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움보다는 장르적인 재미 선택한 ‘뉴하트’

‘뉴하트’가 선택한 것은 의학드라마(이후 의드)의 새로운 실험이 아니라, 장르 그 자체였다. ‘뉴하트’가 기획된 것은 이미 ‘외과의사 봉달희’와 ‘하얀거탑’이 의드의 중흥을 알리기 시작하던 그 때이다. 그만큼 늦춰진 제작은 ‘뉴하트’에게 장점과 동시에 단점을 안겨주었을 것이 분명하다. 장점이란 이미 실험을 해낸 두 의드에서 성공의 요소들을 추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는 것이고, 단점은 뒤늦게 제작됨으로 인해서 실험적인 시도는 퇴색되거나, 시도 자체가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의드라는 장르적 요소들의 봉합으로 얻은 시청률
‘뉴하트’가 두 의드(물론 여기에는 외국 의학드라마들의 영향도 빠질 수 없다)에서 뽑아낸 장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의학 장면들은 실제를 방불케 할 정도로 디테일을 살려야 한다는 것. 그 바탕 위에 그려지는 나긋나긋한 멜로는 비판이 아니라 때론 장점으로 부각되기도 한다는 것. 또한 때로는 의사들의 애환과 더불어 인간으로서의 의사의 모습도 빼놓을 수 없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된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병원 내에서의 권력다툼은 병원 차원을 넘어서 누구에게나 심장을 쿵쾅대게 만드는 소재라는 것.

따라서 ‘뉴하트’에는 이 모든 요소들이 결합되어 있다. 때론 실제 의사들을 통해 몇몇 디테일들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받긴 했지만 대체로 병원 내의 디테일들은 잘 살아있다는 평가를 받았고, 늘 비판받았던 멜로는 오히려 더 배가되었다. 은성(지성)-혜석(김민정) 라인은 물론이고, 최강국(조재현)과 그의 아내(이응경), 배대로(박철민)-김미미(신다은)라인 그리고 우인태(강지후), 김태준(장현성)까지 다양한 멜로를 선보였다. 인간적인 의사의 모습은 최강국과 이은성을 통해 부각되었으며, 병원 내의 권력다툼은 최강국과 민영규(정호근)의 대립구도로 주로 보여졌다.

이를 통해 ‘뉴하트’가 얻은 것은 분명한 시청률이다. 과거 호평에도 불구하고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던 ‘외과의사 봉달희’나 ‘하얀거탑’과는 달리 ‘뉴하트’는 30%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이것은 의드라는 장르가 이제는 안착되는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는 새로운 작품이 아니라 하더라도, 의드의 성공요소들이나 장르적 재미만을 가지고도 어느 정도의 시청률 달성이 가능해졌다는 의미다.

장르적 재미 속에 묻혀진 아쉬운 점들
하지만 이런 일취월장한 시청률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적으로 ‘뉴하트’가 의드의 진화 대열에 낄 수 있는가 생각해보면 그것은 부정적으로 보인다. 거기에는 많은 아쉬운 점들이 장르적 재미에 묻혀 가려져 있는 게 사실이다. 먼저 최강국이라는 의사에 모든 걸 의지하는 드라마 구조가 문제다. 물론 실제로 흉부외과 같은 곳에서는 의사 1인의 능력이 거의 모든 것을 좌우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은 드라마다. 그것이 사실이라 할 지라도 그것을 바람직한 현상으로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드라마는 좀더 이상적인 구도를 만들어냈어야 하지 않을까. 최강국 1인에 집중되는 이상적인 의사상의 구현은 그것이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했다 하더라도 드라마적으로 봤을 때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목이다.

최강국 1인이 이상적으로 그려지자, 나머지 등장인물들의 구성은 선악구도식의 이분법적으로 나뉘게 되었다. 최강국 측에 있는 인물들은 선이고 그에게 반대로 서 있는 인물은 악으로 그려지게 된 것. 이것은 시청률을 끌어올리는 장르적 법칙과 TV드라마라는 좀더 대중적인 매체가 만나는 지점에서는 효과를 발휘한 것이 분명하나, 인물을 그려내는데 있어 지나치게 단선적이라는 비판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만일 최강국 자신도 치명적인 인간적인 결함을 갖고 있다거나(마치 ‘하얀거탑’의 장준혁처럼), 상대측인 민영규 역시 인간적인 면모를 갖고 있다면 드라마가 그려내는 세계는 좀더 현실적인 느낌을 주었을 것이다.

두 번째 아쉬움은 이러한 장점들의 봉합이 지나치게 나열적으로 되었다는 점이다. 최강국은 드라마 속에서 권력다툼을 끄집어내는 역할을 주로 하는데 사실상 ‘뉴하트’는 그 힘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되자 나머지 인물들은 그 힘이 약화되었다. 이은성이나 남혜석 같은 인물들이 멜로에만 치중하고 의사로서의 어떤 성장을 좀체 보이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다. 특히 ‘뉴하트’가 그리고 있는 남혜석이나 김미미 같은 여성 캐릭터들은 거의 대부분이 멜로에만 치중된 인상이 짙다. 이렇게 된 것은 권력다툼과 멜로라는 두 마리 토끼를 어떤 연결고리를 갖고 이어가지 못하고 나열식으로 풀어내면서, 각각 캐릭터들의 역할이 고정된 탓이다. 여성 의사로서 좀더 자신만의 고민이나 능력 같은 것을 남혜석이 보여주지 못한 면은 실로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포스트 뉴하트, 의드불패일까 의드필패일까
마지막회에 와서 ‘뉴하트’는 장르 드라마의 성격보다는 멜로 드라마로 회귀한 느낌을 준다. 남혜석과 그녀의 아빠인 병원장의 죽음, 아내 앞에 무릎꿇고 미안하다 말하는 최강국, 불륜관계였던 조민아 앞에서 차마 수술을 하지 못하고 그로 인해 파혼을 당하는 김태준처럼 병원 내에서 직업으로서 보여줬던 의사의 모습은 가족 또는 연인 앞에 서면서 인간으로 돌아간다. 그간 여러 에피소드들을 통해 각각으로 흩어졌던 이야기들은 이러한 감성에 호소하는 결론으로 인해 상당부분 모아지는 느낌을 주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1년 후의 에피소드들, 이를테면 새로운 심장센터의 질환별 시스템으로의 전환이나, 새 인력 채용에서 있어서 거론되는 학벌문제 해소 등등 드라마가 애초에 제기했던 흉부외과의 문제까지 해소된 느낌을 준다.

하지만 이것이 자연스럽지 못하고 급하게 봉합된 느낌을 주는 것은 왜일까. 시즌2에 대한 요구는 바로 그런 급작스런 끝맺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뉴하트’는 굉장히 매력적이고 장르적인 재미를 주는 드라마임에 틀림없지만, 제목처럼 의드의 새 심장이 되지는 못했다. 의드에 자주 등장하던 흉부외과가 가진 심장이라는 매력적인 소재를 새로운 차원이나 시점으로까지 제시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뉴하트’는 이른바 의드의 성공법칙 같은 것을 세움으로써 의드라는 장르 자체를 즐길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만은 분명하다. 누구나 쉽게 의드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제 남는 것은 새롭게 등장할 의드에 대한 우려이다. ‘뉴하트’의 성공은 상당부분 ‘의드불패’라는 장르적 안도감을 불러올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안도감에 기댄 방만한 기획과 제작은 ‘의드필패’의 신호탄이 될 지도 모른다.

주연보다 센 카리스마의 조연들, 그 이유

‘왕과 나’의 조치겸(전광렬), ‘이산’의 영조(이순재), 그리고 ‘뉴하트’의 최강국(조재현)은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을까. 그들은 모두 각각의 드라마를 이끌어 가는 힘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조치겸은 우리네 사극 속에 권력형 내시라는 새로운 캐릭터로 특유의 카리스마를 선보였다. ‘이산’의 영조는 주인공인 이산을 위기에 빠뜨리기도 하고 또 구원해주기도 하면서 지금껏 드라마의 힘을 만들어온 사실상의 주역이었다. ‘뉴하트’의 최강국 역시 마찬가지. 그는 지금껏 이 흉부외과에서 벌어지는 대부분의 사건들을 정리하는 해결사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이들은 진정한 의미로 드라마의 주인공은 아니다. 주인공이 아니면서 왜 드라마는 이런 캐릭터들을 필요로 할까.

성장하는 주인공의 멘토 혹은 후원자
요즘 드라마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가 성장하는 주인공이라는 캐릭터 설정이다. 이것은 특히 권력과 욕망을 두고 전개되는 드라마 속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것은 이미 성장해 권력을 잡은 무소불위의 주인공은 시청자가 감정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보다는 쉽게 감정이입이 되는 평범한 주인공이 점차 권력의 정점을 향해 가는 성공의 과정은 보는 이에게 충분한 대리충족을 시켜주게 된다.

이런 성장 캐릭터가 등장하는 드라마의 문제는 그 초반부에 있다. RPG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겠지만 캐릭터가 성장하는 과정을 바라보는 건 때론 지루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초반부 드라마 전개는 자칫 무미건조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카리스마 부재의 문제를 해결해주면서 동시에 주인공에게 그 카리스마를 연계해줄 캐릭터들이 필요하게 된다. 즉 주인공의 멘토 혹은 후원자가 필요해지는 것이다.

조치겸이나 영조, 그리고 최강국이라는 캐릭터는 이러한 필요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이들은 주인공은 아니지만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지고 드라마 전체를 휘어잡으며 시청자들의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는 특징이 있다. 드라마 초반부에 이러한 힘은 드라마 성공에 있어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캐스팅에 있어 주인공 못지 않은 비중을 차지한다. 전광렬이나 이순재, 조재현은 누구나 그 연기력을 인정받는 대배우들이다. 이들 대배우들의 호연은 드라마에 더욱 힘을 불어넣는다.

문제는 주인공이 그 캐릭터를 넘지 못하는 것
문제는 주인공이 이제 나이가 들어 성장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그들 캐릭터의 힘이 주인공에게로 넘어오지 않는 지점에 있다. ‘왕과 나’의 조치겸은 주인공인 김처선(오만석)이 성장하기까지 내시부를 이끌며, 예종 같은 왕, 한명회 같은 조정대신, 인수대비 같은 왕실인물, 노상선 같은 내시부 구세력들과 맞서며 권력형 내시의 카리스마를 보여왔다. 그 같은 상황에 김처선이 한 것이라곤 운명적인 사랑의 굴레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었으니, 드라마의 재미는 주인공이 아닌 조치겸으로 기울어질 수밖에. 결과적으로 카리스마는 김처선에게 전수되지 않았다.

‘이산’의 영조는 이산(이서진)의 가장 강력한 위협이면서 동시에 가장 가까운 협력자로서 카리스마를 발휘해왔다. 이산을 위기에 빠뜨리는 것은 어찌 보면 노론 벽파 세력이라기보다는 영조 자신인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일까. 긴박하게 도무지 해결될 것 같지 않게 흘러가던 상황도 영조가 등장하면 그걸로 끝이었다. 이미 영조가 붕어한 상황이니 이제 그 카리스마는 온전히 이산이 차지해야 하나 그것이 효력을 발휘할 지는 미지수다. 위기에 빠뜨려 성장하게 만들었던 영조는 사라졌고, 또한 노론 벽파 역시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간 상황에서 이산의 카리스마가 제대로 세워질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이다.

한편 ‘뉴하트’의 최강국은 이제 주인공을 도와주는 역할에서 아예 주인공의 역할을 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의 갈등구조가 결국 병원 내의 권력구도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최강국을 멘토로 성장드라마를 엮어가야 할 이은성(지성)은 좀체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드라마의 갈등은 최강국이 풀어내고 이은성은 남혜석(김민정)과의 멜로 라인을 엮어내는 병렬적인 역할을 맞고 있는 상황이다.

배우의 문제가 아닌 작가의 문제
이것은 배우들에게도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대배우들의 그늘 속에서 주인공을 맡은 자신이 정작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이 그다지 바람직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배우들의 문제라고 판단하기는 어렵다. 이것은 배우의 문제라기보다는 작가의 문제가 더 크다.

작가는 주인공 속에 주제의식을 심어 넣기 마련인데, 주인공이 아닌 다른 인물에 집중되지 않는 이런 상황은 결국 시청률 앞에 작가의 주제의식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시청률을 올리는데 일조했던 그 캐릭터와 그 캐릭터가 만들어냈던 극적 상황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본래의 기획의도로 돌아간다는 것은, 시청률이란 잣대 위에서 보면 무모한 일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조치겸이나 영조, 최강국 같은 카리스마 넘치는 조연들이 극 속에서 주인공 이상의 비중을 차지하게 된 이유가 된다.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나, 바람직한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속에서 꿈틀대는 시청률 지상주의라는 괴물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추격자’의 엄중호와 ‘노인을 위한...’의 안톤 시거

최근 주목받고 있는 ‘추격자’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기묘하게도 유사한 스토리 구조를 갖고 있는 영화들이다. 거기에는 희대의 살인마가 등장하고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숨가쁘게 펼쳐진다. 즉 이 영화들은 모두 고전적인 형사물이나, 스릴러에 단골로 등장하는 ‘추격과 도망’이라는 장르적 모티브를 잘 활용하고 있다. 또한 이 영화들은 그 장르적 틀 위에서 어떤 의미망을 포착하려 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추격자’에서 추격자는 보도방을 운영하는 전직형사 엄중호(김윤석)이고 도망자는 연쇄살인범 지영민(하정우)이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이것은 정반대다. 추격자는 희대의 살인마인 안톤 시거(하비에르 바르뎀)이고 도망자는 그다지 선해 보이지만은 않은 모스(조쉬 브롤린)다. 한쪽은 살인범이 쫓기고 또 한쪽은 정반대지만 둘 다 나쁜 놈이 나쁜 놈을 쫓는다는 설정은 유사하다. 물론 여기서 형사는 우리나라나 미국이나 늘 뒤늦게 나타나는 존재들이다.

재미있는 것은 두 영화가 모두 추격하는 자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인데, 그 추격자는 도망자보다 더 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시거는 감정이 없는 살인마다. 반면 엄중호는 희대의 살인마인 지영민에 비해 약할 것 같지만 실상은 정반대다. 늘 지영민을 구타하고 도망치게 만드는 인물은 다름 아닌 엄중호다. 하지만 우리네 삶이 그러하듯이 여기에는 변수가 작용한다. 센 놈이 약한 자를 잡는 것이 쉬울 것 같지만 그 변수가 작용하면서 상황은 조금씩 어려워진다.

‘추격자’에서 그 변수는 무능한 공권력이다. 엄중호는 그 탁월한 동물적인 감각으로 지영민을 떡 하니 경찰서 안에까지 끌고 가지만, 경찰은 눈앞에 혐의가 분명한 살인자를 버젓이 거리로 내보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변수는 조금 철학적이다. 그것은 안톤 시거 바로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살인자로서 자신만의 룰을 따르는 자이다. 그런데 그 룰은 어떤 인과가 있는 것이 아닌 우연의 산물이다. ‘추격자’의 지영민은 포획한(?) 미진(서영희)에게 “네가 살아서 돌아가야 할 이유를 말해봐”하고 묻지만 안톤 시거는 그런 이유는 묻지 않는다. 대신 동전던지기로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를 정할 뿐이다.

물론 지영민은 그 이유가 타당하면 살려주기 위해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동물적인 본능일 뿐이다. 그러니 그 이유로 충분한 “딸이 있어요”라는 답변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것이다. 반면 안톤 시거는 감정을 배제한 채 철학적인 사변을 통해 운명을 결정한다. 따라서 그는 동전이 정하는 우연에 따를 뿐이다. 인과과정으로 수사를 하는 형사들에게 인과가 없는 그는 좀체 추격하기 어려운 존재다. 어찌 보면 그는 인과관계에 잔뜩 얽매여 있는 사회적 그물망을 벗어나 있는, 그 누구에게도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절대 자유의 사냥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그렇지 않다. 안톤 시거 역시 그 우연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러니 그를 옭아매는 것은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보안관 같은 법망이 아니라 그 우연 자체다. 쫓고 쫓기고 하던 추격전이 결국 누가 잡히고 누가 죽었다는 식으로 끝나지 않고 모든 걸 다 해치워버린 안톤 시거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으로 끝내는 것은 바로 이 우연의 법칙 속에서 그 무엇도 허무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전언이다. 결국 이 추격전이라는 우리네 삶의 메타포는, 어느 날 우연히 현장에서 돈을 발견한 모스가 그 날 밤 물 한 모금을 전해주러 갔다가 우연히 발각되고, 살인자에게 쫓고 쫓기는 과정 자체가 허무하게도 필연이 아닌 우연의 산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추격자’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리고 있는 추격전은 그 긴박하고 흥미진진한 과정 속에 각각의 메시지를 포착한다. ‘추격자’는 엄중호라는 추격자를 내세워 그 일면 견고해 보이는 사회적 시스템의 무능함을 추격하는 격이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안톤 시거라는 추격자를 내세워, 우연의 법칙 속에 무력하기만 한 필연적 삶의 시스템을 추격하는 격이다.

이 두 영화가 흥행에 있어 전혀 상반된 길을 걷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전국 극장가를 거의 장악하고 있는 ‘추격자’가 곧 200만 관객을 바라보고 있는 반면, CGV 인디영화관에서만 개봉하고 있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1만5천 명에도 미치지 못하는 관객수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관객수의 차이는 물론 개봉관 수가 가장 큰 이유겠지만 역시 추격하는 그 대상 때문이 아닐까. 우리네 관객들은 무능한 정부에 대한 사변적이지 않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비판이,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는 철학적 사유보다는 더 마음에 와 닿나 보다. 어쨌든 두 영화 모두 요즘 들어 보기 드문 수작인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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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극, 재벌가보다는 서민을 보다

요즘 주말극들은 모두 약속이나 한 듯이 재벌가와의 로망이라는 오래된 코드를 들고 나오고 있다. ‘엄마가 뿔났다’의 대기업 회장 김진규네 아들 김정현(기태영)과 서민적인 나일석네 딸 나영미(이유리)간의 사랑이 그렇고, ‘행복합니다’의 재벌집 딸 박서윤(김효진)과 이준수(이훈)의 사랑이 그렇다.

서로 다른 사회적 지위나 부의 차이를 가진 남녀의 만남은 이미 셰익스피어가 희곡을 쓰던 시대에서부터 내려오던 고전적인 소재. 그것이 오랜 고전이 되고 지금까지도 자주 소재로서 활용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신분상승 욕구나 변신욕구를 자극하는 강력한 환타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때 이 설정은 툭하면 신데렐라의 변주 정도에 그치면서 식상해져버린 트렌디 드라마를 근본적으로 비판받게 만든 혐의를 갖고 있다. 하지만 현재 방영되고 있는 이들 주말극들은 이러한 구도를 활용하고 있으면서도 과거와는 다르게 20%대의 높은 시청률을 유지하고 있다. 무슨 차이가 이것을 만들었을까.

주목해야할 것은 재벌가의 남녀들이 보이는 ‘서민적인 모습’이다. ‘엄마가 뿔났다’의 김정현은 대기업 회장 아들이면서도 늘 버스를 타고 다니는 인물이고, ‘행복합니다’의 박서윤은 허례허식에 가득한 상류층 문화에 반발의식을 갖고 있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들은 부유하면서도 서민적이다.

이것은 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여전히 시어머니가 될 재벌가의 엄마들은 허영과 특권의식에 가득한 악역이지만, 최소한 아버지들은 이런 차이를 뛰어넘어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는 인물로서 그려진다. 이러한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부부의 조합은 상당부분 재벌가에 대한 부정적인 인상을 지워준다.

이들이 이렇게 그려지는 이유는 이들 주말극이 보여주는 재벌가와 서민층의 관계가 과거와는 조금 다르기 때문이다. 과거의 드라마가 주로 선망 받는 재벌가의 남자 혹은 여자가 서민인 상대방의 신분을 ‘끌어올리는’ 관계를 보여줬다면, 작금의 주말극들은 거꾸로 재벌가의 남자 혹은 여자가 서민 쪽으로 내려와 눈높이를 맞추는 관계를 그려낸다. 부유하면서도 서민적인 재벌가의 남녀라는 캐릭터는 이걸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설정된 것이다.

이것은 또한 주제의식과도 관련이 있다. ‘엄마가 뿔났다’는 기본적으로 신분상승 욕망을 그리는 드라마가 아니다. 이것은 서민적인 엄마의 일상을 다루고 있으며 따라서 시선은 늘 엄마에게 맞춰져 있다. ‘행복합니다’ 역시 그 주제의식은 ‘엄마가 뿔났다’와 마찬가지다. 서민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이철곤(이계인)네 집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 중심에 있으며, 그것은 박승재(길용우) 회장집 사람들의 이야기와 비교되면서 진짜 행복을 묻게 될 것이다.

재벌가가 등장하지만 이들 드라마가 보여주는 것은 서민적인 일상들의 행복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극과 극의 만남이라는 설정은 오히려 돈을 좇는 사회에 진짜 행복은 이런 보통의 일상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탐탁하지 않아 하는 김정현의 엄마, 고은아(장미희)앞에서도 또박또박 자신의 의견을 말하는 나영미나, “니들이 그렇게 잘났냐”며 절망하지만, 헤어지는 조건으로 돈을 줄 수도 있다는 박상욱의 말에 분노하는 이준수는 진정한 행복 앞에서 현재 우리네 서민들이 당당할 것을 요구하는 인물들이다.

김수현 작가나 김정수 작가 같은 거장들이 주말극으로 가져온 것은 소재로서는 그다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장인의 손길을 거친 드라마들은 일상의 디테일들을 잘 포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지금까지 천편일률적으로 그려져 왔던 구도의 식상함을 넘어서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무엇보다 공감을 일으키는 부분은 서민들의 일상에 대한 존경과 따뜻한 시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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