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하려고 했던 이야기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글 중 내용의 누설이 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새 작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소년 마히토가 화재로 인해 어머니를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화재가 왜 발생했는지는 직접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무렵이라는 시기는 그것이 그냥 발생한 화재라기보다 폭격의 여파라는 걸 상상하게 한다. 마히토는 그 불길을 향해 달려가지만 어머니는 거대한 불기둥 속으로 사라진다. 

 

전쟁 상황과 화재라는 충격, 그리고 어머니의 부재에 대한 상실감은 그래서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이 갖고 있는 판타지의 전제가 된다. 판타지는 결국 현실의 결핍이나 충격에 의해 촉발되어 이세계(異世界)로의 통로를 통과하기 마련이다. 2차 세계대전 중 아이들이 장롱을 통해 나니아라는 곳으로 떨어지며 벌어지는 모험을 다룬 C.S. 루이스의 <나니아 연대기>가 대표적이다. 전쟁이라는 충격, 장롱이라는 통로, 그리고 이세계의 모험. 이건 판타지의 중요한 구조다.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려온 판타지의 세계들을 보면 그래서 터널을 통과하는 이야기가 많다. <이웃집 토토로>에서 메이가 처음 토토로를 만나게 되는 것도 무성한 수풀의 터널을 통과하면서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도 치히로가 판타지 세계로 넘어가게 된 것 역시 수상한 터널을 통과하면서였다. 터널은 일종의 판타지의 통과의례로,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 장치를 가져와 이세계로의 모험을 풀어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역시 어머니가 화염 속에서 죽는 충격을 겪은 마히토가 어머니의 고향으로 와 말을 하는 왜가리의 인도를 받아 이세계로 넘어가는데 역시 터널을 통과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판타지에는 어머니에 대한 서사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건 아마도 실제 자신이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었던 경험 때문으로 보인다. 사라진 어머니를 찾거나 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래서 <이웃집 토토로>에서는 요양원에 있는 엄마를 회복시키고 싶은 아이들의 욕망으로 그려지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는 이세계에서 음식을 먹고 돼지가 된 부모들을 구하려는 치히로의 절박함으로 그려진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마찬가지인데 여기서 특이한 건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갖게 된 충격과 상실에 더해져 고향에서 만나게 되는 새엄마에 대해 마히토가 복합적인 감정을 갖는다는 점이다. 이미 뱃속에 아이까지 가진 새엄마에 대해 마히토는 반가워하지도 그렇다고 분노하지도 않는다. 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데, 그렇다고 무감정한 건 아니다. 특히 금세 새엄마를 들인 아버지에 대해 갖는 마히토의 감정은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예의를 다하지만 그 속에는 분노 또한 감춰져 있다. 

 

전쟁 상황에 전투기 덮개를 제조해 납품하는 공장으로 큰돈을 벌고 있는 아버지. 어찌 보면 어머니의 죽음은 아버지가 하고 있는 일과 무관하지 않을 테다. 전쟁은 결국 그런 무기들의 개발, 제조와 관련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본의 막부 시대가 저물고 메이지유신을 촉발시킨 쿠로후네 사건만 봐도 알 수 있다. 결국 미국의 페리 제독이 서양의 신식 증기선 전함을 끌고 와 일본의 개항을 요구했던 이 사건의 이면에는 새로운 무기 기술이 바탕이 되지 않았던가. 

 

그래서 어머니가 사망하고 아버지가 새 엄마를 들이고 심지어 동생까지 임신하게 된 데 대해 갖는 마이토의 복잡한 감정은, 그 개인서사를 넘어서 그 이면에 담긴 전쟁 같은 역사적 사건들과 연결된다. 어머니의 고향에 있는 학교의 첫 등교 때부터 자동차를 끌고 가 시골 아이들의 기를 꺾으려는 아무 생각 없는 아버지는 무기가 되기도 하는 기술과 그걸로 갖게 되는 힘을 낙관하는 인물이다. 심지어 희생이 따르더라도. 

 

하지만 마히토는 아버지가 공장에서 만든 전투기 덮개를 보며 감탄하고, 자신 또한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칼로 나무를 깎아 활과 화살을 만드는 재능을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어딘가 상처와 죄책감 같은 걸 느끼는 인물이다. 영화에서는 대사 없이 원거리 샷으로 동네 아이들과 마히토가 실랑이를 벌이다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그건 당연히 아버지와 관계된 갈등 때문이라고 보인다. 그 동네의 유지지만 무기 제조를 해서 전쟁에 일조한다는 사실이나, 어머니가 죽고 곧바로 새엄마를 들인 사실은 마히토도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아닐까. 그래서 동네 아이들과 싸우고 나서 그 이유를 그는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는다. 대신 돌멩이 하나를 들어 제 머리를 찧고 피를 흘린다. 

 

마히토가 가진 아버지와 새엄마에 대한 양가적 감정은, 새로운 기술과 그 혁신을 통해 만들려는 새로운 체제에 대해 미야자키 하야오가 갖는 양가적 감정 그대로다. 그것에 매혹되거나 이끌리면서도 동시에 그것이 파괴한 것들(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안타까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양가적 감정은 마히토가 이제 사라진 새엄마를 찾아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탑으로 들어가는 통로를 통해 모험하게 되는 이세계의 풍경들을 만들어낸다. 

 

마히토가 만나게 된 이세계는 이질적인 것들이 겹쳐져 있다. 삶과 죽음이 겹쳐 있고, 인공과 자연이 뒤엉켜 있으며, 창조와 파괴가 동시에 일어난다. 그 세계를 인도하고 그 세계를 채우고 있는 존재들이 왜가리, 펠리컨, 잉꼬 같은 새들이라는 점도 그렇다. 새는 하늘과 땅의 경계를 오가는 은유적 동물이다. 마히토가 만나는 새들은 그래서 자유의 상징처럼 하늘을 유영하는 듯 보이지만, 동시에 먹을 것이 없어 저세계의 생명으로 변화할 와라와라까지 잡아먹는 생존에 구속된 존재로도 또 떼로 몰려다니며 본능에 휘둘리는 존재로도 그려진다. 

 

와라와라를 구하기 위해 불길을 솟구치게 해 펠리컨을 공격하는 히미 역시 펠리컨만을 떨어뜨리지는 않는다. 그 과정에서 와라와라들도 불타 죽게 되는 것. 불을 만들어내는 무기로도 활용되는 기술은 그렇게 무차별적이다. 심지어 선의조차 누군가에게는 악의가 될 수밖에 없다. 이세계로 표현되는 마히토의 감정은 그래서 아버지가 낙관하는 기술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드러낸다. 

 

결국 그 세계로 들어간 새엄마와 뱃속의 동생을 구하기 위한 모험에서, 마히토는 그 곳에서 거대한 바위가 공중에 떠 있는 그곳에서, 도형으로 된 블록을 쌓아 균형을 맞추려는 오랜 선조인 외할아버지를 만난다. 그 할아버지는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탑에 매혹되어 그 탑을 둘러싸는 건물을 짓고 그 안에 책 속에 파묻혀 살다가 사라진 인물이다. 아마도 막부 시절 막강한 부와 권력을 누렸을 것으로 보이는 이 인물의 등장은 서구 열강의 등장으로 서구의 과학기술과 사상을 통해 메이지 유신을 하려했던 그 혁신의 끝단이 과연 성공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이세계로 넘어와 서구의 사상과 기술을 받아들여 완벽한 세계를 꿈꿨지만 그 결과는 금세라도 무너질 것처럼 아슬아슬한 균형 아래 놓여있다. 그걸 상징하듯 도형모양으로 쌓여 아슬아슬하게 세워져 있는 블록의 균형을 맞추는 일을 할아버지는 마히토에게 제안한다. 자신이 실패한 것을 후대가 완성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나타난 펭귄 대왕이 휘두른 단칼에 그 블록이 무너져 내리고 그래서 이세계가 무너지는 광경은 그것이 얼마나 위태롭고 허망한 일인가를 드러낸다.

 

결국 판타지는 떠났던 자가 그 환상의 세계로부터 다시 현실로 복귀하는 서사 구조를 갖는다. 마히토는 이세계의 대혼돈을 경험하고 그 곳에서 새엄마를 찾아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그런데 떠나기 전 마히토가 가졌던 그 복잡한 심경들은 이세계의 모험 과정을 통해 정답은 아니지만 어떤 해답을 찾아낸다. 새엄마를 구하기 위해 찾아 나선 모험이지만 그 곳에서 만나게 된 소녀였던 엄마가 결국 훗날 화염 속에서 죽을 걸 알면서도 현실로 돌아가는 그 선택을 통해서다. 그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구나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일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을 파괴하기도 하는 이 혼돈 속에서도 판타지라는 환상에 빠지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고 외면하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혹자들은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군수업자 아버지의 모습이나, 펠리컨이 와라와라를 잡아먹으며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다는 대목 등을 통해 이 작품이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화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보다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실제 겪었던 어린 시절의 사적 경험들을 모티브로 해서 막부 시대에서 메이지유신으로 넘어오는 일본의 역사적 변화가 만들어낸 현재를 판타지를 통해 담아낸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건 군국주의 미화보다는 그런 선택이 결국은 실패했고 그러니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것에 가깝다. 친절한 작품이 아니고 은유와 상징이 많이 들어 있어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해석도 호불호도 나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사적인 이야기와 역사 그리고 지금껏 해왔던 판타지의 세계까지 하나로 품어낸 야심작이 아닐 수 없다. (사진: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양세종, 수지 마음 훔친 다정함과 무해함의 인간화(‘이두나’)

이두나!

“무서웠겠어요. 혼자서. 누나, 겁내도 되요. 다치는 것보단 낫잖아요. 다치지 말라고요. 누구한테든. 사랑받는 게 업이었던 사람이잖아요.”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함성 속에서 반짝반짝 빛났지만, 어느 날 갑자기 노래가 나오지 않아 도망치듯 무대를 떠난 이두나(수지). 혼자 사는 집에 누군가 자신을 훔쳐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린 그는 사실 그게 두렵지만 마치 그런 일은 흔한 일이라는 듯 익숙한 척 한다. 하지만 그 치한을 붙잡아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게 해준 원준(양세종)은 두나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그렇게 말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이두나!>에서 이 대사는 두나가 원준에게 마음을 열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 한 밤 중 잠에서 깨 홀로 맥주를 마시고 있는 원준을 보고는 함께 술이나 마시려던 두나의 마음에 원준의 그 말은 잔잔한 파문을 던진다. 그 누구에게도 그런 다정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어서다. 두나는 괜스레 더 자야겠다며 원준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눕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원준은 무해하게도 그런 두나를 내려다보며 이불을 덮어준다. 

 

그러자 이제 두나가 원준의 손을 포개 잡으며 말한다. “좀 잡고 있을 게. 싫으면 빼.” 그건 마치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담긴 말이지만 동시에 원준에 대해 두나가 호감을 갖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자 원준은 두나가 포갠 손을 다른 손으로 마치 이불을 덮어주듯 덮어준다. 그 손길을 느끼고 두나 역시 손을 꼭 쥔다. 짧은 장면이지만 두나와 원준의 마음이 드디어 서로에게 닿는 장면이다. 

 

<이두나!>는 한때 화려한 아이돌이었지만 지금은 은퇴해 홀로 지내는 두나를 같은 셰어하우스에 들어오게 된 원준이 만나면서 벌어지는 멜로드라마다. 화려한 아이돌과는 사뭇 다른 현재의 두나의 모습을 드라마는 담배 피는 장면으로 반복해 보여준다. 아이돌이라고 하면 현실과는 어딘가 유리되어 보이는 그런 인물처럼 느껴지지만, 담배를 피우는 두나의 모습은 그 비현실을 현실로 끌고 들어온다. 

 

<이두나!>는 이처럼 두나라는 전직 아이돌의 캐릭터가 하나의 아우라처럼 극의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드라마지만, 그런 비현실적 화려함에 질식됐던 인물을 현실로 이끌어내 조금씩 회복시켜주는 원준의 매력이 도드라지는 드라마이기도 하다. 그런데 원준이라는 이 캐릭터에 저도 모르게 자꾸만 빠져드는 그 매력의 정체는 뭘까. 그건 두 단어로 정리하면 아마도 ‘다정함’과 ‘무해함’이 아닐까. 

 

원준은 함부로 다가가는 그런 인물이 아니다. 대신 한 걸음 물러나 지켜봐주고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꺼내놓는 섬세한 다정함이 일상에 배어있는 인물이다. 그는 아주 작은 것조차 죄책감을 느낄 정도로 선하다. 아픈 엄마와 동생을 두고 자취방으로 떠나오면서 자신이 잠깐 좋다고 느꼈던 그 해방감조차 ‘나쁜 생각’이라고 할 정도다. 그래서 성큼 성큼 다가오는 두나 앞에서 뒷걸음질 치며 조심스러워하다 어렵게 어렵게 “내가 많이 좋아해요”라고 말을 꺼낸다.

 

자신이 너무나 좋아했었지만, 그 때로부터 이미 시간이 많이 흘러 이제는 마음이 두나에게 가고 있는 걸 알고 있는 원준은 그 마음을 알면서도 끝내 고백하는 진주(하영)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누구라도, 가족이라도 함부로 하게 두지 말라”고 하는 사려 깊고 배려 많은 인물이기도 하다. 또 자신이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먼저 좋아한다고 말하며 그걸 애써 감당하려는 용기도 가진 인물이다. 이러니 누나들의 마음을 설레게 할 수 밖에. 

 

최근 들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이상화된 남성상이 바뀌고 있다. 아주 과거에는 카리스마 있는 남성상이 자주 등장하곤 했지만 지금은 그런 인물들은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대신 다정하고 또 무해한 모습으로 상대의 마음을 깊이 이해해주고 배려하는 남성상이 급부상했다. <이두나!>에서 위태롭게 보이는 두나를 그 따뜻함으로 보듬어 다시 건강하게 만들어주는 원준이라는 캐릭터는 바로 그런 남성상이다. 

 

수지가 담배 피우는 모습 하나로도 두나라는 아이돌이었지만 지금은 한없이 흔들리는 인물을 표현해냈다면, 양세종은 흔들리는 두나 옆에서 더할 나위 없이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원준이라는 인물을 눈빛과 목소리로 그려낸다. 수지와 양세종이 서로를 바라보는 그 장면만으로도 애틋해지는 오랜만에 보는 청춘 멜로드라마다. 깊어가는 스산한 가을에 더더욱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사진:넷플릭스)

 

‘연인’, 존버 시대 안은진이라는 독보적 캐릭터의 탄생

연인

“내가 살고 싶다는데 부모님이 무슨 상관이야? 종종아 일전에 강화도 때 다 뛰어내리는데도 우린 살았어. 난 살아서 좋았어.” 노예 사냥꾼들에게 쫓기다 벼랑 끝에 몰린 조선인 여성들은 그 곳에서 치마로 얼굴을 감싼 채 뛰어내린다. 더럽혀진 몸으로 돌아가면 부모님께 죄를 짓는 거라며. 그러자 길채(안은진)는 그렇게 말한다. 살고 싶은데 부모님은 상관없다고. 사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 

 

MBC 금토드라마 <연인>은 ‘생존’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사극이다. 병자호란이라는 극단적인 전쟁 상황을 가져와 그 곳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는 민초들의 반짝반짝 빛나는 삶을 담았다. 파트1이 병자호란 상황 속에서의 살아남기라면, 파트2는 전쟁은 끝났지만 그 배경을 중국 심양으로 옮겨 노예로 끌려간 조선인들의 살아남기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 

 

길채는 바로 그 중심에 서 있는 인물이다. 그저 행복하기만을 바라며 때론 철부지처럼 살아오던 이 인물은 위기 속에서 변화한다. 병자호란 속에서 자신은 물론이고 종종이(박정연)와 방두네(권소현)를 이끌고 심지어 그 사지에서 아이까지 받아내며 끝내 버텨 살아남는다. 전쟁이 끝나고 사랑하는 연인 이장현(남궁민)과 엇갈려 구원무(지승현)와 혼례를 치르고 평화롭게 살아갈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도망노예라는 누명을 쓰고 심양으로 끌려가게 된다. 

 

돈에 팔리고 노리개처럼 핍박받는 노예의 처지가 된 조선인들은 도망치다 발뒤축을 잘리거나 상전의 질투로 손목이 잘리거나 심지어 뜨거운 물을 부어 화상을 입는 참혹한 처지가 된다. 하지만 특히 여성들이 더 절망하게 되는 건,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는 주홍글씨 같은 꼬리표다. 길채를 구하러 나선 남편 구원무 역시 그렇게 끌려갔다면 ‘볼 짱 다 본 몸’이라는 사람들의 말에 흔들린다. 

 

실제로 이렇게 노예로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은 살아 돌아왔어도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된다. 역시 노예로 끌려왔다가 이장현에게 구출된 양천(최무성)은 그 자신 또한 노예의 처지를 잘 알면서도 다른 조선인 여성이 아이의 젖을 주려 하자 ‘원수에게 물린 젖’을 물릴 수 없다며 밀쳐낸다. 심양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예들은 다 같이 참혹한 상황 앞에 놓여 있지만, 그 안에서도 여성들은 차별받고 핍박받는다. 

 

그래서 조선인 여성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들이 당연한 것처럼 벌어지는 그 지옥 같은 현실 속이지만, 길채는 다른 길을 보여준다. 그는 ‘살아남자’고 손을 내민다. 절개니 부모님이 하는 그런 유교적 사고관 따위는 죽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밀쳐낸다. 죽으려 하는 종종이에게 내미는 손이, 자신이 끝까지 지켜주겠다 하는 그 말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다.  

 

<연인>은 이른바 ‘존버’ 시대의 가치관이 투영된 사극이다. 현재 우리 시대의 청춘들은 대단한 꿈이나 이상보다 일단 ‘살아남기’가 더 중요해졌다. 쉽지 않은 취업현실과 갈수록 치열해지는 경쟁 속에서 무엇보다 ‘생존’하는 일이 우선이고, 그것은 결코 수동적인 선택이 아니다. 병자호란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가져온 <연인>은 그 시대 그 어떤 손가락질에도 끝내 살아남았던 길채 같은 인물을 통해 지금의 ‘존버’하는 청춘들의 삶을 지지하고 응원하는 중이다. 

 

이것은 길채를 잊지 못하고 심양에서도 줄곧 그리움의 나날을 보내는 이장현이 갖고 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그 곳에 끌려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것이 치욕이라고 말하는 소현세자(김무준)에게 이장현은 이렇게 말한다. “소인은 포로시장의 조선 포로들인 치욕을 참고 있다 생각지 않습니다. 저들은 살기를 선택한 자들이옵니다. 배고픔과 매질, 추위를 이겨내며 그 어느 때보다 힘차게 삶을 소망하고 있나이다. 하루를 더 살아낸다면 그 하루만큼 싸우면서 승리한 당당한 전사들이 되는 것이옵니다.” 

 

이 얼마나 가슴을 울리는 이야기인가. 이장현의 말을 온몸으로 관통하며 보여주는 길채라는 인물을 우리가 새삼스럽게 들여다봐야 하는 이유다. 노예 시장에 끌려 나와 몸값 흥정을 당하는 처지 속에서도 끝내 생존하겠다는 의지만은 꺾지 않는 이 인물 앞에 이장현이 드디어 나타나 “도대체 왜?”라고 분노와 안타까움과 그리움이 뒤섞인 감정을 토해내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피투성이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우리 시대의 청춘들에게 건네는 공감과 위로처럼 느껴진다. 길채라는 사극 속 인물이 존버 시대 청춘들의 자화상처럼 느껴져서다. (사진:MBC)

'힘쎈여자 강남순'이 굳이 몽골과 강남을 비교한 까닭

힘쎈여자 강남순

“오빤 강남스타일-” 싸이가 그렇게 불렀다면 JTBC 토일드라마 <힘쎈여자 강남순>은 이렇게 부르고 있다. “강남순은 몽골스타일!” 강남순(이유미)이 강남으로 돌아오면서 그가 왜 굳이 몽골에서 아빠를 잃어버려 그 곳의 몽골 양부모 밑에서 자라게 됐는가 하는 이유가 분명해졌다. 사실 개연성만으로 보면 이런 설정이 어딘가 현실성이 떨어지지만, 이 아이가 자라나 강남으로 돌아오면서 그려지고 있는 이야기들은 왜 그런 설정을 했는가를 설득력 있게 해준다. 

 

몽골에서 돌아와 물질적 소유와 욕망과는 거리가 먼 순수한 소녀 강남순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강남이라는 지역이 얼마나 비뚤어진 욕망의 세계인가 하는 걸 투명하게 드러내는 리트머스지가 된다. 오자마자 전세 사기를 당하고, 한강 공원에 버려진 나무들과 플래카드 천막을 얼기설기 엮어 게르를 짓자 주민들이 몰려와 ‘자연경관 훼손’ 운운하며 당장 철거하라고 하는 장면은 단적이다. 몽골에서 살아온 강남순에게 사람이 살기 위해 빈 공간에 게르를 짓고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일 수 있지만, 강남에서는 언감생심이다. 아파트 한 채 수 십 억을 하는 강남이 아닌가. 

 

몽골이 ‘유목’ 개념의 삶을 보여주는 공간이라는 점은 왜 굳이 작가가 강남순을 다른 곳도 아니고 그 곳에서 부모를 잃어버려 그 곳의 삶을 체화하게 했는가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결국 유목민들의 삶에는 ‘정착’ 개념이 만들어내는 물질적 소유의 집착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 그러니 그 곳에서 자라난 강남순이 ‘정착’ 개념의 끝단으로 치닫는 곳인 강남으로 오면서 벌어지는 일단의 해프닝들은 그 뾰족한 풍자로 우리를 빵빵 터지게 만들어준다. 

 

그나마 강남순을 이해하고 도와주는 강한지구대 소속 강희식(옹성우) 경위가 그래도 한강에 게르를 짓고 사는 건 안 된다고 하자, 강남순이 아이처럼 툭 던지는 말은 시청자들의 속을 시원하게 해준다. “니들 경찰들은 잘 곳 없는 사람 쫓아내는 게 급하니, 아니면 사기꾼을 빨리 잡는 게 급하니?” 그 말을 듣고 돌아온 강희식은 서장이 보기 안좋다며 “한강 노숙자 천지 안되게 빨리 철거시키라”는 말에 강남순의 말을 전한 후 이렇게 덧붙인다. “사기꾼부터 잡고 법의 보호를 보여준 다음에 법, 법 하셔야죠. 아니 권리 보장은 해주지도 않으면서 법대로 하라면 사기꾼이 경찰이나 둘 다 나쁜 놈인 건 똑같지 않습니까?”

 

가짜 강남순 행세를 하는 이화자(최희진) 역시 강남순과의 대비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다. 그는 강남순의 엄마 황금주(김정은)의 약한 구석을 파고들어 가짜 딸 행세를 하는데 그 목적은 한 몫 잡아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강남순이 엄마를 찾는 이유는 단 하나다. 보고 싶어서. 거기에는 그 어떤 물질적인 욕망도 들어 있지 않다. 엄마가 엄청난 부자라는 사실을 모르는 강남순은 강희식에게 이제라도 만나서 자신이 꼭 지켜주겠다며 이렇게 말한다. “돈이 없으면 매일매일 돈 벌어서 맛있는 거 사주고 집이 없으면 게르도 지어주고.”

 

흥미로운 건 국밥집으로 시작해 강남 전당포 골드블루라는 엄청난 대부호가 된 황금주 역시 뻔한 강남 졸부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는 점이다. 그는 심지어 이화식이 자신을 속인 가짜라는 사실을 알게 됐으면서도 “불쌍한 애”라며 잘해주라고 한다. “세상 누구한테도 함부로 할 권리는 없다”고 말하는 그는 “내가 누군가를 막 대하면 다른 누군가가 내 딸 남순이를 막 대할 거야”라고 한다. 즉 이 황금주의 딸 사랑은 사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게 아니다. 내 딸이 대접받기 위해서는 타인들을 먼저 잘 대해줘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서로의 존재를 강희식을 통해 알게 되고 그래서 황금주와 강남순이 재회하는 장면 또한 인상적이다. 어찌 보면 뻔한 ‘출생의 비밀’에 등장하는 재회가 예상되지만, 슈퍼파워를 가진 남다른 능력의 이 모녀는 그 만남조차 특별하게 그려낸다. 즉 약속장소에 도착했지만 근처 건물에 난 화재로 아이들이 위기에 처한 걸 알게 된 강남순이 그 곳으로 달려가 아이들을 하나하나 구해내고, 역시 그걸 보게 된 황금주도 그 곳으로 옴으로써 구조 현장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 

 

사적인 재회의 순간은 그렇게 공적인 사안이 우선이라는 두 사람의 같은 생각으로 인해 엇갈리지 않게 된다. <힘쎈여자 강남순>이 초반부에 그려낸 모녀의 가족 찾기 이야기가 뻔해지지 않은 이유다. 이제 힘쎈여자 삼대가 완전체가 된 상황에서 이 드라마는 강남에 들어오기 시작한 신종 마약과의 전쟁이 펼쳐질 예정이다. 강남순은 그가 돕는 강희식과 함께 강남에 신종마약을 퍼트리는 류시오(변우석)라는 싸이코패스와 대결하게 되는 것. 그 과정도 흥미롭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잡아끄는 건 몽골스타일이어서 강남스타일과 대비되는 이 강남순의 통쾌한 강남 꼬집기다.(사진: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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