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커뮤니티’, 이 독보적인 정치 실험 서바이벌이 불러 일으킨 기대감

더 커뮤니티

흔히들 서바이벌 프로그램 하면 떠올리는 느낌은 ‘피곤하다’는 것이 아닐까. 치열한 경쟁이 펼쳐지고 누군가는 생존하고 누군가는 탈락한다. 그러면서 그 생존의 법칙이 사실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양이라고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은 은연 중에 강요한다. 그 많은 오디션 형식의 서바이벌 프로그램들을 떠올려 보라. 마지막 한 명의 생존자만이 독식하는 그 욕망의 질주를 바라보며 승자에게 박수를 보내지만, 동시에 그것이 우리가 사는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라는 걸 확인하면서 씁쓸해지는 그 양가감정들이 피어오르지 않던가. 

 

하지만 웨이브 오리지널 예능 <사상검증구역: 더 커뮤니티(이하 더 커뮤니티)>는 마치 이런 사회가 생존경쟁의 장이라는 단정이 섣부르다고 말하는 듯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물론 이 서바이벌 프로그램도 여타의 그것들과 다르지 않게 서로 다른 가치관과 살아온 배경, 성향 등을 가진 출연자들을 한 자리에 모여 놓는 것으로 시작한다. 프로그램이 그 사람의 사상을 나누는 기준은 네 가지다. 정치, 젠더, 계급, 개방성이 그 키워드다. 이로써 진보와 보수, 페미니즘과 이퀄리즘, 서민과 부유, 개방과 전통으로 출연자들의 사상은 마치 MBTI처럼 구분된다. 

 

그래서 이런 구분은 출연자들 간의 다른 가치관과 생각들로 인한 갈등과 대결을 상상하게 한다. 여타의 서바이벌이었다면 이들은 ‘사상검증’이라는 이름으로 누군가의 사상을 맞춰 탈락시킬 수 있다는 룰이 공개되자마자, 공격과 반격이 벌어지며 순식간에 아비규환이 됐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국민의 힘 소속 도봉갑 당협위원장 출신인 슈퍼맨(김재섭)과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자 문재인 정부 대통령 비서실 청년 비서관 출신인 백곰(박성민)처럼 정치 최전선에서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던 이들은 팽팽한 대립이 불을 보듯 뻔한 일처럼 여겨진다. 

 

나아가 페미니스트인 하마(하미나)와 페미니즘과는 어딘가 거리가 있어 보이는 707 특수단 상사 출신 다크나이트(이창준)이나, 홍콩대 출신의 금수저를 자처하는 지니(이지나)나 흙수저를 자처하는 다크나이트나 청와대 여성 경호원 출신 낭자(이수련)처럼 분명한 차이가 느껴지는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있으니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더 커뮤니티>는 이러한 차이가 결국 분란을 만들고 서로가 서로를 저격하며 누군가를 탈락시키는 흐름으로 흘러갈 것이라는 예상을 보기좋게 빗나간다. 성향과 출신이 다른 이들은 결코 함께 생존해가는 커뮤니티를 구성하기 어렵다는 생각 자체가 그저 고정관념이고 편견의 소산이라는 걸 보여준다. 

 

보다 나은 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 테드(이승국)가 통찰력으로 빠르게 현재 그들이 놓여 있는 상황들을 브리핑하듯 정리하면서 다 같이 생존할 수 있는 ‘천국’의 이상을 설파하면, 정치적 성향에 있어서는 충돌하지만 같은 정치권에서 활동했던 이력을 갖고 있어 오히려 더 잘 소통되는 슈퍼맨과 백곰이 머리를 맞대고 그 방법들을 고민한다. 데이터 전문가이자 방송인인 그레이(전민기)나 맥심 모델이지만 누구에게나 호감을 주는 슈가(김나정)가 특유의 커뮤니케이션 능력으로 커뮤니티의 소통을 풀어간다. 

 

이러한 통상적인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예상을 깨는 의외의 전개 때문일까. <더 커뮤니티> 이렇다할 대대적인 홍보 없이도 방송이 진행되면서 입소문을 탔다. 웨이브측의 발표에 의하면 <더 커뮤니티>는 3~4회가 공개된 오픈 2주차 전체 시청시간이 앞선 1주차 대비 120% 증가했고, 설 연휴였던 오픈 3주 차에는 4회차 동시 공개(5~8회)라는 파격 편성으로, 오픈 4주차에는 첫 주 대비 무려 420% 상승한 시청시간을 기록했다. 또 매 신규회차 오픈 당일인 금요일 웨이브 예능 장르 신규유료가입자 견인 1위를 기록했고, 특히 30대 여성 시청시간 비율이 30%를 차지하는 성과를 냈다. 

 

물론 <더 커뮤니티>는 서바이벌이 갖는 분란도 엄연히 존재했다. 모두가 생존하자는 이들의 노력들을 현실주의자인 다크나이트나 낭자 그리고 다수의 서바이벌 프로그램 경험자이기도 한 마이클(윤비)은 앞에서는 커뮤니티의 결정에 따르면서도 뒤에서는 비웃는다. 그것은 마치 현실주의자들의 조롱처럼 처음에는 느껴지지만 뒤에 가면 이들이 치열하게 살아왔던 삶 자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나올 수밖에 없는 반응들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즉 누군가는 아버지의 사업이 망해서 베이징덕 요리를 먹지 못하게 되어 너무 슬퍼 울었다는 이야기를 짜장면 한 그릇도 사치로 여겼던 이들은 납득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처럼 생각과 성향과 출신이 다른 이들이 꾸려가는 커뮤니티는 놀랍게도 꽤 오래도록 유지된다. 전체 11회 분량에서 8회까지 모두가 생존하는 ‘평화의 시대’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그 평화는 룰 자체가 더 독해지고 불순분자인 벤자민(임현서)의 활동이 본격화되면서 8회에 깨진다. 어쨌든 탈락자가 탄생할 수밖에 없는 룰의 압박 속에서 평화와 공동 생존을 주장해왔던 이들 중 이를 깨고 배신과 저격을 시도함으로써 첫 번째 탈락자가 탄생한다. 그리고 이 균열은 또 다른 탈락자로 이어진다. 불순분자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 불순분자를 모두가 협력해 커뮤니티에서 탈락시키지만 또 다른 이가 그 역할을 부여받는 지독한 상황이 펼쳐진다. 

 

결국 <더 커뮤니티>는 서바이벌이라는 형식이 그러하듯이 그 생존의 틀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많은 이들이 탈락하고 끝내 살아남는 이들이 상금을 분배해 가져가는 것이 이 형식의 결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건 애초 사상이 전혀 다른 이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존의 커뮤니티를 꿈꿨던 그 이상이 깨지는 현실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다크나이트가 주장하듯이 이들이 그간 해왔던 토론과 노력들이 마치 ‘배운 이들의 탁상공론’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커뮤니티>의 서바이벌이 달랐던 건 정해진 생존 현실의 결말을 향해 간다고 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끝없이 이들이 공존을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는 점이 아닐까. 10회에 미션으로 주어진 ‘인생스피치’에서 테드는 인상적인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위선자’라는 키워드를 갖고 개인적인 경험까지 꺼내 들려준 그의 이야기는, 자신이 가진 ‘착한 아이 콤플렉스’가 위선일 수 있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자신 안에 있는 욕망들을 마구 꺼내놓기보다는 그걸 콘트롤하며 살아가는 ‘위선’을 선택할 거라는 거였다. 

 

이건 무얼 의미하는 걸까. <더 커뮤니티>에서 8회까지 공존의 이상을 꿈꾸며 해왔던 노력들이 ‘위선’이라고 간단히 폄하될 수 없다는 걸 말해주는 것이다. 설사 현실은 끝내 이상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런 커뮤니티라는 틀을 통해 함부로 자신만의 욕망을 마구 꺼내놓는 걸 스스로 통제하려 애써 노력하는(물론 실패할 수 있겠지만) 것 자체가 아름다운 선택일 수 있다는 걸 이 독특한 서바이벌은 보여주고 있다.

 

이제 리얼리티쇼 트렌드 깊숙이 들어와 있는 한국 예능에서 이제 ‘서바이벌’도 조금은 다른 시도가 가능할 수 있다는 걸 <더 커뮤니티>는 보여줬다. 그건 정치라는 소재적 차원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일종의 ‘사회 실험’이라고 할 수 있어 그저 프로그램에 머무는 게 아니라 다양한 연구와 논의가 가능할 수 있는 보다 본격적인 리얼리티쇼의 문을 열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최근 몇 년 간 진행된 서바이벌 프로그램들 중에서 단연 <더 커뮤니티>는 도드라져 보인다. 이 프로그램이 연 이 문을 통해 리얼리티쇼의 새로운 영역들이 열릴 것 같은 기대감이 생기는 이유다.(사진:웨이브)

‘킬러들의 쇼핑몰’, 냉혹함 속에서 더더욱 부각된 이동욱의 따듯함

킬러들의 쇼핑몰

‘이동욱은 어딘지 겉으로는 차갑고 냉정한 이미지에 안으로는 뜨거운 열정 같은 걸 갖고 있는 배우다. 그래서 무표정한 얼굴로 있으면 한없이 냉정한 느낌을 주지만, 그런 그가 갑자기 눈물을 뚝뚝 떨어뜨릴 때는 마치 그 얼음이 녹아들어 흘러내리는 물 같은 처연함을 느끼게 해준다.’ 과거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가 한창 인기를 끌던 시절 이동욱의 진가에 대해 내가 썼던 이같은 표현들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킬러들의 쇼핑몰’의 정진만이라는 캐릭터에서도 이동욱의 그 처연한 눈빛을 볼 수 있으니. 

 

“잘들어 정지안.” ‘킬러들의 쇼핑몰’은 이 대사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그건 이 액션스릴러가 갖고 있는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일단의 킬러들이 정지안(김혜준)의 집을 무차별 난사하고 공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되는 이 드라마는, 이 위기 상황을 어떻게 그녀가 극복해나가는가가 전체 서사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생존상황이 시시각각 펼쳐지지만, 그 때마다 정지안은 삼촌 정진만이 평소에 했던 말들을 떠올린다.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 과거로 돌아가 정진만이 어떻게 과거 용병 시절을 보냈고, 어쩌다 은퇴하게 됐으며, 킬러들의 무기를 거래하는 쇼핑몰을 운영하게 된 이야기와, 킬러들의 타깃이 되어 부모를 모두 잃게 된 정지안을 거둬 함께 지내게 됐던 이야기 등을 조금씩 소개한다. 그래서 드라마가 펼쳐내는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건 정지안이지만, 시청자들은 시청 내내 어딘가 정진만과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정진만이라는 인물이 보여주는 아우라가 이 작품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이유다. 

 

앞서 언급한 이동욱의 냉정한 듯 따뜻한 ‘겉차속따’의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처연한 분위기는 이 작품에서도 힘을 발휘한다. 한때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민간인들이 다치는 걸 막으려 했던 정진만이라는 인물은 겉은 얼음처럼 차갑고 단단하지만 따뜻한 내면에 의해 안으로는 녹아흐르는 눈물이 가득 채워진 듯한 인물이다. 이런 이동욱의 이미지에 의해 잘 구축된 정진만이라는 캐릭터가 더더욱 부각되는 건, 그와는 대척점에 놓여 대결구도를 만드는 베일(조한선) 같은 돌처럼 냉혹한 킬러들과의 대비 때문이다. 저들과 달리 그는 피와 눈물을 흘리며 아파한다. 그리고 그 인간적인 끈끈함은 이 인물이 결국은 갖게 되는 가장 큰 힘이 된다. 그로 인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파신(김민)이나 민혜(금해나) 같은 죽음도 불사하고 그를 돕는 진짜 팀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겉으론 팀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돈으로 묶여 그 목적이 사라지면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베일 일당들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다. 

 

1999년 데뷔부터 현재까지 베스트극장이나 드라마시티 같은 단역부터 시트콤을 거쳐 멜로, 가족드라마, 사극, 장르물 등 무수한 작품들을 해왔지만, 이동욱의 존재감이 도드라진 건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의 저승사자 역할처럼 어딘가 신비로우면서도 이질감이 느껴지는 그런 인물들에서였다. ‘아이언맨’의 몸에 칼이 돋는 역할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은 이미지를 드디어 꺼내놓은 이동욱은, ‘도깨비’의 저승사자로 제 몸에 딱맞는 옷을 입은 후, ‘구미호뎐’ 시리즈로 펄펄 날았다. 

 

이렇게 된 건 독특한 분위기를 갖는 외모 때문이기도 했지만, 익숙한 역할을 반복적으로 하기를 거부하며 새로운 영역을 계속 넘보는 그의 성향 때문이기도 했다. 이를 테면 ‘라이프’ 같은 작품에서는 소신이 확실한 응급의료센터 전문의 역할을 했지만, ‘진심이 닿다’ 같은 로맨틱 코미디의 달달한 역할을 소화하더니 ‘타인은 지옥이다’에서 살벌한 사이코 패스 역할을 연기하는 식이다. 심지어 ‘배드 앤 크레이지’라는 작품에서는 유능하지만 나쁜 놈과 정의롭지만 미친 놈의 양자를 오가는 이중인격을 가진 인물을 연기하기도 했다. 

 

차가움과 따뜻함을 동시에 품은 듯한 이미지나 익숙한 역할 대신 새로운 영역을 넘보는 연기에 대한 열정은 그가 그려내는 인물의 독특함에서도 드러난다. 예를 들어 ‘쓸쓸하고 찬란하신 도깨비’에서 그가 보여준 저승사자는 우리가 ‘전설의 고향’으로 늘 봐왔던 검은 도포에 갓을 쓴 그런 인물이 아니다. 현대적으로 재해석되어 댄디한 양복을 걸치고 나타난 이 새로운 저승사자는 그래서 설화 등에서 고정화된 캐릭터 이미지를 트렌디하게 해석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것은 ‘구미호뎐’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구미호라는 캐릭터는 역시 ‘전설의 고향’에서 주로 소개됐는데, 여성으로 그려지곤 했다. <구미호뎐>은 남성 구미호를 그려내면서 초능력을 쓰는 새로운 히어로의 모습으로 재해석됐다. 이동욱이어서 당연한 듯 받아들여지게 됐던 뉴웨이브 남성 구미호라고나 할까. 그래서 시청자들은 이런 작품들 속에서 ‘이동욱이 개연성’이라는 이야기들을 종종 하곤 한다. 독특한 스타일, 세계관, 톤 앤 매너를 가진 작품일수록 그의 연기가 설득력있게 보이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유재석이 이끄는 유튜브 채널 ‘핑계고’에 자주 출연하면서 이동욱이 가진 어딘가 심드렁하지만 그러면서도 장난기와 따뜻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그런 면모들이 대중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유재석과 함께 하는 모습에서 그는 차가운 듯 툴툴거리는 모습을 자주 보이지만, 그것이 더할 나위 없는 편안함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준다. 억지로 만들어내는 텐션이 아니라 자연스러움이 묻어있어 그 점이 대중들에게 호감을 주고 있는 것. ‘킬러들의 쇼핑몰’의 정진만이라는 캐릭터를 통해서도 그렇지만 이처럼 ‘겉차속따’의 인물을 지금의 대중들이 좋아하는 이유는 뭘까. 

 

거기에서는 위험요소들이 적처럼 도처에 깔린 현실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냉정할만큼 단단하게 맞설 수 있으면서도, 같은 편끼리는 따뜻함을 잃지 않는 히어로에 갈증을 느끼는 대중들의 판타지가 느껴진다. 그건 아마도 팀으로 꾸려지곤 하는 집단 속에서 구성원들이 원하는 리더십이기도 할 게다. 권력과 이익으로 얄팍하게 묶여진 베일이 이끄는 팀과는 전혀 다른, 피와 땀과 눈물로 묶여진 정진만이 이끄는 팀의 끈끈한 리더십이 그것이다. (사진:디즈니+)

‘닥터 슬럼프’, 흔들리는 우리를 붙잡아주는 소중한 것들에 대하여

닥터 슬럼프

“아유 니가 애면 좋겠다. 목마나 한번 태워주고 저 문방구 가 가지고 문제집이나 몇 권 사 주고 이라믄 입이 귀에 걸렸는데. 그 때야 니 기분 풀어 주는 거 쉬웠지. 아휴 지금은 우째야 니 기분 풀리는지도 모르겠고.. 이 삼촌이 해줄 게 없어 가지고 여가 애리.” JTBC 토일드라마 <닥터 슬럼프>에서 태선(현봉식)은 울적해하는 조카 하늘(박신혜)의 울적해진 기분을 풀어주고 싶다. 하지만 뭘 해줘야 할지 또 자신이 뭘 해줄 수 있을 지 모르겠다고 털어 놓는다. 

 

“니 병원 그만 두고 삼촌이 몇 번이나 물어보려고 했는데 왜 그만뒀니, 응? 뭣이 그래 힘들었는가, 아니 뭐 우리가 도와줄 건 없는가 해가. 이 삼촌이 배운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니한테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니가 기댈 어깨를 내 주는 거뿌이 더 있겠나. 근데 또 니가 뭣이 모자라 가지고 이 보잘 것 없는 삼촌 어깨에 기대겠노.” 

 

해줄 게 없어서 마음이 아프다는 말이지만 태선의 그 말에 하늘의 울적했던 마음은 한껏 누그러진다. 태선은 일부러 옥상에 심어진 양배추 이야기를 꺼내놓는다. 우울증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하늘의 엄마 월선(장혜진)이 바로 갖다 심은 거라며, “느그 엄마가 이래 양배추 갖다 심는 거 말고는 니한테 해 줄 게 뭐 있겠냐”고 그 마음을 에둘러 전한다. 마침 선 자리라는 걸 속인 엄마 때문에 그 자리에 나갔다 봉변을 당하고 돌아와 엄마에게 “내가 창피하냐”고 쏘아댔던 하늘에게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말이다. 

 

과연 우리를 송두리째 뒤흔드는 세상 속에서 그래도 우리가 계속 살아갈 수 있게 하는 힘은 뭘까. 그건 문제를 척척 해결해주는 그런 능력만이 아니고, 그저 힘들 때 옆에서 바라봐주고 어깨를 내주고 토닥여주는 그런 따뜻한 마음이 아닐까. <닥터 슬럼프>가 태선이라는 인물을 통해 하려는 이야기가 그것이다. 너무나 평범해 해줄 수 있는게 없다고 말하지만, 바로 그 해주고 싶은 마음만으로도 충분히 버텨내게 해주는 힘이 된다는 걸 태선은 보여준다. 

 

태선의 존재감이 두드러지는 건 그와 정반대의 위치에 서 있는 민경민(오동민) 같은 인물과의 대비 때문이다. 처음 마취과에 와서 적응을 잘 하지 못하는 하늘을 선배로 다가와 도와주며 든든한 기댈 어깨처럼 보였던 그는 사실 거짓으로 속이고 하늘을 이용하기만 하다 버린 인물이었다. 해줄 수 있는 것들이 꽤 많은 힘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이, 오히려 거짓으로 이용만 하려 하고 그래서 더 큰 배신감을 안기기도 하는 냉혹한 현실을 이 인물은 표상한다. 

 

태선과 경민의 대비가 보여주듯이 힘겨운 상황에서도 우리를 버티게 해주는 건 무언가를 해줄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해주고픈 마음이다. 마음 없는 능력은 이용하는 것으로 상대를 더 무너뜨릴 수 있는 반면, 능력이 없어도 진실된 마음은 그 따뜻함만으로도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다. 

 

그리고 이건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고 그래서 1등을 받은 성적에 집착하기도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늘 한결같은 월선 같은 부모의 마음이기도 하다. 공부하느라 아버지가 죽는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졌던 하늘에게 월선은 말한다. “하늘아 괘않다. 죄책감 내리 놔라. 아빠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니 아빠여서 행복했다더라. 우리는 진짜 니 부모라서 억수로 행복했다.” 

 

<닥터 슬럼프>는 대단한 능력을 갖고 있고 그래서 성공한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해지진 않는다고 정우와 하늘을 통해 말하고 있다. 그들이 갖게 된 우울증이나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마음의 병은 그 성공에는 그만한 대가가 따른다는 걸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넘어졌을 때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워주는 것 역시 그런 대단한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장 해줄 수 있는 건 없어도 서로를 걱정해 기댈 어깨를 내주는 그런 마음을 통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태선이나 월선 같은 늘 가까이 있어 당연한 듯 여겼던 사람들이 진짜 기댈 어깨였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고 있다.

 

정우가 성형외과 의사이고 하늘이 마취과 의사라는 설정은 그래서 이 부분에서 더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하늘이 하려고 했던 마취과 의사는 어찌 보면 수술을 하는 의사의 든든한 기댈 어깨 같은 존재였을 테니 말이다. 외상후 스테레스 장애로 수술방에서 공황을 겪는 정우 옆에 마취과 의사로 나타난 하늘의 존재가 더욱 든든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거기에는 하늘의 능력만이 아닌 마음이 느껴지니 말이다. (사진:JTBC)

장태유 감독이 부여한 ‘밤피꽃’의 유쾌하면서도 진중한 톤 

밤에 피는 꽃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대본이다. 매력적인 캐릭터와 흥미진진한 사건전개가 펼쳐지는 그 밑그림이 분명하게 그려져야 그 위에 연출이든 연기든 힘을 부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들 드라마는 ‘작가 놀음’이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작가만큼 중요해진 건 연출자의 몫이다. 그건 최근작들이 멜로면 멜로, 액션이면 액션, 사극이면 사극처럼 분명한 한 장르에 머물기보다는 그 장르들이 복합적으로 뒤섞이는 경향을 띠기 때문이다. 이 때 필요한 건 다양한 장르들이 튀지 않게 조율하며 전체 드라마의 톤을 맞춰내는 일이다. 

 

무려 18.4%(닐슨 코리아)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종영한 MBC <밤에 피는 꽃>은 그 다양한 장르들의 겹침이 많은 작품이다. 낮과 밤이 다른 수절과부 조여화(이하늬)라는 인물의 설정 자체가 그렇다. 낮에는 과부로서 수절하며 살아가는 열녀의 길이 강요되는 삶을 살아가지만, 밤이 되면 복면을 하고 담을 넘어 저잣거리로 나와 홍길동 같은 의적 활동을 벌이는 인물이다. 낮이 보수적인 조선 사회를 담은 고전 사극의 장르적 색깔을 갖는다면 밤은 그 사극의 틀을 깨는 액션과 활극이 펼쳐지는 히어로물의 색깔이 펼쳐진다. 

 

또 수절과부의 이 이중적인 생활은 이 인물에게 벌어진 비극적인 과거의 사건과 연결되면서 그 진실을 찾아나가는 추리극의 성격을 띠고, 그 사건은 선대왕의 의문사와 연결되어 있어 시아버지 석지성(김상중)과 왕 이소(허정도) 사이에서 벌어지는 정치극의 색깔도 갖고 있다. 물론 사건을 수사하면서 금위영 종사관 박수호(이종원)와 조여화가 엮어지는 멜로도 빠지지 않는다. 박윤학(이기우)과 연선(박세현)의 서브 멜로도 빼놓을 수 없다. 

 

그래서 사극의 톤에 현대극적인 히어로물의 색깔을 얹고 그 안에 코미디와 멜로를 풀어가면서 추리극과 정치극까지 엮어내는 작업은 결코 쉬울 수 없다. 만일 제대로 엮어지지 않으면 작품은 이도 저도 아닌 지리멸렬한 지경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구슬들을 하나로 꿰어 일관된 톤을 만들어내는 것이 작품의 관건이 되는 이유다. 

 

최근 필자와 만난 자리에서 장태유 감독은 그 중심을 잡아주는 톤이 중요했다며 “코미디와 액션”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했다. 사실 수절과부이고, 그렇게 된 것 역시 석지성이라는 인물의 무서운 계략 때문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밤에 피는 꽃>의 색깔을 무겁고 어두울 수 있었다. 하지만 장태유 감독은 끝내 풀어지는 사건의 결말만이 아니라 그 과정도 충분히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실제로 드라마는 그래서 여러 코미디적 상황들이 전체 서사의 줄거리들 사이에 꽉 채워져 있었는데, 이를테면 조여화가 시어머니 유금옥(김미경)에 의해 가마에서 내리는 법을 반복해서 연습하는 대목이 그렇다. 과거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소재로 활용되기도 했던 그 장면은 진지한 시어머니의 면면을 놓치지 않는 김미경의 연기와 이를 코믹하게 풀어내는 이하늬의 연기 톤이 마주하면서 생겨나는 부조화로 빵빵 터지는 웃음을 만들었다. 

 

또 호판 염흥집(김형묵)이 애지중지하던 산중백호도는 드라마 속 사건들 중 중요한 단서로 등장하는데, 조여화가 그 그림을 우스꽝스런 그림으로 바꿔치기하는 장면이 코미디로 그려졌다. 그런데 장태유 감독은 그 바꿔치기한 그림의 우스운 톤을 살려내기 위해 직접 그 그림을 며칠에 걸쳐 그렸다고 한다. 장 감독이 이번 작품에서 얼마나 코미디에 진심이었는가를 잘 드러내는 대목이다. 

 

장태유 감독이 깔아 놓은 드라마 전체의 이 톤 위에서 이하늬는 펄펄 날았다. 장 감독 역시 자신이 바랐던 코미디와 액션의 톤을 이하늬가 제대로 소화해냄으로써 작품의 색깔이 완성됐다고 했다. 이하늬가 중심을 잡아주면서 드라마의 다양한 결들이 그 주변 인물들의 색깔에 따라 펼쳐질 수 있었다. 이를테면 석지성 앞에서는 추리물과 정치극의 색깔이, 박수호 앞에서는 짝패 액션과 더불어 달달한 멜로의 색깔이 그려졌고, 다양한 주변인물들 이를테면 연선과 봉말댁(남미정), 비찬(정용주)과 황치달(김광규) 같은 인물들의 자잘한 코미디 상황극들이 채워졌다. 

 

<밤에 피는 꽃>의 성공은 그래서 좋은 대본과 연기자들의 호연과 더불어 장태유 감독의 전체 작품의 톤을 맞춰낸 균형잡힌 연출이 더해진 결과였다. 그리고 더더욱 복합적인 장르들이 많아지는 현 추세에 이러한 감독의 역할은 갈수록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어떤 톤으로 중심을 잡느냐가 성패를 가르는 관건이 되는 시대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진: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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