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김구라쇼를 기대하는 이유

 '박중훈쇼'의 실패, '주병진 토크콘서트'의 난항. 우리에게 1인 토크쇼는 이제 어려운 일이 된 걸까. 아니 이것은 단지 1인 토크쇼에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토크쇼들의 성적표를 보면 게스트에 따른 시청률 편차가 너무 들쭉날쭉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토크쇼 자체의 힘이 아니라 게스트 의존도가 너무 높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이 와중에서도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는 토크쇼는 단연 '라디오스타'다. 게스트와 상관없이 일정한 재미를 뽑아내주고, 심지어 타 토크쇼에서는 그저 지나쳤던 게스트마저 재발견하게 만드는 토크쇼. 그 '라디오스타'의 중추는 자타공인 김구라다. 최근 들어 토크쇼에 있어서 가장 핫(hot)한 인물인 김구라. 왜 김구라쇼는 기획되지 않는 걸까. 김구라에게 김구라쇼에 대해 물었다.

"(자신의 쇼를 하고 싶다는 건) 모든 MC들의 꿈일 겁니다. 제가 잘 할 수 있는 건 바로 토크쇼이기 때문에 토크쇼 MC로서 특화되고 싶은 마음이 있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너무 양적으로 일이 많아서요(그는 현재 방송만 8개를 하고 있다고 한다). 상황 자체가 들어오는 일을 거절할 수 없게 됐죠. 제가 뭐 완전 톱스타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어느 정도 위치가 올라가고 여건도 괜찮아지면 제가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토크쇼를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게스트들이 저의 캐릭터를 믿고 편안하게 하면서도 속에 있는 얘기를 공격적으로 물어보는 그런 토크쇼 말이죠. 사실 꽤 오래도록 토크쇼를 해와서인지 이제 노하우가 어느 정도 생겼고, 또 이 분야에서는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김구라의 화법은 초기에는 '독설'이 부각되면서 불편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 독설은 언젠가부터 '직설'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배려한답시고 빙빙 돌려 얘기하는 기존의 토크 방식을 '진정성 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 독설이 직설로 여겨지게 된 건, 물론 김구라만이 갖는 '공감을 바탕으로 하는' 과감한 토크 방식 때문이다. 작금의 토크쇼들의 침체가 전반적으로 게스트를 지나치게 배려하는 토크 방식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볼 때, 김구라식의 화법은 어쩌면 여기에 대한 대안이 될 지도 모른다. 그의 직설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 것일까.

"성향이 그렇습니다. 제 성격 중 하나인데, 저는 사람을 만나서 혈액형을 물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주로 어디 살아요? 이런 현실적인 것에 더 관심이 가죠. 그래서 토크쇼도 현실적인 궁금증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다보니 직설적인 이야기들이 나오는 거겠죠. 또 제가 사람에 대한 호기심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야기를 들으면 그 이야기가 진짜인지 아닌지 빈틈(?)을 찾기도 하죠. 또 기본적으로 관심이 없는 건 별로 호응을 안 해주는 성격입니다. 처가댁 같은 데 가서도 식구들하고 얘기를 별로 안 해요. 관심이 없는 걸 얘기하니까. 또 예의를 딱딱 차리는 그런 성격도 아니라... 이런 면들이 토크쇼에서 나오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런 과감한 독설(?)이 그저 아무렇게나 툭툭 던진다고 먹히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사실 우리처럼 '예의'에 민감한 민족도 없으니까. 따라서 어떤 맥락과 상황에 어떤 정도의 수위와 강약 조절을 하느냐는 정말 중요한 지점이 아닐 수 없다.

"독설은 작정하고 하면 안 됩니다. 특히 젊은 친구들은 의욕이 과잉돼서 뭔가 확실한 걸 보여주려고 아무 맥락 없이 강하게 멘트를 날리기도 하는데요, 그럴 경우에는 잘못하면 분위기만 썰렁해질 수 있죠. 연기에서 합이 중요한 것처럼 독설도 그 맥락과 감정 선이 중요합니다. 게스트와의 토크 속에서 감정 선이 쌓여가다가 어느 순간에 터져야 독설은 효과가 있죠. 마치 배우들이 연기할 때 감정 선을 찾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는 '처음부터 세게 해주세요.' 막 그러시는데 어떻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독설을 던집니까. 뜬금없이 던지는 건 무리수죠. 또 연예인이 나왔을 때랑 일반인이 나왔을 때랑 상황도 다릅니다. 일반인들 같은 경우에는 아무래도 이야기를 더 많이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측면이 많아지죠. '화성인 바이러스' 같은 걸 하면서 이 부분을 많이 배웠어요. 특이하신 일반인분들이 나오시면 거기다 대고 독설만 던질 수는 없더라구요. 오히려 더 많이 듣고 배려하게 되더군요."

'라디오스타'에서 김구라는 '라스의 서병기(대표적인 대중문화 전문기자)'로 불린다. 박명수가 게스트로 출연했을 때, 김구라에게 "당신이 서병기야? 임진모야?" 했던 것에서 비롯된 별칭이다. 이렇게 불리게 된 것은 김구라만의 분석적이고 냉철한 이미지 때문이다. 실제로 어떤 점에서 보면 이런 태도는 기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 토크쇼를 하나의 인터뷰로 볼 때, 김구라는 확실히 무언가를 캐내려는 호기심 많은 기자를 닮았다.

"(웃음) 그렇게 불러주시니 너무 좋죠. 분석적인 토크 방식이라고 하시는데 그것보다는 아무래도 비유 같은 걸 많이 쓰고 그래서 붙여진 별칭인 것 같습니다. 제가 비유를 좀 많이 쓰는데요, 예전에 딴지일보 그런 거 할 때 우리가 뭐 정치를 아나요? 만날 룸싸롱 같은 것에 비유하고 그랬죠. 그러다 보니 좀 현실적인 비유들을 하는 게 습관처럼 배인 것 같습니다."

김구라가 실명을 거론하는 것이나 게스트를 직접적으로 몰아세우는 그 바탕에는 그 당사자와 게스트에 대한 진정한 배려가 깔려 있다. 이것은 토크쇼가 어떤 방식으로 게스트를 배려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게스트 좋은 대로 편안하게 두는 그런 배려는 결국 대중들과의 소통을 가로막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토크쇼의 MC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배려는 게스트와 시청자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다. 그것을 연결시키기 위해 과감할 때는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실명 토크를 많이 하는데, 사실 인터넷 방송 할 때는 전부가 실명이었거든요. 뭐 죄진 사람도 아닌데 실명 거론하는 게 그다지 잘못된 것 같진 않아요. 그런데도 왜 실명을 얘기 하냐 뭐라 하시기도 하죠. 하지만 실명 얘기 안하면 재미가 없어요. 또 M본부, S본부 이렇게 얘기하는 것도 좀 우스워요. 굳이 그럴 필요 있나요? 물론 조금 강하게 실명으로 누군가를 언급하거나, 또 게스트에게 강한 질문을 던지는 건 제 나름의 게스트 배려 방식입니다. 그렇게 주목되게 만드는 거죠. 뭐 신인들은 그런 걸 좋아하지만, 이미 탑에 있는 친구들은 안 좋아하는 경우도 있어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그런 입장 이해해요. 그래서 그런 거 싫어한다는 얘기가 나오면 저도 굳이 그런 얘길 안하게 되죠."

게스트를 배려하는 토크쇼들의 또 한 가지 특징은 '감동'을 전면에 내세운다는 점이다. 그래서 때로는 웃음보다는 눈물이 더 많은 상황이 연출되기도 하는데, 김구라는 지금껏 한 번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 일이 없다. 심지어 눈물 짜는 게스트에게 "가지가지 한다"는 독한 멘트를 날려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들기도 했으니까(여기에는 그만한 당시 상황의 이유가 있었다).

"그 때 강원래씨 나왔을 때 했던 "가지가지 하네"라는 멘트가 무슨 '기념비적인 장면'이라고까지 얘기되기도 했는데요, 사실 그 때 상황은 눈물 흘리는 사람한테 독설을 날린 그런 게 아니었어요. 강원래씨가 갑자기 울지 않아야할 분위기에서 눈물을 흘리게 된 거죠. 그러자 구준엽도 그렇고 전부가 어색해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그렇게 멘트를 던졌더니 강원래씨도 같이 웃고 넘어갈 수 있었죠. 뭐 저보고 방송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시는데,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 본래가 눈물이 별로 없어요. 그래도 요즘은 나이 사십을 넘기면서 조금씩 살짝 올라오는 게 있기도 하더군요."

김구라는 유재석에 대해서 "정말 야외에서는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예능인"이라고 했다. 자신이 아무리 야외에서 열심히 해도 유재석을 넘기는 어렵다는 얘기다. 하지만 적어도 스튜디오 안에서만큼은 자신도 어느 정도 자신만의 영역을 세우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것은 실제로도 맞는 이야기이고 우리가 김구라쇼를 기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요즘 토크쇼에 대한 그의 생각이 궁금했다.

"요즘 토크쇼가 (시청률이) 많이 빠졌죠. 그만큼 대중 분들의 기대치가 높아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올 질문들이 딱 보이는 상황에서 재미있는 답변이 나오기는 어렵겠죠. 해외의 토크쇼들은 좀 더 직접적이고 흥미진진한 얘기를 해야 되는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우리도 그런 쪽으로 점점 흐름이 가는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김구라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부드러운 이미지와 날카롭고 이지적인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적어도 이런 캐릭터가 하는 토크쇼라면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진정한 게스트와 시청자들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해줄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갔다. 이제 달라진 예능 환경과 대중들의 화법에 대한 욕망은 김구라라는 캐릭터를 점점 무르익게 만들고 있다. 이것이 아마도 많은 대중들이 김구라쇼를 기대하는 이유가 될 것이다.

'사랑비', 행복과 슬픔의 변주곡

'사랑비'는 초록의 담쟁이 잎사귀들에 떨어지는 빛에서 시작한다. '청춘(靑春)'이다. 그 길에서 윤희(윤아)를 마주친 인하(장근석)는 단 3초 만에 사랑에 빠진다. 청춘의 첫사랑이다. 70년대의 대학 교정, 윤형주의 '언제라도 난 안 잊을 테요-'하는 그 감미로운 목소리가 매력적인 '우리들의 이야기'가 울려퍼지고, '러브스토리', '어린 왕자', 일기장 같은 70년대를 살았던 세대들의 아련한 기억 속에 남아있는 저마다의 첫사랑을 툭툭 건드리는 것으로 '사랑비'의 모티브는 시작한다.

우리네 모든 첫사랑의 기억(이것은 아름답게 채색되기 쉬운 것이다)이란 것이 그렇지만, 그 이야기는 전형적일 수밖에 없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게 되고, 전하지 못하는 마음에 열병을 앓는 그런 기억, 엇갈림,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의 갈등, 안타까움 같은 것이 우리가 첫사랑으로 저마다 채색해놓은 한 때의 기억일 것이다. 윤희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사랑하는 친구 때문에 마음을 고백하지 못하는 인하의 열병은 그래서 지극히 단순하면서도 강하게 다가온다. 이 드라마는 누구나 갖고 있는 그 첫 기억을 꺼내놓고 그 3초 만에 빠져버린 사랑이 어떻게 온 삶을 뒤흔드는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영화 '러브스토리'의 그 "사랑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전형적인 대사는 윤희의 일기장에서 인하의 독백에서 또 엇갈리게 되는 동욱(김시후)의 작업 멘트에서 계속 반복된다. 왜 첫 사랑에 "미안하다"는 말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등장하는 걸까. 윤석호 PD의 '겨울연가'가 그러했듯이 이 청춘의 첫사랑은 자신의 마음과는 달리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지만, 그래서 서로에게 슬픔과 상처를 주지만 그렇다고 "미안하다" 말할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인하의 해석처럼 "사랑은 진심이니까, 서로의 진심을 아니까" 미안하다는 말이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비'라는 제목은 이 첫사랑이 주는 슬픔과 행복을 잘 표현해주는 조어다. 도서관 앞에서 만난 인하와 윤희가 고장 난 노란 우산을 함께 쓰고 첫 장면에 3초 만의 사랑을 예감케 했던 그 초록 담장 앞을 걸어가는 장면은 이 드라마의 전체 정조를 감각적인 영상으로 잡아낸다. "비 좋아하세요?"라는 윤희의 질문에 "좋아해요. 슬프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라고 인하가 답하고, 윤희는 '어린왕자'이야기를 들려준다. '사랑은 행복과 슬픔이라는 두 얼굴을 하고 있다'는. 그렇게 사랑과 비는 닮아있다. 그녀에게 우산을 받쳐주느라 온몸이 젖어버린 인하의 행복한 얼굴처럼.

'사랑비'는 이 첫사랑의 기억이 다시 현재 시점으로 되돌려지는 드라마다. 나이든 인하와 윤희가 다시 만나고, 그들의 자식들인 서준(장근석)과 하나(윤아)가 만난다. 몇 십 년이 흘렀지만 어찌 보면 이미 나이 들어버린 그들이 청춘의 시간과 함께 공존하는 신비로운 장면이 그 속에는 들어 있다. 청춘과 첫사랑에 대한 현재적 관점으로의 추억.

자극적인 스토리와 팽팽 돌아가는 속도에 익숙해진 시청자라면 '사랑비'는 어딘지 너무 느리게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뭐든 마음에 있는 것을 드러내고 직접적으로 얘기하는데 익숙한 시청자들이라면 인하와 윤희의 말 못하는 열병이 못내 갑갑하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사랑비'는 바로 그 느리고 아날로그적인 사랑을 원석처럼 꺼내놓는 드라마다. 따라서 빠른 속도의 자극적인 영상을 즐기기보다는 그 느리게 돌아가는 그림 같은 영상이 주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촉촉함을 느끼는 것이 감상 포인트다.

윤석호PD는 역시 색채의 마술사답게 이 첫사랑의 만남과 열병을 완벽한 색의 대비로 보여주었다. 청춘을 상징하는 초록 잎들의 배경 위로 촉촉한 비가 내리고 가녀린 노란 우산을 들고 운명이 어떻게 굴러갈 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알 수 없는 슬픔과 행복을 느끼며 남녀가 걸어간다. "사랑은 진심이니까." 같은 진부하고 상투적인 대사마저 떨림으로 바꿀 수 있기를 이 드라마는 간절히 바라고 있는 것만 같다. 과연 '사랑비'가 진부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너무 자극에 익숙해진 걸까.


사람들은 왜 ‘더 로맨틱’해지지 않을까

'더 로맨틱'(사진출처:tvN)

감미로운 음악, 이국적인 풍경, 달콤한 속삭임, 기적 같은 만남... 도대체 우리를 그토록 로맨틱하게 만드는 건 뭘까. 때론 이성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하고, 현실과는 유리된 사람처럼 실제적인 시공간의 차원을 잠시 떠나버리는 이 로맨틱한 상황들. 그리고 그 안에서 만나게 되는 사랑이라는 감정. 그 놀라운 화학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 걸까. 신개념 러브 리얼리티쇼 tvN의 ‘더 로맨틱’이 흥미로워지는 지점은 바로 이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반짝반짝 빛나는 순간들이 카메라에 지극히 현실적인 장면으로 담겨질 때다.

터키. 동서양의 문명이 교차하는 곳. 그래서인지 그 오묘한 풍광처럼, 이질적인 두 존재가 만나서 어쩌면 가장 아름다운 합치점을 찾아내기엔 가장 적합한 장소처럼 여겨지는 그런 곳으로 열 명의 남녀가 여행을 떠나는 건 바로 그 우리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비현실적 경험’ 즉 로맨틱한 상황을 찾아내기 위함이다. 돈과 삶과 생존과 생계 속에서 마치 없는 것처럼 치부하며 살아왔던 그것. 그래서 때로는 바라보는 것마저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던 바로 그것. ‘더 로맨틱(The Romantic)'을 찾아서.

영화나 드라마 속 로맨틱한 만남의 장면 중 하나를 선택(이른바 ‘취향셔플’로 불린다)하고 같은 선택을 한 이와 똑같은 설정으로 떨리는 첫 만남을 갖게 하는 건 일종의 오리엔테이션인 셈이다. 아마도 서울이라는 생계의 공간에서 살아오면서 그 남녀들은 비행기 안에서의 우연한 만남이나, 낯선 거리에서 서로를 발견하는 경험, 모두가 다른 생각 다른 감정으로 서 있는 곳에서 단 둘만이 온전히 같은 음악으로 연결되는 로맨틱한 체험, 거리에서 전화기 저편에 들려오는 상대방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를 찾아 나섰던 그 설렘 같은 ‘비현실적’인 감정들은 잊고 살아왔을 테니 말이다. 이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로맨틱한 세계로 들어가는 일종의 입구에 영화나 드라마 속 장면이 오리엔테이션처럼 자리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로맨틱을 허용하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 바로 이 영화와 드라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과연 그저 비현실적인 것일까. 그래서 영화 속의 또는 드라마 속의 주인공들이 대리해주는 것을 통해 경험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더 로맨틱’이라는 프로그램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다. 누구나 그런 이국적인 공간과 이색적인 시간들 속에 던져지면 갖게 되는 지극히 현실적인 감정. 그것이 바로 ‘더 로맨틱’이다. 잠시 간의 눈 맞춤과 몇 마디의 대화, 그리고 슬쩍 스치는 손끝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로맨틱해지는 그런 존재라는 것. 그러니 왜 당신은 ‘로맨틱’한 감정을 비현실적인 것이라 치부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 한 땀 한 땀 로맨틱한 순간들로 직조된 영상들은 우리에게 그런 질문들을 던진다.

연애와 신혼의 로맨틱한 시간들이 지나고 나면 마치 유통기한 지난 통조림처럼 마음 한 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그 로맨틱한 감정들을 다시 끄집어내게 만드는 이 놀라운 프로그램의 도발은 그래서 그 자체로 도전적인 위치에 서게 된다. 도대체 누가 현실적인 것만을 강요했는가. 무엇을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 그 강요를 몸에 각인시켰던가. 아니 그 누가 이것을 ‘비현실적’인 것이라 치부했던가. 한참을 바라보다보면 ‘나도 저런 경험을 하고 싶다’는 감정이 치솟아 오르고, 그래서 마음 한 구석에 처박아 두었던 그 감정의 상자를 다시 끄집어내 떨리는 마음으로 열게 만드는 그런 경험.

카메라가 우리의 일상 속으로 들어오면서 이전에는 포착될 수 없었던 인생의 찬란한 순간들도 이제는 영상 속에 담겨질 수 있게 되었다. 이 지극히 현실적이고 리얼한 영상이 그래서 가장 비현실적인 것으로 치부되던 ‘로맨틱한 순간들’을 발견하고 끄집어냈다는 것은 놀라운 아이러니다. 그래서 이 비현실적 시공간 속에 놓여진 남녀들의 화학작용이 지극히 현실적인(리얼한) 것이라 여겨질 때 그것은 마치 기적 같은 느낌을 준다. 사람들은 왜 더 로맨틱해질까. 이런 질문을 던지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래서 더 로맨틱한 삶의 가치를 느끼게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를 전하는 프로그램, ‘더 로맨틱’이다.


'해품달', 왜 뒷얘기가 무성할까

'해를 품은 달'(사진출처:MBC)

아쉬움 때문일까. 아니면 드라마 시청률이 40%를 넘겼다는 도취감 때문일까. 물론 드라마가 끝나면 거기 참여한 제작진이나 연기자들의 인터뷰가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해를 품은 달(이하 해품달)'에서 유독 작가의 인터뷰가 눈에 거슬리는 건 왜일까. 또 40% 이상의 시청률을 낸 작품 치고 몇몇 주연들에게만 지나치게 쏠려 있는 스포트라이트도 이례적이다. 이 정도의 시청률이라면 거기 참여한 조연들에 대한 조명 역시 따라오는 게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김수현과 한가인을 빼고 나머지 조연들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없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런 상황은 마치 의도된 것처럼 비춰진다. '해품달'의 마지막회에 남는 아쉬움은 결국 남녀 주인공인 훤(김수현)과 연우(한가인)의 해피엔딩을 위해 주변인물들이 줄초상을 당하거나 들러리로 선 인상이 짙다는 것 때문일 게다. 그러니 작품이 끝나고 두 주인공과 작가의 인터뷰만 유독 눈에 띄는 건 어딘지 씁쓸함을 남긴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극중 윤대형이란 인물을 연기해 작품에 확고한 극성을 만들어낸 김응수의 색다른(?) 인터뷰가 눈길을 끄는 것은.

김응수는 인터뷰를 통해 극중 딸 캐릭터인 윤보경(김민서)이 극 후반 연우가 등장하면서 이렇다 할 대응 한 번 하지 않고 스스로 무너져가는 반응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의견을 내놨다. 또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는 설정 또한 너무 과하지 않았나 하는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작품이야 결국 작가가 쓰는 대로 굴러가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네 드라마처럼 흘러가면서 스토리가 써지는 대본은 주연이 아닌 연기자라면 때로는 '살생부'처럼 여겨지기 마련이다. 언제 어느 순간 갑작스레 (작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할 지 모르는 운명이란 얘기다.

인터뷰 내용을 보면 김응수는 이 상황이 꽤 고질적이라는 걸 드러내고 있다. '해품달' 대본을 받고는 윤대형이란 인물이 끝까지 나오냐고 물었고, 나온다고 했지만 자신은 믿지 않았다는 것이다. 왜? 우리네 드라마 제작 현실이 거의 실시간으로 쓰여지고 상황에 따라 제멋대로 흘러가기도 하는 것이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김응수는 '샐러리맨 초한지'에서도 같은 상황을 겪었다. '초한지'의 초나라에 해당되는 장초그룹 회장으로 출연한 김응수는 그러나 몇 회가 지나고 아무런 이유도 설명되지 않은 채, 드라마에서 사라져버렸다. 아무리 조연이 작가의 글줄 몇 개로 존재 자체가 날아가는 파리 목숨이 됐다고 해도 이건 너무 무례한 처사가 아닌가.

만일 어쩔 수 없이 드라마 방향이 이렇게 흐를 수밖에 없었다면 최소한 작가는 후에라도 상황이 이렇게 된 것에 대한 해명이나 적어도 미안함을 표하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하지만 진수완 작가가 한 일련의 인터뷰들은 어딘지 불편함이 느껴진다. 진수완 작가는 각종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본래 하고자 했던 대본에 대한 아쉬움을 늘어놓았다. 20부작이 아니라 24부작이었다면 달랐을 결말의 디테일들에 대한 이야기나, 유난히 많았던 연기력 논란에 대한 안타까움, 또 작품의 메시지에 대한 부연 설명까지. 얼마나 아쉬웠으면 이렇게 인터뷰를 통해서라도 이런 얘기를 할까 싶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작품 내에서 결국 하지 못한 것에 대한 변명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이다. 결국 작가는 작품으로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인물들이 작품 내에서 저 스스로 살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 작가의 소임일 것이다. 하지만 그럴 듯한 설득력이 없이 작가가 나서서 인물들을 인형처럼 이리 움직이고 저리 움직이게 하다가 결국에는 주인공들의 해피엔딩을 위해 줄초상을 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해품달'을 두고 작품 밖에서 애써 부연 설명하려는 모습은 그다지 좋게 보이진 않는다. 그래서일까. 김응수의 토로가 마치 작가에 의해 인형처럼 마구 휘둘리는, 그래서 대본을 살생부처럼 여기게 되는 조연들의 진중한 질책으로 여겨지는 것은.

심지어 개그 프로그램을 보고 웃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조연이 나오는 우리네 드라마판이 아닌가. 조연들은 주연을 위해 이리저리 굴리다 갑작스럽게 팽 당하는 그런 존재들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드라마판만이 아니라 우리네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 것만 같아 씁쓸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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