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추어리즘이 예능의 새 트렌드가 된 사연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 이 유행어만큼 작금의 예능 트렌드를 보여주는 게 있을까. ‘개그콘서트’의 종료된 코너 ‘많이 컸네 황회장’에서 황현희가 히트시켰던 이 유행어에는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왜 이러냐”는 핀잔이 들어있다. 그런데 이 말이 웃음을 주는 것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상은 아마추어 같은 유치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황현희는 조직의 회장이지만 체신머리 없이 일개 실장과 사소한 말싸움을 하면서 이 말을 내뱉는다. 프로라면 보여주지 않을 속내가 살짝 드러났을 때 터져 나오는 웃음. 아마추어리즘은 이렇게 리얼리티 시대에 예능의 새 트렌드로 자리하고 있다.

‘너는 내 운명’에서 발연기 논란을 빚었던 박재정이 ‘상상플러스’의 MC로 자리한 사연은 이 드라마에서 비난받았던 아마추어리즘이 어떻게 예능 프로그램 속에서 빛을 발하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박재정이 보여준 어색한 연기는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그 자체로 리얼이 된다. ‘상상플러스’에서 그가 보여주는 특유의 ‘손발이 오그라드는’ 멘트는 프로정신으로 똘똘 뭉친 MC들이 보여주었던 틀에 박힌 모습을 순간적으로 깨버린다. 이처럼 리얼리티 시대에 연기되지 않는 리얼함은 어색함을 어떤 진면목으로 평가절상시키는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박명수는 콩트 개그 시대에도 활동해온 개그맨이다. 즉 설정에 맞는 연기를 기본적으로 해낼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라디오 DJ로서의 박명수는 겉으로 보기엔 어수룩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어보면 그것이 하나의 설정이며 진행자체는 꽤 매끄럽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방송에서도 마찬가지다. ‘무한도전’이나 ‘해피투게더’에 출연하는 박명수는 MC의 자질이 없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멘트는 앞뒤가 맞지 않고, 단어 사용은 부적절하며, 발음 또한 어색하기 이를 데 없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진행본능을 갖고 있는 유재석과 대비되면서 그 상황을 형식적인 것이 아닌 리얼한 것으로 전환시키기도 한다. 유재석은 박명수의 그런 면들을 잘 포착해 전체 분위기를 리얼하게 이끌어나간다. 이렇게 보면 박명수는 어색함을 캐릭터로 활용해 리얼함을 만들어낼 줄 아는 흔치 않은 개그맨으로 볼 수 있다. 아마추어처럼 하는 것이 오히려 그의 프로 정신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무한도전’의 캐릭터들이 리얼하게 그려진 것은 그들이 거의 방송 부적합자들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웃기지 못하는 개그맨으로 불린 정형돈, 사고만 저지르는 바보 정준하, 정신을 쏙 빼놓는 돌+아이 노홍철 같은 캐릭터들은 그 방송에 적합하지 않은 어색함으로 오히려 리얼 버라이어티를 살렸다. 이것은 이후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리얼 버라이어티쇼들에서 이른바 뜬 캐릭터들의 면면을 보면 확연하게 드러난다.

‘1박2일’의 초딩 은지원, 버라이어티에서 다큐를 찍는다 핀잔 받는 김C가 그렇고, ‘패밀리가 떴다’에서 주목을 받았던 엉성 캐릭터 이천희가 그렇다. 이들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유재석과 강호동이 확고한 메인 MC로서 자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프로와 아마추어를 넘나드는(진행에 있어서는 프로이면서도 설정에 있어서는 아마추어처럼 행동하는) 능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거꾸로 예능 프로그램이 점점 웃기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개그맨들보다는 그것이 비전문인 가수나 배우들을 더 선호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들은 웃기려고 하기보다는 그저 그 다른 형식 속에서의 부적응을 통해 엉성함을 드러내는 것만으로 리얼한 웃음을 주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자 문제가 되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차츰 그 형식에 적응되는 그 상황이다. 리얼 버라이어티쇼가 하나의 트렌드로 제시하는 도전과제들이 점점 독해지고 상상하기 어려워지는 것은 그 적응상태를 깨기 위한 것이다.

리얼리티에 대한 프로그램의 이 같은 집착은 때론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PD까지 아마추어로 포장하게 만든다. ‘무한도전’에서 실패했던 미션, 좀비 특집이나 ‘1박2일’에서 기상악화로 가려던 제주도를 포기하고 보낸 영종도에서의 하루 같은 실패담은 과거라면 절대로 보여줄 수 없는 어떤 것이었을 것이다. 밤새워 새로 찍던가 아니면 방영을 포기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리얼리티 시대에 이 실패한 미션들은 가감 없이 방영되고, PD들은 자막으로 시청자에게 사죄를 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하지만 이 성의 없어 보이는 아마추어리즘을 표방한 영상들은 오히려 그 리얼리티를 보장함으로써 대중들에게 사랑 받는다.

리얼리티 시대, 예능 프로그램은 프로로서의 매끄러운 진행보다는 아마추어처럼 거칠지만 생생한 장면을 보여줄 수 있는 예능인들을 요구하고 있다. 일부러 어색하게 행동하고, 상황은 어색함을 드러낼 수 있게 조장되며, 연출은 그 어색함을 극대화해서 포착해낸다. 하지만 그들이 이렇게 아마추어같이 행동한다고 해서 진짜 아마추어일까. 지금은 가장 자연스럽게 아마추어같이 행동하는 이가 프로인 세상이다. 그런 면에서 농담처럼 던지는 “왜 이래? 아마추어같이.”라는 말은 이들에게는 핀잔이 아닌 칭찬인 셈이다.

‘남자이야기’의 김강우, ‘카인과 아벨’의 백승현

악역이야말로 드라마를 이끌어가는 힘이라고 할 때, ‘남자이야기’의 채도우(김강우)는 실로 매력적인 악역이라 할 수 있다. 잔뜩 인상을 쓰면서 악다구니를 해대는 ‘에덴의 동쪽’의 신태환(조민기)이 온몸으로 표현함으로써 자신이 악역임을 드러낸다면, 채도우는 최대한 그걸 숨김으로써 그 속의 섬뜩한 면모를 보여준다.

채도우라는 악역의 핵심은 ‘감정이 없다’는 것. 어린 시절 늘 병상에 누워 진통제로 살아가는 어머니에게 주사를 끊임없이 내주며, ‘엄마, 이젠 행복해?’하고 묻던 인물이다. 그 감정 없음은 타인이건 가족이건 상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끔찍하다. 그는 아버지 채회장(장항선)과도 대놓고 맞서는 패륜아이기도 하다.

감정이 없는 그는 목적을 위해서는 친구 앞에서 무릎도 꿇고, 심지어 눈앞에서 친구를 배신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이른바 사이코패스라고도 불리는 채도우의 이런 감정 없는 악역이 상징해서 보여주는 건 이 드라마의 주제와도 연결되어 있다. 바로 자본이라고 하는 감정 없이 사람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 존재를 채도우라는 캐릭터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드라마가 시작되는 것은 바로 이 감정 없는 자본(채도우)이 이른바 작전이라 불리는 숫자놀음을 하는 데서부터 비롯된다. 숫자 놀음이란 그 숫자 밑에 놓여진 사람의 존재 따위는 지워버리기 일쑤다. 따라서 자본을 가진 자의 횡포는 그 숫자 밑에 놓여진 사람을 파탄에 이르게도 하고 죽음으로도 내몬다. 숫자만을 보는 채도우에게 감정이란 있을 수 없다. 즉 채도우란 캐릭터는 무감정한 돈의 생리로 움직이는 이 사회를 축소해 보여준다.

한편 ‘카인과 아벨’에서 주목할 악역은 최치수(백승현)다. 주인공인 이초인(소지섭)과 실제 대결구도를 이루는 인물은 이선우(신현준)지만, 왜 최치수가 더 주목되는 걸까. 그것은 이선우가 가진 형이라는 입장이 악역으로서 복합적인 성격을 띄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선우라는 악역은 대놓고 시청자들을 도발한다기보다는 어딘지 동정이 가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것은 그가 뇌종양이라는 병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이선우가 가진 너무 많은 성격적 소재들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그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원인이기도 하다.

반면 최치수는 사실 그다지 주목할 만한 악역의 성격을 갖추지는 못했다. 그는 단순히 정해진 소지섭의 B급 악역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치수라는 인물은 백승현이라는 연기자를 통해 그 존재감을 살려냈다. 사실 최치수는 그다지 대사도 없고 상황에 대한 심리묘사도 거의 없다. 하지만 짧은 순간에 보여주는 백승현 특유의 표정과 목소리 톤은 보는 이를 소름 돋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악역이 이제 웬만한 주인공보다 더 주목되는 이유는 사실상 대립구도에서 드라마를 극적으로 이끌어가는 인물이 악역이라는 것을 우리가 이제는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딘지 꾸며낸 듯한 달달하고 교훈적인 주인공들보다는 이 사회적 문제들을 독하게 표현해내는 악역이 오히려 리얼한 매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악역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역할을 연기해내는 연기자들의 몫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김강우와 백승현은 악역의 매력을 제대로 보여준 배우들이다.

주말 밤의 풍경을 바꾸는 명품 다큐들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히딩크의 사나이, 그리고 맨유의 심장이자 현 국가대표 주장. 지칠 줄 모르는 체력과 성실함으로 늘 경기장에서 가장 많이 뛰는 선수. 하지만 이런 화려한 영광 속에 서 있는 박지성은 스포츠 경기 중계나 뉴스를 통해서 보여진 모습일 뿐이었다. ‘MBC 스페셜-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에서는 제목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사실은 진면목을 잘 모르고 있는 박지성을 다큐멘터리 특유의 진정성으로 포착해 큰 호응을 얻었다. ‘MBC 스페셜’이 보여준 박지성은 “최고의 선수가 되고 싶지만 보통사람이고 싶은” 한 세계적인 축구스타의 진심을 보여주었다.

‘MBC 스페셜’은 작년 말부터 주목받는 다큐멘터리로 호평을 받아왔다. 창사특집으로 기획된 ‘북극의 눈물’은 지구온난화로 사라져가는 북극의 위기를 그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역설적으로 그려냈고, ‘공룡의 땅’은 공룡화석의 발굴과 탐사를 담은 과학다큐멘터리로 공룡 다큐멘터리의 새 장을 보여주었다. 한편 ‘곰배령 사람들’편에서는 자연다큐와 인물다큐의 접합점을 찾아 도시인들에게 자연의 의미를 되새겨 주었고 ‘마지막 해녀’편에서는 해녀들의 삶을 보여줌으로써 감동을 선사했다.

특히 스타 다큐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평가되는 ‘최민수, 죄민수 그리고 소문’에서는 최민수 사건의 진실과 소문을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스타의 화려함 그 이면의 아픔을 포착하면서도 동시에 소문에 대한 과학적인 접근을 시도해 보여주었다. 또 다른 스타다큐로서 ‘김명민은 거기 없었다’편에서는 김명민을 통해 배우의 눈물겨운 노력을 포착해 큰 호응을 얻었고, 이어 박지성 편은 그 계보를 이어주었다.

연이은 명품다큐라는 호평 속에 시청률도 고공행진중이다. ‘북극의 눈물’이 10%대(1부 11.4%, 2부 10.8%, 3부 9.9%)의 시청률을 그리고 ‘공룡의 땅’이 9.1%, ‘마지막 해녀’가 10.7%의 시청률을 기록한 데 이어 ‘당신은 박지성을 아는가’는 12.2%로 역대 최고 시청률을 기록했다. 주말 밤 다큐멘터리로서는 이례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달라진 시각은 단지 ‘MBC 스페셜’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KBS 스페셜’은 ‘누들로드’같은 대작은 물론이고 다채로운 소재를 넘나드는 명품다큐멘터리로 오랜 시간 주말 저녁 8시에 자리매김해왔고, ‘SBS 스페셜’ 역시 ‘방랑식객’같은 참신한 기획이 돋보이는 다큐멘터리를 발굴해나가고 있다. 주말 밤 TV의 새로운 풍경으로 다큐멘터리가 떠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는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TV의 새로운 경향과 다큐멘터리가 시너지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영상의 홍수 속에서 다큐멘터리라는 장르는 특유의 진정성을 무기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HD화면이 주는 생생함과 연출 없는 장면이 건네는 진심이 묻어나는 영상들은 이 새로운 풍경의 바탕이 되고 있고, 그 위에 과거와는 달라진 실험적인 기획들은 풍경을 쑥쑥 키워주는 자양분이 되고 있다. 주말 밤. 이제 다큐멘터리의 새로운 세계가 열렸다.

8개 국제영화제 수상, 최다개봉관 개봉 왜?

양익준 감독의 ‘똥파리’는 독립장편 극영화로는 이례적으로 로테르담, 도빌, 부에노스아이레스 등 여러 국제영화제에서 8개에 달하는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리고 역시 독립장편 극영화로는 역대 최다개봉관인 50여 개 스크린에서 개봉되었다. 영화를 정식으로 공부한 적도 없는 양익준 감독이 각본, 연출, 주연까지 북치고 장구치고 한 이 영화가 흔한 상업영화들처럼 세련될 리는 만무다. 게다가 영화 찍다 돈이 없어 촬영이 중단되자 전셋집까지 빼서 했을 정도니 돈 냄새가 날 리도 없다. 영화가 친절한 것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다. 시작부터 욕설과 폭력으로 시작해 끝까지 보는 이를 불편하게 만든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욕을 들으면서도, 또 심지어 아버지와 자식을 패는 패륜적인 폭력을 보면서도 때론 웃음이 터지고 때론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은.

‘똥파리’가 그리는 세계는 당연하게도(?) 화장실 같은 세상이다. 거기에는 살벌한 낙서처럼 휘갈겨진 욕설이 일상의 언어처럼 쏟아져 나오고, 어디서 생긴 지도 모르는 분노가 변의처럼 폭력으로 불끈불끈 솟아나온다. 상훈(양익준)은 그 세상에 사는 똥파리다. 이른바 떼인 돈을 받아주는 그의 직업의 세계는 더럽기가 똥 같은 곳이다. 빚을 진 자들 중에는 맞아도 쌀만한 인간들(예를 들면 상훈의 아버지같이 가정폭력을 일삼는)도 즐비하다. 상훈은 자신의 이런 짓거리 역시 더럽다 생각하는 인물. 같이 데리고 다니는 똘마니들에게 왜 폭력을 휘두르지 않느냐며 주먹질을 해대다가도, 그들이 정작 일(?)을 할 때면 그들을 향해서도 폭력을 휘두른다. 그의 주먹은 동료와 적을 나누지 않는다. 그것은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폭력으로 동생과 어머니까지 죽게 하고 감방에 들어갔다 출소한 아버지에게 “든든히 먹어야 맞을 수 있다”고 말하고 발길질을 해댈 정도. 그런 그에게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연희(김꽃비)가 나타난다. 그들이 서로에게 감정을 느끼는 과정에는 여느 영화 속에서 보았던 그런 알콩달콩함은 없다. 만남부터 상훈의 주먹질로 시작하고 일상적 대화 속에는 듣기 불편할 정도의 욕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처음에는 불편했던 욕들이 차츰 듣다보니 익숙해지고, 어느 순간에는 그 욕 속에 숨겨진 이들의 애절한 속내들이 보여지면서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들어놓는다. 월남전 참전으로 후유증을 겪는 아버지로 인해 똑같은 폭력에 내둘러진 연희는 그러나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그런 그녀를 보는 상훈은 한번도 느끼지 못했을 기대고픈 마음을 갖는다.

영화가 프레임 속으로 보여주는 공간은 이 ‘똥파리’들의 세상에만 집중되어 있다. 카메라는 인물을 포착할 때도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와 있는 듯한 거북한 느낌을 준다. 이것은 마치보기에도 섬뜩한 사람이 코앞에 서 있는 것 같은 부담감을 준다. 카메라는 이들의 비극적인 순환이 반복되는 세상을 따라가면서 그것이 서로가 서로에게 똥칠을 해대는(그렇게 하도록 시스템화된) 과정을 조명해준다. 연희와 상훈은 보이지 않는 폭력의 선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지긋지긋한 가난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서로의 살을 물어뜯는 비정한 세상(비참한 삶을 사는 똥파리 상훈이 역시 비참한 삶을 사는 빚쟁이들의 돈을 폭력으로 받아내는)은 그 모습을 드러낸다.

상훈을 이 똥파리들의 세상에 붙잡고 있는 회사(?) 사장(그는 상훈의 친구이기도 하다)은 분명 이 시스템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지만, 그를 통해 이 폭력의 세상을 연출해낸 시스템의 장본인들은 끝까지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가 끝까지 이 낮은 자들의 세상을 비추는 동안, 관객들은 이 프레임 바깥의 세상이 궁금하게 된다. 그리고 프레임 바깥의 그 어떤 시스템이 프레임 안의 똥파리들의 비극적인 삶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순간, 그 똥파리들이 해대는 욕과 폭력은 하나의 안타까운 몸부림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그 더러운 세상에 대한 정밀묘사는 영화의 진심을 전하면서도 동시에 어떤 국적성을 지워버리는 효과도 있다. 하긴 이런 세상의 풍경이 어디 특정 국가의 문제일까. 각종 세계 영화제의 관심은 그걸 에둘러 말해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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