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닥터’가 된 리얼 버라이어티, 그 이유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들. 그런데 그 이미지가 이미 낡아버렸거나, 너무 과장됐거나 혹은 부정적으로 변했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과거라면 아마도 대부분은 이미지의 생명이 끝나면서 연예인으로서의 삶도 끝장나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고치면 되니까. 어떻게? ‘이미지 닥터(?)’를 찾아가면 된다. 다름 아닌 리얼 버라이어티쇼를 말하는 것이다.

없던 이미지도 만들어드립니다!
‘1박2일’에 출연하기 전까지 은지원은 그저 힙합아이돌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1박2일’은 그에게서 조금은 막무가내지만 귀여운 초딩 이미지를 끄집어내 주었다. 자신감을 가진 은초딩은 지금 은둘리 같은 보다 적극적인 캐릭터로 점차 진화하고 있다.

김C는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가 낳은 캐릭터다. 좀더 연기를 해야하는 과거의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라면 좀체 적응하기가 어려웠을 테니까. 하지만 거꾸로 연기를 하지 않아야 더 각광받는 리얼 버라이어티쇼 속에서 그는 그저 자신의 맨 얼굴을 보여주는 것만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새로 세웠다.

‘개그콘서트’에서 고음불가로 캐릭터를 세웠던 이수근은 버라이어티쇼로 와서 적응기가 필요했다. 초반 이렇다할 캐릭터를 구축하지 못하던 그였지만 차츰 차츰 발현하게 된 그의 재치 있는 입담은 무덤덤하게만 보이던 국민일꾼이란 캐릭터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꽤 오랜 시간을 묵묵히 기다려준 ‘1박2일’의 덕이다.

한편 ‘패밀리가 떴다’의 박예진은 어딘지 무뚝뚝해 보였던 이미지를 ‘달콤살벌한(?)’ 이미지로 바꿔주었다. 또 이천희는 같은 프로그램에서 진지하기만 했던 이미지를 벗고 어딘지 엉성한 이미지를 부가해 천데렐라라는 캐릭터를 갖게 되었다. 없었던 이미지도 만들어주는 곳, 바로 그 곳이 리얼 버라이어티쇼다.

낡은 이미지는 편안하게, 과장된 이미지는 친근하게, 비호감은 호감으로
윤종신은 늦둥이로 예능계에 진출해 라디오에서 단련된 특유의 입담을 선보였다. 그의 깐죽 캐릭터가 점차 수면에 올라오게 된 것은 ‘라디오스타’, ‘명랑히어로’ 같은 캐릭터화된 리얼 토크쇼를 통해서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윤종신의 캐릭터를 잡아준 것은 ‘패밀리가 떴다’다. 이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윤종신의 단지 깐죽거리는 캐릭터 이외에 ‘미식전문가’ 같은 성격을 부여하면서 오래된(?) 이미지를 오히려 편안하게 만들어주었다.

한편 같은 프로그램의 이효리나 대성, 혹은 간혹 게스트로 출연하는 아이돌 스타들은 연예활동을 통해 쌓여진 과장된(?) 캐릭터를 이 프로그램을 통해 보다 인간적이고 친근하게 변모시키고 있다. 유재석과 늘 툭탁거리며 짝을 이룬 이효리는 여지없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국민요정의 이미지에 털털한 이미지를 덧붙였다. ‘무한도전’의 멤버가 된 전진은 ‘패밀리가 떴다’에도 출연하면서 꽃미남 아이돌 스타 이미지에 코믹한 성격을 부여했다.

비호감 이미지였던 서인영은 ‘우리 결혼했어요’를 통해 신상녀 이미지를 덧붙였고 이를 통해 예능계의 신데렐라가 됐다.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갖는 진솔한 모습이 비호감 이미지까지 호감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일까.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켜 방송활동이 뜸했던 연예인들은 리얼 버라이어티를 통해 복귀를 꿈꾸고 있다. 새롭게 케이블 채널 tvN에서 시작하는 리얼 버라이어티쇼, ‘180분’의 이영자와 이찬이 그 주인공이다.

무엇이 리얼 버라이어티를 이미지 닥터로 만들었나
이밖에도 많은 연예인들이 리얼 버라이어티를 통해 자신의 이미지를 다시 세우고 싶어한다. 이미지가 생명인 연예인들은 그만큼 빠르게 소비되는 이미지를 그저 부여안고 있을 틈이 없다. 자꾸만 변해 가는 신상 캐릭터에 대한 요구에 발맞추지 못한다면 순식간에 잊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연예인들이 이미지 변신을 하는 방식은 작품을 통해서였다. 즉 배우들은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서, 가수들은 새로운 음반을 통해서, 개그맨은 새로운 개그코너를 통해서 이미지 변신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 보다 더 강력하게 등장한 것이 바로 리얼 버라이어티쇼다. 배우든 가수든 개그맨이든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이 쇼는 이른바 리얼리티를 통해 그네들의 맨 얼굴을 드러내는(실제로 드러낸다기보다는 그럴 것이라 상상하게 만드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러니 이 ‘진정성의 형식’속으로 들어가면 거의 대부분의 이미지 ‘변신, 수리, 복구(?)’가 가능해진다. 이른바 ‘한 꺼풀 벗겨놓고 보면 누구나 똑같은 사람’이라는 공감대 속에서 몰랐던 면들을 발견하게 되고, 잘못된 면들도 이해하게 된다. 물론 그 전제는 진솔해야 한다는 점일 것이지만.

지금 리얼 버라이어티쇼는 이미지 전쟁이라 할 만큼 치열해진 연예계에서 어떤 피난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지쳐있던 이미지는 그 속에 들어가 새로운 활력을 얻기도 하고, 부담스럽게 과장된 이미지는 그 속에서 털털한 친근감을 얻기도 하며, 한 때의 잘못으로 복구 불능에 빠진 이미지는 그 속에서 솔직한 심경을 드러내면서 새로운 희망을 찾기도 한다.

이미지 닥터가 된 리얼 버라이어티쇼. 이것은 거꾸로 리얼리티 세상에서 발생하는 이미지의 문제에 있어서 그 무엇이든 솔직한 것만큼 확실한 방법은 없다는 것을 에둘러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법 속의 이야기 vs 법 바깥의 이야기

금요일 밤의 SBS 프리미엄 드라마 ‘신의 저울’은 여러모로 ‘프리즌 브레이크’를 닮았다. ‘프리즌 브레이크’의 마이클 스코필드(앤트워스 밀러)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이제 사형을 앞두고 있는 형을 구해내기 위해 저 스스로 법을 어기고 감옥으로 들어간다. 한편 ‘신의 저울’에서는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된 형, 장준하(송창의)를 위해 동생 장용하(오태경)가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수감되며, 형은 누명을 벗고 동생을 구해내기 위해 검사가 된다. 이 두 드라마는 모두 억울하게 누명을 쓴 자가 있고 그래서 교도소에 들어간 자가 있으며 바깥에 남은 이는 그를 구해내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는 점에 있어서 유사하다.

또한 이 두 드라마는 똑같이 어떤 식으로든 법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내보인다. ‘프리즌 브레이크’에서 스코필드가 형을 직접 구하기 위해 범법행위를 저지르는 순간, 법에 대한 이 드라마의 태도가 드러난다. 법은 믿을 수 없는 것이며 그러니 탈옥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신의 저울’에서도 법에 대한 태도는 이와 다를 바가 없다.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동생이 대신 감옥에 들어가게 되는 순간, 법은 믿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무전유죄, 유전무죄’의 세상, 그러니 저 스스로 법을 집행하는 권력자가 되어 동생을 구해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간 자를 끄집어내기 위한 주인공들의 선택에서 이 두 드라마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된다. ‘프리즌 브레이크’는 애초부터 법을 버림으로써 말과 말이 부딪치는 법정싸움은 포기하고 추리를 방불케 하는 스릴러와 액션의 세계로 나아간다. 반면, ‘신의 저울’은 법을 선택함으로써 칼과 칼의 부딪침보다 더 살벌한 말의 전쟁인 법정드라마의 길을 걷게 된다. 철학적인 질문보다는 짜릿한 퍼즐게임 같은 탈옥 드라마를 선택한 ‘프리즌 브레이크’와 달리, ‘신의 저울’은 “정의란 무엇인가”, “법은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같은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신의 저울’에 대한 기대감은 이러한 철학적인 질문을 가능하게 만드는 인물설정에서 비롯된다.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김우빈(이상윤)과 그의 아버지인 청렴한 검사 김혁재(문성근)는 그 운명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사건 이후에 법과 함께 서 있던 자기 존재가 흔들리게 된다. 깨끗한 법조인의 대명사인 아버지를 본받아 살려했던 김우빈은 죄책감에 점점 타락의 길을 걷고, 김혁재는 자신의 아들의 범법사실 앞에서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편 이 결정적인 살인사건을 후에 조사하게 될 인물이 장준하와 김우빈의 중간에 서게 될 여자, 신영주(김옥빈)라는 점은 드라마를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신의 저울’이 ‘프리즌 브레이크’의 설정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다른 기대감을 갖게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진지한 질문들 때문이다. 결국 법이란 ‘신의 저울’이라는 허울을 쓰고는 있지만 사람에 의해 그 무게가 달아지는 ‘인간의 저울’일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신의 저울’은 과연 복수극이라는 단순함을 넘어서 이 법정드라마의 근원적인 질문에까지 다다를 수 있을 것인가. 그 향배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봉태규 그리고 여자 봉태규, 차예련

악역이 이토록 귀여울 수가 있을까. SBS 수목 드라마 ‘워킹맘’에서 워킹맘 최가영을 힘겹게 하는 주요인물은 박재성(봉태규)과 고은지(차예련)다. 그런데 코믹극으로 그려지기 때문일까. 이 사회성 짙은 소재의 워킹맘을 다룬 드라마 속에서 진지하게 다뤘다면 천하의 악당이 될 이들이 오히려 귀엽게까지 느껴지는 것은. 악당은 악당인데 좀 어수룩해 보이고, 결국에는 늘 당하기만 하는 이들을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 조금은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지만, 평면적인 워킹맘 최가영보다 더 주목하게 되는 이들 캐릭터는 지금 ‘워킹맘’을 보게 만드는 진짜 힘이 분명하다.

울고 있어도 웃음이 터지게 하는 남자, 봉태규
이 잘생긴 것과는 거리가 먼 남자의 매력은 도대체 뭘까. 필요하다면 눈물에 콧물까지 질질 흘리면서 연기에 몰입할 수 있는 그 망가짐의 미학이 아닐까. 놀라운 것은 봉태규가 이렇게 절절하게 울 때마저 보는 이들은 폭소를 터뜨린다는 점이다. ‘워킹맘’에 있어서 봉태규가 하는 박재성이란 역할은 이 드라마의 전체 분위기를 좌우한다.

악하다기보다는 철부지에 가까운 박재성이란 캐릭터는 바로 그것 때문에 워킹맘 최가영을 힘겹게 만든다. 고은지의 유혹에 쉽게 넘어가 늘 일을 저지르고는 배구선수 출신인 최가영에게 얻어맞기 일쑤다. 그러면서도 상황파악 못하고 그다지 귀엽지도 않은 ‘장화 신은 고양이’ 흉내를 낸다. 결국 이혼까지 당하고 노숙자 신세까지 전락하는 박재성은 따라서 드라마 속에서 악역으로 존재한다기보다는, 이 땅의 모든 워킹맘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는 샌드백 역할을 하고 있다.

봉태규가 연기하는 박재성은 그가 가장 잘 하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코믹 연기로 물이 오른 봉태규는 이제 더 이상 데뷔 영화인 ‘눈물’에서의 반항기 어린 캐릭터가 아니다. 그는 ‘애정결핍이 두 남자에게 미치는 영향’, ‘두 얼굴의 여친’, ‘가루지기’를 통해 가장 불쌍한 얼굴로 가장 웃음을 끌어내는 캐릭터로 자리잡았다. ‘워킹맘’에서 봉태규가 주인공이어야 하는 최가영 역의 염정아보다 더 주목을 끄는 것은 코믹 드라마의 성격상 웃음을 주는 인물에 더 주목이 가는 이유도 있지만, 봉태규 특유의 개성에서 비롯된 바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여자 봉태규로 피어난 차예련의 매력
이 드라마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배우는 차예련이다. ‘못된 사랑’의 조앤 역할은 그녀의 매력을 끌어내기에는 너무 평범했다. 눈부신 외모와 몸매에 완벽한 성격의 캐릭터는 드라마 속에서는 너무나 정형화된 이미지를 만든다. 게다가 요즘의 대세는 섹시함과 털털함이 합쳐진 ‘섹시털털’이 아닌가. ‘워킹맘’에서 고은지를 만나 차예련의 매력이 피어나는 건 그 때문이다.

초반부에는 그저 악역처럼만 보였던 고은지는 그러나 차츰 무너지기 시작하면서 이제는 박재성과 소울메이트처럼 통하는 캐릭터가 된다. 여기서 고은지를 연기하는 차예련은 거의 여자 봉태규가 된다. 불쌍할 정도로 깨지고 당하는 악역으로서 고은지는 박재성과 똑같이 미워할 수 없는 드라마에 웃음을 주는 존재다.

그녀의 매력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은 고은지가 집밖으로 쫓겨나기 시작하면서. 명품으로 치장했던 그녀는 차츰 하나씩 그 명품을 팔아 생활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잠자리로 찾는 찜질방에서 심지어 박재성의 입에 들어간 계란을 빼서 먹을 정도로 망가진다. 그 상황에서도 여전히 공주병에 빠져 자신이 원하면 누구든 자기의 매력에 빠져들거라 착각하는 고은지는 이제 어느새 누군가 사주는 자장면을 입에 덕지덕지 바르며 먹는 자신을 깨닫지 못한다. 고은지를 통해서 차예련은 마치 리얼 버라이어티쇼에 등장한 듯한 효과를 거두고 있다.  섹시한 이미지에 인간적인 면모가 덧붙여지고 있는 것이다.

‘워킹맘’에는 따라서 두 명의 봉태규가 존재한다. 문제를 만드는 장본인이지만 늘 깨지는 역할로 보는 이들에게 기꺼이 통쾌함을 선사하는 그들. 이 드라마는 거의 이 두 인물의 힘으로 움직이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 드라마는 이 시대의 워킹맘의 문제를 진지하게 끄집어낸다기보다는 오히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워킹맘들의 막혔던 울분을 터뜨려 주는 정도의 드라마라는 걸 알 수 있다. 문제에만 천착했다면 이런 코믹한 접근은 할 수도 또 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을 테니까. 워킹맘이라는 심각한 소재 때문에 이러한 코믹터치에는 분명 위험성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어쨌든 ‘워킹맘’이라는 드라마를 통해 두 봉태규(?)의 가능성을 발견한 것은 부정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귀신보다 무서운 건 시대의 억압이다

돌아온 ‘전설의 고향’의 귀신들은 과거와 비교해서 달라진 점이 없다. 그럼에도 그토록 무서웠던 귀신들이 무섭지 않고, 오히려 예쁘고 심지어는 슬프게 보여진 이유는 무얼까. 그것은 귀신이 태어났던 시대와 지금의 시대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전설의 고향’의 귀신들의 면면을 보면 저마다 탄생의 이유를 갖고 있다. ‘구미호’는 당대 가부장적 사회에 대해 도발로써 탄생한 것이며, ‘아가야 청산가자’의 아기를 억울하게 읽게된 어미 귀신은 가진 자에 의해 아기마저 빼앗기는 못 가진 자의 처지를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어미의 모성애와 연결시켜 탄생하게 된 것이다. ‘사진검의 저주’는 왕권을 지탱하기 위해 핍박받은(인신공양의 제물이 된) 자가 귀신으로 탄생하고, ‘오구도령’은 어찌할 길 없는 전염병 앞에 억울하게 죽었을 민초들이 귀신으로 환생한다. ‘기방괴담’은 여성, 그것도 기생이라는 신분이 가진 사회적 억압이 귀신으로 화하며, ‘환향녀’는 여성들에게 강요되었던 순결과 정조에 의해 살아 돌아온 자들을 다시 죽음으로 내모는 상황이 귀신을 탄생하게 한다.

따라서 ‘전설의 고향’의 귀신들은 거의 대부분이 사회적인 억압의 대상들이다. 그렇게 억울하게 죽은 자들의 사연은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그 억압을 풀어헤치려 하고 그 안전한 방법은 귀신을 선택하게 된 것. 귀신의 행위 하나하나는 그저 표피적으로 누군가를 무섭게 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라, 자신의 억압된 감정의 표현이다. 그리고 그 표현을 누군가 듣고 이해하게 됐을 때, 귀신의 저주는 끝이 난다.

귀신들이 무섭지 않은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 귀신들은 누군가를 해코지하기 위해 무차별적인 보복을 감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억울함을 토로하기 위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것뿐이다. 바로 이런 귀신에 대한 이해는 그 공포의 존재를 동정의 대상으로 바꾸어놓는다. 이는 거꾸로 뒤집어 생각하면 귀신이 그토록 두려운 것은 그 불가해한 존재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설의 고향’이 탄생했던 70년대 말과 21세기는 그만큼 시대적인 간극이 넓다. 현대이지만 여전히 가부장적 가치체계가 그대로였던 70년대 말, 사회적 억압은 여전했고 그 속에서 귀신은 공포의 존재일 수 있었다. 억압된 분위기 속에서 그 귀신들은 억압하는 자들의 내부 속에 감춰진 죄의식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했고, 억압된 자들의 한을 위무해주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이 귀신들의 억압은 현대인들이 갖고 있는 그것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과거 억압의 기억을 갖고 있는 중ㆍ장년층이라면 향수 어린 시선으로 그 귀신들의 통쾌 살벌한 이야기 속에 빠져들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세대들에게 이 귀신들의 사연은 옛이야기 속의 하나일 뿐, 현재진행형의 울림을 주지는 못한다. 따라서 ‘전설의 고향’은 더 이상 ‘무서운 귀신 이야기’의 대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제 말 그대로의 전설, 즉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머문다. 굳이 ‘전설의 고향’을 가지고 공포극이라 규정지을 필요가 있을까. 공포가 아니라도 귀신이야기가 아니라도 전설은 그 자체로 옛이야기의 재미를 선사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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