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과 연기의 힘, '아이리스'

'아이리스'의 화면은 멈춰서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기존 드라마에 익숙한 시청자라면 이 계속 움직이는 화면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일단 한 번 그 흔들리는 카메라에 적응이 되면 그 영상이 주는 심리적 뉘앙스는 새로운 묘미로 다가오게 된다. 마치 현장의 근거리에서 그 사건상황들을 바라보는 듯한 긴박감을 연출해내기 때문이다.

'아이리스'는 또한 순간적인 점프 컷 같은 것들이 자주 사용된다. 갑자기 연결을 툭 끊어버리며 바뀌는 장면의 연속은 현장의 불안정한 주인공의 심리적 상황을 포착해낸다. 외부적인 사건이 끊임없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이러한 마치 주인공이 떠올리는 듯한 영상들이 툭툭 들어오면 무언가 긴박한 사건들이 여전히 연속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또한 '아이리스'에서는 가장 긴박한 순간에 가장 편안한 영상으로 교차편집되곤 한다. 예를 들어 갑자기 북측 요원 암살 명령으로 긴박감이 넘치는 NSS의 장면과, 일본으로 여행을 떠난 현준(이병헌)과 승희(김태희)의 아름다운 영상이 교차되는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교차편집은 이 각각에 벌어지는 두 사건을 모두 강화하는 힘을 발휘한다. 한쪽에는 긴장감을 높이고 다른 한쪽에는 이완감을 높여주는 것이다.

현준이 요원 암살 명령을 받고 헝가리 부다페스트로 가서 벌이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다채로운 연출이 적절히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여기 등장하는 사건, 즉 스토리만 보면 그 내용이 그다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요원 암살을 성공했지만 본부에 의해 버림받는 주인공, 그 주인공을 추격하는 적국과 본부 요원들, 그리고 그 주인공을 사랑하는 연인의 가슴 저린 안타까움 등은 첩보 액션물의 단골소재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관습적인 스토리를 새롭게 만드는 것은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느냐의 문제다. 여기서 거론되는 것이 바로 촘촘히 계산되어 짜여진 영상 연출과 그 연출을 실제 연기로 보여주는 연기자의 힘이다. 한 컷도 허투루 찍혀지지 않은 영상들을 그 심리적인 전개과정에 맞춰 편집해내는 이 드라마는 그간 영화에 비해 정체되어 있는 드라마의 연출을 다시 보게 만든다. HDTV가 보급되고, TV가 대형화되면서 안방극장이 눈앞에 성큼 다가온 현재, 여전히 과거의 관습적인 드라마 연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아이리스'의 영화적 연출은 그 자체로서 큰 의미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연출을 구현해내는 연기자들의 연기 또한 '아이리스'가 가진 힘이 아닐 수 없다. 이병헌은 멜로와 액션을 제대로 버무려내는 연기로 눈의 즐거움은 물론이고, 가슴의 울림까지 만들어내고 있고, 그를 좇는 북측 핵심 첩보요원 박철영 역할의 김승우는 매력적인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멋진 연기를 선보이고 있다. 김태희의 연기는 한결 성숙해진 느낌이고, 북측 작전공작원 김선화 역의 김소연 역시 이병헌의 여성판이라고 할 만큼 균형 잡힌 멜로와 액션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연출이 잡아내는 아름다운 영상 위에서 펼쳐지는 이들의 혼신을 불태우는 연기. 이 '아이리스'가 보여주는 폭발적인 힘의 원천은 작금의 우리 드라마가 가진 정체된 연출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변화하는 시골정보프로그램 속 한결같은 '6시 내고향'의 가치

하루의 바쁜 일과가 끝나가는 저녁 6시. 뜨끈한 국물이나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한 그릇만 봐도 허기에 식욕이 도는 그 시간 우리의 눈은 자꾸만 TV 화면에 머문다. 오늘은 또 어느 곳의 구수한 이야기가 우리의 식욕을 돋울까. 저녁 상 차리는 주부와 밥상을 두고 둘러앉은 식구의 눈도, 고향 떠나와 타향에서 홀로 저녁 상 앞에 앉은 외로운 자취생의 눈도, 이제 막 퇴근해 돌아와 구수한 밥 냄새를 맡는 가장의 눈도 TV에 머무는 데는 이유가 있다. 살맛 없는 세상, 살맛나는 고향의 이야기가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회차만도 무려 4400회. '6시 내고향'은 18년 간이나 저녁 6시면 어김없이 우리를 고향으로 데려다준 프로그램이다. 그 정도면 거의 안 지나친 곳이 없으련만 매번 보고 듣게 되는 고향이야기가 늘 새롭게 다가오는 건 왜일까. 그것은 아마도 그만큼 우리네 고향의 이야기는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기 때문일 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우리가 매일 겪는 다른 하루하루가 늘 변함없는 고향 이야기를 매번 새롭게 느껴지게 만들기 때문일 것이다. 하루의 끝에 돌아갈 집처럼 늘 변함없이 우리를 기다리는 고향이 되어버린 프로그램, 바로 '6시 내고향'이다.

이 프로그램의 8%에서 9%대를 유지하는 한결같은 시청률이 가능한 이유는 프로그램명이 표방하듯 저녁 6시라는 시간대를 고향으로 가는 시간으로 만들어버린 그 채널 선점효과 때문이다. 특별한 편성상의 변수가 없다면 우리는 습관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저녁 시간대를 맞이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프로그램의 오랜 성공이 그저 관성적인 시청에 의한 것만은 아니다. 타 방송국의 같은 시간대의 프로그램들이 비슷한 소재로 늘 경쟁을 벌여왔지만 그 아성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6시 내고향'이 갖는 정보의 질적 차이에서 비롯된다. 지역 네트워크를 백분 활용해 날마다 생생한 날 것의 고향 이야기가 배달되는 그 정보의 힘을 넘어서기란 실로 어려운 일일 것이다. MBC는 98년부터 무려 10년에 걸쳐 '생방송 화제집중'이라는 코너를 운영했지만 작년 코너를 접었고, 지금은 저녁 6시 대에 뉴스를 방영하고 있다. 한편 SBS는 30분 일찍 '생방송 투데이'를 편성하고 이어서 저녁 드라마를 방영하는 것으로 차별화를 꾀하고 있다. '6시 내고향'이 선점하고 있는 6시라는 시간대에 방송사별로 나름의 고민을 하고 있는 흔적들이다.

'6시 내고향'의 제작방침은 세 가지로 나눠진다. 그 첫 번째는 사라져 가는 고향의 의미와 정서를 느끼게 하는 것(과거지향)이고 두 번째는 도시와 농촌을 연결시켜주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현재지향)이며, 세 번째는 농어촌이 앞으로 발전적으로 변해가는 그 방향을 제시하는 것(미래지향)이다. 하지만 이러한 제작방침보다 중요한 것은 이 프로그램이 늘 보여주는 고향에 대한 아련한 향수 같은 감성적인 부분이다. 세월이 바뀌어도, 점점 첨단화되는 세상이 되어도, 아니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고향을 찾는다.

'1박2일'의 이명한 PD가 자신들이 지향하는 바가 "'6시 내고향'의 예능 버전"이라고 말했듯이 고향을 조명하는 프로그램으로서 '6시 내고향'이 타 방송프로그램에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하지만 이러한 영향은 거꾸로 부메랑으로 돌아와 변함없는 '6시 내고향'의 아성에 도전하고 있다. 정보 프로그램의 예능화가 그것인데, SBS의 최양락, 정형돈이 메인MC로 자리한 '괜찮아U' 같은 프로그램이 등장했고, 정보 프로그램에 쇼적인 측면을 접목시킨 KBS2의 '리빙쇼 당신의 6시' 같은 프로그램이 그것이다. 시사교양 프로그램의 전반적인 인포테인먼트화와 최근 부상하고 있는 시골이라는 소재가 맞아떨어지면서 생겨난 현상이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어도 여전히 우리의 눈이 '6시 내고향'에 머무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우리가 고향을 찾는 마음이 한결같듯이 이 프로그램이 한결같은 모습으로 우리를 푸근한 저녁시간으로 인도한다는데 있다. 고향을 떠나와 각박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늘 저 편에 고향이 존재한다는 따뜻함을 전해주는 '6시 내고향'. 바로 그 모습 때문에 우리는 저녁 6시가 되면 늘 고향으로 달려간다.

'지붕 뚫고 하이킥'과 '그대 웃어요'

이른바 막장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자극적인 설정의 드라마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가운데, 웃음을 주는 완소드라마가 있어 눈길을 끈다. 그 주인공은 MBC 일일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과 SBS 주말드라마 '그대 웃어요'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짜증과 경악의 연속인 자극적인 드라마들과는 상반되게, 이들 드라마들은 보는 내내 입가에 편안한 미소가 저절로 지어지게 하는 마력을 발휘하는 것이 특징. 도대체 어떤 점들이 이들 완소드라마들만이 갖는 매력을 만드는 것일까.

'지붕 뚫고 하이킥'은 독특한 시트콤이다. 시트콤이라면 시추에이션 코미디로서 웃음이 전면에 내세워지게 되지만 이 작품은 그저 물리적인 웃음에만 머물지 않는다. 웃음 뒤에 진한 페이소스를 남기는 것이 특징. 산골에서 상경해 부모 없이 서울 하늘에서 생존해가는 세경과 신애가 보여주는 진한 자매애가 그렇고, 그런 그들에게 사랑의 손길을 은연 중에 내미는 줄리엔이나 준혁, 지훈의 이야기가 그렇다.

동생 신애에게 학용품을 마련해주기 위해 샌드위치 많이 먹기 대회에 참가하는 세경의 에피소드는 우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어떤 훈훈한 감동을 준다. 해리가 가진 인형을 갖고 싶어 신애가 훔치려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정보석의 한 박자 늦는 탐정 놀이에서 웃음이 터지지만, 결국 그 사실을 알게된 지훈이 신애에게 인형을 새로 사서 전해주는 장면에서는 훈훈한 미소가 피어난다. 준혁이 버린 학교 체육복을 입고 학교를 찾아온 세경이 번번이 체육선생에서 당하는 에피소드는 큰 웃음을 주지만, 학교 공부가 그리운 세경에게 준혁이 마치 버리는 것처럼 참고서를 건네는 장면에서는 흐뭇한 마음을 갖게 만든다.

이처럼 웃음에 어떤 마음을 담아내는 것으로 '지붕 뚫고 하이킥'이 주는 웃음은 여타의 시트콤과 확실한 차별성을 갖게 된다. 폭소는 즉발적으로 터져 나오는 것이지만 쉬 잊혀지기 쉽다. 하지만 상황이 주는 흐뭇함에 짓게 되는 미소는 오래도록 여운을 남기게 된다. 이것이 '지붕 뚫고 하이킥'이 완소 드라마이게 하는 이유다.

한편 주말드라마로 점차 주목받기 시작한 '그대 웃어요' 역시 풍자적인 웃음 속에 페이소스를 담아냈다. 허풍에 겉멋만 잔뜩 든 서정길(강석우)이 사업에 실패하고 길바닥에 나앉게 되자 그의 운전기사였던 강만복(최불암)이 그 가족을 거두어 함께 살아가는 독특한 설정의 이 드라마는 예의 없는 세상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스며들어 있다. 운전기사였었다는 것만으로 여전히 하대하는 서정길은 돈이면 다된다는 식의 무례한 시대를 대변하는 인물. 그를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강만복의 결심은 이 시대에 대한 통쾌한 일침이 아닐 수 없다.

어찌 보면 이 심각해질 수 있는 계층의 부딪침을 이 드라마는 가벼운 웃음으로 전화시키는 풍자정신을 발휘한다. 게다가 강만복의 일갈은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의 차원에서 머물지 않고 마치 아버지가 자식에게 하는 것 같은 사랑을 바탕에 깔고 있다. 서정길의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강만복이 엇나가는 서정길을 자식처럼 계도하는 이야기가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에 이야기는 유쾌하고 훈훈해진다.

우연의 일치인지 이 '지붕 뚫고 하이킥'과 '그대 웃어요'는 모두 계층적인 갈등을 이야기의 모티브로 삼고 있다. '지붕 뚫고 하이킥'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메인 줄기로서 가진 것 없고 부모마저 없이 산골에서 상경한 세경, 신애와, 모든 것을 다 가졌지만 어딘지 빈 구석이 많은 서울의 해리네 가족이 대비된다. '그대 웃어요' 역시 돈 걱정 없이 살아온 정인(이민정)네 가족과 늘 절약만을 외치며 살아온 현수(정경호)네 가족의 그 다른 삶의 방식이 갈등의 메인줄기다.

이러한 계층적 갈등이 갖는 빈부격차의 이야기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지극히 현실적인 소재로 다가온다. 중요한 것은 이 '지붕 뚫고 하이킥'과 '그대 웃어요' 가 이 갈등을 봉합해가는 과정이다. 대결구도가 파탄과 복수로까지 이어지는 이른바 막장드라마들과는 달리, 이 작품들은 긍정의 힘으로 어떤 소통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이 이 작품들이 시청자들에게 현실적인 공감을 주면서도 화해가 갖는 훈훈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이유이다.

'선덕여왕'이 보여주는 완성도와 시청률의 상관관계

애초에 26회 만에 40%에 도달한 ‘선덕여왕’은 여러 징후들이 50%를 손쉽게 넘길 것이라는 예상을 가능하게 했다. 그것은 사극이라는 장르가 가진 힘과 '선덕여왕'이 소구하고 있는 3,40대 여성 시청층, 그리고 김영현, 박상연 작가 특유의 스토리텔링이 가진 힘이 삼박자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선덕여왕’의 시청률은 40%를 넘기지 못하고 정체되어 있다. 그 이유는 도대체 뭘까.

먼저 지목되어야 할 것은 드라마가 진행과정에서 점점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선덕여왕'은 사실 그렇게 쉬운 드라마는 아니다. 전쟁 사극 같은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전형적인 멜로가 낯선 이야기들 속에 감초처럼 존재하는 사극도 아니다. 초반부에 중국에서부터 신라로 넘어와 낭도로 성장하는 덕만의 이야기는 스펙터클을 보여주었지만, 덕만이 궁으로 들어와 본격적으로 미실과 대적하는 이야기부터는 정치사극으로 넘어가면서 볼거리는 줄어들었다.

게다가 이 정치사극은 심리극에 가깝고, 그 연출 또한 추리극에 가깝다. 따라서 인물들의 대사를 듣다보면 처음 보는 이들은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추리극 같은 구조의 연출은 당장 대사를 통해 사건의 정황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궁금증을 한참 증폭시킨 후에 뒷부분에 가서 정황을 터뜨리는 것으로 드라마에 이미 몰입된 시청자들에게는 즐거움을 줄 지 모르지만, 새로 드라마를 보려는 이들에게는 장벽이나 마찬가지다. 이것은 마치 추리극을 중간부터 보는 것과 같다.

대결구도에 있어서도 이 드라마는 결코 쉽지 않다. 일반적으로 사극이 내세우는 선악구도는 그 옳고 그름이 명백한 게 단점이자 강점이다. 너무 단순해보이지만 누구나 보면 척 알 수 있는 그 선악구도의 대결 속에서 시청자들은 쉽게 몰입될 수 있다. 하지만 '선덕여왕'의 대결구도는 옳고 그름의 차이라기보다는 사고관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선악 개념을 넘어서 있다.

미실은 주인공 덕만의 대립자이지만 또 한 편으로 보면 훌륭한 여성 지도자로도 보인다. 그리고 실제로 덕만은 미실을 그렇게 인정하고, 자신이 맞닥뜨린 문제를 미실에게 가져가 물어본다. 미실이 종종 덕만의 멘토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물론 미실과 덕만 두 인물의 성장을 가능하게 한다. 대결구도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상대방에서조차 배우려하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대결이 아니라, 각자 가진 사고관의 대결을 갖는 이 이야기는 물론 매력적이다. 하지만 시청률 면으로 보면 그다지 쉬운 설정은 아니다. 각각의 사고관을 이해시켜야 하며 그 사고관의 부딪침을 극적으로 만들어내고 거기서 한 인물의 승리와 성공을 그려내야 한다는 것이 어찌 쉬운 일일 수 있을까. 게다가 선악대결구도에 익숙한 시청자들에게는 그 대결이 갖는 의미를 읽어내는 것 자체가 힘겨운 일일 수 있다.

'선덕여왕'의 시청률이 오르지 않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그 드라마가 너무 꽉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인물 또한 살리는 인물, 죽이는 인물 이렇게 나눠서 그려낸 것이 아니고, 각자 제 역할을 하는 인물들로 세워두었기 때문에,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각 인물들의 상황을 모두 이해해야 전체 드라마를 이해할 수 있는 불편함이 생기게 된다. 물론 이 불편함은 즐거운 것이고 완성도 면에서도 높게 평가될 수 있지만, 결과적으로 나오는 대중적인 수치인 시청률에는 그다지 좋은 것은 아니다.

뒤집어서 생각해보면 '선덕여왕'이라는 꽉 짜여진 완성도를 가진 꽤 복잡한 사극이 40%에 육박하는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대단한 일로 여겨진다. 최근 미실의 난을 통해 어떤 스펙터클을 보여주고, 또한 미실이 가진 완벽함에 도덕적 균열을 만들어내는 것은 '선덕여왕'이 완성도와 시청률 사이에서 처한 상황을 돌파하려는 의지처럼 보인다. 이렇게 '선덕여왕'의 시청률이 오르지 않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는 것은, 물론 당연히 올려야만 하는 것으로 취급되는 시청률 때문이 아니다. 이것은 어쩌면 자칫 시청률을 위해 지금껏 쌓아온 완성도에 흠집을 내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다. 30%든 40%든 '선덕여왕'은 이미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모쪼록 시청률에 대한 압박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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