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발이 오그라드는’ 리얼함, ‘절친노트’


흔히 ‘손발이 오그라드는’ 이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 상황이 있다. 최근 들어 웃음의 새로운 경향으로 주목되고 있는 이 어색한 상황을 웃음으로 바꾼 예능 프로그램이 있다. 바로 ‘절친노트’다.


잘 짜여진 대본과 코미디언의 콩트 연기가 기본기가 되었던 과거였다면 이 어색함은 버려져야하고 지탄받아야할 어떤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리얼리티 개그의 시대에 접어들면서 어색함은 리얼리티를 드러내는 새로운 포인트로 제시되고 있다. 어색한 장면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짜여진 내용의 실패(따라서 짜여지지 않은)를 드러내준다.


‘절친노트 - 절친하우스’에 새롭게 등장한 절친대본은 리얼 버라이어티쇼에서 대본논란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할 때 대담한 역발상이라 할 수 있다. 대본을 드러냄으로써 오히려 대본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 절친대본은, 서먹서먹한 김국진과 김성민 앞에 제시되면 그 낯간지러움에 대본대로 읽고 연기하는 것 자체가 리얼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이 절친대본은 사실 ‘절친노트’가 취하고 있는 리얼리티 요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이 프로그램의 전체를 제어하고 있는 절친노트 자체가 하나의 절친대본이기 때문이다. 매번 어색한 관계에 있는 이들 사이에 제시되는 미션들은 그것을 연기(?)해야만 하는 당사자들의 리얼한 속내를 드러내게 만든다.


하지만 ‘절친노트’의 리얼함이 단지 그 어색함을 드러내는 수준에 머물렀다면 대중들과의 공감의 폭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 어색함을 연기하다 보면 마술처럼 사이가 진짜 점점 가까워진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어색함을 연기하다 보면 속내를 드러내게 되고 그것이 서로를 알게 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만일 이 과정이 제대로 이루어진다면 ‘절친노트’의 마무리에 가서는 진짜 어색함 없는 리얼한 절친의 마음이 통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만일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훈훈한 느낌을 받았다면 그것은 바로 어색함을 훈련시키는 과정에서 변화되는 마음들의 진심을 문득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아무리 예능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그 틀 속에서 처음 만난 타인들이 어떻게 진짜로 친한 척 행동할 수 있겠는가. 얼마간은 설정이고 얼마간은 연기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제 대중들은 다 알고 있다. 흔히 리얼 버라이어티쇼의 인원 구성이 평소에도 무슨 무슨 라인이라고 불릴 정도로 가까운 사람들로 구성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절친노트’는 역발상의 예능 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다. 아예 누가 누구를 만나는 지도 모르는 상황을 설정해놓고 이 막무가내의 예능 프로그램은 절친노트라는 마법의 대본을 내놓고 그대로 하라고 한다. 아예 친하지 않은 그 분위기를 프로그램의 맨 앞부분에 세워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씩 그 마음들이 열리는 것을 그저 바라만 보는 것으로 ‘절친노트’는 버라이어티쇼의 리얼한 재미들을 만들어낸다. ‘절친노트’의 웃음이 자연스러운 것은 거꾸로 거기 출연한 인물들이 어색함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1박2일', '패떴', '남자의 자격', 그 삼색여행의 묘미

여행은 되는 아이템이다. 특히 리얼 버라이어티 시대에 여행이 갖는 메리트는 분명하다. 여행에는 현실에서 탈출한다는 판타지가 있고, 현장에서 벌어지는 의외의 사건이 주는 리얼리티가 있으며 때론 현재의 나를 바꿔보기 위한 도전이 있다. 이 판타지와 리얼리티 그리고 도전의 요소는 그대로 작금의 리얼 버라이어티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무한도전'의 한 부분에서 파생되어 나온 '1박2일'의 성공은 '패밀리가 떴다', '남자의 자격'으로 그 여행 버라이어티의 범주를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1박2일'은 스스로 야생버라이어티를 주창하고 나선 것처럼 '고생하는 여행'을 특징으로 한다. 까나리 액젓과 야외취침을 두고 벌이는 복불복 게임이 이 버라이어티의 백미인 것은 그것이 야기하는 생고생에 이 여행의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의미한 생고생만을 한다는 건 아니다. '1박2일'에는 마치 배낭여행이나 무전여행이 갖는 낭만과 체험의 의미가 바탕에 깔려 있다. '1박2일'의 여행이 갖는 묘미는 그 리얼리티에 있다. 갑자기 기상악화로 본래의 목적지에 가지 못하는 것조차 버라이어티의 한 부분으로 끌어들일 때, '1박2일'의 여행은 빛을 발한다.

반면 '패밀리가 떴다'는 리얼리티보다는 판타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것이 이 여행이 현장을 리얼하게 체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현장을 찾은 패밀리들의 단합대회(?)를 위한 성격이 짙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여행에서는 외적인 현장 체험보다는 동반자와의 내적인 관계 체험에 더 몰두한다. 여행이라는 특별한 경험 속에서 일상적 관계들은 허공에 약간 들려진 듯한 들뜬 분위기로 새로운 판타지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것은 이 버라이어티에서 중심적인 아이템으로 자리하고 있는 밥 해먹기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일상적인 것이지만, 그렇게 일탈된 공간에서는 특별한 경험으로 치환된다.

한편 새롭게 시작한 '남자의 자격'은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다. 마치 산사체험이나 군대체험 같은 류의 이 여행의 목적은 그 도전을 통해서 나를 돌아보고 또 나를 바꾸는 것이다. 중년의 남자들이 출연진인 점은 이 여행의 도전이 지극히 현실적인 부분과 맞닿아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제 꺾어진 나이이기에 그 여행의 도전은 자신만을 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족을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응원이 버라이어티 뒤편에 자리할 때, 이 여행의 울림은 더 커진다.

무전여행 '1박2일'과 MT '패밀리가 떴다', 그리고 도전여행 '남자의 자격'이 모두 일요일 저녁에 포진되어 있다는 점은 어쩌면 되는 아이템에 쏠리는 우리네 대중문화의 한 경향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여행의 결은 조금씩 다르며, 저마다의 특색을 갖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 이제는 돌아올 시간에 TV 앞에 앉아 여행을 대리하는 시청자들이 있다는 점은 그만큼 이 여행 버라이어티의 존재감을 높여준다. 리얼리티와 판타지와 도전을 제공하는 여행과 버라이어티의 절묘한 만남. 여행 버라이어티 3종세트 시대가 도래했다.

패턴화된 예능의 게스트 전략, 그 한계

‘무릎팍 도사’에는 초창기에는 보이지 않던 패턴이 이제는 하나의 형식으로 자리잡고 있다. 게스트가 문을 열고 “여기가 혹시...”하고 묻고 거기에 맞춰 무릎팍 도사와 건방진 도사 그리고 올밴이 춤을 춘다. 강호동이 게스트를 안아서 자리에 앉혀주고 먼저 하는 것은 탁자를 꽝 내리치며 기선을 제압하는 일이다. 소리를 빽빽 지르는 그 기세는 보는 시청자의 마음까지 건드릴 정도, 그러니 그 앞에 앉은 게스트의 마음은 오죽할까.

이것은 본격적인 토크가 시작되기 전, 분위기 선점을 위한 포석이자, ‘무릎팍 도사’라는 세계로 들어왔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 패턴은 따라서 ‘무릎팍 도사’라는 명패를 달고 있는 한 달라져서도 안될 형식이다. 하지만 본격적인 토크의 세계로 들어와서는 말이 달라진다. 토크쇼의 묘미가(작금의 리얼 토크쇼 경향에는 더 그러하지만) 돌발적인 어떤 발언이 주는 의외성에 있다면, 이야기 속에서도 늘 존재하는 어떤 패턴은 토크쇼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무릎팍 도사’에서는 강호동과 건방진 도사 유세윤의 도발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심지어 언짢게 만드는 질문들과 깐죽거리는 말들이 게스트를 자극하고, 본격적인 낚시질이 시작된다. 이제 이 토크쇼에서 한 형식으로 잡혀있던 게스트의 ‘고민’은 그저 요식행위로 변한 지 오래다. 그것은 실제 고민이 아니라 때로는 자랑이기 십상이고, 말미에 가서 제시되는 해결방안도 마찬가지다.

낚시질이 어느 정도 무르익는 시점에서는 이제 게스트에게서 감동 포인트를 끄집어낼 순서다. 인생 역정에 어려운 시절이 없는 이들이 있을까. 그것을 슬쩍 끄집어내는 것만으로도 토크쇼의 분위기는 숙연해질 정도로 역전된다. 그리고 분위기를 다시 띄우는 이야기가 오고간 후, ‘고민해결’로 토크는 끝이 난다. 이 ‘무릎팍 도사’의 패턴들은 형식적으로도 꽤 창조적이고 게스트의 진면목을 끄집어내는데 있어서도 꽤 효과적이다. 하지만 이미 정착되고 반복되면서 드러나게 되는 패턴은 자칫 토크쇼의 의외성을 제거할 위험성이 있다.

예능 프로그램의 패턴화 문제는 이제 어느 정도 정착단계에 들어선 여타의 예능 프로그램들에도 똑같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패밀리가 떴다’는 그 패턴화가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밥 먹고 게임하고 밥 먹고 게임한다’는 비아냥섞인 비판들이 나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비슷한 여행 버라이어티를 추구하지만 ‘1박2일’이 대민 접촉과 장소의 다양화를 통해 패턴의 문제를 극복하고 있다면, ‘패밀리가 떴다’는 그 폐쇄적인 프로그램의 성격으로 인해 더 패턴화가 진행될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게스트에 집중하고 있고, 그것이 어느 정도는 효력을 발휘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해결에는 여전히 역부족이다.

‘무릎팍 도사’ 역시 패턴화의 한계를 게스트를 통해 넘어서려 하고 있다. 프로골퍼 신지애의 출연은 한동안 계속 되었던 연예인 출연의 홍보적 성향을 어느 정도는 일소해 줄만큼 참신한 면이 있었지만, 고정화된 패턴의 틀 안에서 머무는 한계를 보인 것도 사실이다. ‘무릎팍 도사’나 ‘패밀리가 떴다’가 구사하는 게스트 전략은 미봉책일 수밖에 없다. 자칫 게스트에만 집중해 프로그램의 색깔이 무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간단한 이치지만 문제는 문제가 발생한 곳에서 해결을 봐야 한다. 패턴의 문제는 패턴 내에서 해결해야 한다.

영웅보다 인간을 선택한 ‘돌아온 일지매’

‘홍길동전’이나 ‘전우치전’ 같은 우리네 고전들의 영웅들을 보면 그 대결의 대상이 왕이거나, 체제 자체가 되는 과감성이 엿보인다. 탐관오리들을 징벌하고, 적서차별에 대항하고, 왕마저 탄복시키는 그 영웅들은 심지어 자신만의 나라를 세우기까지 한다. 당대 서민들의 억압된 정서를 속 시원히 풀어주는 그 이야기들이 얼마나 힘이 되었을 지 짐작해보는 건 어렵지 않다. 이준기가 분했던 ‘일지매’는 바로 이 계보를 잇고 있다.

하지만 ‘돌아온 일지매’에서 일지매는 이런 영웅들과는 색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물론 탐관오리로서 김자점(박근형)을 공공의 적으로 규정하고 그의 재물을 빼앗아 민초들에게 나눠주고, 그가 내통하는 청국의 침략을 막기 위해 은밀히 화포를 제작하기까지 하지만 그것은 왕과 대항하기보다는 왕의 밀서를 받고 은밀히 일을 진행중인 최명길(정동환)을 돕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 일지매는 그것이 왕을 위해 하는 일이라기보다는 결국 민초들의 고통을 덜기 위해 하는 일(전쟁이 나면 가장 고통받는 건 그들이라며)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지매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은 과거 고전들의 영웅들이 보여주었던 체제 전복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돌아온 일지매’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적서차별이 국가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을 인식하면서도, 그 시스템 자체와 대항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김자점을 해하려는 일지매에게 그것이 결국에는 나라에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며 제지하는 열공스님(오영수)의 대사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돌아온 일지매’의 이런 ‘체제 내에서의 싸움’이 캐릭터로 잘 드러나 있는 인물은 구자명(김민종)이다. 그는 관원으로서 자신이 해야할 책무와 나라가 민초들에게 가하는 고통 사이에서 번민하는 인물이다. 따라서 일지매란 존재는 그에게는 딜레마다. 일지매는 탈법적인 일을 하지만 그것이 결국 민초를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점은 구자명이란 캐릭터를 비극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리고 이것은 똑같이 일지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시스템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해결되지 못하는 문제를 시스템 안에서 해결하려는 그의 노력은 “민초들에게 행복을 주기보다는 고통이라도 덜어주는” 소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일지매의 이런 모습은 지극히 현실적인 선택이 아닐 수 없다. ‘돌아온 일지매’가 영웅담류의 소재를 갖고 있으면서도 전체적으로 우울한 기운이 감도는 것은, 이 이야기가 이처럼 무거운 현실을 벗어나 호쾌한 세계를 그리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 사극에서 일지매는 공적인 문제보다는 사적인 문제에 더 집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출생과 함께 버려진 일지매는 꽤 오랜 시간을 어머니의 그림자를 찾으며 방황하며 보냈고, 그 그림자 속에서 달이와 월희(윤진서)를 만나고 사랑해왔으며 지금도 그것은 진행형이다. 구자명이 가진 딜레마는 그가 평생을 사랑해온 일지매의 모친인 백매(정혜영)와의 사적인 이야기로 환원된다. 가끔씩 영웅담을 표명하는 이 사극이 멜로 드라마의 연장선으로 비춰지는 것은 일지매가 취하고 있는 이 자세에서 비롯된다.

결론적으로 보면 ‘돌아온 일지매’는 영웅을 그렸다기보다는 한 인간을 더 조명한 드라마라고 볼 수 있다. 늘 깨지고 다치는 일지매의 모습은 그가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라 그 또한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을 자꾸 상기시킨다. 이것은 어쩌면 고우영 화백이 원작만화를 그렸던 당대 현실의 억압적인 검열 탓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만화 같은 영웅보다는 좀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인 영웅을 그리려 했던 의도 탓일 수도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점들이 ‘돌아온 일지매’가 촘촘한 스토리에 실험적인 연출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대중적으로는 성공하지 못한 드라마를 만든 것은 아닐까. ‘돌아온 일지매’는 분명 인간미 넘치는 인물들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하지만 이 어려운 시국에 대중들은 어쩌면 황당하더라도 좀더 초인적인 판타지를 제공하는 영웅을 기대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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