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식에 빠진 주말극, 남은 건 작가색

먼저 서로 다른 집안환경에서 자라난 남녀가 있다. 그런데 그들은 집안환경과 상관없이 서로를 사랑한다. 밖에서 연애를 할 때야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이제 결혼을 앞두고 있는 나이가 되자 문제는 복잡해진다. 결혼을 앞두자 남자 혹은 여자는 그동안 상대방에게 속여왔던 자신이 부자임이 드러나거나, 스스로 그 사실을 밝히게 된다. 공교로운 것은 대체로 그 부잣집 자제는 상대방이 다니는 회사의 회장 자제라는 점이다. 부유한 집안 부모는 결혼을 반대하고 결국 그 반대에 모멸감을 느끼던 한 쪽은 회사를 그만두거나 결혼을 포기하겠다는 통보를 한다. 혹은 그 반대의 결정을 하기도 한다.

놀랍게도 위에 적어놓은 스토리는 지금 현재 주말 드라마로 인기를 얻고 있는 김수현 작가의 ‘엄마가 뿔났다’와 김정수 작가의 ‘행복합니다’가 똑같이 가진 이야기 구조이다.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시작했기 때문인지 어떨 때는 같은 날 방영하는 드라마의 내용이 거의 같게 맞아떨어질 때도 있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고은아(장미희)가 스스로 대사 속에서 “드라마에 나오는 편견에 가득 찬 교양 없는 시어머니 역할 하기 싫어”라며 밝힌 것처럼 그 장면은 드라마라면 어디에나 한번쯤 등장하는 시퀀스가 되어버렸다. 고은아는 자신의 대사에도 불구하고 아들의 연인인 영미(이유리)를 불러서 모멸감을 준다. 같은 날 방영된 ‘행복합니다’에서도 역시 같은 장면을 발견할 수 있다. 재벌집 사모님인 이세영(이휘향)은 딸과 결혼하려는 이준수(이훈)를 불러 얼굴에 물을 끼얹는다. 다른 것이라곤 시어머니가 장모로, 그리고 며느리가 사위로 뒤바뀌어 있을 뿐이다.

이 두 부유층의 사모님들은 모두 자신의 딸 혹은 아들이 격에 맞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기를 원한다. 이 두 드라마는 서민들의 시선에 맞춰져 있기 때문에 이 서민적인 주인공을 데려다가 인간적인 모멸감을 주거나 물을 끼얹는 장면은 자못 자극적이다. 그것은 마치 드라마를 보는 사람의 얼굴에다 물을 끼얹는 것과 마찬가지의 느낌을 준다.

이렇게 한 차례씩 당한 주인공들은 저마다 회사를 그만둔다. 그 회사의 회장 자제로 있는 상대방과 동등한 입장에서 만나려면 그 방법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장면 역시 ‘엄마가 뿔났다’와 ‘행복합니다’에서 같은 날 방영되었다. 이 정도 되면 주말 가족극의 패턴은 이미 공식화되어버렸다고 말해도 무방할 것이다. 만일 이 두 드라마를 모두 즐기는 시청자라면 같은 구조의 이야기를 같은 날 반복적으로 시청한 셈이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공식화된 이야기가 식상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이 두 드라마는 저마다 색깔이 다른 느낌마저 주면서 번갈아 볼 때 역할 바꾸기(남자와 여자의)의 재미까지 선사한다. ‘엄마가 뿔났다’에서 여성의 시선을 통해 계층 갈등의 묘미를 본다면, ‘행복합니다’는 남성의 시선을 통해 그것을 즐길 수 있다. 이것은 마치 게임 같다. 공식화된 틀 속에서 다른 캐릭터들을 갖고 한 시간 동안 즐기는 게임.

이 공식화된 구조의 두 드라마가 주는 진짜 재미는 작가에게서 나온다. ‘엄마가 뿔났다’는 김수현 작가가 주는 속도감 있는 대사들의 잔치와 자잘한 일상의 디테일들을 통해 재미를 주고, 김정수 작가는 군더더기 없는 구성에 작가 특유의 서민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묘미를 더한다. 만일 이 두 대작가들의 색채가 없었다면 이 두 주말 드라마는 자기만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렇게 유사한 구조의 스토리를 가지고도 비슷한 높은 시청률을 모두 거두고 있다는 점은 지금 우리가 주말 드라마를 통해 얻는 재미가 독특한 소재나 색다른 시각 혹은 주제의식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말해준다. 우리는 똑같은 구조를 어떻게 재미있게 풀어내느냐는 ‘이야기꾼’의 그 이야기 능력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재미있는 두 거장의 이야기 풀어내는 능력에 푹 빠져 있으면서도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은. 이 거장들의 비슷비슷한 이야기는, 삶이란 결국 그렇게 독특하고 색다른 무엇이 아니라 다 같은 구조 위에 있지만 그 위에서의 사는 방식이 다를 뿐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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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마스코트된 상근이, 그 명과 암

평범한 개에서 어느 날 불쑥 이름이 뜨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모를 사람이 없을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는 상근이. ‘1박2일’의 마스코트였던 상근이는 이제 국민 마스코트가 되어가고 있다. ‘하룻밤 자고 났더니 스타가 되어 있더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상근이에 대한 관심은 갑작스레 커졌고, 그 일거수 일투족이 화제가 되고 있다.

월수입은 얼마나 되며 나이는 몇이고 결혼(?)은 했는지 같은 사생활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라디오 방송 출연에 발로 찍어서 하는 팬 사인회, 게다가 피겨스타 김연아와의 만남까지 상근이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평범한 개로서는 상상도 못할 호사처럼 보인다. 벌써부터 연예기획사가 나서서 상근이를 매니지먼트할 것이라는 소문까지 돌 정도니 그 관심은 같은 프로그램 출연자들마저 부러울 정도가 아닐까.

상근이는 그 존재만으로도 이제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국민견이 되었다. 그런데 이 즈음에서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다. 과연 상근이도 우리가 생각하듯 스타로서의 행복을 느끼고 있을까 하는 점이다. 이를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먼저 상근이가 어떻게 이런 국민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먼저 뜬금 없는 질문을 던져보자. 상근이와 한때 3D 캐릭터로 인기를 끌었던 아담 같은 사이버스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우선 떠오르는 건 둘 다 독특한 캐릭터로 주목받았다는 점이다. 캐릭터 비즈니스에서는 심지어 괴물까지 캐릭터로 활용할 정도인데, 여기서 말하는 ‘독특한 캐릭터’란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이 아니면서 인간 이상의 대우를 받는 캐릭터라는 점이다.

상근이는 은초딩(은지원)과의 대립구도를 통해 확고하게 캐릭터를 세웠다. 그것은 먼저 거대한 상근이, 작은 은초딩이라는 외관의 대비가 각자의 캐릭터를 강화시켰다. 상근이 옆에 서면 은초딩은 더 작아서 진짜 초딩처럼 보이는 효과가 있고, 반대로 상근이는 더 큰 존재처럼 보인다. 이러한 외관에 인간과 개의 대결구도는 흥미로울 수밖에 없다.

프로그램은 웃음을 유발하기 위해 초등학생 같은 사고방식으로 상근이를 갖고 놀려는 은초딩의 모습과 이를 귀찮아하는 어른스러운 상근이의 모습을 대비시킨다. 때론 자신의 말을 듣다가도 상근이에게 번번이 당하는 은초딩은 누가 이기고 지고를 떠나서 개와 그런 승부를 겨루고 있다는 점 자체가 각각의 캐릭터를 강화하는 장치가 된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진짜 사람이름처럼 친근한 이름을 가진 상근이의 캐릭터가 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상근이가 보여준 캐릭터가 아니라 연출의 힘에 의해 만들어진 인격이다. 이것은 저 사이버 스타들의 그것처럼 부여된 것일 뿐, 본인이 원한 것은 아니다. 사이버 스타야 생명체가 아니기에 문제는 없지만, 상근이의 경우는 다르다. 인간은 아니지만 상근이는 엄연한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말을 못하기에 항변조차 하기 힘는 생명체.

‘1박2일’, ‘아현동 마님’에 겹치기 출연을 하면서 모 광고CF도 찍고, 팬 사인회까지 하러 다니는 등의 바쁜 나날은 상근이가 원하지 않는 삶일 수도 있다. 그것을 부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것은 상근이를 통해 대리충족을 하려는 욕구로 인해 인격을 부여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상근이를 그저 자연으로 돌려보내자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우리가 상근이를 통해 얻은 행복만큼 좀더 상근이 입장에서의 행복을 고려하자는 말이다. 자칫 상혼에 찌든 비정한 연예비즈니스의 세계 속에 빠져 행복한 개가 아니라, 불행한 인간화된 개로 살아가지 않게 하자는 이야기다. 상근이는 다른 개들보다 좀더 행복한 개 정도로 살아가야 한다.

'뉴하트' 같은 의드를 유독 좋아하는 저로서는 이 정도의 아이템을 가지고 이정도의 결말로 달려간 '뉴하트'가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습니다. 사실 의드는 이제 어느 정도 정착된 장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하얀거탑' 이전의 의드들은 이른바 '무늬만 의사'라는 비아냥이 많았죠. 이유는 병원의 디테일들은 없고 병원을 배경으로 한 멜로가 난무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얀거탑', '외과의사 봉달희' 이후 우리네 의드는 한단계 발전했다고 보여집니다. 거기에는 이미 '그레이 아나토미' 같은 미드에 매료당한 수많은 시청자들의 눈과 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죠. 이런 비판적인 시선은 늘 새로운 시도의 밑거름이 되는 게 사실입니다.

'뉴하트'가 처음 시작할 때 저는 이 심장이라는 소재에서 세가지 포인트를 생각했습니다.

‘뉴하트’, 세 가지 심장 살릴까
네모난 세상/명랑TV 2008/01/18 00:46 Posted by 더키앙

그 첫째는 장르적인 심장, 즉 흉부외과라는 현실적인 디테일이었죠. 이것이 제대로 그려진다면 장르 드라마의 기본을 충족시킬 것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뉴하트'는 초반부 이 흉부외과의 현실을 꼬집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과이지만 그 어려움 때문에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현실, 막상 그 과에 있다 하더라도 거의 병원에서 생활하며 개인 생활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 그럼에도 현실적으로는(금전적으로)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 상황 등등이 최강국 교수와 이은성, 남혜석의 이야기 속에 녹아 있었습니다. 의학적인 장면들의 디테일? 이제는 거의 기본이 되었죠. 실제 의사의 도움을 받으니 이만큼 리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현실적인 문제들은 후반부로 가면서 이은성의 학벌 파벌 문제 등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또한 현실적이라는 면에서 괜찮은 접근이라 생각되었습니다.

두번째 심장은 인간애, 즉 인간에 대한 따뜻한 마음이었습니다. 이것은 최강국이라는 의사를 생각하면 단박에 떠올릴 수 있는 것이었죠. 최강국은 말 그대로 환자만을 생각하는 의사였죠. 초반부 흉부외과의 현실이 배경으로 제시되고 그 현실 속에서도 의사가 버틸 수 있는 힘은 오로지 환자가 거기 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고 있었죠. 최강국은 실로 이런 의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이상화된 모델을 보여주었습니다.

세번째 심장은 다름 아닌 하트, 즉 사랑이었습니다. 드라마적 재미를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멜로라인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는 걸, 우리는 저 '그레이 아나토미'나 '외과의사 봉달희'를 통해 알 수 있었습니다. 디테일이 살아서 병원 환경과 맞아떨어졌을 때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멜로는 비판이 아닌 환호가 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멜로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중간부터 갑자기 시작된 이은성과 남혜석의 사랑은 좀 갑작스런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 후로 급물결을 탄 이 둘의 멜로는 차츰 그 불길을 병원 전체로 퍼뜨렸고, 그러자 병원 의사들은 전부 사랑에 몸살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이 세 심장의 봉합부분이었습니다. 이것이 제대로 되면 '뉴하트'는 제목처럼 의드의 새로운 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뉴하트'는 장르적인 재미 그 자체만을 추구했지 무언가 새로운 의드의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외과의사 봉달희', '그레이 아나토미'식의 멜로와 '하얀거탑'의 병원내 권력다툼이 모두 등장했지만 이것이 하나의 사건으로 연결되지는 않았고 그저 각각의 나열식 에피소드로 흘러갔습니다.

마지막회는 바로 이런 나열된 에피소드가 가진 파편성을 급히 봉합하는 것이었죠. 마지막회 초반 15분 정도가 이 병원 의사들의 멜로 이야기로 채워지고 사회적 이야기로 확장되지 못하는 이야기는 의사 개인의 사생활로 파고들었습니다. 즉 내가 혹은 내 주변의 사람이 환자라면 하는 가정으로 역시 인간일 수밖에 없는 의사의 모습으로 결론을 지었죠. 급히 1년 후로 지나가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지만 개인적으로는 그 1년 동안의 변화 과정이 더 궁금함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병원은 시스템이 바뀌었고, 멜로 라인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어져 왔는지 결론이 아닌 과정이 궁금했지만, 마지막 한 회가 남은 상황에서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 과정이 보여주지 않음으로 해서 기대충만해 시작한 드라마가 멜로로 봉합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시즌 2를 요구하고 싶은 심정은 '뉴하트'가 그만큼 잘된 드라마였기 때문이 아니라, 부족함이 많아서 보여주지 못한 것이 많이 남은 드라마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새로운 의드가 나왔을 때 '뉴하트'가 줄 의드에 대한 선입견은 어떤 것이 될까요. 여전히 기대감만일까요? 아니면 또 비슷한 코드들의 봉합일뿐인가 하는 의구심일까요? 여러모로 아쉬운 의드가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매력적인 ‘뉴하트’, 왜 의드의 새 심장 못됐나
네모난 세상/명랑TV 2008/02/29 00:09 Posted by 더키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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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하지만 현실적인 캐릭터, 2인자

‘이산’에서 이산(이서진)만큼 주목받는 캐릭터는 단연 홍국영(한상진)이다. 어떻게 보면 드라마 속 주인공이자 1인자인 이산보다 소위말해 더 뜬 것처럼 보인다. 단적으로 이산은 아무리 멋진 대사를 해도 그저 멋있다는 평가 정도로 끝나지만 홍국영의 한 마디 한 마디는 어록으로 남는다. 시간적으로 보면 홍국영이 등장하는 양은 이산과 비교하면 조족지혈이다. 그럼에도 가끔씩 얼굴을 내미는 장면 속의 홍국영의 일거수 일투족에 대한 집중도는 이산보다 더 높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왕의 2인자들, 홍국영과 윤회
홍국영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이산보다 매력적이라는 말이 맞을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무엇이 홍국영을 그렇게 빛나게 하는 것일까. 그 첫 번째 이유는 홍국영이 지극히 현실적인 캐릭터라는 점이다. 특히 이산과 비교하면 더욱 그러하다. 이산은 이른바 대의명분과 정치라는 세계 속에 자신의 개인 감정을 철저히 억누르는 캐릭터이지만, 홍국영은 그렇지 않다. 그는 노론 벽파 세력의 역모가 드러난 상황에서 이를 덮고 넘어가려는 이산의 처분에 대해 분개하는 인물이다.

‘대왕 세종’에 등장하는 윤회(이원종) 역시 앞으로 세종이 될 충녕대군(김상경)의 2인자 역할을 하고 있다. 정치적인 대의에만 밝았지 실제 현실 정치에는 어두웠던 충녕대군에게 윤회는 이상을 현실화하는 인물로 비춰진다. 그는 충녕대군이 멀찌감치 물러나 정치적 대의를 얻고 있을 때, 기꺼이 나아가 명국 사신의 문제를 해결해내는 인물이다.

당당한 2인자에 더 공감가는 시대
역사적으로도 드라마적으로도 홍국영이나 윤회 같은 인물의 역할은 사실상 초반부터 그런 것이었다. 이산이나 충녕대군이 대의명분을 세우면서 그 누구에게도 피를 묻히지 않는 모습을 고수하려 할 때, 홍국영이나 윤회는 손수 나서서 피를 묻히는 그런 역할. 이것은 실제현실에서도 2인자, 혹은 3인자들의 역할이기도 하다. 1인자들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양지에 세워놓고 자신은 음지의 진창에서 뒹구는 2인자들의 모습은 가깝게는 우리가 몸담고 있는 회사나, 가정 내에서조차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드라마라는 것이 현실을 살아가는 시청자들의 결핍된 부분을 채워주고 때로는 꿈꾸게 하는 어떤 것이라면, 2인자에 대한 이러한 호응은 쉽게 이해가 될 것이다. 시청자들은 완벽하게 이상화된 1인자보다는 못났어도 현실적인 2인자에 더 공감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된 데는 사회적 분위기의 변화가 영향을 미친 것이 분명하다. 이제 1인 중심의 수직구조의 명령 체계보다는 다양성이 용인되는 수평구조의 토론 체계가 합리적으로 판단되는 사회다. 그러니 1인자니 2인자니 하는 것은 역할이 그럴 뿐, 그것이 더 이상 순위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예능 속의 2인자들
최근 들어 예능 프로그램에서 2인자 혹은 3인자 캐릭터가 1인자 못지 않게 인기를 끄는 요인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무한도전’을 이끌고 있는 반장 유재석 만큼 입지를 다지고 있는 하찮은 형 박명수가 그렇고, ‘1박2일’의 리더 강호동 만큼 인기를 끌고 있는 허당 이승기나 초딩 은지원, 심지어는 상근이까지 그 예에 해당될 것이다. 그렇다고 무조건 2인자면 다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소위말해 뜨는 2인자 캐릭터란 1인자 아래서 꼬리를 내리고 있는 2인자가 아니라 오히려 대등한 입장으로 서 있는 2인자라는 점이다. 즉 2인자는 이제 어떤 시청자에게는 순위가 2인자라기보다는 1인자보다 인기 있는 2인자로 인식되며 따라서 그런 역할을 프로그램 내에서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2인자 컨셉트는 때론 프로그램 자체의 정체성으로 내세워지기도 한다. ‘라디오 스타’가 대표적인데 이 프로그램 속에서 MC들은 서로 자신이 메인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위해서는 심지어 초대된 게스트에게 면박을 주거나 말문을 막는 상황까지 연출한다. 이것은 그만큼 치열해진 예능의 세계를 말해주면서 동시에 그와 같은 치열함이 실제 현실의 모습이라 공감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기도 한다. 가식적인 모습으로 우아한 척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2인자임을 인정하고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이는 모습이 더 공감을 준다는 이야기다.

TV가 보여주는 2인자 전성시대는 고스란히 사회의 모습을 포착한다. 그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 첫째는 1인자보다 무수히 많은 2인자들이 1인자 되기가 태생적으로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한 사회이고, 그 둘째는 그렇기에 2인자로서 1인자에 억눌릴지라도 저 스스로는 당당함을 희구하는 사회이다. 이것이 물론 TV 속의 이야기라 할 지라도 드라마에서 예능까지 당당한 2인자에게 아낌없는 박수가 보내지는 이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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