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어게인3’, 다시 부른다는 포용성이 빨아들인 실력자들

싱어게인3

“제가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1등을 하기는 했는데 화제성이... 많이 차이가...” JTBC <싱어게인3>에서 타 오디션 우승자로 나온 37호 가수는 그런 말로 자신이 이 프로그램에 나온 이유를 설명했다. 그녀는 이미 시청자분들도 다 알고 있을 KBS <새가수>의 우승자인 류정운이다. 그녀의 말대로 우승까지 했지만 그 이름은 낯설다. 물론 <새가수>라는 오디션 프로그램 역시 낯설긴 마찬가지지만. 그녀는 “<싱어게인> 특유의 기준이 너무 부럽다”고 했지만 네 개의 어게인만을 받아 합격 보류 판정을 받고 최종에서는 결국 탈락했다. 

 

역시 타 오디션 우승자로 나온 38호 가수는 다름 아닌 <팬텀싱어> 시즌1 우승팀 포르테 디 콰트로의 김현수였다. 그는 <싱어게인3>에 나온 이유로 “성악 베이스로 노래를 하고 무대에 섰었는데 여러 장르를 노래 하다 보니까 발성적으로 한계도 있고 사실 헤매고 있는 중”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 역시 다 한 개의 어게인만을 받아 탈락했다. 

 

27호 가수 역시 채널A <보컬플레이>의 우승자인 임지수였지만 <싱어게인3> 무대에 서게 된 이유는 코로나19였다.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우승했지만 코로나가 터지면서 자신을 찾아주는 무대가 없었다는 것. 그래서 유튜브에서만 노래를 해왔는데, 구독자분들이 <싱어게인3>에 꼭 나와 달라는 메시지를 달아줬다고 했다. 그녀는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이 타 오디션에 참가했던 분들도 “당당하게 참가할 수 있는 오디션>”이라고 했다. 그녀는 7개의 어게인을 받아 말 그대로 당당하게 합격했다. 

 

이번 <싱어게인3>는 유독 실력자들이 쏟아졌다. 그걸 알 수 있는 대목은 1라운드만 무려 3화까지 채워질 정도였다는 점이다. 한 회 당 두 시간이 넘는 방영시간을 갖고 있다는 걸 감안하면 얼마나 많은 실력자들이 1라운드 경연을 치열하게 치렀는가를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실력자들이 이번 시즌에 특히 쏟아져 나온 건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류정운이 말한 것처럼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인지도와 화제성이 이제 하나의 브랜드가 될 정도로 확고해진 게 그 하나라면, 김현수처럼 성악을 했지만 새로운 도전을 하고픈 이들에게도 문이 열려있기 때문이다. 

 

특히 임지수가 말한 것처럼 코로나19는 더더욱 설 무대가 없던 가수들을 <싱어게인3>로 모여들게 만든 이유가 됐다. 물론 거기에도 전제가 있었다. <싱어게인>이라는 프로그램이 가진 포용성이 그것이다. 이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은 ‘다시 부른다’는 단 하나의 기획 의도로 다양한 영역의 가수들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었다. 완전한 ‘찐무명’도 있지만, 이미 아는 사람은 아는 ‘재야의 고수들’도 참여하고, 한 때 그 시대를 떠올리게 할 정도의 히트곡을 냈지만 기억에서 잊혀진 슈가맨들이나 OST를 부른 가수들도 심지어 타오디션 우승자들에게도 문이 열려 있다. 

 

<슈퍼밴드> 참가자들로 이미 익숙한 58호 가수로 참가한 홍이삭이나, 12호 가수 임윤성 같은 이미 시청자들에게 익숙한 가수들도 들어와 있지만, 국카스텐 하현우와 함께 이른바 4대 천왕 출신이라는 26호 가수 김길중이나, 특유의 허스키 보이스로 재야에서는 이미 유명한 5호 가수 김마스타, <사랑의 불시착> OST로도 잘 알려진 49호 가수 소수빈, 신촌블루스의 보컬로 블루지한 감성에 국악 창법에 가까운 폭발적인 가창력으로 유명한 25호 가수 강성희 등등 엄청난 실력자들이지만 대중들에게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가수들이 이번 <싱어게인3>에는 줄줄이 등장했다. 

 

여기에 진짜 찐무명이지만 매력적인 보이스에 만만찮은 실력을 보여준 ‘<싱어게인> 키드’ 31호 가수 서윤혁이나, 연천군 캠핑장에서 노래를 불렀다는 46호 가수 신해솔, 다비치 같은 여성 듀오가 되고픈 포부를 드러낸 52호 가수 아샤트리, 자신만의 그루브로 박진영의 ‘니가 사는 그 집’을 불러 올 어게인을 받은 56호 가수 다린, 독보적인 음색으로 다른 공간으로의 순간이동을 시켜주는 듯한 무대를 선사했던 47호 가수 테종 같은 막강한 라인업들이 채워졌다. 

 

사실 어찌 보면 방송과 동시에 인터넷을 통해 그 가수가 누구인가를 쉽게 찾을 수 있어 ‘○호가수’라고 부르는 것이 무슨 소용일까 싶다. 그만큼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진 않았어도 이미 실력이 검증된 가수들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이름을 일부러 가리고 ‘다시 부른다’는 기치를 내세워 그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포용성은 이 음악 오디션 프로그램을 독보적으로 만드는 중요한 이유다. 그 가수가 누구인가를 찾는 과정 또한 그 가수를 알아가는 과정으로 채워지고 있으니 말이다. 

 

결국 막강한 실력자들이 쏟아진 <싱어게인3>가 말해주는 건 대중적으로 알려지진 않았어도 저마다의 매력을 가진 다양한 가수들이 넘쳐난다는 것이다. ‘무명가수전’이라는 부제를 단 <싱어게인>은 그래서 이들 실력자들을 빨아들이는 블랙홀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이 됐다. 이제 겨우 첫 라운드를 마친 <싱어게인3>가 펼쳐놓을 화수분 같은 매력의 무대들이 기대되는 이유다. (사진:JTBC)

‘운수 오진 날’이 담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사회적 의미

운수 오진 날

“저, 고통을 못 느껴요.” 금혁수(유연석)는 사고로 편도체에 문제가 생겨 공포도 고통도 못느끼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금혁수(유연석)는 그걸 ‘신기한 능력’이라며, 운전을 하고 있는 택시기사 오택(이성민)에게 굳이 손바닥을 칼로 긋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을 보며 오택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른다. 마치 제 손을 긋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금혁수는 무표정하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은 티빙 오리지널 드라마 <운수 오진 날>이 이 살벌한 논스톱 스릴러를 통해 담고 있는 게 무엇인가를 정확히 드러낸다. 그건 ‘타인의 고통’에 대한 이야기다. 한 평범한 택시기사가 연쇄살인범을 손님으로 태우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다룬 스릴러의 근간은 바로 금혁수라는 사이코패스에서 나온다. 별 이유 없이 재미로 무고한 이들을 살해한 이 사이코패스는 이제 해외로 밀항을 하려 하고, 거기에 택시기사가 말려들게 된 것. 

 

금혁수가 살인까지 아무런 감정없이 하게 된 건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의 고통을 전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는 저들이 어떤 고통을 당하는지에 대한 감각 자체가 없다. 하지만 그와 달리 오택은 자신은 물론이고 심지어 사이코패스가 자랑하듯 제 손을 긋는 장면을 보면서도 견디지 못한다. 그러니 금혁수와 오택 사이에는 고통과 공포에 대한 간극이 극명하게 존재한다. 바로 이 간극이 이 작품의 스릴러가 극대화된 이유다.

 

휴게소에서 누군가 시비를 걸어와 분노를 느낀다고 해도 오택은 화가 날 뿐 그 이상의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 만일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이 타인에게 미칠 고통을 그가 알고 있고, 또 그 폭력이 자칫 자신에게도 돌아올 상처에 대한 공포도 갖고 있어서다. 하지만 고통도 공포도 없는 금혁수는 다르다. 그는 기분 나쁘게 한 그를 그저 살해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마치 자신이 대신 한 것이라는 식의 무용담처럼 오택에게 늘어놓는다. 

 

<운수 오진 날>은 이 차이에서 오는 공포감을 다양한 상황 속에서 스릴러로 꺼내놓는다. 오택이 지나는 차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금혁수 모르게 비상등을 켜고 달리고, 무언가 위급한 상황에 놓였다는 걸 알게 된 한 차량의 사내들은 두려우면서도 오택을 도우려 한다. 오택이 처한 고통을 공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혁수는 그들마저 잔혹하게 살해한다. 

 

원작 웹툰에는 없는 캐릭터지만 드라마 리메이크에 새롭게 창조된 황순규(이정은)는 그래서 금혁수와는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이다. 아들을 죽인 금혁수를 추적하는 이 엄마는 자신이 느끼는 고통만큼 오택이 느낄 고통도 공감한다. 금혁수가 오택의 딸마저 납치 감금했다는 사실을 알고는, 복수와 처벌만큼 딸에 대한 오택의 절절한 마음을 이해한다. 금혁수에게 협박받으며 어쩔 수 없이 그를 돕는 오택이 자신마저 따돌리려 해도 그걸 이해하는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어떤 지를 그 누구보다 절절하게 아는 황순규는 금혁수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그에게 공격받아 죽어가는 한 사내를 발견한다. 황순규는 죽어가는 사내의 손을 잡고는 하는 말은 그래서 너무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내가 옆에 같이 있어 줄게요. 좋은 것만 생각해. 사랑하는 사람들, 가족들 떠올려 봐요.” 그건 마치 죽어가는 아들에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사내를 빌어 하는 말처럼 들린다. 

 

아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자신의 고통처럼 느끼기에 낯선 사내의 고통 또한 절감하며 그 옆을 지켜주려는 황순규의 모습은, 아무런 고통도 공포도 없는 걸 ‘신기한 능력’이라 치부하며 살인행각을 벌이는 금혁수와 극명하게 대비된다. 그리고 그 공감은 죽어가는 사내에게도 그대로 전이된다. 황순규의 말을 듣던 사내가 힘겹게 그의 손을 잡아주는 것.  

 

<운수 오진 날>은 눈을 뗄 수 없는 스릴러의 진가를 보여준다. 그래서 전체 10부작 중 6부작까지 공개했지만 그 6회를 단번에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런 몰입이 나오는 건 여기 등장하는 금혁수라는 괴물에 의해 끔찍한 고통과 공포를 겪는 오택이나 황순규 그리고 무고한 피해자들을 바라보며 그 고통과 공포가 끝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이를 통해 <운수 오진 날>은 인간다운 것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나의 고통만큼 타인의 고통이 어떠하다는 걸 느낄 수 있는 바로 그것이야말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든다는 거다. 그리고 이건 굳이 연쇄살인범 같은 살벌한 범죄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닐게다. 자신이 하는 어떤 말과 행동이 타인에게 어떤 상처와 고통을 주는 지 모르는 이들을 우리는 정치, 경제, 사회 곳곳에서 마주하고 있으니. (사진:티빙)

‘사랑한다고 말해줘’, 정우성이 11년만에 선택한 멜로 뭐가 다를까

사랑한다고 말해줘

산 속 외딴 곳에 있는 집. 정적 속에 산새 몇 마리의 지저귐은 유독 크게 느껴지는 그 곳에 고독의 표상처럼 서 있는 그 집을 차진우(정우성)는 사진에 담는다. 마치 그렇게 침묵과 고요 속에 외롭게 살아온 자신의 모습을 담아내듯이. 지니TV 오리지널 드라마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이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이 남자의 특별한 사랑에 대한 이야기. 

 

제주공항에 도착해 바닷가 촬영장을 찾은 정모은(신현빈)은 ‘여자4번’으로 불리는 무명배우다. 스튜어디스였지만 배우의 꿈을 시작한 그 선택은 쉽지 않다. 연기가 어색하다며 제주까지 온 그녀를 감독은 다른 배우로 바꾸겠단다. 그러면서 그녀가 배역을 위해 고심해서 산 스카프는 마음에 든다며 팔라고 한다. 정모은이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무례한 말들로 가득하다. 

 

그 바닷가를 찾았다가 우연히 정모은을 멀리서 보게된 차진우는 그녀를 사진에 담는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장애를 가진 차진우의 시선에는, 들을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들어온다. 그래서 무슨 사연인지 제주를 찾아 하염없이 바다만 보고 앉아 있다 결국 죽어버린 한 남자를 벽화로 남긴다. 그 남자는 그렇게 외로운 모습 그대로 벽화 속에 남았다. 그 벽화를 보게 된 정모은은 거기에 포스트잇으로 메모를 남긴다. 

 

말이 있는 세계와 말이 없는 세계. 말로 하는 소통이 더 잘 될 것 같고, 침묵은 불통일 것 같지만 실은 정반대인 경우도 있다. 정모은이 마주한 세계가 그렇다. 그녀는 자신의 세계가 무심코 던지는 무례한 말들 속에서 상처받는다. 반면, 차진우가 그린 말없는 고요의 벽화를 보며 알 수 없는 위로 같은 걸 받는다. 갑자기 벌어진 화재 사고 속에서 저마다 빠져나가라며 아우성을 치지만, 정모은은 그런 ‘말’ 대신 듣지 못하는 차진우를 구해 함께 나가야 한다는 ‘마음’에 발길을 돌린다.  

 

정모은이 병원에서 깨어났을 때 차진우가 전하는 감사의 표시는 말이 아니라 스케치북에 한 자씩 눌러쓴 글귀라 더 마음을 움직인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도와주셔서 그리고 무사해주셔서.’ 듣지 못하는 이와 듣는 이가 서로 다른 세계에 놓여 있다는 건 먼저 마음이 움직이면 그리 불편한 일만은 아니다. 꼬르륵 소리에 배를 만지자, 이를 오해해 ‘아파요’라고 적은 차진우의 글에 정모은이 ‘고파요’라고 정정해줌으로써 피어나는 웃음처럼 말이다.  

 

그렇게 마음이 조금씩 열리면서 이들은 상대가 살고 있는 다른 세계를 알고 싶어진다. 식당이 모두 문을 닫아 차진우는 자신의 캠핑카로 정모은을 초대한다. 함께 라면을 끓여먹는다.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자 비를 피해 앉은 정모은은 천둥소리에 깜짝 놀라는데, 그 와중에도 차분한 차진우를 보고는 자신도 귀를 막아 본다. 그가 사는 세계가 궁금한 것. 그녀는 나직이 말한다. “소리없이 내리는 비도 나쁘지 않네.”

 

<사랑한다고 말해줘>는 청각 장애를 가진 차진우와 배우로서의 꿈을 키워가는 정모은을 통해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이들이 과연 서로에게 얼마나 다가갈 수 있고 또 사랑할 수 있는가를 멜로라는 장르적 틀을 통해 묻는다. 그런데 여기에는 무수한 가시 같은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그래서 무시로 상처받고 상처주는 세상이 밑그림으로 깔려 있다. 정모은이 차진우가 마주하고 있는 ‘침묵과 고요의 세계’를 궁금해하게 되는 이유다. 물론 그건 차진우에겐 고독이겠지만. 

 

서울로 돌아온 차진우는 한 아트센터에서 청각장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수업을 수어로 하지만 이들의 손으로 하는 대화는 화기애애하다. 반면 배역 캐스팅을 위해 심사위원들 앞에서 연기를 선보인 정모은은 가시 같은 말들에 상처받는다. “열심히 한 티가 나요. 근데 우리가 연기 보자고 했지 암기 실력 보자고 했나 열심히 하는 사람은 뭐랄까 난 재미가 없어.” 그러자 정모은은 “제가 부족할 수는 있지만 열심히 한 게 잘못 된 건가요?”하고 되묻는다. 하지만 결과로만 판단하는 그들끼리 나누는 대화에서 성희롱에 가까운 말까지 듣게 된다. “아니 승무원 출신이면 좀 타이트한 유니폼이라도 좀 입고 와 가지고 어필이라도 좀 하지 이게 뭐예요.” 

 

‘거리의 이방인 옆에 잠시 머물다 갑니다. 부디 지금은 외롭지 않길.’ 제주 어느 바닷가에서 외롭게 죽어간 사내를 그린 벽화에 정모은은 그런 포스트잇을 남겼다. 그 포스트잇에 화답하듯 차진우는 그녀의 그림을 그려 ‘배우님께’라는 글귀를 남긴 스케치북을 건넸다. 정모은은 그 글귀를 떠올리며 혼자 생각한다. ‘나, 배우라는 말 처음 들어봐요. 보조출연, 단역, 엑스트라 뭐 그렇게들 말하니까.’ 말보다 소리없이 마음을 담은 글 하나가 더 마음을 움직인다. 

 

정우성이 11년만에 하는 멜로는 이처럼 말로는 다 담을 수 없는 사랑 혹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말의 세계와 침묵의 세계에서 살아왔지만, 이제 그 서로 다른 세계를 향해 마음이 움직인다. 우연히 서울 한 복판에서 만난 자리에서 여자는 ‘열심히’ 연습한 수어로 남자의 세계를 향해 들어온다. 남자는 침묵 속에서 말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당연히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세상엔 노력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군가 다가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를 다시 만나게 돼서 반갑다고 준비한 말을 천천히 한 뒤엔 웃었다. 가벼운 인사 몇 마디에 무슨 생각이 그리도 많냐는 듯이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건  소리없는 사랑의 시작이었다.(사진:ENA)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아침 햇살 같은 박보영이 전하는 위로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포도 싫다고 몇 번을 말했어? 엄마 도대체 왜 그래? 왜 이렇게 사람 숨 막히게 해? 난 나를 잃어버렸어. 아니 한 번도 나를 가진 적이 없어. 내가 누구야? 나 평생 엄마가 하라는 대로 다했어요. 옷도 친구도 엄마가 골라주는 대로. 결혼도 엄마가 시키는 대로. 이만큼 살게 된 것도 엄마 덕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참았어. 엄마 말대로 하면 남들도 다 부러워하고 행복해질 거라고. 근데 엄마 나 왜 이렇게 아파? 응? 나 왜 이렇게 불행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의 첫 번째 에피소드는 조울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오리나(정운선)의 이야기다. 병원을 찾을 때마다 비싼 샤인머스캣을 사갖고 와 딸에게 건네는데, 딸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눈치다. 엄마의 강권에 포도를 집으려 하던 딸은 결국 포도를 내려놓고 그간 꾹꾹 눌러왔던 속 이야기를 꺼내놓으며 억눌러 온 감정을 폭발시킨다. 

 

그녀의 엄마 말대로라면 오리나는 모두가 부러워할만한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어려서는 발레를 했고 늘 반장을 했으며 명문대를 졸업해 판사 남편과 결혼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프다. 때론 과도한 집착을 보이고 그래서 클럽에서 우연히 보게 된 바텐더를 쫓아다니다 스토커로 신고당하기도 한다. 심지어 옷을 전부 벗어던지고 춤을 추는 이상행동을 보이기까지 한다. 모든 걸 최고로 좋은 걸로만 하게 해줬던 엄마는 그런 딸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엄마는 다 너 잘 되라고 그런 거야. 니가 나한테 어떤 딸인데...” 하지만 마흔세 살인 딸은 혼자 커피도 한 잔 못시켜먹는 사람이 됐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게 뭔지를 몰라서다. 그만큼 모든 걸 엄마가 시키는 대로 하라는 대로 하다 보니 작은 일 하나도 스스로 선택하지 못하는 바보가 됐다고 딸은 토로한다. “진짜 웃긴 게 뭔지 알아? 나 다 벗어 던지고 춤췄을 때가 태어나서 제일로 행복했어. 사람들이 미친년이라고 손가락질하던 그 순간이 그 때 처음으로 제대로 숨 쉬는 거 같았어. 나 엄마랑 있으면 행복하지가 않아.”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가 들려준 오리나의 이야기는 드러난 증상으로 보면 심각해 보인다. 즉 누군가를 스토킹하고, 전라로 춤을 추는 그런 행동들은 충격적이다. 병원에 와서도 그런 일이 벌어진다. 전담 간호사인 정다은(박보영)의 뺨을 때리기도 하고, 그녀를 밀쳐 버린 후 복도로 뛰어나와 옷을 벗어던지고 복도를 뛰어다니기도 한다. 그러니 누가 봐도 병이라는 게 확실하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조울증까지 갖게 된 이유는 어찌 보면 일상적이다. 자식 잘되라고 하나부터 열까지 간섭하거나 챙기려는 부모들의 모습이 낯설지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입시 경쟁을 어린 시절부터 시작하는 우리네 교육 현실에서 ‘자식 사랑’이라는 핑계로 벌어지는 지나친 간섭들은 과연 그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있을까. 정다은이 오랜 남사친인 유찬(장동윤)을 만나 이 환자의 사례를 ‘백조처럼 우아하게 만들어진 오리’ 이야기로 에둘러 들려줬을 때 유찬이 한 말은 이 문제의 해답을 들려준다. “남들이 아무리 백조같이 예쁘대도 지가 싫으면 그만이지 행복이 뭐 별거냐? 지 좋은 거 마음대로 하는 게 그게 행복이야.”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는 이처럼 다양한 정신적인 아픔을 호소하는 사례들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끄집어낸다. 첫 회가 지나치게 자식의 삶에 간섭하는 우리 사회의 문제를 그로인해 고통스러워하는 딸의 이야기로 풀어냈다면 2회의 직장 상사의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으로 강박증을 갖게 된 김성식(조달환)씨의 사례는 직장 내 갑질의 문제를 끄집어낸다. 

 

그래서 이런 현실 때문에 병원까지 오게 된 환자들을 돌보고 병을 치유하기 위해 세심한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의사와 간호사들의 말과 행동들은 그저 병을 고치는 차원을 넘어서 이러한 현실에 상처받은 이들 모두를 위로하는 모습으로 다가온다. 시청자들 역시 그 이상행동을 보이는 환자들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되고, 그것이 남 일이 아니라 내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러니 여기 등장하는 정다은(박보영)처럼 지나칠 정도로 환자에 몰입하고 세심하게 돌보는 간호사의 모습이 직업적 차원을 넘어서는 울림을 담게 된다. 

 

정다은은 오리나의 병이 그녀의 어머니와 관련 있다는 걸 알지만, 그러면서도 너무나 조심스럽게 그녀의 어머니를 설득한다. “저기 어머니. 제가 이런 말씀 드리는 게 조금 조심스럽긴 한데요. 어머님 꼭 저희 엄마 같으세요. 저희 엄마도 그러시거든요. 막 병원에 떡 돌리라 그러고. 다 나 위해서 하는 말인 거 아는 데도 실은 좀 싫기는 했거든요.” 자신의 이야기로 에둘러 자식의 입장을 대변한다. 그러면서도 엄마들의 그런 간섭이 그 누구보다 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걸 딸들도 다 알고 있다는 말로 오리나의 어머니를 위로한다.  

 

“딸들도 알아요. 엄마가 누구보다 나 사랑하는 거. 어머님이 사랑하니까, 걱정하니까, 그러셨다는 거. 저도 엄마가 하라는 대로 하는 게 편할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엄마가 제일 좋을 때가 언제인지 아세요? 내가 뭘 하든 잘할 거라고 믿고 지켜봐 줄 때요. 어머님도 오리나님 한번 믿어 보시면 안 될까요?” 밝고 따뜻하고 세심한 정다은이라는 인물이 건네는 위로와 설득은 이처럼 시청자들의 마음에도 와 닿는다. 12부작 속에 다양하게 등장하는 다친 마음들을 그녀가 토닥여줄 때, 시청자들 또한 치유 받는 듯한 기분에 빠져드는 이유다. (사진:넷플릭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