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사극시대, 작가로 즐기는 사극

최근 드라마 중 사극만큼 다양성을 확보하고 있는 건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과거 정사 위주의 정통사극의 틀에서 벗어나면서 가능해진 일. 이른바 퓨전사극은 역사적 사실, 혹은 역사적 텍스트에 상상력을 덧대, 사극의 외연을 넓히는 역할을 했다. 이제 사극은 어떤 역사적 시점을 다룰 것인가 보다 어떻게 다룰 것인가가 더 중요해졌다. 사극의 작가주의가 거론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제 사극은 작가들의 상상력과 감독의 연출력에 의해 그 색채를 달리하게 되었다.

이병훈표 성장 사극, ‘이산’
월화의 밤을 평정한 MBC 사극 ‘이산’은 이병훈표 사극의 정석을 보여주고 있다. 매 2회 정도 분량으로 주어지는 미션과 해결을 통한 캐릭터의 성장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전형적인 선악구도가 극명한 대결구도를 이루고 있다는 점도 이병훈 PD의 색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조라는 왕을 주인공으로 세운 점이 과거 주로 평민이었던 주인공과 다른 점이지만, 차라리 평민으로 살아가는 게 나을 법 싶은 정조의 상황을 보면 그다지 달라진 것도 아니다. 절대적인 지지자가 되는 영조 캐릭터 또한 ‘대장금’의 왕과 오버랩되며, 묵묵히 뒤에서 주인공을 돕는 성송연(한지민) 역시, ‘대장금’의 민정호(지진희)를 빼닮았다.

이렇게 비슷한 구조에 비슷한 캐릭터들이 등장하지만 여전히 힘을 발하는 것은 이병훈표 성장 사극의 틀이 내포하고 있는 저력을 말해주는 것이다. 과거의 역사적 시점을 다루지만 거기에는 여전히 현대인들의 욕망들이 다양하게 투영되어 있다. 성군을 바라는 백성들의 마음이나, 신분과 남녀 차별을 뛰어넘는 성공담은 지금 시대의 환타지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 왕으로 서게 될 정조 이산(이서진)이 나갈 방향성이다. 지금까지 이병훈표 성장 사극 속의 주인공들은 그 꼭대기에 서는 순간 미션 완료하며 끝났지만 ‘이산’은 앞으로도 한참 더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홍자매표 패러디 사극, ‘쾌도 홍길동’
수목의 밤을 웃게 만드는 홍미란, 홍정은 작가의 ‘쾌도 홍길동’은 패러디 사극이다. 그간 여러 작품들을 통해 다양한 패러디를 통한 웃음을 선사했던 홍자매는 ‘쾌도 홍길동’에 와서는 고전인 ‘홍길동’ 자체를 패러디 한다. 사극이라 하기엔 역사적 시공간이 부재한 이 드라마는 따라서 ‘홍길동’이란 고전의 현대적 해석으로 볼 수 있다. 사극 속에서 웨이브춤과 골프 장면은 물론이고 주인공들의 펑키한 패션 스타일을 볼 수 있는 것은 이 드라마가 사극 자체를 패러디해 현재를 풍자하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무협지의 틀과 만화적 상상력이 홍길동이란 텍스트 위에서 작가들의 상상력과 만난다. 작가에 의해 새롭게 재해석된 등장인물들은 저 마다 현대인들의 그것을 표상하는 기성세대의 가치관(운명론이나 태생적 결정론 같은)과 부딪치면서 그 전복을 꿈꾼다. 나라를 훔친 도적과 맞서 그들의 재물을 훔치는 도적, 홍길동은 이 시대의 가치관들과 조우하면서 새로운 수퍼히어로로 부각된다. 홍자매의 발칙한 상상력이 사극에서도 고스란히 발현되는 순간이다.

윤선주표 본격 정치사극, ‘대왕 세종’
주말 밤을 장악한 ‘대왕 세종’은 본격 정치사극의 가능성을 엿보게 만든다. 그 원동력은 다름 아닌 윤선주라는 작가에서 나온다. ‘불멸의 이순신’으로 주목을 받고 ‘황진이’로 자기 색깔을 굳혀온 윤선주는 ‘대왕 세종’에서 본격적인 정치의 세계로 뛰어든다. 윤선주 작가가 써온 작품의 특징은 그 주인공의 행보에서 일관되게 발견할 수 있다. 작가는 신분이나 서열로 인해 내적인 한계 상황을 가진 주인공이 그 열등감과 차별을 이기고 가장 높은 자리에 서는 과정을 그린다.

이순신은 우리가 위인전에서 보아왔던 완벽한 인물로 등장하지 않는다. 그는 깊은 열등감을 갖고 있는 인물이며 그럼에도 그것을 뛰어넘어 불멸로 달려가는 실전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국어 교과서에 등장하는 시조 몇 편으로 기억되는 황진이 역시 드라마 속으로 들어와서는 끝없는 자기와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여성으로 그려진다. 이것은 ‘대왕 세종’에서도 마찬가지다. 그저 한글 창제로서 각인된 세종대왕은 이 작품을 통해 치열한 정치세계 속에서 생존해나가는 현실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작가의 이러한 주인공의 내적 갈등에 대한 탐구는 역사적 사실에만 박제되어 있던 위인을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로 재탄생시킨다. 윤선주 작가의 이 같은 인물 탐구를 통한 치밀한 심리묘사는 ‘대왕 세종’이 그리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의 정치적 입장을 다각적으로 표현하면서 거기서 발생하는 화학반응의 재미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그 정치적 입장이 너무나 다양하고 대사의 중의적인 의미들이 너무 깊어 이해가 쉽지 않은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그 어려움이 진짜 복잡한 정치의 세계라는 점은 누구나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 혹은 연출자들의 역량이 더 중요해진 퓨전사극 시대에, 물론 역사왜곡의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하지만 사극은 기본적으로 역사 자체가 아니라 창작의 산물인 드라마라는 점에서 이러한 작가의 탄생은 환영받을 만한 일이다. 오히려 ‘사극은 역사 자체’라는 사고방식을 뒤집어 ‘사극은 드라마’일 뿐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 후, 사극의 좀더 자유로운 실험이 이루어지고, 한 편으로는 그로 인해 환기된 진짜 역사에 대한 논의들이 병렬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작가가 사극을 말해주는 사극의 작가주의 시대는 이미 도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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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뿔났다’, 그녀들을 뿔나게 한 것

‘엄마가 뿔났다’의 엄마 김한자(김혜자)는 자식들 때문에 마음이 좋지 않다. 세탁소 일을 하고 있는 아들 영일(김정현)의 아이를 가졌다며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친 미연(김나운)만으로도 골치가 아픈데, 막내 영미(이유리)는 밥벌이도 못하는 남자(실제론 재벌2세이지만)와 결혼을 하겠단다. “내 인생이 정말 마음에 안 들어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사실상 대부분의 자식 가진 엄마의 마음을 제대로 잡아낸다. 세상에 제 맘대로 되는 자식 가진 부모가 몇이나 있을까.

그래서 그녀는 늘 ‘안해요! 못해요!’하고 말하면서 화를 내거나 때론 눈물을 보인다. 그런데 그런 그녀가 걱정되어 찾아온 자식들 앞에서 그녀는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며 언제 그랬냐싶게 금세 웃어 보인다. 이 조울증에 가까운 태도변화는 갑작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지만 우리는 이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것은 그녀의 웃는 얼굴 뒤에 숨겨져 있는 세상 엄마들 모두가 가지고 있을 아픔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편 나일석(백일섭)은 늘 이렇게 말한다. “결국엔 할 거면서 당신은 꼭 그러더라.” 속으로 뿔나면서 겉으로는 웃는 그 엄마의 마음은 내레이션 속에서나 흘러나올 뿐이다. 남자들이건, 자식들이건 일단 저질러놓고는 “사랑해서 미안혀”라고 말하면 그뿐인 존재들 아닌가. 그래서 뿔난 엄마가 어느새 웃는 낯으로 대할 때 그들은 “엄마 벌써 풀렸구나”하며 으레 그래왔고 그래야 할 것처럼 말하곤 한다.

그렇게 뿔난 그녀를 살 수 있게 해주는 것은 관성적인 살림의 손길 때문이다. 그녀는 늘 손이 바쁘다. 흔히 엄마들이 그러하듯이 입으로는 연실 자식 걱정과 뿔난 심사를 수다로 뽑아내면서도 손은 쉴 틈이 없다. 같은 날 태어난 남편과 시누이의 생일 상을 차리면서, 아이까지 데리고 들어온 며느리를 위해 미역국을 끓이면서, 맏딸 영수(신은경)의 오피스텔에 반찬거리를 가져가면서, 갑자기 찾아온 막내 영미의 남자친구 정현(기태영)을 위해 저녁거리로 뭘 준비할까 고민하면서, 아기 목욕을 시키고 콩나물을 다듬고, 빨래를 끓이면서 나오는 그녀의 수다를 듣다보면 말과 행동이 서로 상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안한다. 못한다 하면서도 몸은 늘 그녀를 뿔나게 하는 가족들을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는 것. 그것이 가족을 위해 살림하는 엄마들의 마음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 속에서 뿔난 엄마는 김한자뿐만이 아니다. 이제 앞으로 결혼문제로 그녀와 부딪치게될 정현의 엄마, 고은아(장미희)도 제 맘대로 되지 않는 아들 때문에 잔뜩 뿔이 나 있다. 격에 맞지 않는 아들의 여자친구도 여자친구지만, 한 번도 그녀의 말을 어기지 않던 아들이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는 배신감이 더 클 터이다. 그녀는 “드라마에 나오는 편견에 가득 찬 교양 없는 시어머니 역할”은 하기 싫다 말하면서도 결국은 자식 욕심 앞에 그 역할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자식 앞의 부모마음이야 김한자나 고은아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문제는 그 뿔난 심사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드라마는 두 뿔난 엄마의 서로 다른 문제 해결 방식을 드러낸다. 그것은 그녀들의 상반된 일상과 관련이 있다.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고은아는 살림과는 거리가 먼 여자다. 그 집안의 살림은 ‘미세스 문’이 해주고 있는 상황에 그녀는 교양 있는 포즈로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거나 대화를 나누는 것이 일상의 전부다.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해왔던 그녀는 ‘희생’이라는 단어가 늘 떠오르는 엄마라는 존재보다는 군림하고 시키는 사모님이라는 존재로 그려진다. 누구에게 양보할 수 없는 그녀가 하는 문제 해결 방식이란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의 여자를 불러, 남편 말대로, ‘웃는 얼굴로 포를 뜨는’ 일이다.

반면 김한자는 그 뿔난 심사의 위안을 살림 그 속에서 찾는다. “속상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며 잠자리에서 이불을 들고 나와 펴는 부엌은 그녀에게 삶의 힘을 다시 되찾게 해주는 공간이다. 부족하고 마음에 안 들지만 ‘거둬 먹이는’ 엄마의 마음 그 속에 자신을 살 수 있게 하는 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긋지긋한 노동이 분명하지만 관성이 되어버린 살림의 손길은 때론 자신을 살 수 있게 해주는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엄마가 뿔났다’가 그려내는 두 명의 뿔난 엄마. 그 엄마들의 뿔은 모두 제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자식들로 인해 비롯된 것이지만 서로 다르다. 김한자의 뿔은 안으로 자라나 자신을 찌르는 반면, 고은아의 뿔은 밖으로 자라나 그 누군가를 찌른다. 고은아가 뿔난 심사를 토로할 때 옆에서 그걸 받아주는 것이 구관조 하나인 반면, 김한자의 옆에는 늘 가족들이 있는 건 그 때문이다.

“니가 최고여!”라고 말하면서 울면 한 그릇이라도 따뜻하게 사주는 시아버지 나충복(이순재), 혹여나 상처가 깊을까봐 붕어빵이라도 사서 아내를 찾는 남편, 든든한 말벗이 되어주는 시누이 나이석(강부자), 엄마의 가시 돋친 말에도 그저 뽀로통한 얼굴만 하고 넘기는 맏딸 영수, 그리고 엄마의 마음을 풀어줄려고 분위기를 맞추는 예쁜 딸, 영미가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엄마의 뿔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이 드라마를 보는 엄마란 존재를 가진 모든 이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주부들의 살림, 태안을 살림
말실수 가족
지수가 화영을 이해하는 까닭
‘내 남자의 여자’, 그녀들의 부엌
이 시대 주부, 지수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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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뿔났다’vs ‘천하일색 박정금’

주말극은 가족극을 선택했고, 가족극은 여자를 선택했으며 그 여자는 엄마와 아줌마로 그려지고 있다. 주말 저녁 8시 동 시간대에 방영되고 있는 김수현 작가의 ‘엄마가 뿔났다’와 하청옥 작가의 ‘천하일색 박정금’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두 드라마가 그리고 있는 엄마와 아줌마는 모두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깊은 공감대를 끌어내는 힘이 있기에 소재만으로도 어느 한쪽의 우위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초반 시청률 경쟁을 장악한 것은 명불허전 김수현 작가의 ‘엄마가 뿔났다’. 하지만 ‘천하일색 박정금’의 추격이 만만치가 않다. 주말극의 두 여자들은 무엇을 무기로 시청자들의 시선을 잡고 있을까.

김수현표 엄마의 일상, ‘엄마가 뿔났다’
‘엄마가 뿔났다’는 제목처럼 엄마에 포커스가 맞춰진 드라마다. 엄마를 뿔나게 하는 가족들 사이의 소소한 일상들이, 김수현 특유의 입담에 버무려진 가족극. 따라서 드라마라고 하면 언뜻 떠올릴 수 있는 비일상적인 낯선 사건들은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실제 생활 속에서 슬쩍슬쩍 지나쳤던 일상들이 새로운 무게로 그려지면서 어떤 의미 같은 것을 생각하며 미소짓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드라마는 마치 리얼리티쇼를 보는 것처럼 가족 일상의 자잘한 면들을 디테일을 살려가며 속도감 있게 훑어나간다. 그리고 그 일상들은 온전히 엄마인 김한자(김혜자)의 마음에 담긴다. 드라마 중간 중간 그녀의 내레이션이 삽입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너무 자잘해 파편적으로까지 보이는 리얼한 일상들이 엄마의 마음으로 하나씩 정리가 되는 구조이다. 엄마의 일상은 살림의 현장에 있다는 점에서 드라마를 거의 차지하고 있는 것은 부엌이거나, 밥상머리, 빨래를 하는 목욕탕, 아들이 일하는 세탁소, 기껏 외출한다 해도 시장이거나 밖에서 살고 있는 딸의 집 정도다.

엄마는 이 공간 속에서 끊임없이 가족들과 대화를 나누는데, 대화 너머로 주목해야할 것은 끝없이 계속되는 엄마로서의 살림의 손길이다. 그녀는 대사를 하며 밥을 퍼주거나 설거지를 하고 장을 보며 청소를 하거나 빨래를 한다. 이러한 몸에 익은 엄마로서의 행동들은 대사의 울림을 더 깊게 만든다. 입으론 화를 낸다고 해도, 무의식적으로 새어나오는 자식을 위한 행동들이 공감대를 너머 깊은 감동마저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김수현 작가의 선택은 대사만이 아니라 바로 이러한 행동까지를 염두에 둔 진짜 어머니상이었던 셈이다.

이것은 대사에 기대 엄마의 모습을 그려내는 여타의 드라마와는 다른 깊은 맛을 전해준다. 색은 다 같은 된장 색이라도 거기에 우려낸 맛이 달라진다는 말이다. 우리 시대의 어머니상이란 말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엄마 역할이라면 이력이 난 김혜자의 엄마 연기는 이러한 김수현이 구축하려는 엄마의 모습을 100% 이상 그려낸다. 말 그대로 묵힌 장맛 같은 깊은 삶의 향내가 묻어나는 작품이다.

워킹맘 아줌마의 일상, ‘천하일색 박정금’
반면 ‘천하일색 박정금’은 이 시대 워킹맘으로서의 아줌마의 일상을 다룬다. 강력계 형사지만 사건 현장으로 달려가면서도 아이 학원비 같은 일상을 걱정하는 박정금(배종옥)은 삶의 일상이 사건현장보다 더 힘겹다는 것을 풍자적으로 그려낸다. 김수현 드라마가 가진 리얼리티보다는 극적 상황 자체가 주는 공감대의 힘이 돋보이는 드라마다.

박정금은 따라서 리얼한 캐릭터라기보다는 우리 시대의 워킹맘으로서 살아가는 아줌마들을 대변하는 상징적인 캐릭터다. 드라마의 공간이 그녀의 일터인 사건현장과, 가족 공간인 집(이혼한 아버지의 집까지 포함하여)으로 양분되는 것은 그것이 워킹맘의 일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공간은 그저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일터에 나와서도 박정금은 모성 때문에 잡았던 범인들을 놓아주기도 하며, 선처를 위해 발벗고 뛰기도 한다.

반면 집으로 오면 박정금은 슈퍼우먼으로서 살림을 하고 한 여자로서 누군가의 사랑을 받길 원하기도 하는 천상 여자로 돌아간다. 그래서일까. 사건현장에서 강해 보이기만 한 그녀는 일상으로 돌아와서는 사기를 당해 공동명의로 타인과 아파트에 살아야 하는 처지인데다, 복잡한 가족사로 아버지와 새 어머니 앞에 아득바득 살아가는 존재다. 이러한 워킹맘으로서의 강한 유대감은 그녀를 지켜줄 강력한 남성을 기대하게 만드는데 그 인물이 돈은 못 벌지만 인술을 펼치는 의사 정용준(손창민)과 자신 또한 깊은 아픔을 가진 한경수(김민종)라는 남자들이다.

‘천하일색 박정금’은 이 계속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이 만들어내는, 박정금이란 인물에 대한 깊은 공감이 재미를 주는 드라마다. 따라서 소소한 일상과 함께 동시에 벌어지는 비일상적인 사건들의 대비와 겹침이 다채로운 재미를 주게된다. 역시 우리 시대 아줌마상으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배종옥이 그 카멜레온 같은 연기에 그녀만의 색채를 입혀 마치 현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입맛에 딱 맞는 퓨전요리 같은 맛을 낸다.

깊은 장맛 같은 엄마의 일상이거나, 아니면 퓨전요리 같은 워킹맘의 일상. 주말극을 선택하는 시청자들의 즐거운 고민이 깊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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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홍길동인가

경제개발을 통한 고도성장 시대 끝에 맞이했던 IMF까지, 숨가쁜 20세기를 살아온 우리네 아버지들과는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21세기 청춘들은 지금 이 다른 시대를 어떻게 보고 살아가고 있을까. 겉으로 보기엔 유쾌하기 이를 데 없어 보이지만 아버지 세대와는 전혀 다른 4차원 사고방식의 그네들은 혹 ‘저런 놈이 어디서 나왔나’하는 서자 취급을 받거나, 혹은 적자 대우를 받으면서도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 놓은 부조리하지만 굳건한 현실의 시스템 앞에서 울분을 터뜨리고 있는 건 아닐까. 혹은 그 울분의 끝에 자신들만의 활빈당을 만들어 세상에 대한 변혁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 왜 지금 ‘쾌도 홍길동’이냐는 질문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른 것 같지만 같은 그들의 처지
‘쾌도 홍길동’의 등장인물들은 하나 같이 현실에 안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물들이다.
청춘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아픔을 속으로 숨기면서 겉으론 과장된 명랑함을 보여준다. 주색잡기에 저자거리에서도 악명 높은 날건달인 홍길동(강지환)은 늘 잘난 척을 해대지만 그것이 자신의 아픔을 숨기는 고도의 위장술이라는 것이 이내 드러난다. 그 아픔은 적서차별에서 비롯된다.

반면 창휘(장근석)는 왕위에 오를 적자였지만 서자인 형 광휘(조희봉)에 의해 모든 것을 빼앗기고 궁 밖에서 복수의 나날을 보내는 인물이다. 자신이 오를 자리에 광휘가 앉아 있다는 사실에 분개하지만, 홍길동은 그런 그에게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왕위에 오르려는 이유가 그저 적자이기 때문이냐는 것이다. 즉 두 사람은 적자와 서자이지만 밀려나 있다는 점에서 그 처지는 같다.

한편 허이녹(성유리)은 본래 병조판서의 외동딸이지만 어린 시절 부모를 잃고 허노인에게서 자라나 저자거리에서 약을 팔며 떠도는 신세다. 그녀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늘 밝고 명랑하게 살아간다. 그녀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반면 서은혜(김리나)는 조선 최고의 권세가의 딸로서 모든 걸 가졌지만 자신은 정작 새장 속에 갇혀 지내는 인물이다. 그녀는 그녀가 갖지 못한 저자거리의 자유를 꿈꾼다. 두 사람은 모든 걸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이지만 둘 다 자유를 꿈꾼다는 점에서 그 처지는 같다.

무엇이 그들을 아프게 하나
이들의 아픔은 따라서 그저 고전 ‘홍길동’이 보여주는 적서차별에 한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운명에 의해 구획되는 인생에 관한 것이다. 서자로 태어나면 서자로서 살아가야만 하고, 적자로 태어나면 그 이유로 왕이 되어야 하며 고귀한 신분으로 태어나면 그 신분에 걸 맞는 부자유스러운 체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대한 불만이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일탈을 꿈꾼다. 무언가에 의해 규정되기보다는 저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삶을 꿈꾸는 것이다.

이것은 이 시대 청춘들이 겪는 적자의식 혹은 서자의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또 그 이유 때문에 사회에 안착하지 못하는 청춘들의 서자의식은 물론이고, 그 반대의 경우 즉 좋은 간판을 따고 좋은 직장에 들어가 사회 속에 안착한 청춘들 역시 맞닥뜨리게 마련인 부조리한 삶이 그것이다. 무엇보다 그 사람으로서의 가치가 매겨지지 않고 그 사람의 외부적 조건으로 가치판단 되는 사회 속에서는 무수한 홍길동이 탄생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청춘들의 눈에 비친 기성세대들의 세계는 부조리한 세계다. 역사적 시공간이 불분명한 ‘쾌도 홍길동’이 그려내는 세계는 도둑들의 세계이다. 홍길동과 창휘는 모두 자신의 삶을 도둑맞은 자들이다. 홍길동은 적서차별 아래 자신의 삶을 도둑맞은 인물이고, 창휘는 형에 의해 왕위를 도둑맞은 인물이다. 그들은 도둑맞은 것을 되찾기 위해 사회와 맞선다. 이것이 홍길동이 도둑을 터는 도둑이 되는 이유이고, 창휘가 찬탈 당한 왕위를 되찾으려 모반을 계획하는 이유이다.

도둑을 도둑질하는 사회, 그들이 잃은 것
재미있는 것은 ‘쾌도 홍길동’이 그리고 있는 상반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다. 홍길동의 아버지 이판(길용우)은 무엇을 할 수 있느냐는 길동의 물음에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한다. 또한 은혜의 아버지인 서윤섭은 스스로를 권력의 핵심이라 일컫는 부패한 관료로 대변된다. ‘쾌도 홍길동’에서의 아버지는 거부해야하고 맞서야 하는 부정적인 존재들이다.

반면 어머니는 등장인물들의 어린 시절에 도둑맞은 가장 소중한 존재로 대변되는데 홍길동과 창휘는 모두 그 어머니를 잃고 거리로 내팽개쳐진다. 그리고 그 어머니의 자리는 다른 사람이 차지하게 되는데, 홍길동의 의붓어머니인 김씨부인(이덕희)이 그렇고, 창휘를 어린 시절부터 도와온 노상궁(최란)이 그렇다. 그들은 그러나 모두 홍길동과 창휘를 모성으로 대하지 않는다. 김씨부인은 자신의 아들 인형(김재승)을 위해 홍길동을 도둑으로 몰아 사지로 밀어 넣는 인물이며, 노상궁은 창휘를 위해 어떤 짓이든 하는 인물이지만 그것은 비뚤어진 자신의 욕망일 뿐이다.

따라서 이 결핍된 두 인물 사이에 서는 허이녹이란 존재는 바로 이들이 찾는 모성을 대변한다. 홍길동과 창휘가 그녀에게 빠져드는 이유는 그녀가 가진 한없는 순수의 세계다. 저자거리의 아픈 아이를 그저 지나치지 못하는 그녀는 등장인물들의 아픔을 모두 품어주는 모성의 존재다. 따라서 ‘쾌도 홍길동’이 그리는 세계는 바로 이 모성이 사라진 세상, 그리고 아버지로 대변되는 권력 혹은 현실에 눈먼 도둑들의 세상에 남겨진 청춘들의 사모곡이다. 그것은 청춘들의 사랑으로 그려지지만 그 사랑이 결핍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사모곡에 가깝게 읽혀진다. 이러한 부정적인 부성과 긍정적인 모성의 대립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이라기보다는, 남성중심사회가 만들어놓았던 수직적 권력 시스템과 여성성으로 대변되는 작금의 수평적 시스템의 대립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고전 ‘홍길동’은 ‘쾌도 홍길동’으로 재해석되면서 그 안에 이 부조리한 사회 속에 던져진 이 시대 청춘들의 방황과 사랑을 포착해낸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못해 사회생활은 고사하고 몇 년째 취업의 문턱도 넘지 못하는 청춘들, 집안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어떠한 기회조차 박탈해 가는 사회 속에서 고개 숙인 청춘들, 자신을 부유하게 만드는 조건이 저 부조리한 사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저 현실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청춘들까지 이 드라마 속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쾌도 홍길동’이 그려내는 홍길동이라는 인물은 이 변화되어가고 있는 시대에도 여전히 굳건한 시스템과 맞서야 하는 우리네 청춘들의 자화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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