들어져 있다. 왕재수가 검사로서 김이상의 상사로 부임해 오고, 그 권력을 남용해 주어영과의 사이를 가로막는 이야기는 치졸함과 치사함의 절정을 보여준다. 삼각관계의 설정이야 드라마를 위해 어떻게든 만들어질 수 있는 것이지만, 김이상이 보는 앞에서 왕재수가 그를 비웃듯 노려보며 억지로 주어영과 키스하는 장면은 범죄적인 뉘앙스마저 풍긴다.

이 장면은 이 드라마가 주어영과 김이상 사이에 어떤 애틋한 감정을 만들어놓은 것이 결국은 시청자들의 공분을 끄집어내기 위한 사전 포석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또다시 문영남 작가의 자극적인 갈등 구조로의 회귀다. 문영남 작가는 먼저 지극히 착하고 순한 인물을 먼저 세워두고는 거의 악마에 가까운 대립자를 통해 그 주인공들을 핍박하는 것으로 갈등을 극대화시킨다. 물론 결론은 사필귀정이지만 드라마는 결론만큼 과정이 중요한 콘텐츠이다. 문영남 작가의 작품들이 짧은 사필귀정의 이야기보다 긴 핍박이 가진 울화통의 이야기로 기억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수상한 삼형제’에는 주어영과 김이상 사이에 끼어드는 왕재수 이외에도, 전형적인 민폐남인 장남 김건강(안내상)이 등장하고, 그 지질함을 끝까지 감싸고도는 엄마 전과자(이효춘)가 등장해, 보는 이의 혀를 차게 만든다. 마치 종 부리듯 며느리인 도우미(김희정)를 마구 대하는 전과자가 민폐만 끼치는 김건강을 상전 대하듯 하는 장면은 또 하나의 부정적 관계로서 시청자들의 눈을 밟는다. 전과자 연기를 하고 있는 이효춘의 연기력 논란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대사 자체가 연극적인 데서 오는 이유도 있지만, 그녀의 캐릭터가 가진 과장된 설정에서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문영남 작가는 드라마라는 살아있는 유기체가 저 스스로 움직이게 하는 작가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설정된 캐릭터를 부여한 인형들의 놀이를 즐기는 작가처럼 보인다. 인물들의 이름이 그 캐릭터로 부여되는 것은 어쩌면 그 단초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주어영은 이름처럼 두 남자 사이에서 어영부영대고 있고, 김이상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며, 왕재수는 말 그대로 왕재수다. 전과자는 무슨 잘못인지 모르지만 아버지인 김순경(박인환)에게 체포되어 있는 말 그대로의 전과자이며, 심지어 며느리인 도우미는 진짜 며느리라기보다는 집안일 돕기 위해 고용된 도우미처럼 보인다.

‘수상한 삼형제’의 행보가 수상해 보이는 것은 이미 변화의 여지없이 설정된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작가의 의지에 의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인위적인 손길은 그것이 인위적이기 때문에 부자연스러워 보이고, 때로는 비정상적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모습은 보는 이를 답답하게 하고 심지어 화나게도 만든다. 이것은 작가가 시청자들과 벌이는 하나의 게임이다. 거기에 말려들면 화를 내면서도 더욱 더 쳐다봐야만 하는 이상한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게임. ‘수상한 삼형제’의 수상한 게임은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

'미남이시네요', 그 비현실적 세계가 보여주는 현실

'미남이시네요'에서 고미남의 어투는 비현실적이다. "-다", "-까?"로 끝나는 그의 말투는 남장여자라는 설정 때문인지 군대식 어투를 그대로 빼닮았다. 처음 이 드라마를 접하는 이들은 아마도 그 어투가 거슬렸을 것이다. 하지만 재미있는 건, 이 어투를 계속 듣다보면 거기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심지어 그 어투가 어떤 묘미까지 주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 지점에서 다시 돌아보면 고미남의 비현실적 어투는 이 드라마를 보기 위한 마치 하나의 훈련과정처럼 여겨진다. 이 어투가 적응되는 순간부터 당신은 '미남이시네요'의 세계 속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고미남의 어투가 비현실적인 것처럼 '미남이시네요'는 비현실적인 세계를 그린다. 아이돌을 소재로 다루고 있는 '미남이시네요'에서 현실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에게 버려졌거나, 고아로 자라나 부모가 누군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이다. 그것도 심각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는 우리가 늘 신문기사를 통해 목도하고 있는 아이돌들의 진짜 힘겨운 현실 같은 것은 들어가 있지 않다. 사건사고 속에 등장하는 장기계약에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해내야 하는 아이돌의 현실은 이 드라마와는 무관하다.

이유는? 대중들이 원하는 것은 그런 현실보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판타지로서의 아이돌이기 때문이다. 그 누구도 아이돌의 실제 현실을 바라보고 싶어 하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이돌 자체가 하나의 판타지를 근거로 서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모든 이들이 꿈꾸는 스타고, 땅 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저 해와 달처럼 하늘 위에 떠서 빛나는 존재로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러니 그들이 판타지의 세계에서 추락해 현실의 중력 위에 놓여지는 순간, 그들은 더 이상 아이돌이 아니다.

'미남이시네요'가 그리는 세계는 바로 이 현실이 삭제된 공간에서 살아가는 아이돌의 세상이다. 그러니 현실적인 갈등은 이 세상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거나 대단히 미약하게 처리된다. 드라마가 본질적으로 갈등구조를 가져간다는 점에서 이 현실적인 갈등이 배제된 공간은 자칫 잘못하면 밋밋한 드라마를 만들어버릴 위험성이 있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애초부터 현실적인 갈등 자체를 고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이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현실에 대한 생각 없이 몰입되는 아이돌의 세계 속에서의 한바탕 가슴 쿵쾅대는 설렘이니까.

처음 고미남(박신혜)이 선 자리와 A.N.GELL의 리더인 황태경(장근석)이 선 자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은 그 거리감이 있어야 그만큼 설렘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팬덤과는 먼 거리에 있는 수녀원에서 살아가던 고미남이 A.N.JELL이라는 아이돌 그룹의 세계로, 또 거기서 그 리더인 황태경에게로 점점 다가가고 가까워지는 이야기다. 고미남은 이 굳건히 닫혀져 대중들의 상상 속으로만 존재하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 그 판타지의 로맨스를 만끽하는 존재다.

남장여자라는 코드는 이 드라마에서는 정반대로 활용된다. '커피 프린스 1호점'이나 '바람의 화원' 같은 작품에서 남장여자 코드는 그 당사자가 연인에게 다가가고 또 드러나는 방식으로 사용되지만, 이 드라마에서 남장여자는 애초부터 팀원들에서 발각되어 오히려 그들의 보호를 받는 코드로서 활용된다. 즉 남장여자로 남자들을 속이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 남장여자를 남자들이 보호해주는 식이다. 그녀를 보호해주는 세 남자는 순정만화에서 갓 나온 듯, 한 명은 늘 상대방을 즐겁게 해주고(제르미), 한 명은 보이지 않게 상대방을 배려해주며(강신우), 다른 한 명은 늘 건방지고 툴툴거리지만 나름 카리스마를 갖추고 그녀를 보호해주는(황태경) 인물이다.

'미남이시네요'는 이 비현실적인 인물들이 현실의 무거움과는 전혀 상관없는 아이돌의 세계를 만끽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즉 이 드라마가 닮아있는 순정만화나, 이 드라마가 소재로 삼고 있는 아이돌에 대한 판타지는 바로 이 드라마의 정체성이다. 우리는 현실을 잠시 잊기 위해 순정만화의 세계에 빠져들고, 그 무거움을 내려놓기 위해 아이돌의 판타지 속에 뛰어든다. 그리고 그것은 잘못된 일이 아니다. 현실이 배제된 '미남이시네요'를 보면서 도대체 저게 무슨 쓸데없는 이야기인가 하고 생각하면서 거기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순정만화를 보거나 아이돌에 열광하면서도 왜 그런지를 이해하려들지 않았던 데서 오는 결과다. 이 드라마는 현실을 배제한 세계를 보여줌으로써, 거꾸로 사람들이 잊고 싶고 벗어나고 싶어하는 그 현실을 드러내주고 있다. 따라서 고미남의 비현실적 어투는 현실을 지워내는 지우개이면서, 이 판타지의 세계로 들어가는 열쇠가 된다.

'살맛납니다'를 보고 싶게 만드는 이유

7년 동안 뒷바라지를 해온 남자친구가 고시를 패스하고는 위자료를 건네며 이제 지겨워졌으니 헤어지자고 한다면? 그 얘기를 듣고 가슴이 열불이 나 찾아가 뺨을 올려붙인 엄마에게 이 남자친구가 사과는커녕 도리어 위자료가 적어서 그러느냐고 한다면? '살맛납니다'가 주인공 주변에 펼쳐 놓은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참 살맛 없는 세상이다.

이것은 경제적으로 부유하다고 해서 다른 것이 아니다. 의대를 졸업했고 의무병까지 마쳤지만 그것이 전부 아버지의 강권 때문이었다면? 이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았는데 아버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모자라 결혼을 사업처럼 생각하는 아버지에 의해 원치도 않는 사람과의 만남을 종용받는다면? 아버지의 권력 속에 온 가족이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 같이 살아간다면?

7년 뒷바라지한 서민층 가족 홍만복(박인환)네 장녀 홍민수(김유미)나 부유층이지만 자기 삶을 전혀 살아보지 못한 장인식(임채무)네 외아들 장유진(이태성)이나 살맛 안 나긴 마찬가지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살맛 안 나는 현실 속에서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그들은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밝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려 한다. 홍민수는 해외여행을 약속했던 부모님의 결혼기념일에 고작 실연당한 소식이나 전하는 처지지만 가까운 곳으로 놀러가 오히려 가족 간의 결속을 다지는 시간을 갖는다. 아버지에 의해 맞선을 보러 간 여행이지만 거기서 장유진은 홍민수를 만나 어떤 새로운 힘을 얻게 된다.

MBC가 새로 시작한 일일드라마 '살맛납니다'는 이처럼 긍정의 에너지로 부정적 상황을 넘어서려는 의지가 엿보이는 드라마다. 돈밖에 모르고 가족들을 핍박하는 장인식이나, 성공을 위해 자신을 뒷바라지 해온 연인을 버리는 김기욱(이민우)이나 모두 현실의 부정적 상황을 대변하는 인물들이다. 살맛 안나는 세상은 바로 그런 인물들에 의해 조장된 현실이다. 평범하게 살아가는 서민들은 그들이 조장한 현실 속에서 어려움을 겪지만 묵묵히 바보처럼 살아간다. 드라마는 이렇게 어려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오히려 긍정적인 에너지로 현실을 넘어서면서 더 큰 행복을 느낀다고 말한다. 다 얻어도 자신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한다.

이것은 작금의 드라마 현실과도 맞아떨어지는 이야기다. 최근 드라마들은 마치 성공을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현실의 부정적 인물들처럼, 시청률을 위해 뭐든 할 것처럼 달려들고 있다. 자극적인 소재와 넘어서지 않아야 할 선을 마구 넘나들면서 이 모든 것을 불황의 탓으로 돌린다. 드라마가 점점 막가는 것은 이처럼 먹고 살아야 하는 일이니 뭐든 허용되는 것처럼 여기는 잘못된 드라마 생태계의 문제다. 어느 순간부터 가족의 따뜻함을 전해주었던 일일드라마들이 저마다 독한 설정으로 점철된 것은 작금의 현실을 잘 보여주는 사례다.

'살맛납니다'는 이렇게 달라진 현실과 달라진 드라마 생태계 속에서 긍정의 힘을 얘기하는 드라마다. 살맛 없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살맛 나게 그리는 드라마 속에서 우리는 조금은 현실의 각박함을 잊고 긍정적인 에너지를 얻어갈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매일 저녁 '살맛납니다'를 보고 싶게 만드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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