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준화된 TV 프로그램, 그 생존법과 한계

지금처럼 방송사간의 프로그램 경쟁이 치열했던 적이 있을까. 월화수목의 드라마 전쟁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해졌고, 주말의 예능 전쟁은 그 판도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다. 최근에는 ‘주중 드라마, 주말 예능’ 같은 틀조차 무색해지고 있는 상황. 월요일 밤의 예능 전쟁과 주말 드라마 경쟁은 점점 전 요일로 확산되면서 전방위적인 방송사간의 프로그램 대전을 예고하고 있다.

소재나 완성도에서 평준화된 TV
그런데 경쟁구도를 벗어나 각각의 프로그램들을 중심으로 이 가을의 TV를 바라보면 우위를 따질 수 있기보다는 각각의 개성들이 강하고, 나름대로의 완성도를 답보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에덴의 동쪽’이 대작으로서의 완성도 높은 시대극을 그리고, ‘타짜’는 부동의 소재인 허영만 원작을 각색했으며, ‘베토벤 바이러스’는 김명민 포스와 클래식소재라는 개성이 강하다. 반면 ‘바람의 나라’는 ‘주몽’과는 또 다른 고민하는 왕을 그릴 새로운 고구려 사극이며, ‘바람의 화원’은 김홍도, 신윤복 같은 이름만 들어도 호기심을 자극하는 퓨전사극을 기대하게 만든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드라마들은 소재나 완성도면에서 어느 것의 우위를 따지기 어려울 정도로 평준화되었다.

이것은 이미 여러 차례의 진화 단계를 거치며 다양해진 주말의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른바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은 어떤 계보를 형성하면서도 즉각적으로 서로의 프로그램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진화를 거듭해왔다. ‘무한도전’에서 비롯된 여행 컨셉트가 ‘1박2일’의 야생을 거쳐, ‘패밀리가 떴다’의 심리게임으로 이어졌고, ‘무한도전’의 리얼 버라이어티와 짝짓기 프로그램이 이종교배되면서 등장한 ‘우리 결혼했어요’의 연애모드는 거꾸로 ‘무한도전’과 ‘패밀리가 떴다’의 프로그램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들 프로그램들은 동시간대 경쟁하지만 모두 각각 한번씩은 수위에 올랐던 적이 있을 만큼 각각의 완성도를 구축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있다.

치열해진 편성전쟁과 새로움에 대한 강박
치열한 경쟁이 만들어낸 결과지만 이제 TV의 드라마와 예능은 선뜻 부동의 우위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평준화되었다. 이 완성도나 소재면에서 승패를 판가름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그 수위를 결정하는 것은 두 가지다. 그 하나는 편성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움이다. 드라마가 시작할 때마다 벌어지는 편성전쟁이나, 하루에 2회분을 방영하거나 스페셜을 앞뒤로 배치하는 등의 변칙 편성이 일반화되고 있는 건 그 때문이다.

예능에 있어서 치열해진 건 시간대 경쟁이다. ‘1박2일’과 ‘우리 결혼했어요’, 그리고 ‘패밀리가 떴다’는 각각 ‘해피선데이’, ‘일요일 일요일 밤에’, ‘일요일이 좋다’라는 프로그램 속에 존재하면서 다양한 시간대 공략으로 시청률에 영향을 주었다. 초반 ‘1박2일’이 강력한 힘을 발휘할 때는 다른 프로그램들이 같은 시간대를 피하기 위한 전략을 썼다. 하지만, 이제 그 힘이 약화되는 느낌을 보이자 ‘우리 결혼했어요’는 ‘1박2일’과 같은 시간대로 이동해 전면전을 예고하고 있다.

한편 편성 전쟁만큼 치열해진 건, 새로움에 대한 강박이다. 드라마에서 이제는 단순한 멜로나 트렌디가 통하지 않는 건 그 새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올 가을 드라마 대전이 볼만한 것은 거의 모든 드라마들이 소재면에서나 스타일면에서 새로움을 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예능 프로그램의 상황은 더 절실하다. 기본적인 리얼 버라이어티의 형식이나 스타일이 정착되고 또 성공한 코드들이 곧바로 다른 프로그램에 소비되는 상황에서 프로그램 자체가 가진 생명력은 그만큼 짧아질 수밖에 없다. 이 상황에서는 새로움이 추가되면 그 자체로 전세는 역전될 가능성이 높다. ‘패밀리가 떴다’가 성공한 것은 ‘1박2일’에 없던 새로움 (예를 들면 여성 출연자라거나 심리게임 같은)에 기댄 바가 크다. ‘우리 결혼했어요’가 새로운 멤버로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치열한 시청률 경쟁, 시청자들에게 좋기만 할까
물론 시청률 경쟁은 어떤 면에서는 시청자들에게 반가운 상황이다. 그만큼 질적으로 완성도 높은 작품이 아니면 경쟁에서 밀려날 수 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좋은 프로그램을 시청자들은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어느 날 갑자기 방영시간이 조정되는 상황이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그다지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또한 한 프로그램에서 봤던 성공한 소재들이 여기저기서 똑같이 베껴지는 상황 역시 시청자 입장에서 좋을 리가 없다. 이것은 끝없이 새로운 소재나 스타일을 발굴해낸 그 원본의 아우라를 무한복제를 통해 순식간에 사라지게 만든다.

그런데 이러한 시간대 경쟁은 지금 시대에 얼마나 유용한 것일까. 하드웨어의 변화가 곧바로 소프트웨어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처럼 작금의 디지털화된 방송환경의 변화에도 시청 패턴의 변화는 아직까지 아날로그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실상 시간대를 무너뜨린 디지털 환경에서 동시간대의 시청률 경쟁은 무색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그 변화의 속도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는 점이다. 대중화된 IPTV와 HDTV의 보급은 이 변화를 이끄는 주동력이다. 이 하드웨어의 변화가 말해주는 건 이제 경쟁의 시각보다는 다양성의 시각으로 프로그램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이제 시청자들은 ‘베토벤 바이러스’와 ‘바람의 나라’, 그리고 ‘바람의 화원’을, 그리고 ‘1박2일’과 ‘우리 결혼했어요’ 그리고 ‘패밀리가 떴다’중 하나를 선택하게 강요받길 원하지 않는다. 원한다면 모든 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 시대가 아닌가.

‘에덴의 동쪽’, 붕괴된 가족을 복기하다

형 동철(김범)이 동생 동욱이 저지른 방화를 대신 뒤집어쓰고 소년원에 들어간다거나, 그 진실을 어머니에게 비밀로 숨긴다거나, “목숨걸고 공부해라”던 형과의 약속을 지키고 동욱이 서울대 법대 수석으로 합격을 한다거나 하는 ‘에덴의 동쪽’의 에피소드들은 옛 드라마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들을 그대로 재연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흔히 구태의연한 드라마들이라 비난하던 가난, 원한, 복수, 출생의 비밀, 재벌과 얽히는 삼각관계 같은 신파의 코드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70년대에나 어울릴 법한 코드들 앞에 21세기를 살고 있는 시청자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시간을 되돌려 가족을 복기하다
‘에덴의 동쪽’에서 어린 동철(신동우)은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벌렸다가 가슴을 툭툭 치고 입가로 손을 가져간 뒤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쭉 내민다. 그 수신호는 자신이 아버지를 “하늘만큼 사랑한다”는 뜻. 이 수신호는 이 드라마에서 어떤 대사보다 더 강렬하게 가족 간의 애정을 표현하는 장치다.

죽은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너무 놀라 말조차 잊어버린 동철은 마지막 가는 길에 이 수신호로 대신 마음을 전한다. 동생이 홧김에 저지른 방화를 대신 뒤집어쓰고 마을을 떠날 때, 열차 위에 오른 동철이 따라오는 동생 동욱에게 이 수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외친다.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동생이다!”라고.

만일 이 드라마의 시대가 현재라면 어떨까. 아마도 가족 간의 사랑은커녕 따뜻한 눈길조차 어색해져 버린 작금의 상황에 이 수신호는 코미디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행스럽게도 그 시대가 70년대인데다 장소도 태백 황지의 막장 탄광촌이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놓자 지금 시대라면 촌스러울 수도 있는 노골적인 가족애의 표현들은 진정성을 갖게 된다.

무엇이 이 가족을 붕괴시켰나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을 그 중심에 세우고 있다. 즉 신태환(조민기)이라는 한 인물에 의해 붕괴되고 해체된 가족이 복수심과 가족애를 무기로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다. 신태환이라는 인물을 악역으로 세우면서 최초로 내세운 에피소드가 그의 애인이었던 미애(신은정)의 아기를 강제로 지우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로써 신태환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가족을 붕괴시키는 자로서 자리매김한다.

이 반대편에 선 인물은 동철이다. 그는 신태환이 붕괴시키려는 가족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고 묶어두려고 노력한다. 이역만리 마카오로 챙(박찬환)에게 억지로 끌려가면서 “가족을 버리고 못가요! 난 죽어도 돌아가야 해요.”라고 외치는 동철은 가족을 지키는 자, 즉 가장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렇게 동철과 동철의 가족들이 서로를 절절히 생각하게 된 것은 모두 아버지의 부재와 관련이 있다.

가족을 위해 매일 땅속을 파고 들어가는 막장의 노동을 짊어져야 했던 아버지에게 동철이 건네던 새장이 망가져 버렸을 때, 그것은 단지 아버지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탄광일로 늘 어깨에 훈장처럼 달고 다니던 아버지의 멍 자국이, 달동네로 연탄을 나르며 공부를 하던 동욱의 어깨에도 똑같이 대물림되는 것은 이 젊은이들에게 아버지의 부재가 만들어낸 굴레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부재는 단순히 신태환과 이기철(이종원)의 사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현재를 만든 개발과 노동의 대립에서 비롯된 시대의 아픔이다.

붕괴된 가족이 세상과 맞서는 방법
이 드라마에서 동철의 어머니가 둘이라는 점은 이채롭다. 아버지 부재의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두 명의 어머니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하나는 세상과 직접적으로 맞서고(양춘희-이미숙), 다른 하나(정자-전미선)는 아이들을 보듬는다. 또 그들은 힘겨울 때 서로를 돕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한 울타리에 묶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기철이라는 이미 사라져버린 가장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유독 아버지에 대한 집착이 끈질기게 그려진다. 칼에 맞은 챙을 구해준 동철에게 “네가 날 업고 뛸 때 애비 짓이라도 할 생각이었다”고 하는 챙의 진술은 인상적이다. “형이 있다죠?”하고 혜린(이다혜)이 동욱에게 물었을 때, 동욱이 “네 내겐 아버지 같은 존재죠”라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동철이 돈을 벌기 위해 세상을 전전하는 것은 그 부재한 가장을 메우려는 몸부림이고, 동철의 서울대 법대 수석입학은 그것에 대한 자식 같은 동생의 화답이다. 아버지는 늘 가족을 위해 떨어져 있고(죽었거나 도망중이거나), 가족들은 늘 그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것은 떨어져 있어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역만리에서도 신문에 난 법대 수석 기사를 통해, 전화 한 통화를 통해 더 절절해지는 관계다.

70년대 개발시대를 살았던 원죄의식
드라마가 어떤 복수극의 틀을 가져왔다면 지금 가족들이 기다리는 건 아버지가 부재한 자리를 채워줄 동철의 귀환이다. 법대에 수석 입학한 동욱이 “형 만한 아우 없어요”라고 말하고, 합격 환영식장에 가는 동욱에게 춘희가 “네 형도 같이 간다고 생각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동철에 대한 그리움은 없어도 있는 자로서 자리할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시청자들은 이미 이 운명의 쌍곡선을 보아버렸다. 복수를 위해 미애가 아기를 바꾸는 장면을.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이 절절한 형제애와 가족애로 똘똘 뭉친 이들이 사실은 철천지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거꾸로 신태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붕괴시키려 했던 것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이 끈끈한 혈연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 속에서 어떤 파란을 예고한다.

이것은 70년대 개발시대를 살아냈던 이들의 원죄의식을 끌어낸다. 개발시대, 그 어깨에 지워질 날 없는 멍 자국을 훈장으로 만들었던 건 가족이라는 우선적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그 때,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가족이 터전을 잃고 피눈물이 흘린 자리에 울타리를 세우고 살고 있었다. 개발이란 이처럼 자원의 파헤침(파괴)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흔하디 흔한 출생의 비밀이란 코드가 이 드라마에서 기능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가족의 역할 바꾸기, 혹은 상황 뒤집어보기를 간단하고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에덴의 동쪽’은 먼저 70년대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 점점 해체되어만가는 가족을 복기해 놓는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가족에 대한 향수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끈끈하게 만들어버린 시대의 아픔을 거기서 들여다보고는, 이내 가족을 넘어 인간애를 바라다본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지금 이 21세기에도 이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유효해지는 이유다.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 그리고 강호동

지난 '야심만만-예능선수촌'에서는 독특한 대결이 벌어졌다. 이른바 '예능과 태능'의 대결! 베이징 올림픽을 통해 스타로 자리매김한 이용대, 이배영, 남현희, 왕기춘이 게스트로 출연해 예능 MC들과 한판 대결을 벌이는 것이었다. 물론 이 기획은 스포츠스타들의 끼를 마음껏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기에 '태능'의 일방적인 우세승이었지만, 실제로 그들이 보여준 예능감은 손을 들어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강호동, 스포츠에 예능을 접목하는 무릎팍 도사이자 스타킹
MC를 방불케 하는 수사력을 보인 이배영 선수와 귀여우면서도 자신만만한 이용대 선수, 그와 묘한 라이벌 관계를 형성하며 정반대의 캐릭터로 큰 웃음을 준 왕기춘 선수, 그리고 솔직 대담한 발언으로 눈길을 끈 남현희 선수까지 토크에서 춤, 노래까지 거침이 없었다. 그런 그들 뒤에 든든히 자리 잡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끄집어내고 열광적인 리액션으로 흥을 돋우는 이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강호동이었다. 그는 같은 운동선수 출신으로서 갖고 있는 스포츠 선수들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예능의 성격을 접목시키는 무릎팍 도사이자 스타킹이었다.

까칠하다 싶을 정도로 파고들면서 슬쩍 상대방이 감추고픈 비밀을 드러내게 만드는(예를 들면 이용대 선수의 여성편력(?) 같은) 질문들은 그대로 '무릎팍 도사'의 강호동이었고, 이배영 선수와 난데없이 시작된 제자리높이뛰기 대결에서는 '스타킹'의 강호동이었다. 은근슬쩍 왕기춘 선수의 들이대는 끼를 부추기면서 상대방의 캐릭터를 순식간에 구축해놓는 것 또한 '스타킹'에서 무대에 올라온 일반인들에서 짧은 순간에 웃음의 요소를 끄집어내는 그 모습 그대로였다.

추성훈의 최고 명승부는 강호동과 벌인 말씨름
특히 강호동이 스포츠스타들과 인연이 많은 것은 바로 그 예능과 스포츠 양단의 이해도가 남다른 그의 능력 때문이기도 하다. '무릎팍 도사'에 출연해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이종격투기의 추성훈 선수와 강호동의 말씨름은 지금도 명승부(?) 중의 명승부로 꼽힌다. 강호동은 한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 안에 추성훈 선수의 아픈 과거는 물론이고, 그가 가진 끼와 유머감각을 모조리 끄집어냈다. 팽팽한 긴장감은 스포츠 선수들로서 갖는 본능적인 대결의식을 프로그램 바탕에 깔아주었고, 그 위에서 치열한 신경전, 그리고 상대방의 빈틈을 파고드는 질문 공세와 역공이 마치 씨름과 유도의 이종격투기를 보는 듯 했다. 이 명승부는 아마도 추성훈이 지금껏 벌인 어떤 경기보다 값진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무릎팍 도사'에 장미란 선수가 출연했을 때도 강호동의 감각은 여전했다. 세계를 들어 올린 역사를 앞에 놓고 강호동의 섬세한 멘트는 그녀 속에 수줍게 숨겨진 여성성을 끄집어내게 했다. 무엇보다 놀라운 건 장미란 선수 또한 특유의 여유를 갖고 이야기를 받아쳤다는 점이다. 스포츠 스타로서 갖고 있는 경기에서의 익숙한 긴장감과 그 속에서도 발휘되는 순발력은 어쩌면 예능이라는 경기장에서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한 요소들을 끄집어내준 것이 강호동이라는 건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스포츠와 예능을 접목한 최초의 MC, 강호동
강호동이 운동선수로서 가졌던 경험치들은 '1박2일' 같은 리얼 버라이어티 쇼에서도 예외  이 발견된다. 그가 제안하는 게임들이 스포츠와 맞닿은 것들이 많으며 그 게임 속에서 웃음과 감동의 포인트를 잡아내는 것은 분명 운동선수 출신만이 가질 수 있는 장점이다. 백령도에서 해병대원들과 벌인 씨름대회가 강호동의 진가를 보여준 건 우연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최근 들어 이러한 강호동의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장점이 지나치게 전면에 내세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씨름선수로서의 강호동이 장점이긴 하지만 그것을 너무 드러내다 보면 그만큼 강호동이 가진 다른 장점들이 묻히게 된다. 강호동은 운동선수가 아닌 예능인으로서 만으로도 충분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지나치게 드러낸 씨름선수로서의 이미지 소비는 강호동에게는 오히려 득보다 실이 많다. 씨름선수 이미지가 숨겨진 상태에서의 그 능력 발휘가 강호동에게는 더욱 이득이라는 말이다.

스포츠 스타와 연예인에는 분명 어떤 상관관계가 존재한다. 밤낮없이 몸 사리지 않고 뛰어들어야 하는 엄청난 체력을 요구하고, 그러면서도 쇼에 들어가면 끊임없는 긴장감 속에서 섬세한 기술(유머감각)을 발휘해야 한다는 점이 그렇다. 승리를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어떻게 활용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특유의 신경전에서도 유연해져야 한다는 것도 그 유사한 점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누구나 강호동처럼 스포츠에 요구되는 능력을 특유의 예능감과 연결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강호동은 스포츠의 재미요소를 예능과 접목시킨 최초의 MC가 아닐까. 이것이 스포테이너 시대에 강호동이 주목받는 이유가 아닐까.

 '노다메 칸타빌레'와 김명민에 대한 기대감


이제 단 2회를 했을 뿐인데, '베토벤 바이러스'가 내뿜는 전염성은 강하다. 드라마가 끝나고 나온 네이버 검색어 순위에는 10개 중 7개가 '베토벤 바이러스'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시청률도 사극이 아닌 현대극으로서 첫 회에 15%를 넘긴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게시판도 뜨겁다 못해 찬양 일색이다. 도대체 이 강한 전염성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우리 식의 '노다메 칸타빌레'에 대한 관심

'베토벤 바이러스'가 '노다메 칸타빌레'의 표절이다 아니다라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 드라마는 바로 그 '노다메 칸타빌레'에 대한 관심 때문에 더 주목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작년 일드 열풍의 한 가운데 있었던 '노다메 칸타빌레'를 봤던 시청자라면 아마도 누구나 그 클래식이라는 독특한 소재의 드라마가 또 없을까 찾아보곤 했을 것이다.


그러니 '베토벤 바이러스'는 '노다메 칸타빌레'와는 다른 작품이라 주장하더라도 어떤 식으로든 그 연장선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즉 우리 식의 '노다메 칸타빌레'는 어떤 것일까 하는 궁금증, 그것이 아니라도 또 다른 '노다메 칸타빌레'류에 대한 기대감 같은 것이 이 드라마의 초반 승승장구를 가능하게 한 요인이다.


그리고 여기에 김명민이라는 배우는 '노다메 칸타빌레'와 같은 소재라도 다른 식의 해석을 더욱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는 이미 '하얀거탑'의 장준혁이란 인물을 통해 일본의 원작을 뛰어넘는 우리 식의 '하얀거탑'을 세웠던 전적이 있다. '명민좌'로 통하는 그의 연기 포스는 작품 전체를 새롭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감까지 갖게 만들었다.


그 중심에 선 사나이, 김명민

따라서 이 드라마가 준비된다고 했을 때, 그 화제의 중심에 섰던 인물은 단연 김명민이다. 거의 광기에 가까운 연기 몰입으로 '하얀거탑'의 장준혁을 이 시대 샐러리맨의 표상으로까지 만들었던 김명민. 그 신경쇠약 직전의 남자가 '베토벤 바이러스'를 만나 펼칠 코믹 연기에 어찌 기대가 없을까.


드라마 속에 강마에로 분한 김명민의 연기는 시종일관 진지했다. 그리고 바로 그 진지함 속에 유머가 있었다. 강마에가 데리고 다니는 개, 베토벤이 수면제를 먹고 쓰러지자 "토벤아-"하고 부르며 어쩔 줄 몰라하고, 119에 전화해 진지하게 "개가 수면제를 먹고 쓰러졌으니 속히 위 세척을 해야 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심각한 김명민의 연기와 맞물려 폭소를 자아내게 만들었다.


만화 톤의 스토리 전개는 자칫 드라마를 가볍게 만들 수 있었지만 그 무게를 다시 잡아준 것 역시 김명민이다. 강마에의 몇몇 대사들, 예를 들면 "환불해 달라고 하세요", "브람스 CD 사서 들으세요", "집에 가서 목욕하세요. 귀 빡빡 문지르시고요"같은 만화톤의 말투도 김명민을 만나면 웃음 이면의 어떤 힘을 느끼게 만든다.


'베토벤 바이러스'가 가진 초반의 강한 전염성은 이례적인 것이다. 사극은 초반 스펙터클을 통해 시청자들의 눈을 단박에 사로잡기 때문에 시청률이 순식간에 오르지만, 현대극은 차츰 감정을 쌓아나가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베토벤 바이러스'의 초반 성적은 작품 자체가 준 것이라기보다는 작품에 대한 기대감이 더 많이 좌우한 것이다. 그리고 그 기대감은 어느 정도 충족되고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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