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설의 홍수, 내우외환 겪고 있는 ‘상상플러스’

처음 ‘상상플러스’가 시작되었을 때 그 제목에는 당대 인터넷의 언어문화를 TV 프로그램으로 껴안겠다는 기획의도가 숨겨져 있었다. 즉 상상을 덧붙인다는 그 의미 속에는 이른바 댓글 문화에 대한 이 프로그램의 호기심이 담겨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것을 하나의 코너로 만든 것이 댓글방의 활용이었다. 스타들에 대한 재치 넘치는 댓글들을 포스트잇으로 방 한 가득 붙여놓고 거기서 몇 개를 골라 그걸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형식은, 자연스레 네티즌들의 참여를 이끌었고, 이로써 ‘저들끼리의 이야기’로만 치닫던 당대의 토크쇼에 참신한 변화를 제공했다.

뉴미디어의 등장과 그로 인해 변해 가는 언어에 대한 ‘상상플러스’의 관심은 곧바로 ‘세대공감 올드 앤 뉴’로 이어졌다. 당시 건전한 KBS의 방송이미지에 걸맞는 이 프로그램은 기성세대의 언어와 신세대의 언어 사이에 교량역할을 하겠다는 야심찬(?)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이것은 또한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인포테인먼트에도 잘 편승하는 형식이었다. 세대 간의 공감대를 넓힌다는 좋은 취지 하에 출연진들은 맘껏 놀 수 있는 멍석이 마련되었다. 노현정 아나운서를 중심에 세워 유지한 말에 대한 엄정함은 몸 개그와 부적절한 언어가 난무하는 출연진들의 경박함에 어떤 긴장관계를 만들며 균형을 잡히게 했다.

하지만 ‘상상플러스’의 추락은 바로 그 엄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투여된 노현정 아나운서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면서 연예인화 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인포테인먼트로서의 정보와 재미 중에 점점 재미에 경도되게 되면서 ‘상상플러스’는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지만, 그것은 또한 이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흔들어 만들어낸 인기일 뿐이었다. 긴장감은 흐트러졌고 노현정 아나운서가 빠지자, 상황은 급변했다. 인기가 급하락하면서 ‘상상플러스’는 말에 대한 관심을 버렸고, 그러자 과거 그 프로그램이 벗어나고자 했던 말장난으로 회귀했다.

‘놀이의 탄생’같은 몸 개그로의 변신을 시도했지만 역시 실패. ‘상상플러스’는 먼 길을 돌아 다시 말에 대한 관심으로 돌아왔다. 이것이 지금의 이지애 아나운서가 자리한 ‘상상우리말더하기’라는 코너다. 하지만 이 돌아온 탕아는 그다지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유는 그 동안 ‘상상플러스’가 내적으로 겪은 그 일련의 과정들, 즉 아나운서가 연예인화되고, 인포테인먼트가 엔터테인먼트로 변화하는 그 과정이 프로그램 외부에서도 진행되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세대공감 올드 앤 뉴’가 나왔던 그 시절만 해도 아나운서의 권위는 여전했고 따라서 그들이 구사하며 굳건히 지키고 있던 방송언어의 권위도 여전했다. 물론 방송사에서 독립해 연예활동을 하던 아나운서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나테이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폭발적인 아나운서들의 변신이 일반화된 시점은 정확히 노현정 아나운서가 인기의 극점에 있었던 그 시기와 일치한다. 이 변화의 시기부터 아나운서들은 더 이상 우리 말의 최후의 보루를 잡고 있는 권위의 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연예인 혹은 방송인의 하나로 그 존재를 낮춰오기 시작했다.

이 아나운서들의 변신이 말해주는 것은 그것을 용인해주는(혹은 권장하기까지 하는) 방송사의 달라진 말에 대한 태도를 말해주기도 한다. 아나테이너들은 보도와 뉴스 속에서 엄정함을 유지하기보다는 쇼 프로그램 속에서 춤을 추고 끼를 발휘하는 방송인으로 활약했고, 이렇게 달라진 방송사의 태도와 리얼리티가 강조되는 방송 환경이 만나자 권위를 포기한 방송언어는 막말과 독설로 변질되어 갔다. 아나운서의 변신은 그 자체가 방송언어의 변화를 상징적으로 예고했던 징후들이다.

‘상상플러스’가 내우외환을 겪게 되는 것은, 이 외부적인 변화(독설의 트렌드화 같은) 속에서 어떤 적응점을 찾아내지 못하자, 결국 내부적인 문제까지 도출하게 되는 그 악순환에서 비롯된 것이다. 언어를 다룬다는 취지의 프로그램이 각종 막말 논란에 휩싸이게 되는 이 아이러니는, 이제는 권위를 잃어버린 아나운서와의 사라진 긴장감이 그 문제의 밑바탕을 제공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형식이 무의미해지면, 그 속의 인물들은 과도해지거나 무성의해지기 마련이다.

‘상상플러스’의 끝없는 추락은 한 토크쇼의 부적응을 말해주기도 하지만, 아나운서에 대한 인식의 변화, 나아가 방송사가 언어를 생각하는 인식의 변화 같은 것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씁쓸함을 남긴다. 이제 막말까지 치닫는 방송언어 환경 속에서, 그저 부적응자처럼 보이는 ‘상상플러스’는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할 위기에 직면해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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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낭소리’와 막장드라마, 그 불황기 영화와 드라마의 상반된 선택

이미 60만 관객을 넘어서 독립영화로서는 꿈의 100만 관객을 넘보고 있는 ‘워낭소리’. 소를 닮아버린 할아버지와 사람을 닮아버린 소가 함께 걸어가는 그 느린 걸음걸이에 사람들은 아낌없는 박수를 쳐주었다. 한편 수줍게 “좀 하는” 영화라며 지난 겨울 살며시 다가 온 ‘과속스캔들’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현재 800만 관객을 넘어섰다. 블록버스터의 화려한 외관들 속에서 수수한 얼굴로 다가온 ‘과속스캔들’은 따뜻한 가족애를 그리며 불황기 찬바람에 서늘해진 관객들의 가슴을 적셨다.

진정성을 선택한 영화, 막장을 선택한 드라마
어찌 보면 이 두 영화의 성공은 지금껏 주목받지 못했던 작은 영화들의 반란이라는 점에서 이례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타고 전해진 따뜻한 이야기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적인 반응은 불황기 영화의 새로운 대안으로까지 보여진다. 극장 밖에서 세파에 흔들리며 버티던 관객들은 극장 속 몇 천 원의 도피처 속에서 위안과 성찰을 요구했다. ‘과속스캔들’은 이제 한물 갔다고 생각하는 소시민들에게 “아직 당신은 꽤 하는 사람”이라고 어깨를 두드려주었고, ‘워낭소리’는 먹고살기 급급한 현재, 오히려 그로 인해 사라져가고 있는 노동의 신성함을 성찰하게 해주는 감동의 시간을 선사했다. 실로 진정성의 성공이었다.

반면 같은 불황기 속, 안방극장은 이와는 정반대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된다. 지난 2월9일자 일일 시청률표를 보면 그 1위가 SBS의 ‘아내의 유혹(34.3% AGB닐슨 자료)’, 2위가 KBS의 ‘꽃보다 남자(26.2%)’, 3위가 MBC의 ‘에덴의 동쪽(23.3%)’이다. 이것은 지난 한 주의 주간 시청률과 거의 같은 결과(주간시청률에는 SBS의 주말극장 ‘유리의 성’이 하나 떠 끼어있을 뿐이다). 이 시청률표가 말해주는 것은 지금 현재 방송3사의 대표주자가 바로 드라마라는 점이며, 그 드라마들은 막장이라 불려지거나, 각종 논란 속에 허우적대는 것들이라는 점이다.

느리게 걷는 ‘워낭소리’와 속도에만 편승한 ‘아내의 유혹’
영화가 선택한 진정성, 드라마가 선택한 막장. 불황에 대한 이 상반된 선택이 말해주는 것은 무얼까. 이것은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서로 다른 매체성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이것은 두 매체의 과금 체계를 보면 알 수 있다. 영화는 순수하게 관객이 돈을 지불함으로써 수익을 얻는 매체인 반면, 드라마는 시청률이라는 간접적인 잣대를 통해 광고로 수익을 얻는 매체다. 작품성이나 완성도에 대한 요구는 당연히 영화에 더 무게중심을 둘 수밖에 없다(그것이 오락을 위한 것이라 할 지라도).

반면 드라마는 작품성보다는 화제성에 더 치중하게 된다. 즉 완성도가 떨어져 욕을 먹으면 영화로서는 사형선고가 될 수 있지만, 드라마로서는 오히려 논란을 통한 시청률 상승이라는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완성도에 대한 이러한 상반된 태도는 ‘워낭소리’와 ‘아내의 유혹’의 상반된 속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워낭소리’의 속도는 말 그대로 소걸음에 가깝다. 그 느린 걸음을 따라 걸으며 하나하나 이야기를 담담히 쌓아놓은 것이 ‘워낭소리’의 미덕이다. 반면 ‘아내의 유혹’은 작품의 개연성이나 인물의 일관성 같은 것마저 휘발시킬 정도의 속력으로 자극에만 몰두한다. 여기서 속도감은 지속적인 자극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완성도의 구멍을 메워주는 장치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은 영화처럼 불황기 속에서 어떤 진정성을 갈구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그렇지 않다. 4부작이었지만 호평을 받았던 ‘경숙이, 경숙아버지’에 쏟아진 찬사는 여전히 시청자들이 드라마를 통해서도 어쩐 진실된 감동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완성도나 작품성과는 상관없는 시청률의 양적 판단에만 의존하는 작금의 드라마 시스템은, 드라마를 시청자들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움직이는 괴물로 만들어가고 있다. 언제까지 욕하면서 보는 이 병적인 시청으로 휘둘려야 할까. ‘워낭소리’처럼 그 따뜻한 울림이 대중성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드라마에서도 바라는 것은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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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장’과 ‘국민’이라는 용어, 남용되고 있다

막장. ‘갱도의 막다른 끝’. 흔히 ‘갈 데까지 갔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다. 최근 드라마들이 불륜과 자극적인 설정과 식상할 정도로 반복되는 스토리를 반복하면서, 이 말은 그런 드라마들을 지칭하는 접두어가 되어버렸다. 이 ‘갈 데까지 간’ 드라마에 대한 반발심이 ‘막장’이라는 극단적인 표현을 불러온 것이다.

현재 ‘막장’이라는 용어는 실로 전염병처럼 창궐하고 있다. 오히려 ‘막장’ 아닌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다. 일찌감치 막장의 전염병을 터뜨리고 화려한 시청률로 사라진 ‘너는 내 운명’을 비롯해, 현재 그 스피디한 전개로 실험성까지 바라보게 되는 ‘아내의 유혹’이 그 대표주자. 이제 이 전염병은 일일드라마나 가족드라마에 머물지 않고 ‘에덴의 동쪽’이나 ‘꽃보다 남자’같은 미니시리즈 같은 프라임 타임까지 퍼져나가고 있다.

문제는 마구 사용되는 ‘막장’이란 용어의 남용이다. 자극적인 설정과 개연성 없는 스토리를 지적하는 ‘막장’이라는 극단적 표현은 지나치게 남용되다 보니 이제는 오히려 시청자들을 ‘막장’에 익숙해지게 만들고 있다. 게다가 일부 세대가 극단적으로 욕하지만 여전히 그 수요층(그것도 강력한 충성도를 가진)이 존재하는 이들 드라마들의 상업성은, 익숙해진 막장을 더욱 양산할 가능성이 있다. 이제 막장드라마는 그 본질인 조악함을 그 상업적으로 변모한 용어 아래 숨기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막장’이라는 용어는 또 다른 차원으로 남용되던 ‘국민’이라는 용어와 만나 웃지 못할 상황을 만들어낸다. 막장드라마가 국민드라마로도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시청률 때문이다. 어느 순간에서부턴가 국민드라마라는 호칭은 질적인 판단이 아니라 양적인 판단(시청률)에 의해 불려지기 시작했고, 막장드라마가 그 시청률에 도달하게 되자 ‘국민’과 ‘막장’이 동거하게 되었다. ‘아내의 유혹’에 혹자는 이렇게 이름 붙였다. ‘국민막장드라마.’

‘국민’이라는 질적인 판단으로 불려져야할 용어가 어느 순간부터 양적인 판단으로 그 의미를 남용하게 되면서 그것이 양적인 팽창(시청률 확보)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막장’이라는 단어와 만나고, 그렇게 되자 ‘국민’과 ‘막장’이라는 본래는 먼 거리에 떨어져 있어야할 용어가 아주 가깝게 다가와 하나로 붙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자 ‘막장’이라는 용어는 이제 그 부정적인 질을 질타하는 용어에서 양적인 성공을 상찬하는 용어로 변질되고 있다.

‘국민’이나 ‘막장’과 같은 드라마에 붙는 말들은 둘 다 모두 질적 판단으로 등장한 용어이다. 전자가 그 질의 긍정적 측면을 지칭한다면, 후자는 그 부정적 측면을 지칭한다. 하지만 이 두 용어는 지금 모두 양적인 의미로 변질되고 있다. ‘막장’이라 아무리 불러도 그것이 부정적인 의미로 들리지 않고(오히려 상업적으로 성공한 드라마로 보이게 된다), ‘국민’이라 아무리 불러도 그 질적인 가치를 느끼지 못하게 되는 상황. 이것이 바로 시청률이란 잣대가 가진 진짜 무서운 얼굴이 아닐까. 이제 이들 막다른 길을 달리는 드라마들에 대한 비판은 용어의 차원을 넘어 좀더 섬세해질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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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일지매’, 그 모성 부재의 세계

‘돌아온 일지매’에서 심마니의 딸로 살아가던 달이(윤진서)는 우연히 만나게 된 일지매(정일우)에게 대뜸 이렇게 말한다. “자식. 너 예쁘게 생겼다. 계집애 같애... 일지매. 무슨 이름이 계집애 같애... 눈썹이랑 코, 입 모두 여자 애 같애.” 그녀의 아찔한 도발에 일지매는 진짜 계집애(?)처럼 답한다. “놔라. 부끄럽다. 멋쩍다.” 그런데 다음 시퀀스로 일지매는 아예 달이의 옷을 입고는 마을로 내려가 닭을 훔치는 장면이 나온다. 이 여장한 일지매는 어찌 보면 이 사극에서 생뚱맞아 보인다. 왜 굳이 여장까지 해 보일까. 재미있어서? 일지매가 본래 꽃미남의 원조라서?

고우영 원작의 ‘일지매’를 보면 그 얼굴은 고우영 화백이 즐겨 그리던 여성 캐릭터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달이가 지적한 것처럼 ‘일지매’라는 이름 또한 여성적이다. 훗날 일지매가 일을 치르고 나서(?) 사라지며 남겨놓는 매화 한 가지도 이 활극에 어울리지 않게 자못 여성적이다 못해 미적이기까지 하다. 왜 일지매라는 특별한 영웅은 굳이 여성의 얼굴을 고집하고 있는 것일까.

일지매, 그 모성부재의 세계
‘돌아온 일지매’가 그리는 세계에는 모성이 삭제되어 있다. 일지매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생이별을 하고, 결국 버려지게 되었다. 저자거리의 걸인인 걸치(이계인)는 버려진 일지매를 데려다 젖동냥을 해가며 키운다. 이 모성 없는 세상에 버려진 일지매와, 그를 키워낸 걸인 아버지 걸치라는 설정은 이 드라마가 그리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을 압축한다.

모성 부재의 세계 속에는 두 개의 아버지 모습이 중첩되어 있다. 하나는 아들을 눈앞에서 부정해버리는 비정한 아버지이고 다른 하나는 피 한 방울 안 섞였어도 간 쓸개까지 다 내어줄 정도로 지극 정성인 걸치라는 아버지다. 비정한 아버지는 어머니를 내치면서(혹은 방조했고) 일지매 앞에 모성부재의 세계를 만들어냈다. 일지매는 그 부재한 모성을 야성처럼 품고 있는 달이를 만나지만 그녀 역시 아버지들의 세계 앞에 목이 떨어진다.

일지매가 찾는 것은 바로 그 아버지로 인해 잃어버린 모성의 세계다. 반 미쳐 짐승이 되어버린 일지매를 굴(이 드라마 속에는 굴, 즉 자궁의 이미지를 많이 사용한다. 달이와 만나던 동굴 같은)에 가둬버리며 열공스님은 “그 곳이 바로 네 어미 뱃속이다”라고 말한다. 열공스님은 일지매를 가둔 것이 아니라, 그가 그토록 원하던 모성의 세계로 되돌려 다시 태어나게 한 것이다. 그가 밖으로 나오게 될 즈음, “너는 누구냐”고 묻는 열공스님의 질문에 일지매는 말한다. “저는 이입니다. 어미를 찾아 옷섶을 헤매던 더러운 이.”

모성부재의 세계, 서민 아버지들의 모습은?
이 사극에는 모성을 빼앗아버린 아버지와 상반되는 걸치와 열공스님 이외에도 또 존재하는 아버지들이 있다. 그것은 구자명(김민종), 배선달(강남길) 같은 서민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은 권력의 핵심에는 근접하지 못하지만 그럭저럭 살아가며 문득문득 부성애를 끄집어낸다. 구자명은 포도청의 냉철한 수사관이지만 또 한 편으로는 힘없는 이들에게 손을 내밀어주는 따뜻함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일지매 앞에서 그는 마치 아버지와 같은 걱정을 해준다.

한편 배선달과 차돌이(이현우)는 일지매의 모성부재 상황을 또 다른 버전으로 반복한다. 차돌이는 부모가 없는 천애고아에 동네 왈패들에게 약취를 당하던 아이. 배선달은 차돌이를 자신이 데려다 키우겠다며 아버지의 정을 보인다. 그런데 이 아버지의 상을 보이는 구자명과 배선달 같은 캐릭터는 어딘지 고개 숙인 모습들이다. 구자명은 법을 집행하는 위치에 있지만 법보다 우위에 있는 권력 앞에서 무기력하고, 배선달은 화려한 무예의 세계에 빠져있지만 자신 하나 지켜낼 힘이 없는 소시민이다.

일지매, 여성의 얼굴로 서민들을 품에 안다
모성이 삭제되어있고, 자궁의 이미지가 강조되며, 일지매라는 캐릭터가 여성의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만 보더라도 이 사극이 지향하는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부재한 모성의 회복이다. 일지매는 바로 여성의 얼굴로 굶주린 서민들에게 먹을 것을 챙겨다 주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다. 그러니 이 일찌감치 어머니 없는 세계에 내던져진 일지매가 그 먼 길을 돌아 스스로 품게 되는 것이 바로 모성이다.

국가를 흔히 어머니에 비유하는 것은 그 백성들을 자식으로 여기는 마음을 꿈꾸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온 일지매’의 세계 속에서 국가는 백성을 착취하는 아버지(당대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아버지는 종종 권력을 좇는 욕망의 화신으로 그려진다)의 이미지로 표상된다. 그 아버지는 일찍이 어머니(의 마음)를 몰아내고 그 자리에 앉아 있으며, 따라서 일지매는 소년기 그 어머니를 찾아다니다 결국에는 서민들의 어머니를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가부장적 세계와는 거리가 먼, 서민들의 아버지들은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측은한 마음으로 서민들의 삶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어머니는 이미 살해된 존재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지매를 통해 그 모성 회복의 가능성을 확인한 그들도 변하게 된다. 이것은 일지매가 왜 여성의 얼굴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실마리를 전해준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모성을 형상화한 영웅 일지매가 여타의 영웅들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인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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