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근두근 내 인생', 죽음이 대수인가 두근대는 가슴이 있는 한

 

조로증에 걸려 몸은 이미 팔십 세 노인이 다 된 아름이의 나이는 열여섯 살. 공교롭게도 그의 부모인 대수(강동원)와 미라(송혜교)가 아름이를 갖게 된 나이도 열여섯이다. 열일곱에 낳았지만 그들이 만나 서로에게 두근대는 마음을 가졌던 건 열여섯. 이른바 우리가 흔히 이팔청춘이라고 말하는 나이다.

 

'사진출처:영화<두근두근 내인생>'

왜 하필 이팔청춘일까. 부모는 그 나이에 사랑을 했고, 한 번도 이성과의 사랑을 해본 적이 없는 아름이는 그 나이에 생을 마감한다. 바로 이 이팔청춘이라는 설정은 <두근두근 내 인생>이라는 영화에 중요한 메시지와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팔청춘의 나이에 맞닥뜨리는 죽음이라니.

 

대개 병동에서 벌어지는 이야기, 그것도 아이가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는 이야기는 전형적인 신파 구조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마음만 먹는다면 영화는 관객들을 눈물 쏙 빼는 경험 속으로 몰아넣을 수 있다. 하지만 <두근두근 내 인생>은 그런 선택을 하지 않는다. 이웃집 할아버지 장씨(백일섭)에게 조로증 소년이 같이 늙어가는 처지잖아요라고 말하듯이, 울기보다는 웃으려는 노력을 더 많이 보여준다.

 

어린 나이에 일찍 죽음을 실감하기 때문일까. 아름이는 어찌 보면 부모와 어르신들까지 오히려 다독이는 어른의 심성을 보여준다. 엄마가 일하는 것을 덜어드리기 위해 자신은 싫을 수 있는 방송을 선선히 하겠다고 나서는 아이다. 영 상태가 안 좋아져 언제 죽을 지도 모른다는 걸 스스럼없이 토로하는 아이에게 오히려 아이처럼 발끈하는 건 칠순의 이웃집 장씨다.

 

영화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나이에 대한 선입견을 기분 좋은 훈훈함으로 깨버린다. 아직도 게임기에 집착하는 대수는 여전히 아이 같고, 그 앞에서 아름이는 부모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웃집 장씨에게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PD가 아름이가 어떤 아이인가를 묻자 친구라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수십 년의 나이를 순식간에 훌쩍 뛰어넘는 뭉클함이 느껴진다.

 

하지만 아름이 앞에서 짐짓 아이인 척 구는 대수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여전히 이팔청춘의 목소리로 대하는 미라나 모두 아이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참을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어쩔 수 없는 부모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하지만 이들이 아름이 앞에서 눈물을 숨기는 것은 신파 구조로 눈물샘을 더욱 자극시키기 위함이 아니다. 그것은 이 영화의 주제와도 맞닿아 있다. 다가오는 미래의 슬픔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함께 하는 순간의 즐거운 기억들이다.

 

김애란 작가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인지 영화는 이야기가 가진 힘에 대해 역설한다. 나이 열여섯에 죽음을 맞이하든 아니면 팔십에 죽음을 맞이하든 결국 인간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중요한 건 그 열여섯 이팔청춘에 가슴 설렘을 마음 한 구석에 품고 편안히 누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수와 미라가 처음 만나 사랑에 빠지는 장면은 그래서 마치 동화 같은 이야기로 재구성된다. 단 한 번도 이성과의 두근대는 사랑을 경험하지 못했던 아름이는 아마도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부모가 느꼈던 그 이팔청춘의 설렘을 처음으로 공유했을 지도 모른다. 이것은 소설 같은 이야기의 힘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사라져도 이야기는 영원히 남는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결국 이 영화가 신파로 흐르지 않고 잔잔하게 우리네 삶을 얘기해줄 수 있었던 건 죽음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눈물이 아닌 웃음의 기억으로 채워주려 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아름이의 기억 속에는 부모의 모습이 여전히 아이 같은 아빠 대수와 당찬 엄마 미라의 이팔청춘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죽음? 그게 대수인가. 당장 두근대는 가슴이 있는 한.

 

<비정상회담>에서 침묵하는 김구라를 보니

 

JTBC <비정상회담>에 한국 대표로 출연한 김구라는 테이블에 앉자마자 이 프로그램이 잘 되는 것에 대해서 MC들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사실이다. 이 프로그램은 전체를 이끌어가는 메인 MC로 전현무, 유세윤, 성시경이 있지만 그들은 이야기의 전면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다만 옆에서 주제를 던지거나 외국인들이 던지는 말에 양념을 쳐서 웃음을 만드는 정도를 할 뿐이다.

 

'비정상회담(사진출처:JTBC)'

그래서였을까.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김구라는 지금껏 여타의 토크쇼에서는 좀체 보여주지 않았던 경청의 자세를 보여주었다. 그가 갖고 나온 주제는 아들에게 뭐든 들어주는 자신이 비정상이냐는 것이었다. 지금껏 아들 동현이가 원하는 건 들어주지 않은 것이 없다는 김구라는, 그러나 대부분의 외국인들에게는 비정상판정을 받았다.

 

터키 대표 에네스 카야는 그 어릴 때의 잘못된 습관이 아이의 미래를 망친다며 강도 높게 김구라의 육아방식을 비판했다. 미국 대표 타일러 라쉬는 아이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건 괜찮지만 끈기 있게 한 가지를 끝까지 하는 것은 좀 더 종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일본 대표 타쿠야는 무뚝뚝했던 자신의 아버지를 회상하며 그렇게 아이의 행복을 위해 뭐든 받아주는 김구라의 육아방식을 지지하기도 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육아방법에서 각자 아버지에 대한 회고로 이어졌다. 타쿠야는 자신이 야구선수로 마운드에 섰을 때 저 멀리 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보고 있던 것이 감동적이었다는 얘기를 꺼내며 자신이 아버지가 되면 아들과 캐치볼을 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타일러 라쉬는 알코올에 의존하던 아버지가 알고 보니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 만큼 우울증에 시달렸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고는 그 약해진 아버지와 드디어 소통하게 됐다고 얘기했다. 김구라는 자신의 아버지가 루게릭병을 앓았지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했던 사연을 꺼내놓으며 자기 위치에 굳건히 서 있는 것도 효도라고 말했다.

 

최근 김구라에 대한 호감은 과거에 비해 부쩍 줄어들었다. 과거에는 특유의 독설이 시청자들에게 심지어 통쾌함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어딘지 불편함으로 변모하고 있는 상황이다. 토크쇼가 전반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기 때문인지 독설의 강도를 높이고 있지만 그건 오히려 호불호만을 더 키우고 있다. 특히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불쑥 불쑥 꺼내놓은 그의 이야기 방식은 대중들에게는 어딘지 잘못된 것으로 다가오게 만들었다.

 

그런 김구라가 <비정상회담>에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 경청하는 모습은 심지어 낯설게 다가왔다. 김구라가 아닌 것 같은 모습. 그건 방송에서 보여주던 독설가의 모습이 아니라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의 김구라의 모습이었다. 이건 어쩌면 <비정상회담>이라는 특별한 토크쇼가 부여한 역할일 것이다. 김구라는 처음 테이블에 앉았을 때 프로그램이 잘 되는 이유가 MC들이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처럼 애써 자신을 누르는 모습을 보였다.

 

<비정상회담>에 출연한 김구라를 통해 발견하게 되는 건, 그가 던지는 센 멘트들이 그의 고유 성향이라기보다는 어쩌면 그 토크쇼가 그에게 요구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실 SBS <매직아이>MBC <라디오스타> JTBC <썰전>에서 경청하는 김구라는 불필요하다. 그는 점점 센 이야기들을 요구하는 토크쇼들 속에서 필요한 존재가 되었고 따라서 거친 독설은 그의 정체성이 되었다.

 

이런 점은 김구라가 좀 더 새로운 예능의 영역을 개척할 필요가 있다는 걸 에둘러 말해준다. 방송이 그를 불러준 건 독설하는 김구라였지만 지금은 조금씩 그 호감보다는 비호감이 늘어가는 상황이다. 비슷한 토크쇼 속에 들어가면 자칫 김구라는 그 틀에 갇혀버릴 위험성이 있다. MBC <사남일녀>는 김구라가 하지 않던 야외 버라이어티쇼를 통해 그의 새로운 면을 보여주려 했었지만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는 역시 토크쇼에서 힘을 발휘하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가 가진 직설어법을 새롭게 활용할 수 있는 토크쇼는 없는 것일까. 이건 김구라의 숙제이면서 우리네 방송계가 고민해야할 토크쇼의 숙제이기도 하다.

 

생활 자체가 예능이 되는 대체불가 김병만

 

SBS에서 새롭게 시작한 에코빌리지 <즐거운가>는 김병만이라는 대체불가 예능인의 면모를 새롭게 발견하게 만들었다. <즐거운가>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아직까지 시도되지 않았던 직접 집을 짓는 과정을 담고 있다. 집을 짓는다는 것이 누군가 지어준다는 것으로 인식이 박혀 있는 일반인들에게는 자신이 설계하고 자신이 땀을 흘려 집을 짓는다는 것 자체가 설레는 도전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즐거운가(사진출처:SBS)'

물론 도전이 주는 의미는 있지만 사실 집짓기는 과거라면 도저히 예능화되기 어려운 아이템이다. 하지만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건 거기 김병만이라는 달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집 또한 스스로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뭐든 제 손으로 척척 만들어내고 해내는데 일가견이 있는 김병만은 진정한 의미로서의 생활 예능인이다. 그는 언제부턴가 그가 체험하고 겪는 생활 자체를 예능으로 묶어내고 있다.

 

<정글의 법칙>은 어린 시절부터 산에서 나무를 타며 뛰어놀았던 김병만의 특별한 재능을 전제해서 탄생한 프로그램이다. 그의 재능을 처음 들은 SBS 정순영 국장은 단박에 김병만에게 이 기획을 제안했고 그렇게 해서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 그런데 그의 재능과 도전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스쿠버 자격증과 스카이다이빙 자격증까지 딴 김병만은 <정글의 법칙>의 시야를 물속과 하늘 위로까지 옮겨가게 만들었다.

 

그가 설 특집으로 출연했던 <주먹쥐고 소림사> 역시 마찬가지다. 평상시 그가 관심을 보였던 무술의 세계는 그를 직접 소림사로 가게 만들었고 거기서 무술을 배우는 과정을 예능으로 탄생시켰다. 이번 <즐거운가><정글의 법칙>에서 그가 지형지물을 이용해 뚝딱 집을 지어내는 모습을 통해서 그 프로그램 탄생의 전조를 본 적이 있다.

 

흥미로운 건 이처럼 김병만 스스로의 진짜 생활이 예능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와 그가 출연하는 프로그램 속의 그가 거의 100% 똑같은 리얼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아마도 프로그램 안과 밖이 이처럼 투명하게 이어지는 연예인도 드물 것이다. 바로 이점은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시대에 왜 김병만이 독보적인가를 잘 말해준다. 그는 진짜인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를 보여준다.

 

<즐거운가>는 김병만표 리얼 예능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즉 여타의 예능 프로그램들이 방영되고 나면 그저 기억 속에 휘발되는 것에 비해, 이 프로그램은 직접 실체로서 그들이 만든 집이 남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프로그램과 현실은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방송이 현실을 그대로 바꾼다는 건 김병만표 리얼 예능이 현실 그 자체에 발을 딛고 있다는 걸 말해준다.

 

<즐거운가> 첫 회를 통해 김병만은 직접 포크레인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새로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KBS <개그콘서트>에서 보여주었던 그 누구보다 체험에 있어 적응력이 빠른 달인의 기질은 이렇게 각각의 하나의 프로그램으로 탄생하고 있다. 과거 달인이 매주 새로운 도전을 예능으로 시작해 리얼로 발전시켰듯이, 지금 김병만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나온 하고 싶은 도전들을 프로그램을 통해 리얼로 만들어내고 있다. 이것은 김병만이라는 예능인의 독보적인 영역이 아닐 수 없다.

 

<닌자 터틀>, 그 유쾌함은 어디서부터 나올까

 

마이클 베이가 제작한 <닌자 터틀>은 우리에게는 닌자 거북이로 이미 알려진 친숙한 캐릭터다. 항간에는 <닌자 터틀>의 거북이 히어로들이 우리가 봤던 닌자 거북이와는 달리 귀여운 면이 사라졌다며 안타까움을 표시한다. 실제로 그런 면이 있다. <닌자 터틀>의 거북이들은 보는 이들을 섬뜩하게 만드는 면이 있다. 클로즈업해서 잡힌 이 거북이들의 얼굴은 심지어 징그럽게까지 느껴진다.

 

'사진출처: 영화 <닌자 터틀>'

하지만 이건 <닌자 터틀>이 만화가 아니라 실사 영화, 그것도 훨씬 무게감을 갖는 히어로 무비로 만들어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보인다. 만화 같은 귀여운 캐릭터들로 그려졌다면 자칫 영화 자체가 만화처럼 유치하게 여겨졌을 것이다. 오히려 공포물의 괴물 같은 섬뜩함을 준다면 그 체감이 그들을 실물처럼 느껴지게 할 수 있다. 여주인공인 메간 폭스가 이 닌자 거북이들과 처음 만날 때의 시퀀스가 마치 실사판 미녀와 야수같은 느낌을 주는 건 이 실감을 위한 치밀한 선택처럼 보인다.

 

<닌자 터틀>의 재미는 이 섬뜩함 뒤에 이들 거북이 4인방 레오나르도, 도나텔로, 라파엘, 미켈란젤로의 유쾌함이 곁들여지는 데서 나온다. 이들이 하는 닌자 액션은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또 후반부에 가면 나오는 마치 007 시리즈에서나 봤을 법한 설산에서의 추격전은 압권이지만 역시 새롭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도시를 위기에 빠뜨리는 악당을 물리친다는 익숙한 스토리에 액션들을 새롭게 만들어주는 건 이들이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10대라는 캐릭터 설정이다.

 

실제로 총알 세례를 받고 날카로운 칼날이 허공을 가르는 테러리즘의 현장에서 힙합 춤을 추거나 농담을 던지는 것이 가능할 수 있을까. 또 뉴욕이라는 도시를 살리기 위해 어둠 속에서 헌신하면서도 나 너무 멋지지 않았어?”하고 치기 어린 잘난 체를 하는 영웅의 모습이라는 것도 10대 캐릭터라는 설정이 아니라면 이상하게 여겨졌을 대목이다.

 

<닌자 터틀>10대라는 캐릭터를 가져와 부여한 거북이들의 특징은 아드레날린 과다로 설명된다. 언제 어디서 터질지 알 수 없는 이 충동적이면서도 넘쳐나는 힘은 그들이 좁은 엘리베이터 공간에서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장면에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한없이 유쾌한 캐릭터로 재탄생된다.

 

사실 이런 과잉의 설정이 아니라면 <닌자 터틀>은 유치하고 어설픈 말 그대로 만화 같은 이야기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 닌자 이야기에 서구식 히어로물을 접목하고, 사람과 거북이의 돌연변이를 주인공을 내세워 수련 받은 거북이들이 뉴욕을 구한다는 이야기는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 게다가 이 거북이들의 스승은 스플린터라는 쥐다. 결국 이런 스토리는 만화가 아니라면 기괴한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닌자 터틀>의 거북이들이 징그럽게 그려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이건 만화가 아니라 실사판 영화니까. 그 기괴함이 실감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 위에서야 만이 만화가 아닌 영화가 된다. 그래도 만화 속의 귀여운 닌자 거북이들을 떠올리며 아쉬워할 필요는 없다. 이를 모두 상쇄시켜주는 10대 캐릭터의 유쾌함이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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