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민트’, 이하나와 김광민의 특별한 만남

순간 ‘수요예술무대’가 다시 돌아온 것 같았다. 이미 무대 위에 서있던 김광민은 이하나에게 앉으라고 권했고, 이하나는 어색한 듯 앉으며 “제가 게스트가 된 것 같네요”하고 말했다. 그 농담은 92년부터 2005년까지 무려 13년 간이나 수요일밤을 예술로 만들어주었던 ‘수요예술무대’의 진행자 김광민에 대한 이하나의 헌사였다.

‘수요예술무대’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으로 클래식이든 재즈든 팝이든 가요든 장르에 구애받지 않던 음악프로그램이었다. 장르는 달랐지만 그 다른 장르를 모두 품을 수 있는 무대가 있다는 것이 이 프로그램이 가진 가능성이었다. 그 프로그램은 무대 위에 올려지고 라이브로 펼쳐지는 음악과, 그 음악을 듣는 관객이 있다면 다른 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자신이 진행자로서 부족하다고 얘기하는 이하나에게 김광민은 자신이 13년 동안 했어도 지금의 이하나보다 못하고 어색했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피아노 앞에 앉으면 그렇게 진지하고 멋진 모습을 보여주는 그는, 진행자의 자리에 서면 그렇게 수줍어하고 어눌한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색해했다. 그런데 바로 그 점이 김광민을 대중들에게 깊이 각인시켰다.

그것은 김광민만의 얘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수요예술무대’라는 프로그램의 특징이 되었다. 놀라운 입담을 가진 진행자의 매끄럽고 재치 넘치는 멘트는 사실 음악프로그램의 사족과 같은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음악이고, 그 음악과 관객과 어떻게 교감하느냐였다. 김광민의 음악 속에서의 진지함과 진행자로서의 어눌함은 그런 면에서 ‘수요예술무대’가 가진 음악중심주의를 그대로 표방하고 있었다.

이것은 ‘페퍼민트’가 지향하는 것과도 같다. 이하나의 ‘페퍼민트’에는 잘 마련된 무대와 관객이 있다. 그러니 이 음악중심주의를 표방하는 프로그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대를 채워줄 음악인들이다. ‘페퍼민트’가 열어놓은 무대 위에는 재즈연주자도 있고 록커도 있고 포크 가수도 있고,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인디 가수들까지 누구나 오른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이 무대가 순위도 아니고 인지도나 인기도 아닌 오로지 음악을 통한 소통을 위해 마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하나는 진행자로서 어색하다. 진행자가 관객과 시청자들을 대신해서 무대에 오른 음악인들을 만나는 역할을 갖고 있다면 어색함은 어쩌면 불편함을 주는 행위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하나의 어색함에는 다른 것이 있다. 음악하는 사람들에 대한 과한 존경과 애정에서 그것이 비롯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쩌면 저 ‘수요예술무대’의 김광민이 보여주었던 어색함과 맞닿는 부분인지도 모른다.

미니콘서트를 하던 김종서가 객석에 앉아있는 이하나에게 말했다. “이런 프로그램은 처음이네요. 왜 거기 가 앉아 있어요?” 그러자 이하나는 “미니 콘서트에는 저도 관객의 한 명이니까요”라고 말했다. 김종서 옆에서 기타를 치던 김태원이 옳다며 한 마디 의미심장한 말을 거들었다. “예. 좀 그렇게 들어줘야 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하나의 이 프로그램의 성격을 정리하는 듯한 마지막 멘트. “뮤지션을 향한 페퍼민트의 무한한 애정은 계속됩니다.” 이하나는 그렇게 ‘페퍼민트’의 향기가 되어가고 있고, 그 기분 좋은 향기는 음악을 타고 차츰 세상으로 퍼져가고 있는 중이다.

‘무릎팍 도사’를 보면 2009 토크쇼가 보인다

올 예능을 단적으로 정리하자면 그 한 축이 리얼 버라이어티쇼이고 다른 한 축은 토크쇼라고 할 수 있다. 그 중 토크쇼에 있어서 올해 가장 두드러지는 것을 고른다면 단연 ‘무릎팍 도사’가 꼽히지 않을까. 그것은 ‘무릎팍 도사’가 얻은 시청률 성적표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기존 토크쇼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때론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걸어온 ‘무릎팍 도사’의 실험적인 행보가 전체 토크쇼에 일으킨 영향력을 말하는 것이다. 올 한 해 ‘무릎팍 도사’는 우리네 토크쇼에 어떤 실험을 했고 그것은 내년 어떤 변화를 가져올까.

탈신비주의, 탈권위주의 바람
‘무릎팍 도사’의 핵심적인 특징은 배틀 구조의 화법으로 진행되는 토크의 진검 승부라는 점이다. 마치 탐문하듯이 상대방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시청자들이 원하는 이야기를 끌어내려는 도사와, 그것을 숨기거나 아예 자포자기하듯 털어놓는 게스트의 입장이 절묘하게 부딪치는 이곳은 기존 연예인들 혹은 유명인들이 갖고 있던 신비주의 혹은 권위주의의 껍질을 벗겨내는 곳이기도 하다. 과거 신비주의 마케팅이 주조를 이루던 시대라면 이 대결구도는 애초에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겠지만, 이제 탈신비주의가 어떤 대세가 된 상황에서 이 도사와 게스트가 벌이는 한판 굿은 가능해진다. 그 양자가 공유한 목적은 신비주의라는 겉옷을 벗어 던지는 것이다. 이를 통해 대신 연예인 혹은 유명인은 친근한 이미지를 대신 얻게 된다. 반면 도사가 얻는 것은 바로 그 연예인, 유명인의 껍질을 벗겨내는 쾌감이다.

도사의 직설어법은 여타의 토크쇼에서 에둘러 홍보가 아닌 척 가장한 채 홍보를 하는 그런 방식을 깨뜨려버린다. 올해 다른 토크쇼들은 여전히 이 방식을 어떻게 잘 위장한 채 고수할 것인지만을 고민해왔다. ‘야심만만2’도 올킬 시스템을 내세우고 있지만 여전히 게스트의 홍보에 집중하고 있고, 게스트의 카테고리화로 어떤 주제를 상정하는 방식을 취하는 ‘놀러와’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해피투게더’나 ‘샴페인’ 같은 토크쇼에도 해당되는 얘기다. ‘명랑히어로’는 초기에 시사문제를 끌어 들여 이 문제를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지금의 ‘두 번 살다’라는 컨셉트는 역시 인물 홍보로 돌아가고 있다. 이러한 토크쇼들 역시 직설어법을 따르고 있지만 거기에 상응하는 ‘무릎팍 도사’ 같은 형식은 구축하지 못했다. 과거의 형식에 화법만 바꾼 셈. ‘무릎팍 도사’가 보여준 화법과 형식의 균형은 2009년 토크쇼들의 주된 고민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예인 중심주의 벗어난 게스트 섭외의 확장
무엇보다 올해 ‘무릎팍 도사’가 토크쇼의 변화에 기여한 부분은 게스트 섭외에 있어서 연예인 중심주의를 벗어났다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토크쇼라고 하면 늘 연예인들이 출연해 자신들의 신변잡기나 홍보거리를 토로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던 것이 사실. 초기 ‘무릎팍 도사’도 이 한계에서 그다지 벗어나지 못했었다. 논란 연예인을 섭외한 것은 참신한 부분이었지만 그것 역시 논란 연예인에게 면죄부를 씌워주었다는 역홍보의 한계를 드러낸 부분이다. 한참 공격적인 발언을 하던 도사가 마지막에 가서 “○○여! 영원하라!”고 외치는 장면은 이 토크쇼 역시 연예인 홍보의 한 분파임을 자인하는 셈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 직면해서 ‘무릎팍 도사’가 꺼낸 비연예인 게스트라는 카드는 주효했다. 비연예인 출연은 연예인 홍보라는 지적을 간단히 뛰어넘으면서 동시에 그만큼 신선하게 다가왔다. ‘무릎팍 도사’는 양준혁, 박세리, 이만기, 장미란, 추성훈 같은 스포츠인들은 물론이고 산악인 엄홍길, 바이올리니스트 사라장(장영주), 발레무용가 강수진, 만화가 허영만, 소설가 이외수 같은 문화계 전반의 인물들을 비롯해 심지어 우리 시대의 소설가 황석영까지 토크쇼로 끌어들여 한바탕 걸판진 솔직한 토크의 재미 속으로 우리를 초대했다. 연예인보다는 비연예인이 출연했을 때 더 높은 시청률을 보였다는 점은 앞으로 우리네 토크쇼들이 게스트를 섭외하는데 있어 새로운 이정표를 보여준 셈이 아닐 수 없다.

집단MC체제? 1인 토크쇼로도 충분
무엇보다도 ‘무릎팍 도사’가 내년 토크쇼의 어떤 전범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모두가 집단 MC체제를 부르짖을 때 홀로 1인 토크쇼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건방진 도사 유세윤과 올밴이 있지만 이들은 보조적인 위치에 있을 뿐, 그 진짜 형태는 1인 토크쇼로서 게스트와 메인 MC의 토크 대결이 중심을 이룬다. ‘무릎팍 도사’는 정통 토크쇼 구조를 유지하면서, 대신 토크의 형식과 대화의 방식을 바꾸는 것으로 정면승부를 통해 그간 홍보와 진정성 사이의 딜레마에 빠져있던 토크쇼의 문제를 뛰어넘었다.

이것은 현재 경기불황으로 인해 구조조정이 불가피한 집단 MC체제에 있어서 하나의 가능성이 된다. 하지만 ‘무릎팍 도사’ 같은 1인 체제가 구조조정의 한 선택으로 대세를 이룬다고 해도 똑같이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미 ‘박중훈쇼’ 같은 1인 체제의 토크쇼가 생기고 있는 상황이지만, 이 쇼의 경우처럼 그저 과거로 회귀하는 1인 토크쇼는 어쩌면 시대착오일 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1인 토크쇼라도 그 구조 위에 이 시대의 화법을 적용시킬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토크쇼는 늘 반복되는 것 같지만 또 한 편으로는 그 시대에 맞게 얼굴을 고쳐오며 진화해왔다. 그 전방위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무릎팍 도사’다.

‘바람의 화원’에서 ‘쌍화점’까지 달라진 동성애 시선

SBS 2008 연기대상에 베스트커플 후보 부문에 ‘바람의 화원’에서 화제를 모았던 닷냥커플(문근영-문채원)이 후보에 올랐다. 당초에는 대상이 아니었지만 단지 남녀 커플이 아니라는 이유로 후보에서 배제될 수는 없다는 네티즌 여론에 따라 그렇게 결정된 것. 어쩌면 이것은 그저 이벤트적인 후보 선정의 하나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작금의 여러 대중문화 속에 자리하는 동성애에 대한 달라진 시선을 생각하면 꼭 단순한 이벤트로만 치부할 수는 없다.

실제로 ‘바람의 화원’의 러브라인에서 닷냥커플은 사제커플(박신양-문근영)보다 오히려 사랑을 받았다. 신윤복과 김홍도의 멜로가 어딘지 어색한 느낌이 있었다면, 정향과 신윤복의 멜로는 그 자체로 절절한 감정이 묻어났다. 정향이 가야금을 뜯고 신윤복이 그 정향을 화폭 속에 담는 장면은 남녀 간의 그 어떤 멜로 연출보다 더 뛰어나게 감정을 표현해냈다. 즉 닷냥커플은 그저 여여커플이라는 겉으로의 시각 그 이상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작년 동성애 코드를 드라마 속으로 가져와 화제를 모았던 ‘커피 프린스 1호점’에서 가장 시청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던 대사는 아마도 한결(공유)이 결국 자신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은찬(윤은혜)에게 “갈 때까지 가보자”라고 한 말일 것이다. 이 대사는 남녀의 성을 넘어서 사랑의 감정 그 자체에 손을 들어주는 것. “네가 남자라도 사랑한다”는 절절한 마음의 표현이다.

반드시 동성애를 지지하는 시청자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사랑이라는 감정 앞에 성 구분이라는 장벽을 넘어서는 이러한 코드들은 적어도 대중문화에서는 이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최근 개봉했던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에서는 이러한 동성애의 시선이 거의 일상적인 수준으로 받아들여진다. 천재 파티셰인 선우(김재욱)는 동성애자로서 가게 사장인 진혁(주지훈)을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해 왔던 인물. 물론 진혁은 동성애자가 아니지만 그들의 대화는 마치 동성애를 하나의 농담처럼 주고받는다. 과거 무겁기만 했던 동성애에 대한 시선을 생각해보면 엄청난 변화이다.

앞으로 개봉을 앞두고 있는 ‘쌍화점’은 동성과 이성을 넘나드는 사랑과 질투의 대서사시다. 왕(주진모)의 총애를 받는 왕의 호위무사 홍림(조인성)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알지 못하고 자라나지만, 동성애자로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왕을 대신해 왕후(송지효)와 합궁을 하게된다. 그 때부터 홍림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그제야 알게되고 왕후와 사랑에 빠져들고 점점 질투의 화신이 되어가는 왕은 상황을 결국 파국으로 몰고 간다는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의 전제가 성적 구분 자체를 넘어서는 미묘한 지점에 서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도 역시 중요해지는 건 성별 자체가 아니라 사랑의 감정이다.

이제 적어도 대중문화 속의 멜로 구도에서 성별 구분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닌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그간 남녀 간의 멜로가 자진 상투적인 식상함을 벗어나 어떤 신선한 구도를 만들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그만큼 사회가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방증하기도 한다. 남녀의 역할구분은 이제 이 사회에서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대중문화 속에 등장하는 동성애에 대한 시선이 달라진 것은 물론 동성애 자체에 대한 호감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남녀구분에 대한 차이가 없어진 것이다. 지금은 닷냥커플도 베스트 커플로 충분히 바라볼 수 있는 시대다.

그들로 와서 우리들로 끝난 ‘그사세’의 긍정론

‘그들이 사는 세상’에서 ‘그들’이 의미하는 것은 무얼까. 어찌 보면 그 답이 명징해보이는 이 질문에 이 드라마의 묘미가 숨겨져 있다.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노희경 작가와 표민수 PD, 그리고 송혜교와 현빈이라는 연기자들이 만들어 가는 이 드라마에 관심이 쏠렸을 때, 우리는 그 제목 속 ‘그들’이 방송가, 특히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드라마를 만드는 그들의 이야기?
그것은 사실이었다. 준영(송혜교)은 펑크가 나버린 드라마 촬영 분을 채워 넣기 위해 현장에서 자동차 질주 신을 찍고 있었고, 지오(현빈)는 그 날 방영 분을 급하게 편집하고 있었다. 까칠하지만 시청률로 인정받는 손규호(엄기준)는 현장에서 소리를 버럭버럭 질렀고, 양수경(최다니엘)은 그 욕을 다 먹어가며 현장에서 굴렀다. 김민철(김갑수)은 데스크에 틀어 앉아 시청률표를 보고 있었고, 윤영(배종옥)은 촬영장 자신의 차량에서 로드 매니저에게 호통을 치고 있었다.

또 그들은 자신만의 세계로 돌아와 준영과 지오처럼 헤어졌다 다시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또 각자만의 이유로 갑작스런 이별을 통보하기도 하며, 양수경처럼 저 혼자 사랑하다 상처받기도 하고, 윤영과 민철처럼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순정 어린 사랑에 빠지기도 하며, 손규호와 장해진(서효림)처럼 어느 날 갑자기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이것은 그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그들의 이야기가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드라마와 현실을 비교하며 의견충돌을 할 때다. 그들은 삶이 드라마 같을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드라마 속에서처럼 쿨한 사랑과 쿨한 이별을 하지 못하고 구질구질하며 때로는 신파가 되고 때로는 상투적인 대사로 가득 채워지는 현실을 비교하면서 드라마 속 삶과 현실의 삶은 다르다는 것을 관조해낸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상상하는 판타지로 가득한 사랑이 현실적인 사랑과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 드라마와 현실을 관조하는 상황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이제 조금씩 우리들의 이야기가 되어간다.

이러한 관조적 입장을 취하게 해주는 것은 두 주인공의 나레이션이다. 지오와 준영이 자신들이 만드는 드라마 속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을 관조한다면, 이 나레이션은 바로 한 차원 더 위에서 지오와 준영이 서로 만나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그 과정들을 내려다본다. 즉 이것은 외부적인 시선이거나, 작가의 시선이거나, 어쩌면 모든 걸 다 겪고 난 지오와 준영이 후에 그 때의 상황을 돌아보는 시선 같은 것이다. ‘그사세’에서 지오와 준영은 드라마 밖에서 자신들이 삶을 관조한다 생각하지만, 이 나레이션으로 대변되는 외부의 시선은, 그들을 결국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끌어들인다. 따라서 바로 이 지점은 드라마 밖과 드라마 안이 만나는 곳이 된다.

판타지보다는 꿈꿀 수 있는 현실을 선택하다
마지막회에서 준영의 나레이션은 지오가 했던 “모든 드라마는 해피엔딩이어야 한다”는 말을 얘기하면서 “희망이 아니면 그 어떤 것도 말할 가치가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작가의 다짐과 같다. ‘그사세’의 주인공들을 통해 알게 되었듯이 삶은 드라마처럼 달콤하고 쿨하지 않지만 어떤 희망을 얘기해야 한다는 노희경 작가의 다짐. 노희경 작가는 이 드라마를 통해 판타지와는 다른, 현실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고, 그리고 그 뒤틀린 현실 속에서도 어떤 희망을 얘기하려 했다. 함께 싸우고 만나면서 드라마와 현실의 괴리를 체험한 지오와 준영이 함께 드라마를 찍으며 그 드라마 속 주인공들의 키스신에서 자신들의 키스를 상상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드라마 밖에서 여전히 현실에 치이지만 드라마 속의 세상을 꿈꾸는 그들, 이것은 바로 우리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우리가 아름다운 드라마를 만든다해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만큼 아름다운 드라마는 만들 수 없을 거다.” 이 나레이션처럼 노희경 작가가 선택한 것은 결국 현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판타지로 가장된 현실도 아니고, 그저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쿨하지 못한 삶 속에서 허우적되는 그런 현실도 아니다. 그것은 어려워도 꿈꿀 수 있는 현실이다. 매일 밤샘촬영에 추위와 싸워가며 버텨내는 현실이지만 그 속에서 아름다운 드라마를 꿈꾸는 그들처럼, 실제는 7%의 시청률이 나온 드라마지만, 그 속에서 27%의 시청률을 받아 쥔 주인공들이 킥킥대며 웃게 해주는 그 꿈꿀 수 있는 현실. 우리가 이 드라마를 보며 어떤 따뜻한 위안 같은 것을 받았다면 바로 이 노희경 작가가 우리에게 전해준, ‘어려워도 꿈꿀 수 있는 현실’을 그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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