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1970>은 왜 이민호를 캐스팅했을까

 

<강남1970>은 제목에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그대로 집어넣었다. 1970년대의 강남. 그것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이것은 지금의 강남이라는 공간이 막연히 표징하는 의미와 맞닿아있다. 테헤란로를 중심으로 도열한 빌딩들과 회사들은 우리네 상류층의 막강한 자본을 상징하고, 도곡동에서 대치동, 압구정동에 들어찬 천정부지의 집값을 자랑하는 아파트들은 부동산 버블을 타고 커버린 개발시대의 경제에 맞닿아 있다. <강남1970>은 현재의 강남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하는 그 시원을 따라가는 영화다.

 

사진출처: 영화 <강남1970>

어찌 보면 자못 탐구적이고 탐사적일 수 있는 이 영화를 유하 감독은 누아르로 풀어낸다. 마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우울함에 <영웅본색>의 핏빛 액션이 그 겉모습이고, 그 이면에는 강남이라는 공간으로 표징되는 부동산 경제가 어떻게 경제와 정치 그리고 폭력의 야합으로 만들어졌는가가 다뤄진다.

 

그러니 이 영화는 종대(이민호)와 용기(김래원)가 밑바닥에서부터 성공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올라가는 그 액션 누아르에 초점을 맞춰 즐기는 것이 하나도 이상하지 않게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이어지는 형제애와 욕망의 줄다리기는 전성기 시절의 홍콩 영화처럼 때론 속 시원하고 때론 긴장과 이완을 덧붙이는 연출로 즐거움을 주기에 충분하다.

 

이민호라는 꽃미남으로 이미지화된 배우를 캐스팅한 것은 그래서 다분히 모험적이지만 결과적으로 잘된 의도라고 판단된다. 이민호는 자칫 의미 과잉이 될 수 있는 영화를 멋진 액션 영화처럼 느껴지게 만든다.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이 배우가 조폭들 사이에서 화려한 액션을 보일 때는 카타르시스마저 느끼게 해준다.

 

그러면서 영화는 결코 1970년대의 강남이라는 우리네 현대사에 대한 의미화를 버리지 않는다. 어찌 보면 말끔해 보이는 그 강남이라는 공간은 마치 이민호가 멋진 슈트를 차려입고는 있지만 그 자리에까지 오기 위해 무수한 피들이 그의 손에 묻혀졌던 것과 같은 의미로 다가온다. <강남1970>은 그렇게 피로 세워진 이 도시의 한 시절을 그려낸다.

 

물론 그 이면에는 개발시대의 군부독재와 그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인들, 그들과 손대려는 자본가들 그리고 몸뚱어리 하나가 부서져도 욕망을 쟁취하려는 조폭들의 커넥션이 있다. 그 단단한 커넥션은 결국 맨 꼭대기의 권력자들만을 남긴 채 그 밑은 끊임없이 희생되고 대치되는 시스템의 세계다. 시스템을 운용하는 이들을 제외하고, 모두가 제 손에 쥐었다고 생각하는 욕망을 그들은 끝내 쥐고 있지 못한다. 그것이 게임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유하 감독이 <말죽거리 잔혹사>, <비열한 거리>에 이은 <강남1970>으로 이른바 폭력 3부작을 통해 일관되게 다룬 것은 권력 시스템과 부딪쳐 깨지는 개인의 문제였다. 그들은 모두 시스템에 저항하거나, 적응하거나 혹은 그 시스템을 장악하려다 실패한다. 그리고 그렇게 몸뚱어리 하나를 갖고 부딪친 개인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시스템의 주인들이 권력을 장악한다.

 

<강남1970>의 마지막 장면은 이 70년대의 이야기가 현재와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를 잘 보여준다. 과거 70년대 손에 피를 묻혔던 그들은 지금 현재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그 말끔한 양복 아래 숨겨진 잔인함은 강남이라는 공간의 말끔함을 다시금 바라보게 만든다. 유하에게 강남은 그런 공간이었을 것이다. <강남1970>은 그래서 1970년대를 향수하는 영화가 아니다. 대신 그것은 지금의 문제가 1970년대의 한 지점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영화다.

 

<펀치>, 짜장면 한 그릇에도 담기는 은유

 

결국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흔히 우리가 하는 이 말은 상황에 따라 너무나 다른 뉘앙스로 읽힌다. ‘먹는다는 건 가장 기본적인 삶의 본질이라는 뜻도 되지만 그것은 또한 욕망의 다른 표현으로 읽히기도 하기 때문이다. SBS 월화 드라마의 <펀치>먹는다는 표현이 그렇다. 이 드라마에서는 짜장면 한 그릇을 먹어도 그 먹는 행위에 남다른 은유가 담긴다.

 

'펀치(사진출처:SBS)'

검찰총장이 된 이태준(조재현)과 그를 검찰총장 만들었으나 그에게 배신당한 박정환(김래원) 검사가 함께 먹는 짜장면은 그들의 관계를 그대로 상징한다. 처음에는 같이 어려움을 겪었던 시절을 상징하던 짜장면이지만 관계가 틀어지고 나자 서로 다른 중국집의 짜장면이 맛있다고 의견이 갈린다. 그렇게 영원히 틀어질 것 같았던 두 사람이지만 윤지숙(최명길) 법무부 장관을 공동의 적으로 세우며 연합할 때는 또 같이 앉아 짜장면을 먹는다.

 

음식은 하나의 기호와 취향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그걸 같이 먹는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하는 소재로 활용된다. 이태준 총장과 윤지숙 장관의 입맛이 다른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서로 다른 욕망으로 엇나가 있다는 걸 말해준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는 식당은 그들의 관계에서 누가 우위에 있는가를 표현하기도 한다. 홍어를 좋아하는 이태준 총장이 윤지숙 장관에게 홍어를 한 점 얹어 먹으라고 권하는 장면은 이태준 총장이 권력의 우위를 잡게 된 상황을 말해주고, 반대로 윤지숙 장관이 스파게티집으로 이태준 총장을 부르는 장면은 반대의 상황을 말해준다.

 

함께 밥을 먹는다는 행위는 이처럼 <펀치>에서는 권력 관계의 은유로서 사용된다. 윤지숙 장관과 이태준 총장이 서로의 비리를 하나씩 잡고 공동운명체가 되는 순간, 이태준 총장은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도 가야되는 거 아니냐고 너스레를 떤다. 윤지숙 장관이 까만 커피에 프림을 넣는 장면을 은유해 깨끗한 검찰을 만들겠다고 하는 장면이나, 박정환 검사가 커피에 검은 설탕과 하얀 설탕을 넣으며 (윤지숙 장관이나 이태준 총장이나) 그게 그거라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또 이태준 총장의 형 이태섭(이기영)이 자살 직전에 동생과 칡뿌리를 나누는 장면도 그렇다. 그 칡뿌리는 이태준 총장의 책상에 간직되어 두 사람의 형제애를 표징하는 도구가 된다.

 

<펀치>의 박경수 작가는 이처럼 음식에 대한 은유를 의도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것일까. 그것은 일단 자칫 이 복잡하고 어려울 수 있는 드라마의 권력 관계들을 가장 쉽게 풀어낼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가 누구와 연합하고 또 누구와 대립하는 정치적인 관계의 변화는 따라가기 어려울 수 있지만 함께 밥을 먹는 장면만으로도 그 사람들의 관계를 표현할 수 있다면 훨씬 효과적이지 않을까.

 

하지만 그런 효과적인 측면보다 더 중요한 건 먹는다는 행위에 대한 박경수 작가 특유의 사유가 거기에 녹아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군가를 만날 때 아무렇지도 않게 밥 한 끼 하자고 말하지만 사실 그 이면에는 꽤 많은 목적들이 담기기 마련이다. 욕망의 한 가운데 서 있는 이들이라면 그러니 그 밥 한 끼의 의미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목적성을 띨 수밖에 없다. 이것이 <펀치>의 인물들이 밥을 먹는 장면이 맛있다기 보다는 탐욕스럽다고 여겨지게 만드는 이유다.

 

최근 나영석 PD<삼시세끼>가 화제다. 도시를 떠나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삼시세끼를 챙겨먹는 그 행위에 대중들은 뜻밖의 열광을 보낸다. 차승원과 유해진이 만재도의 한 집에서 챙겨먹는 밥 한 끼에는 아무런 목적성도 탐욕도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 밥 한 끼에는 두 사람의 진심이 담긴다. <펀치>의 삼시세끼와는 너무나 다른 장면이 아닐 수 없다.

 

결국은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하지만 그 먹는다는 행위가 삶의 본질에 닿아있지 않고 어떤 욕망과 목적성을 내포할 때 그 밥 한 끼는 우리네 삶의 피와 살이 되지 못할 것이다. <펀치>의 목적화된 음식들은 그래서 그 관계의 피폐함을 드러내는 증거가 된다. 좋은 사람과 만나 진심이 담긴 밥 한 끼 챙겨먹는 일. 어쩌면 진정한 삶과 관계의 회복은 그런 작은 것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래원, 절제와 광기의 절묘한 조화

 

2006년 개봉했던 <해바라기>라는 영화 속에서 김래원의 가능성이 발견되었다면, 최근 드라마 <펀치>와 영화 <강남1970>에서의 그는 그 가능성을 최대치로 끄집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과거 그에게서 발견됐던 것은 광기감성을 공유한 배우였다. 그는 한없이 순진무구해 심지어는 바보처럼 보이는 얼굴이었다가 어느 순간 악마 같은 광기를 폭발해내는 얼굴로 돌변할 때 그 에너지를 드러낼 줄 아는 배우였다.

 

'펀치(사진출처:SBS)'

<펀치>에서의 김래원은 그 다소 단조롭던 두 가지 얼굴이 여러 개로 변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이태준(조재현)을 검찰총장으로 만들어내는 박정환은 욕망에 충실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이태준의 충실한 개가 되어 검사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까지 하는 냉혈한이었다. 그랬던 그가 시한부 인생 판정을 받고 그 와중에 이태준의 버림을 받게 되면서 문득 가족으로 돌아온다.

 

갑자기 찾아오는 엄청난 병의 고통을 견뎌내고, 그것보다 더 지독한 이태준과 윤지숙(최명길) 법무부 장관 같은 인물들의 공격을 버텨내면서 그는 가족을 지켜야 한다. 그는 병과 싸우고 세상과 싸우며 가족 앞에 서는 인물이지만 그 얼굴은 좀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그는 통증을 숨기려 자기만의 방안으로 들어가 입술을 질끈 물고, 파상 공격 앞에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표정을 숨긴다. 그리고 가족 앞에서도 여전히 건재한 듯한 얼굴을 보여준다.

 

똑같은 무표정의 얼굴이지만 그 안에는 세 가지 다른 감정들이 요동친다. 병의 고통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한 인간의 모습을 숨기고, 자신을 희생양 삼아 권좌에 오르려는 한때는 같은 꿈을 꾸던 인물들 앞에서는 그 분노의 감정을 숨긴다. 그리고 가족 앞에서는 자신의 이 고통들을 숨기려 애쓴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살고 싶다며 눈물을 쏟아내는 장면은 그래서 김래원 특유의 감정 폭발을 만들어낸다. 멀쩡한 듯 보이던 얼굴이 한껏 일그러지고 눈물로 범벅이 될 때 우리는 그간 그의 무표정 뒤에 있었을 고통들을 한 순간에 느낄 수 있다.

 

이것은 김래원이라는 배우의 특별함이다. 그는 절제의 미학을 안다. 한껏 감정이 폭발할 때 그것을 한 번 눌러 줌으로써 다음 장면에서 더 강한 긴장감이 유발되고 클라이맥스에서의 강렬함이 커진다는 걸 그는 잘 알고 있다. 그의 얼굴은 그다지 특징이 있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바로 그런 얼굴이기 때문에 무표정에 눌려진 감정들은 더 폭발력을 갖는다.

 

유하 감독의 신작 <강남1970>에서의 김래원은 욕망과 우정 사이에서 흔들리는 용기라는 인물을 연기한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종대(이민호)와 함께 형제처럼 추운 밤을 살 부비며 버텨왔던 그는 차츰 강남이라는 욕망의 중심부로 들어가게 되고 결국은 종대와 맞서게 되는 역할을 맡았다.

 

이 작품에서 김래원의 무표정은 조직 내에서의 암투를 통해 빛을 발한다. 자신의 진짜 목적을 숨긴 채 하나하나 조직을 잠식해 가면서 또한 형제 같던 종대와의 엇나가는 관계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은 김래원이라는 배우를 통해 더 효과적으로 그려진다. 그의 욕망은 그래서 비열하다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오는 면이 있다. <강남1970>이 그려내는 권력자들의 게임 속에 이용되던 희생자들의 이야기에, 광기의 액션과 욕망, 감성을 동시에 드러내주는 김래원만큼 맞춤인 배우가 있을까.

 

<펀치><강남1970> 같은 작품이 모두 권력과 희생양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은 그래서 흥미로운 일이다. 그 권력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그 앞에서 희생양이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박정환이나 종대는 김래원이라는 배우를 만나 그 무표정 속에 더 아픈 감정들을 담아낸다. 그것은 어쩌면 무표정한 듯 하루하루를 살아내는 우리네 보통 서민들이 갖는 욕망에 대한 양가감정일 것이다. 그래서 그 무표정에 더더욱 몰입하게 만드는 힘. 이것이 김래원의 특별함이 아닐까.

 

<K>의 칭찬과 혹평, 그리고 유희열의 위치

 

지금 하도 많이 칭찬을 받기도 하고, 대중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기도 해서 본인은 헷갈릴 것 같다.” <K팝스타4>에서 유희열은 의외로 이진아의 노래에 대해 혹평을 했다. 그는 제일 별로였다. 솔직하게 이진아의 매력이 없다. 이 곡은 앨범으로 치자면 수록된 10곡 중에 잠시 쉬어가는 9번 소품과 같다고 말했다.

 

'K팝스타4(사진출처:SBS)'

이진아에게 그 혹평은 강도가 더 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새로운 자작곡 두근두근 왈츠에 대해서도 박진영과 양현석 심사위원은 또 한 차례의 폭풍 칭찬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특히 박진영은 스스로도 자신의 과한 평가에 대한 대중들의 반응을 의식한 듯, “과하게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라는 단서를 붙인 뒤 어쩔 수 없다는 듯 그녀의 곡에 대한 칭찬을 했다.

 

양현석 역시 마찬가지였다. 자신으로서는 오히려 이번 곡이 더 대중적으로 느껴진다고 그는 평가했다. 하지만 그런 칭찬 속에서도 유희열의 잔뜩 굳어진 얼굴은 이진아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쩌면 이진아가 진정으로 듣고 싶은 건 박진영이나 양현석 같은 대형 기획사의 의견이 아니라, 작아도 아티스트형 가수들과 함께하는 유희열의 의견이었을 것이니 말이다. 유희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이진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고, 그 아프지만 약이 되는 질책에 눈물을 흘렸다.

 

이 장면은 현재 <K팝스타4>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이 가진 위치를 가장 잘 보여준다. 본래 <K팝스타>대형기획사가 참여하는 오디션이라는 차별점으로 자리매김한 프로그램이다. 따라서 거기에 맞는 10대 참가자들이 유독 많았고, 그렇게 발굴된 이들은 아이돌로서 활동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시즌을 거듭하면서 대중들의 기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기획사가 양산하는 가수들보다는 점차 아티스트형 가수들에 대한 소구가 생겨난 것이다. <K팝스타>가 탄생시킨 악동뮤지션 같은 팀은 이런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인물들이다.

 

유희열의 등장이 신의 한 수로 여겨진 것은 그가 특유의 방송감을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존재 자체가 대형 기획사들과는 다른 색깔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아티스트형 가수들이 가진 특징들을 가장 잘 어우를 수 있는 인물로 그는 여겨졌다. 그래서 그는 박진영, 양현석과는 의견을 달리하는것만으로도 <K팝스타>에서의 자신의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문제는 이런 아티스트형 가수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이들에 대한 칭찬과 혹평이 자칫 이들을 망가뜨릴 수 있는 위험요소로 다가오면서다. 특히 이번 <K팝스타4>에서는 유독 천재(?)’들이 흔해질 만큼 과한 칭찬들이 많았다. 물론 그것은 심사위원들의 진심이었겠지만 그런 진심이 받아들여지는 상대방에게는 오히려 독이 될 가능성도 높다.

 

아티스트형 가수들은 자신들만의 세계를 갖고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칭찬과 혹평은 타인을 의식하게 만든다. 본래 평가에는 어떤 암묵적인 기준 같은 것들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 기준이 개인적인 취향에 머물 때는 그래서 더 위험하다. 혼자 작업할 때는 자신의 색깔을 유지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렇게 오디션에 노출되어 누군가에게 심지어 감당하기 어려운 칭찬을 받기 시작하면 그 이야기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심사위원의 과한 칭찬은 오히려 대중들의 반대급부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즉 지나치게 과한 칭찬에 대한 반작용으로 그게 과연 그럴 만 했는가 하는 대중들의 논란이 생겨난 것이다. 이진아를 두고 벌어진 논란은 이처럼 그녀가 촉발한 것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과한 평가가 만들어낸 것이다. 그저 조용히 자신의 노래를 할 수 있게 해줬다면 좋아하는 사람은 좋아하고 별로인 사람은 별로로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닥 큰 감흥이 없던 사람들까지 이것은 천재의 음악이라고 강요함으로서 논란은 촉발되었다.

 

유희열의 솔직한 혹평은 그래서 그가 왜 이 오디션 프로그램에 존재하는가를 잘 보여준 것이었다. 그는 이진아 같은 아티스트의 입장과 또 대중들의 반응을 대변함으로써 이 오디션 프로그램의 심사가 가진 과함에 어떤 균형점을 내놓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가 이진아에게 한 것은 혹평이라기보다는 조언에 가까웠다. <K팝스타4>라는 오디션 프로그램의 무대이고, 대형기획사의 상업적 의견들이 개진되는 장이지만 그래도 흔들리지 말고 자신의 음악을 하라는 것. 그 말이 이진아에게는 아프면서도 고마운 대목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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