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시세끼>의 카메라는 왜 특별할까

 

그다지 특별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는 <삼시세끼>의 세상에서는 두부 한 모가 사라진 일이 엄청난 사건처럼 그려진다. 기껏 읍내까지 가서 산 것으로 생각한 두부가 막상 집에 와보니 없다는 사실을 안 이서진과 옥택연, 김광규, 김지호는 서로 공방전을 벌인다. 그들은 도대체 두부가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존재가 있다. 그건 바로 카메라다. 카메라는 이들이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에 눈이 멀어 챙겨야할 두부를 아무도 챙기지 않고 등을 진 것을 보여준다.

 

'삼시세끼(사진출처:tvN)'

이 별 거 아닌 두부 실종 에피소드가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가 되는 이유는 뭘까. 그것은 너무나 일상적이라 우리의 눈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을 카메라의 눈이 세세하게 잡아내기 때문이다. 염소 잭슨에게 다가가는 김지호가 자신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잭슨에게 툴툴댈 때, 카메라는 잭슨이 군불을 때는 이서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장면을 교차해 보여준다. 사실 이런 장면도 이러한 소소한 일상을 응시하는 카메라가 아니라면 놓치기 쉬운 장면들이다. 이서진이 잭슨의 이름을 불러주고, 집을 지어주고, 물을 주는 과거의 장면들이 덧붙여지니 또 하나의 잭슨-이서진 러브라인 에피소드가 만들어진다.

 

카메라는 심지어 집 앞에 놓여있는 소파 같은 정물조차 하나의 이야기를 건네는 마법을 보여준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산보를 다녀와 배고프다며 오빠들을 깨우는 김지호는 의자 소피에 앉아 아 이 의자 너무 좋네라고 혼잣말을 한다. 그러자 마술처럼 이 소피에 얽힌 과거의 이야기가 영상과 함께 자막으로 흘러나온다. ‘의자 소피로 말할 것 같으면... 택연이와 밍키가 사랑에 빠지던 곳. 노래방 다녀온 일섭이 열정을 식히던 곳. 푸드 파이터 화정의 식욕을 자극하던 곳. 때로는 밍키의 침대가 되었던 곳. 그곳이 배고픈 지호에겐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다.’ 지나가면 놓치기 마련인 시간의 흐름을 한 공간으로 묶어주는 마법. 이것 역시 카메라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이것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관찰 카메라가 가진 궁극의 목표이자 소임일 것이다. 관찰 카메라는 우리가 그냥 지나쳤던 일상 속으로 카메라를 드리웠다. 하지만 그 카메라가 사생활을 훔쳐보는 차원에 머문다면 그건 자극만 남을 뿐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를 전해주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삼시세끼>의 관찰 카메라는 훔쳐보기가 아닌 일상 속에 숨겨진 의미의 발견을 보여준다.

 

밤하늘에 지천으로 떠있는 별을 도시에 사는 우리는 밝디 밝은 불빛들 때문에 볼 수 없다. 어쩌면 늘 떠있는 저 하늘의 별처럼 일상은 본래 마법 같은 일들로 가득 차 있는 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의 눈이 불빛처럼 바쁜 삶에 멀어 있을 뿐. <삼시세끼>의 시골이란 공간은 우리가 잊고 있던 바로 그 밤하늘의 별 같은 일상을 발견하는 곳이다. 조명이 꺼지자 하늘을 뒤덮고 있던 별이 쏟아진다.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것을 <삼시세끼>의 카메라는 보여준다.

 

옥택연은 그 별을 본 소회를 전하며 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도시에서는 늘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는 것. 하지만 무언가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그 시간 속에서 주위를 느낄 수 있는 시간은 별로 없었다는 것. 그의 작은 발견이 주는 감흥은 자막을 통해 하나의 의미로 만들어진다. ‘항상 무엇인가를 한다는 것. 밥을 먹거나, 일을 하거나... TV를 보거나 차를 마시거나 늘 무언가를 하느라 시간을 쓴다. 그중 시간을 오롯이 쓰는 건 얼마만큼 일까. 지금 그는 무언가 하는 시간이 아니라 그 시간 자체를 느끼는 중이다. 그에게 주어진 잠시 동안의 그만의 시간을...’

 

<삼시세끼>의 카메라가 특별한 것은 그 일상을 바라보는 남다른 시각 때문이다. 그저 보여지는 것에 집중하기보다는 아무 것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일상 속에서 사실은 대단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발견해내고 그 의미를 찾아내고 있는 것. 그런 점에서 <삼시세끼>처럼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 같은 시골의 공간은 오히려 우리가 잊고 있던 일상의 발견을 하기 위한 최적의 장소가 된다. 혜민 스님이 말한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 곳이 바로 <삼시세끼>의 세상이다.

 

삼포세대에게 멜로보다 강력한 <미생>의 판타지

 

최근 들어 드라마 속 멜로는 왜 그렇게 시들해져버렸을까. 여전히 멜로가 들어가야 시청률을 담보한다는 방송사 드라마 기획자들의 진단은 틀린 것이 아니다. 그것은 늘 수치로서 분명한 결과를 보여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단순한 양적 시청률과는 무관하게 멜로는 외면받기도 한다. 각기 다른 계층의 남자와 여자가 만나 그 계층의 벽을 뛰어넘어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는 적어도 이 시대에는 너무나 공허해진 이야기가 되었다.

 

'미생(사진출처:tvN)'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이미 포기한 삼포세대라는 신조어가 나오는 시대에 통상적인 멜로는 마치 현실의 고통을 잠시 잊게 해주는 진통제가 되거나, 때로는 전혀 효과가 없는 엉뚱한 처방약처럼 보인다. 그래서 요즘은 연애도 결혼도 출산도 현실이 아닌 TV 프로그램으로 대리 경험하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마녀사냥>이 그렇고 <우리 결혼했어요>가 그러하며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육아 예능이 그렇다. 이를 다루는 멜로는 <밀회>처럼 그나마 사회적 의미를 덧붙였을 때만 잠깐 주목되는 어떤 것일 뿐, 이제는 현실과 동떨어진 공허함만 남았다.

 

<미생>이라는 대박 리메이크가 지상파가 아닌 케이블에서 방영되게 된 이유가 멜로를 굳이 넣지 않으려는 윤태호 작가의 의지때문이었다는 사실은 그래서 흥미롭다. 윤태호 작가는 드라마라면 전가의 보도처럼 사용되는 멜로가 <미생>이 그리는 세계를 변질시킬 것을 저어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회사라는 살벌한 전쟁터에서의 삶에 멜로의 달콤함을 덧붙인다는 건 어딘지 맞지 않을뿐더러, 이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에게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미생>에는 그래서 멜로가 없다. 장그래(임시완)와 안영이(강소라)의 알게 모르게 느껴지는 감정의 공기는 있지만 그건 멜로라고 말하기 어렵다. 선차장(신은정)이라는 워킹맘에서 결혼과 출산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지만 그것은 멜로가 그리는 결혼과 출산의 달콤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일과 가정을 양립할 수 없는 우리 시대의 비애가 그 인물이 그려내려는 결혼과 출산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것은 삼포세대와 동일한 입장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를 낳으면 축복해주기는커녕 또냐?”고 인상을 찡그리는 게 우리네 직장의 현실이다.

 

그런데 이 멜로를 대치하는 더 강력한 관계가 <미생>에는 존재한다. 그것은 남녀 관계의 차원을 넘어선 인간관계의 이라고 할만하다. 장그래라는 사회 초년생이 어찌 어찌해 들어와 살게 되는 영업 3팀의 오과장(이성민)과 김대리(김대명)는 직장이라는 조직이 갖는 어쩔 수 없는 갈등들을 보여주면서도 마치 때론 형 같고 때론 삼촌 같은 훈훈한 공동체의 모습을 그려낸다. 오과장은 이 스펙 없는 장그래라는 청춘을 겉으로는 신뢰하지 못하고 밀어내는 듯 보이지만 속으로는 그 누구보다 안타까워한다. 장그래가 억울한 누명을 쓰게 되고 그 사실을 오과장이 알아주는 딱풀에피소드는 두 사람 사이의 밀당처럼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한다.

 

<미생>이 직장을 꿈꾸는 이들이나 직장을 다니는 이들에게 열렬한 반응을 얻은 것은 회사라는 어쩔 수 없이 인간의 노동(육체적 정신적 감정적)을 극한으로 밀어붙이는 시스템에 대한 이 작품의 태도 덕분이다. 이 작품은 아예 시스템 자체를 거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시스템에 굴복하지도 않는다. 원 인터내셔널이라는 시스템이 가진 부조리들 속에서 어쩔 수 없이 하루하루를 버텨내야 하지만 영업 3팀이라는 작은 공동체는 그 안에서도 나름대로의 작은 저항과 다독임을 통해 이 밥벌이로 치부되는 일터에 그만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 과정을 만들어가는 건 다름 아닌 그 구성원들이다. 장그래와 오과장, 김대리가 엮어가는 회사생활 관계의 썸들은 그래서 그 어떤 비현실적인 멜로의 썸보다 우리의 시선을 잡아끈다. 오과장 같은 상사가 있다면, 장그래 같은 부하직원이 있다면 또 김대리 같은 중간 책임자가 있다면... 이런 상상을 하면서 그들 간에 벌어지는 관계의 성장은 그저 판타지라기보다는 도무지 변하지 않을 것 같은 세상에 던지는 작은 대안이 아닐는지. 그런 점에서 장그래와 오과장은 요즘 드라마에서 가장 뜨거운 커플이다.

 

<보이후드>, 시간의 궤적을 담아낸 궁극의 영화

 

시간을 본다는 것은 어떤 느낌일까. 만일 이 느낌이 궁금하다면 <보이후드>라는 영화의 165분에 빠져볼 일이다. 이 영화는 특별한 극적 스토리라인을 그다지 발견할 수 없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성장기를 오롯이 들여다보는 효과를 만들어낸다. 극중 메이슨 역할을 무려 12년 동안 연기해낸 엘라 콜트레인은 분명 시나리오에 있는 대로 연기를 한 것이지만, 이 영화 안에 자신의 소년시절을 그대로 담아냈다.

 

사진출처: 영화 <보이후드>

6살의 메이슨은 앳되고 밝은 얼굴의 엘라 콜트레인을 보여주지만, 12년 간 15분 남짓의 영화 분량을 찍기 위해 한 해에 3-4일 정도 만나 찍혀진 그 얼굴의 변화는 천진함에서 어둠과 우울을 거쳐 깊이가 조금씩 만들어지는 아이의 성장통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물론 영화의 스토리가 엘라 콜트레인의 다큐는 아니지만 그 얼굴의 변화와 그 속에 담겨진 느낌은 한 소년의 진짜가 틀림없다. 거기에는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살아가면서 그 변화를 놓치기 마련인 시간이 남기고 간 궤적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기적 같은 체험이다.

 

그렇게 들여다본 한 소년의 성장기란 어떤 것일까. 특별한 극적 내러티브를 사용하기보다는 그 정도 나이에 누구나 했음직한 고민들과 갈등들을 담담하게 영화는 풀어낸다. 엄마의 잇따른 결혼 실패와 의붓 아빠들의 폭력은 소년의 얼굴에 우수를 깃들게 만들고,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 그 고통과 아픔들은 소년의 내면 속에서 성장통으로 변모하며 삶의 의미를 물어보게 한다. 소년이 던지는 진지한 삶에 대한 질문은 그의 성장을 지속적으로 들여다본 관객에게는 결코 웃을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

 

물론 그 아슬아슬한 성장기를 잡아주는 건 때론 친구 같고 때론 기댈 언덕 같은 친 아빠 메이슨 시니어(에단 호크)라는 소울 메이트 덕분이다. 이 영화를 찍은 리차트 링클레이터 감독의 <비포선라이즈>를 함께 한 배우답게 에단 호크는 기꺼이 그 12년 세월의 흔적을 영화에 헌납했다. 고통을 수반하는 성장이 무에 그리 즐거울 일이 있을까. 하지만 그 성장에 햇볕을 주고 물을 주는 메이슨 시니어 같은 존재가 있기 때문에 소년이 청년이 될 수 있다는 걸 우리는 영화를 통해 발견하게 된다.

 

사실 누군가의 삶을 온전히 들여다본다는 건 그 자체로 마음 한 구석을 짠하게 만드는 경험이다. 갑자기 떠난 신해철이 대학가요제 시절 무한궤도로 나와 그대에게를 부르는 옛 영상을 볼 때 느껴지는 것처럼, 또 그렇게 순수한 열정에 가득했던 그가 넥스트 같은 밴드로 돌아와 세상에 묵직한 메시지를 노래로 전달하는 그 변화의 과정을 보는 것처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누군가의 삶을 더 짧은 영상 속에서 한 눈에 바라보는 그 느낌에는 왠지 모를 서글픔과 놀라움이 교차할 수밖에 없다.

 

<보이후드>는 바로 그 특별할 것 없지만, 그래서 더욱 특별해지는 소년에서 청년으로의’ 12년을 담담하게 담아냈다. 만일 우리가 지나온 시간들이 궁금하다면 <보이후드>라는 한 소년의 앨범을 한번쯤 들여다보는 것으로 충분할 지도 모른다. 그 아무 것도 없다 여겨졌던 그 지나간 시간 속에서 어떤 기적 같은 힘을 보게 될 테니.

 

<나를 찾아줘>가 보여주는 기막힌 미국사회에 대한 통찰

 

미국식 막장이라는 표현은 <나를 찾아줘>라는 영화에 온당할까. 아마도 끝없는 반전에 반전이 이어지고, 숨겨졌던 사실들이 하나씩 밝혀져 나오며, 멀쩡했던 인물들이 끔찍할 정도로 변신하는 그 과정들이 우리네 막장 드라마를 떠올렸던 모양이다. 심지어 <나를 찾아줘>의 에이미(로자먼드 파이크)MBC <왔다 장보리>의 연민정(이유리)과 비교하기도 한다.

 

출처 : 영화 <나를 찾아줘>

하지만 한 마디로 얘기하면 <나를 찾아줘><왔다 장보리> 같은 우리네 막장드라마는 비교 불가다. 다만 그 속도감과 놀라운 반전에 반전이 유사하게 여겨질 뿐, <나를 찾아줘>라는 작품이 그려내는 세계의 밀도는 우리네 막장드라마들의 그 허술함과는 비교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나를 찾아줘>의 이러한 빠른 전개와 반전요소들이 그저 자극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이 하려는 주제의식과 딱 맞아떨어지는 완성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를 찾아줘>는 평범하게 잘 살아가는 듯 보였던 부부 닉(벤 애플랙)과 그의 아내 에이미가 보여주는 거의 막장에 가까운 그네들의 연기적인 삶이다.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에이미 때문에 그녀를 찾아 나선 닉은 사랑하는 아내를 절절하게 찾고자 하는 남편처럼 보이지만 차츰 그와 그들의 부부생활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리고 사건이 전개되면서 점점 에이미의 실종은 마치 닉의 살인이라는 심증으로 흘러가는데, 이것은 이 2시간이 훌쩍 넘는 영화가 본격적인 반전을 만들어가는 데 거의 시작 부분에 해당할 뿐이다.

 

아주 담담하게 시작했는데 영화가 흘러가면서 점점 사건들이 중첩되고 그로인해 예측과 배반이 계속되는 이 흐름은 특별한 스펙타클 없이 이야기로만 흘러가는 이 긴 영화를 전혀 지루하지 않게 만든다. 이토록 이야기의 세계에 푹 빠지게 만드는 그 힘은 영화가 가진 놀라운 스토리텔링 능력 덕분이다. 영화는 한 쪽으로 이야기를 몰고 나갔다가 그 지점에서 다시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틀어버리는데 대단히 능하고, 그것은 또한 작품이 말하려는 주제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놀랍기까지 하다.

 

영화가 반전을 모티브로 삼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이야기는 스포일러에 해당되는 것일 게다. 하지만 한 가지만 짚고 넘어가자면 이 영화는 연기하는 삶의 끔찍함을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들 쇼윈도 부부라고 부르는 그 연기하는 삶이 어떻게 자본주의와 결탁하고 있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끔찍한 짓들이 자행되면서도 전혀 도덕적으로 둔감해지는가에 대한 이야기도 담고 있다.

 

영화의 제목이 <나를 찾아줘>라는 건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도대체 진짜 모습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린 삶. 그것은 이 영화의 극적인 전개만을 빼놓고 본다면 우리네 현대인들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그 복잡한 삶 속에서 겉으론 멀쩡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잘 살아내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본색이 숨겨진 채 연기를 위해 안간힘을 쓰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지 않던가.

 

<나를 찾아줘>를 보면서 또 한 가지 떠오르는 건 미국이라는 사회가 가진 이중적인 얼굴이다. 겉으로 보면 미국(美國)’은 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의 외견을 보여주지만 어디 실체가 그런가. 로맨틱한 사랑의 이면에서도 쿨하다는 시대적 연기 강령을 가진 미국은 그 속에 자본의 욕망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한다 하면서 모든 걸 제 손에 쥐고 통제하려는 욕망은 그래서 때로는 파괴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한다.

 

<나를 찾아줘>는 그래서 한 멀쩡해 보이는 부부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으로 미국 사회가 가진 이중적 얼굴을 보여주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것은 이제 미국식의 자본주의를 이식해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그리 낯선 문제가 아니다. 이 기막힌 미국사회에 대한 통찰을 보여주는 영화가 막장이라고? 만일 이런 게 막장이라면 매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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