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로 보는 영화 ‘원스’

“때론 ‘음악’이 ‘말’보다 더 큰 감동을 전할 수 있다.”
지난 9월 10개관으로 개봉했던 ‘원스’는 13주차가 되면서 20개관으로 확대 개봉되었고 20만 명의 흥행에 육박하고 있다. 제작비가 1억4천만 원에 불과한 독립영화로 보면 이 영화의 흥행은, 더 많은 물량이 투여되는 기획영화들이 거둔 약 500만 명의 흥행에 버금가는 성공을 이룬 셈이다. 그 성공의 이유는 바로 존 카니 감독의 말과 다르지 않다. ‘원스’는 음악이 우리 인생에 주는 최고의 선물들을, 그 순간들을 86분 짜리 영상에 담아 전하는 음악에 관한, 음악에 의한, 음악의 영화다.

음악의 기적1. 노래의 진심이 다른 마음에 닿는 순간
사람의 마음을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잘 아는 사람도 아닌 불특정 다수를 향해 전하는 마음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니 그 마음이 노래를 통해 전달되는 그 순간은 음악이 기적을 만드는 지점이다. ‘원스’는 바로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길거리에서 노래하는 남자는 자신의 상처 입은 마음을 절규하듯 노래한다. 노래란 본디 상처를 어루만지는 자기 위안과 같은 것이기도 하니까. 그러니 그 노래는 누군가를 위해 하는 것이 아닌 자신을 위한 것이 된다. 그런데 혼자 마음을 다독이던 그 순간, 그 마음의 노래를 알아듣는 사람이 나타난다. 이것은 음악이 우리에게 전하는 기적적인 순간이면서 우리네 인생에서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사랑의 메타포이기도 하다.(OST. Say it to Me Now)

음악의 기적2. 음악이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순간
그렇게 만난 그들은 한 악기점에서 피아노와 기타 선율 속에 노래를 담아 서로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길거리에서 기타 하나 들고 절규하는 가난한 남자와, 피아노가 없어 맘씨 좋은 악기점에 잠깐 들러 피아노로 마음을 위안하던 가난한 여자는 아무런 설명 없이도 음악만으로 서로를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고단한 삶 속에서 그 고단함을 버티게 해주는 것이 다름 아닌 음악이며 악기라는 공감대 때문이다. 가사의 내용을 음미하지 않아도 서로의 목소리와 악기의 선율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영화 속 장면은 감동적이다. 그 노래와 연주가 서로의 상처를 쓰다듬기 때문이다. 이 기적적인 순간은 음악이 아니라면 영화 한 편을 통해서도 설명되기 어려운 장면이 아닐까. 눈이 아닌 귀로 보는 영화이기에 가능한 것이 아닐까. (OST. Falling slowly)

음악의 기적3. 음악으로 마음을 전하다
남자가 여자에게 자신이 만든 곡을 주고 여자가 거기에 가사를 붙이는 이 시퀀스는 이 영화의 백미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곡을 내준다는 것은 어쩌면 대단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되지만, 영화 속 남자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곡을 건넨다. 자신은 도저히 가사를 붙일 수 없을 것 같다며. 하루가 끝나고 다들 잠든 시간에 어두운 불빛에 의지해, 남자가 주고 간 CD플레이어를 들으며 여자는 곡에 가사를 붙인다. 그리고 CD플레이어에 소모된 건전지를 다시 사기 위해 딸의 소중한 저금통을 털고 파자마 차림으로 가게를 찾는 장면은, 그녀의 남편에 대한 마음과 그 마음을 담는 것을 허락한 남자가 주고간 곡에 대한 애정이 담겨 있다. (OST. If you want me)

음악의 기적4. 함께 노래하다
남자와 여자가 길거리의 음악가들을 모아 녹음실을 빌려 노래를 CD에 담는 장면은 이제 둘 사이에 흐르는 공감대와 사랑의 노래를 이제 세상을 향해 들려주겠다는 실천의 의미를 담고 있다. 시큰둥하던 엔지니어의 귀를 활짝 열게 만들고, 시간이 돈인 녹음실에서의 밤샘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만드는 그들의 음악은, 영화 속을 빠져나와 현실에 선 관객들의 마음마저 움직이게 한다. 밤샘 끝에 남자와 여자의 손에 쥐어진 CD는 몇 개에 불과하지만 그 CD에 담겨진 노래는 그들이 함께 노래했던 기적 같은 순간들과 마음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그 어느 것에도 비교될 수 없는 가치를 지닌다. 이로써 그들은 서로 헤어지지만 영원히 음악 속에서 하나가 된다. 이미 마음이 정해졌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언제든 부르면 달려갈 것이라 노래하는 남자처럼. (OST. When Your Mind's Made Up)

현실 속에서 음악이란 때론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한 어떤 것이다. 그것은 가난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이라도 찾으면 그 마음을 보듬어주는 우리네 삶의 치유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니 돈도 아니고, 화려한 영상도 아니며, 놀라운 스토리도 아닌 이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가난한 자들에게 더욱 공평한 음악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그들의 음악은 가난하지 않다.

섹시하고, 웃기고, 울리는 몸

‘색즉시공2’가 보여주는 몸은 섹시하다. 볼륨감 넘치는 몸들이 유혹적인 표정과 자세로 관객들을 자극한다. 살과 살이 부딪치고 거기서 토해져 나오는 환희의 비명소리는 관음 욕구를 충족시켜준다. 하지원이 떠나간 자리에 서게된 송지효의 몸은 귀엽게 톡톡 튀고, 전라연기를 펼친 이화선의 몸은 관능적이다. 전편에 이어 출연한 신이는 거침없는 화장실 유머를 날리며 섹시한 웃음을 유발한다. 때론 상황전개 자체가 지나칠 정도여서 자칫 여성들의 몸을 성적 대상으로 비하했다는 심각한 지적을 받을 만하지만, 영화 속에서 비하되는 건 여성들만이 아니다. 이 영화 속에서 남성들은 대부분 여성들에게 깨지고 비하되는 존재다. 화장실 유머가 그러하듯이 그 대상에는 성별이 없다. 비하되는 것은 이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청춘의 몸이다.

그러나 ‘색즉시공2’가 몸이 보여주는 섹시함만을 재미로 제공했다면 에로물 그 이상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색즉시공2’는 여기에 몸 개그를 접목한다. 주인공인 은식(임창정)과 경아(송지효)가 각각 몸이 강조되는 활동을 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전작에서 그것이 차력과 에어로빅이었다면 이번에는 K-1과 수영이다. 그들은 대학생이지만 말보다는 몸으로 웃긴다. 은식은 몸이 처할 수 있는 대부분의 굴욕적인 상황들을 보여준다. 그가 늘 반쯤 쳐진 피곤한 눈으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불쑥불쑥 솟아나는 몸의 욕구를 억누르려 할 때 웃음은 터져 나온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화장실 유머의 재연에 가까운 섹시한 몸 개그는 영화가 진행될수록 점점 슬퍼진다. 이것은 마치 아낌없이 망가지며 몸 개그의 진수를 보여주던 개그맨이 어느 순간 눈물을 보일 때 그 강도가 더 높아지는 것과 같다. 은식의 몸 개그는 사실 뭐하나 가진 것 없고 오로지 몸뚱어리 하나뿐인 미래가 불투명한 청춘의 몸부림이었다는 것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멜로로 빠진다. 전작이었던 1탄보다는 그래도 덜 신파적인 2탄의 멜로지만 여전히 맨 몸 하나로 세상과 겨루는 건 슬프다. 이것은 저 ‘바보들의 행진’의 병태에서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변하지 않은 청춘들의 아픔이다.

웃기면서도 울리는 이 청춘영화를 통해서 임창정은 제 몸에 맞는 옷을 찾아 입은 듯하다. 임창정의 연기는 종종 이 웃음과 눈물의 경계를 넘나드는 부분에서 빛이 난다. 허영만 화백의 만화를 영화화한 ‘비트’에서 환규라는 인물을 통해 보여준 임창정의 연기는 몸 개그와 눈물을 혼합한 그 지점에서 관객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너무 진지하거나 너무 가벼운 역할 속에서는 그의 진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말이다. ‘색즉시공2’에서의 은식은 그런 면에서 임창정의 연기결을 제대로 보여줄 수 있는 역할로 보인다.

‘색즉시공2’는 몸이 보여줄 수 있는 세 가지를 보여주는 영화로 적당히 섹시하고, 적당히 웃기며, 적당히 슬프다. 특별한 기대감을 갖고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지만 기대 없이 본다면 확실한 재미를 얻을 수도 있다. 그리고 거기서 우리네 몸이 보여주는 세 가지 양태를 통해 청춘의 한 때를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뜻밖의 수확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격지심과 우월감, 그리고 나 자신

인순이(김현주)는 플랫폼 앞에서 망설인다. 그녀는 전과자다. 고등학교 때 실수로 사람을 죽였다. 그래서 그네들 말로 별을 달았다. 복역하고 나와서도 그 별은 그녀에게 결코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다. 전과자라는 이유로 일자리에서 쫓겨나는 마당에 그녀는 “앙심품지 말라”는 주인의 말까지 들어야 하는 처지다. 별을 단 여자에 대한 사회의 편견은 그녀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뽑아 버린다. 그러니 그녀가 선택하려는 것은 달려오는 열차를 향해 몸을 날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전과자라는 편견에 가려 이 세상에서 아무도 불러주지 않을 것 같았던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 불러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상우(김민준)다. 유상우. 어렸을 때 둘도 없던 친구.

플랫폼으로 뛰어들 운명을 막아준 상우의 부름으로 인순이는 그래도 다시 살아보겠다 마음  먹는다. 그것은 어린 시절, 자신에게 전과자란 낙인이 붙기 이전의 기억으로의 회귀다. 어린 시절 잃어버렸던 엄마도 찾게 되고 상우와 다시 만나게도 되지만 편견은 저 바깥의 세계에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엄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인순이를 코디라 소개하고 그것도 모자라 이태리로 유학을 보내버린다. 상우는 동료들에게 인순이가 영국의 왕립디자인스쿨을 나왔다며 거짓말을 한다. 심지어 엄마는 전과사실이 밝혀지자 이유를 묻기는커녕 ‘남부끄러운’ 자신의 심정만 토로한다. 밖에서도 안에서도 별을 단 전과자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마찬가지. 그래서 그녀는 다시 플랫폼에 선다.

그런데 그 순간, 인순이는 또 누군가의 부름을 받는다. 그녀는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떨어진 취객을 살리기 위해서 플랫폼을 뛰어내린다. 그리고 그 사건은 별을 단 전과자를 ‘지하철녀’라는 새로운 이름의 별(스타)로 만들어버린다. 그것은 그녀에게 벌어진 두 번째 기적이지만 그 기적 또한 그녀가 바라던 일은 아니다. 인순이가 바라는 것은 그저 자신의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불리는 것이다. 어린 시절 놀이터에서 엄마의 부름에 집으로 돌아가던 아이들을 보며 간절히 원했던 것. 사회가 전과자라는 별을 달아 그녀를 부를 때 진정으로 듣고 싶었던 것. 엄마가 연극배우 이선영의 딸로서 소개할 때 진정으로 소개되고 싶었던 것. 또한 어울리지 않는 유명인이라는 껍데기로 불릴 때 돌아가고 싶었던 것. 그것은 바로 자신이다.

‘인순이는 예쁘다’는 전과자, 지하철녀처럼 수많은 이름으로 불려지는 그녀가 자신의 이름, 박인순으로 불려지는 과정을 찾아가는 드라마다. 인순이뿐만 아니라 드라마 속 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이름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서 살아간다. 인순의 엄마인 선영은 유명인이라는 허울 속에 살아가고, 그녀를 영원한 팬으로서 추앙하는 상우의 아버지 병국은 책임으로만 존재하는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간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만나면서 거기에는 어떤 가능성이 피어난다. 선물을 주겠다는 병국의 말에 물질적인 어떤 것을 기대했던 선영이 막상 병국이 가져온 붕어빵을 먹는 장면은 그들이 서로를 만나면서 자기 자신에 가까워질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처럼 인순과 상우의 관계 역시 자격지심과 우월감으로 극과 극을 대변되면서 그 간극을 좁혀나간다. 따라서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도달할 곳은 자격지심과 우월감을 모두 훌훌 벗어버리고 자기 자신으로서 서로를 만나는 그 지점이다. 이것은 사랑이 가진 가능성이다. 진정한 사랑은 허울이 아닌 그 사람 자체를 가감 없이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라는 전언이다. 별을 달거나 별이 되거나 그 어느 것도 원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 그렇게 불려지는 인순이처럼 수많은 나 아닌 나의 모습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 그 속에서 진정한 행복은 자신을 그 무엇도 아닌 자신으로서 인정하면서 예쁘다고 말할 때 가질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다름 아닌 사랑으로서 가능하다는 말을 인순이는 주문처럼 말하고 있다. “괜찮아. 난 착해. 난 예뻐. 난 사랑스러워. 난 훌륭해. 난 특별한 존재야.”라고.

끝없는 논란에도 불구, 대마불패 신화 건드리나

‘태왕사신기’에 대한 논란은 도대체 어디까지 갈까. 430억 원이 투여된 덩치 큰 대작만큼이나 논란도 끝이 없다. 지난 6월 네 번째로 방송연기를 발표했을 때, MBC의 반응은 의외였다. 아무리 외주제작사의 몸피가 커졌다고는 하지만 MBC는 거기에 대해 뭐라 한 마디 토를 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MBC가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이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급작스런 ‘태왕사신기’의 연기로 비어있는 월화의 밤을 채우기 위해 8부작 ‘신현모양처’가 급조되었지만 당연히(?) 반응은 없었고, ‘태왕사신기’와 겹쳐 SBS에서 방영하게 된 ‘쩐의 전쟁’은 당시 수목의 밤을 뜨겁게 달구며 MBC를 안타깝게 했다. 한편 화려한(?) 캐스팅과 소재만 난무하고 제대로 된 스토리가 부재했던 주말드라마 ‘에어시티’는 60억이 투여되었지만 시청률 10% 내외를 오가는 저조한 상황이었다.

이 정도의 상황에서 MBC가 그저 침묵으로 일관했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뚜껑을 연 작품이 어느 정도의 질을 담보했다는 것. 송지나 작가의 대본은 짜임새가 있었고, 김종학 PD의 연출은 명불허전이었으며, 배용준은 그만이 가질 수 있는 아우라로 작품 전체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잡음은 생겼다. 완성도 높은 사전제작을 주창했던 ‘태왕사신기’는 결국 시간에 쫓기는 ‘생방송 편집’을 하기에 이르렀고 급기야 테이프 입고가 늦어져 20분이나 뉴스를 연장 편성하는 초유의 사태를 만들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편성제작부문 김정규 부위원장은 ‘태왕사신기의 오만, 그리고 MBC의 굴욕’이라는 제목의 보고문을 통해서 “지난달 중순에는 제작시간 부족을 이유로 23회 방송이 어려우니 마지막회로 예정돼 있던 ‘태왕사신기 스페셜편’을 방송하겠다고 요구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이 일련의 사건들을 두고 보면 ‘태왕사신기’는 방송사의 고유권한인 편성권마저 뒤흔들 정도의 힘을 발휘했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것들은 모두 작품에 대한 욕심에서 빚어진 결과일 수도 있다. 보다 좋은 작품을 만들다 보니 나타난 부작용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부작용이란 결국 우리네 드라마의 고질병인 시간에 쫓기는 방송제작 행태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태왕사신기’의 잇단 논란들은 그 고질병이 대작이라는 힘을 등에 업고 이제는 편성까지 좌지우지하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작품 자체에도 영향을 미쳤다.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만든 계속되는 연기자들의 부상과 끝없이 쫓기는 시간과의 전쟁 속에서 ‘태왕사신기’는 그 마지막회의 화룡점정을 하지 못했다. 시청자들의 “안 본 걸로 할 테니 다시 찍어달라”는 요구는 대작드라마에 대한 기대가 그만큼 컸다는 것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대작드라마를 표방한 ‘태왕사신기’의 마지막으로는 너무 밋밋했던 데서 나온 비판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제 불거져 나온 것은 ‘대작’이라는 거창한 용어를 만든 430억 원이란 돈의 행방이다. MBC 노조측은 430억 원 중 배용준 개인에게 지급된 금액이 60억 원에 달한다고 하면서 대작이란 말은 허명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제작사와 배용준 측은 이것을 극구 부인하고 나서고 있어 그 진위를 알 수 없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이런 논란은 대작드라마가 남긴 깊은 후유증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더 큰 문제는 지금부터다. 그나마 배우들의 거품 개런티에 대한 자정의 목소리가 자리를 잡아가는 요즘, 이것이 ‘태왕사신기’의 대작 마케팅을 타고 다시 고개를 드는 것은 아닌가하는 우려 때문이다. 과정이야 어찌됐건 방송사의 편성까지 움직일 정도의 성공을 거둔 ‘태왕사신기’가 드라마 제작의 새로운 모델로 자리잡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다. 대마불사의 잘못된 신화가 드라마의 대작화를 부추기지는 않을까 하는 안타까운 생각 때문이다.

돈들이면 된다는 사고방식은 ‘대작드라마’의 환상일 뿐이다. 시청자들은 볼거리보다 스토리에 더 열광하며 그렇기에 드라마가 집중해야 할 것은, 규모보다는 참신한 연출과 다양한 소재발굴, 작가군의 양성 그리고 새로운 제작시스템의 도입 등을 통한 드라마의 완성도이다. MBC가 꿈꾸던 ‘태왕사신기’라는 쥬신의 별은 저 드라마 속의 담덕처럼 실제로 반짝반짝 빛났던 것이 사실이나, 그 별의 반짝임만큼 그림자도 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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