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플래쉬>, 열정이 사라진 시대에 예술이란

 

드럼이란 악기가 이토록 매력적이었나. 암전된 화면에 마구 두드려대는 드럼 소리가 고조되는 장면으로 시작되는 <위플래쉬>라는 영화는 그 긴장감을 쉴 틈 없이 끝까지 밀어붙이는 영화다. 최고의 드럼 연주자가 되기 위해 온몸을 던지는 앤드류와, 천재의 열정이 사라진 시대에 천재를 끄집어내기 위해 혹독한 한계를 제자들에게 시험하는 플렛쳐 교수의 재즈 음악을 사이에 둔 치고 박는 한판 승부는 관객의 시선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사진출처: 영화 <위플래쉬>

교육 윤리의 잣대로 바라보면 <위플래쉬>는 대단히 불편한 영화다. 플렛쳐 교수의 스파르타식 밀어붙이기는 자칫 그 선을 넘게 되었을 때 제자에 대한 엄청난 폭력으로 다가올 수 있기 때문이다. 앤드류는 플렛쳐 교수가 만들어내는 그 스트레스 속에서 손에서 피가 줄줄 흐르고 온몸이 땀으로 샤워를 하는 것조차 스스로 감수해내려 한다. 실로 그 스트레스는 한계 속에서 인간의 천재성을 끄집어내게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지만 그렇게 만나게 된 천재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음악의 희열을 경험하게 한다.

 

하지만 그런 교육 윤리의 불편한 잣대를 벗어나 <위플래쉬>를 바라보면 이 단순하면서도 굵직한 영화의 미적 체험에 놀라게 된다. 영화는 드럼처럼 청각을 두드리다가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더니, 온몸에 분노의 아드레날린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그것이 폭발되는 강렬한 느낌을 제공한다. 재즈는 이 영화의 중요한 반쪽이지만 영화는 그것을 미화하거나 아름답게 꾸미려 애쓰지 않는다. 그저 앤드류라는 또 하나의 드럼이 겪는 고통스런 예술의 과정을 드러내 보여줄 뿐이다.

 

눈치 챘겠지만 <위플래쉬>에는 두 개의 드럼이 존재한다. 하나는 앤드류가 치는 드럼이고, 또 하나는 플렛쳐 교수가 두드리는 앤드류라는 드럼이다. 플렛쳐 교수는 앤드류를 두드려 놀라운 재즈 연주를 끄집어내려 한다. <위플래쉬>라는 영화의 제목은 더블 타임 스윙 주법으로 완성된 영화 속 재즈 곡의 제목이지만, ‘채찍질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플렛쳐 교수는 전설적인 재즈 드러머 버디 리치의 탄생이 그의 열정을 끄집어낸 사건(?)에서 비롯됐다고 말한다. 버디 리치를 끝까지 몰아붙이게 하고 거기서 그만의 음악적인 성취를 만든 것이 누군가의 채찍질덕분이라는 것. 그는 이렇게 벼랑 끝까지 자신을 밀어붙이는 채찍질이 사라지면서 진정한 재즈가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개탄한다.

 

<위플래쉬>는 열정이 사라진 시대에 다시금 예술을 얘기한다. 그것이 어떻게 탄생하고 어떤 힘겨운 과정을 겪어 완성되는가를 보여준다. 실로 재즈 드럼 연주라는 조금은 대중들에게 낯설 수 있는 소재를 갖고 이토록 강렬한 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건넬 수 있다는 사실은 <위플래쉬>에 대한 대중들의 열광을 가늠할 수 있는 이유다.

 

심지어 달관세대라는 기괴한 표현까지 나오는 이 시대에 열정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무언가 거대한 벽으로서 존재하는 플렛쳐 교수는 결코 바람직한 인사는 아니다. 하지만 그 극한의 스트레스 속에서 그 상황을 오히려 역전시켜 분노와 광기를 예술로 뽑아내는 앤드류의 열정은 보는 이들의 피를 끓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이제 앤드류가 스틱을 쥔다. 그리고 거꾸로 플렛쳐 교수를 향해 드럼 연주를 통한 채찍질을 날린다. 우리를 두드리고 몰아붙이는 것들이 우리를 한계로 몰아세울 때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들이 쥔 스틱을 내 손으로 쥐어야 하지 않겠는가. <위플래쉬>는 열정이 사라진 시대의 우리들을 재즈 드럼 연주라는 예술을 통해 채찍질의 고통을 뛰어넘는 희열을 맛보게 해주면서 그 안에 우리네 현실까지를 들여다보게 만드는 영화다. 이러니 입소문이 날밖에.

 

<풍문>, 유준상의 과장연기가 만들어낸 효과

 

SBS <풍문으로 들었소>에서 한정호 역을 맡은 유준상의 연기는 튄다. 고아성이나 이준의 연기나, 한정호의 아내 역할의 유호정 그리고 이 집안 곳곳에서 수군대는 비서나 유모 같은 조역들이 실제 그 인물들처럼 자연스러운 연기 속에 녹아 있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그의 연기는 과장된 것처럼 보이고 목소리 톤도 일상적이라기보다는 연극적이다. 마치 그는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풍문으로 들었소(사진출처:SBS)'

이것은 어쩌면 유준상이라는 연기자가 가진 특징이자 개성일 것이다. 그는 과거 드라마에서도 지상에서 1센티 정도는 들어 올려진 연기를 선보였다. <넝쿨째 굴러온 당신>의 방귀남이라는 인물을 떠올려보라. 어딘지 짠한 느낌이 들면서도 코미디 톤이 느껴지는 인물이 아닌가. 그의 연기는 완전한 몰입이라기보다는 보는 이들이 저 사람은 연기를 하고 있구나 하고 이화시키는 쪽에 더 가깝다.

 

연기라고 하면 모두가 메소드 연기로 대변되는 몰입을 떠올리지만 반드시 그게 전부도 아니고 정답도 아니다. 연기는 완전한 몰입이 아니라 연기하면서도 이를 통제할 수 있을 만큼의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기도 하고, 때로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것이 연기라는 걸 인식시켜 오히려 그 상황에 대한 이성적인 접근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연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담론들은 지금도 논쟁적일 정도로 정답이 없다.

 

따라서 중요한 건 유준상의 조금은 과장되고 연기하는 톤이 느껴지는 연기가 <풍문으로 들었소>에 어울리는가 하는 점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유준상의 연기 톤은 기묘하게 한정호라는 인물과 맞아 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한정호는 괴물이다. 겉과 속이 이처럼 다른 인물이 없다. 속으로는 웃으면서 누군가를 나락으로 떨어뜨릴 수 있을 만큼 무시무시한 이빨을 숨기고 있지만, 겉으로는 바보처럼 웃음을 지어보이기도 하고 짐짓 교양인의 가면을 쓰고 훈계를 하기도 한다.

 

도대체 무엇이 한정호를 이런 괴물로 만들었을까. 그것은 그가 살아가는 상류사회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얘기하면서 우매한 대중을 운운하는 이 책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런 얘기를 하면 돌 맞는다고 말하는 서봄(고아성)과 한인상(이준)에게 한정호는 이렇게 말한다. “돌 맞고 말고. 그러니까 입 밖에 내지 말고 조용히 실천해라. 그게 진정한 힘이다.” 한정호는 겉으로는 대중과 평등을 외치지만 속으로는 대중의 우매함을 비웃는 그런 인사다.

 

겉으로 보이는 한정호는 그래서 실체가 아니다. 그는 연기를 하고 있다. <군주론>이 나온 16세기의 군주 연기다. 그가 괴물처럼 보이는 건 그래서다. 지금 21세기에 살면서 16세기 인물을 연기하는 삶을 살고 있다니. 이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보면 결코 웃음이 나오지 않는 비극적인 현실이기도 하다. 그것이 우리네 상류사회가 갖고 있는 시대착오적인 괴물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갑질이라는 시대착오적 행위는 그 속내를 숨겨야할 군주 연기가 속내를 드러냈을 때 드러나는 사건이다.

 

유준상의 다소 과장된 연기와 연기하는 듯한 연기는 그래서 한정호라는 시대착오적 괴물과 맞춤이다. 주변인물들이 실체적인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반면, 한정호는 그의 집이라는 무대에서 16세기 시대에 머물러 연기하고 있는 비극적이지만 우스꽝스런 괴물의 삶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아니면 우연히 맞아 떨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웃찾사>를 살린 일등공신은 <개콘>이다

 

편성을 변경해 KBS <개그콘서트>와 동시간대 대결을 벌인 <웃찾사>. 과연 그 결과는 어땠을까. 시청률로만 보면 <개그콘서트>의 당연한 압승이다. <개그콘서트>12.7%(닐슨 코리아)를 기록한 반면 <웃찾사>5.9%로 절반가량 적은 시청률 수치를 가져갔기 때문이다.

 

'웃찾사(사진출처:SBS)'

하지만 <개그콘서트><웃찾사>의 이 시청률 수치는 단순 비교해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그콘서트>는 오래도록 그 시간대를 점유해온 수치인 반면, <웃찾사>는 이제 겨우 편성 시간대를 옮긴 첫 회의 시청률이기 때문이다. <웃찾사>가 옮겨온 후 <개그콘서트>의 시청률은 지난 13.9%보다 1.2% 포인트 하락했다. 대신 <웃찾사>가 들어온 후 SBS는 이전 <떴다 패밀리> 마지막회 시청률인 2.3%에서 두 배 가량 시청률이 오른 셈이다.

 

즉 이 시간대의 시청률을 어느 정도 회복시킨 것만으로도 <웃찾사>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이런 시청률보다 더 중요한 성과는 <웃찾사>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대중적인 관심도를 편성 변경 하나로 끌어올릴 수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했던 건 역시 <개그콘서트> 덕분이다.

 

<웃찾사>는 본래부터 <개그콘서트>와의 맞대결을 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 시기가 이렇게 빨리 올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이 시기를 앞당기게 한 장본인은 <개그콘서트>. 최근 들어 시청률이 계속 떨어지고 코너들도 정체된 느낌을 주면서 <개그콘서트>가 예전만 못하다는 얘기가 나오기 시작하자 <웃찾사>는 발 빠르게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한편 현실에 대한 공감과 신랄한 풍자를 다루면서 <웃찾사>에 대한 호감도는 점점 높아지고 있었다. ‘뿌리 없는 나무‘LTE뉴스’, ‘배우고 싶어요같은 코너들이 화제를 만들고 있었던 것. 일요일 밤으로 돌아온 <웃찾사>는 여기에 강성범의 모란봉 홈쇼핑같은 새 코너를 장착했다.

 

물론 이것만으로 <웃찾사><개그콘서트>의 아성을 공략하기에는 중과부적이다. 하지만 바로 이 지점은 <웃찾사>로서는 가장 좋은 이점으로 작용한다. 웃음의 코드는 결국 낮은 위치에 있을 때 더 폭발력이 세고, 대중적인 지지도 커지기 때문이다. 서민들의 팍팍한 삶을 풍자와 공감으로 끌어내 웃음으로 전화시킬 수 있는 건, 그것을 하는 개그맨들이 서민과 같은 낮은 위치에 서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웃찾사>를 살려내고 있는 건 그 경쟁상대로서 최고의 위치에 서 있는 <개그콘서트>라는 존재다. <개그콘서트>라는 골리앗이 서 있어 <웃찾사>라는 다윗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리고 이것은 궁극적으로 <개그콘서트>에도 큰 자극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여러모로 독주체제란 매너리즘을 만들 위험성도 높고 또 대중들에게도 그리 좋은 이미지를 남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웃찾사>가 들어와 <개그콘서트>와 경쟁구도를 만들면서 이 시간대를 빼앗아간 MBC의 드라마와의 한판 승부가 앞으로 흥미진진한 대결이 되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웃찾사><개그콘서트>의 경쟁구도는 거시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 편성 시간대를 무대 개그 프로그램의 시간으로 포지셔닝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웃찾사>의 편성 시간대 변경은 대단히 성공적이라고 평가된다.

 

<징비록>, 류성룡보다 강한 이순신의 존재감

 

어쩔 수 없이 이순신이 주인공인건가. KBS <징비록>의 주인공은 이 제목의 책을 쓴 류성룡(김상중)이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가면 갈수록 이순신에 대한 갈증이 깊어진다. 단 한 번도 출연하지 않은 이순신 역할을 누가 연기할 것인가가 벌써부터 초미의 관심사다. 거북선 건조를 선조(김태우)가 후원한 걸로 알고(사실은 류성룡이 왕의 이름으로 보낸 것) 이순신이 감사의 서신을 보내온 장면에서 잠깐 등장한 목소리에 시청자들이 귀를 쫑긋 세운 건 그래서다.

 

'징비록(사진출처:KBS)'

지주들만 배를 채우고 가난에 허덕이는 백성들과 이를 바로 잡지 못하는 왕과 신하들, 전운이 감돌고 있음에도 나라살림이 엉망이라 축성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실정. 심지어 선조는 수군을 폐지하자는 얘기까지 꺼냈다. 수군을 폐지하자는 건 고스란히 바닷길을 열어주자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발끈한 이산해(이재용)는 이를 매국이라고까지 하며 불같이 화를 냈다.

 

이 혼돈의 시기에 당파나 왕, 백성들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소신 있게 자신의 뜻을 밀고 나가는 인물은 류성룡이 유일하다. 그러니 그는 선조가 반대한 거북선 건조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에게 왕의 이름으로 은밀하게 후원금을 보내주고 있었던 것. 모두가 당파로 인해 이순신을 등용하려 하지 않을 때도 유일하게 그를 지지한 인물이 바로 류성룡이다.

 

그래서 <징비록>은 이렇게 백성들의 안위와 왜세에 대한 균형 잡힌 사고를 가진 소신 있는 정치가 류성룡을 다루는 것이지만, 그래도 지금의 대중들에게 더 희구되는 인물은 아무래도 이순신인 것 같다. 이순신이라는 이름 석 자가 나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이렇게 된 건 <징비록>이 다룰 수밖에 없는 임진왜란이라는 소재에 걸맞는 스펙터클로서 이순신만한 인물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징비록>은 임진왜란이 벌어지는 그 과정에서 어떤 정치적인 실패가 있었고 어째서 외세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했는가에 대한 냉엄한 심판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니 정치적인 대결구도와 왕과 신하의 역학관계가 드라마의 주 골격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대중들은 이런 정치적인 입장과 대결에 일종의 혐오를 느끼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지금 현재의 정치 현실 안에서도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흔하게 보는 풍경이기 때문이다. TV 뉴스만 들여다보면 지긋지긋하게 나오는 정치인들의 공방을 드라마를 통해서 또다시 보기 싫은 까닭이다.

 

대신 대중들이 드라마를 통해 보고 싶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이순신 같은 희망이다. 무능한 정치인들이 서로의 이권을 두고 다투고 있을 때 묵묵히 바다를 지키기 위해 준비에 준비를 다하는 그런 인물. 이순신에 대한 열망에는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고 있는 정치인들에 대한 분노가 깔려 있다.

 

하지만 이것은 자칫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판타지적인 해소에 머물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지긋지긋해도 그 식상한 정치를 아프게도 들여다보는 일이다. 그것을 통해 현재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 어떤 해결의 실마리나 대중들의 각성을 이뤄내는 일은 이순신이라는 정해진 영웅담의 쾌감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징비록>이라는 책은 그래서 써진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꾸만 이순신이라는 인물로 빨려 들어가는 건 그만큼 작금의 현실이 당대의 임진왜란 직전처럼 서민들의 마음을 실망감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오죽 지긋지긋하면 들여다보고 싶지 않겠는가. <징비록>에서 류성룡의 정치보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에 대한 희망을 더 보고 싶어 하는 데는 이런 대중들의 헛헛한 정서가 깔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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