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영 작가의 성장이 돋보인다

 

SBS 월화드라마 <해치>는 융복합이 돋보이는 사극이다. 연잉군(정일우)이 자신의 출생적 한계를 뛰어넘어 강력한 군주이면서 민생을 돌본 영조가 되어가는 역사적 사실을 가져왔지만, 그 사실을 풀어나가는 과정들은 상상력이 더해진 ‘역사적 재해석’에 가까웠다. 예를 들어 경종(한승현)의 독살설 같은 역사를 <해치>는 밀풍군(정문성)이 왕의 탕약에 독을 넣게 사주하는 사건으로 풀어낸 방식이 그렇다. 이를 알게 된 연잉군이 탕약을 쓰지 못하게 하자 마치 약을 못 쓰게 해 경종을 사살했다는 식의 이야기가 흘러나오게 된 것으로 해석해낸 것.

 

특히 이인좌(고주원)의 난을 해석한 부분은 신묘한 면이 있다. 즉 우물에 독을 풀어 괴질이 생기게 만들고 이를 ‘자격 없는 왕 때문’이라는 괘서를 뿌려 민심을 흔든 후 난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그렇다. 이인좌의 난을 환란과 변란으로 해석했고, 이 과정에서 남인으로서 늘 소외받아왔던 이인좌 수뇌부의 내분을 일으키기 위해 영조가 ‘탕평책’을 내놓는 이야기로 풀어냈다. ‘이인좌의 난’이나 ‘탕평책’ 같은 실제 역사적 사실들이 들어가 있지만 이를 상상력을 더해 재해석해낸 <해치>의 성취가 돋보이는 지점이다.

 

게다가 이런 재해석에는 과거의 역사를 가져와 현재를 이야기한다는 사극의 중요한 형식적 특징 또한 담겨있다. 환란과 변란과 이로 인해 만들어지는 ‘거짓 소문’들은 최근 우리네 사회가 겪은 현실의 이야기를 고스란히 재현해낸다. 세월호 참사 당시 부재했던 콘트롤 타워의 문제는, <해치>에서 괴질이 퍼져 민심이 이반되는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저잣거리로 왕이 직접 나가 민초들과 소통하는 모습과 대비되는 풍경으로 그려진다. 또 괘서는 최근 인터넷 시대에 골칫거리로 등장한 ‘거짓 뉴스’를 환기시키는 면이 있다.

 

<해치>가 이른바 ‘신세대 사극’이라고 여겨지는 건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가져오되 과감한 상상력으로 해석해내는 그 신묘함 때문이기도 하지만, 지금껏 사극하면 떠올리곤 하던 <조선왕조실록> 같은 정치사극의 풍경과는 너무나 다른 장르사극의 풍모를 지녔기 때문이기도 하다. <해치>에서는 이른바 <왕좌의 게임> 같은 미드적인 장르적 특징들이 묻어난다. 왕좌를 놓고 벌이는 연잉군과 경종, 밀풍군의 이야기나, 노론, 소론, 남인이라는 파벌이 만들어내는 복잡미묘한 사건들이 그렇다.

 

여기에 ‘해치’라는 상징물이 보여주듯이 당대의 사헌부의 개혁과 연잉군이 왕좌를 얻어가는 과정을 액션 수사 장르물의 신세대적인 접근방식으로 이어 붙였다. 그래서 계속 터지고 덮여지는 사건들의 진실을 파헤치고, 그것을 통해 적을 무력화시키며 결국은 왕좌에 앉게 되는 과정을 담을 수 있었다. 그 왕좌가 주는 만만찮은 무게감을 버텨내는 과정 또한.

 

김이영 작가가 이처럼 역사와 상상력, 과거와 현재, 국내 사극과 미드적 장르를 성공적으로 퓨전해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간 그가 걸어온 작품의 길과 무관하지 않다. 이병훈 감독과 함께 <이산>, <동이>, <마의> 같은 퓨전사극을 만들며 사극의 잔뼈가 굵은 김이영 작가는, <화정>을 통해 미드적 감성을 더한 독립적인 자기만의 세계를 시도했지만 미완의 시도에 그친 바 있다. 결국 이런 실패의 경험이 <해치>라는 작품의 완성도를 만들었을 거라 여겨진다.

 

<해치>는 이병훈 감독이 추구했던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의 조화는 물론이고, 현재적인 메시지를 담아내는 깊이와 현재의 시청자들이 빠져들 만한 장르적 운용을 통한 긴박감까지 훌륭한 융복합을 보여준 작품이다. 이로써 김이영 작가는 확실히 자기만의 세계를 가진 사극 작가로 서게 됐다. 다음 작품이 벌써부터 기대되는.(사진:SBS)

진실의 무게 담은 ‘자백’, ‘비밀의 숲’과는 또 다른 명작

 

진실이란 도대체 얼마만큼의 무게를 가진 것일까. 신문지상에 그토록 많은 ‘진상규명’이라는 단어에 담겨진 건 어쩌면 우리가 그저 ‘또야’하며 지나칠 그런 성질의 것이 아닐 지도 모른다. 거기에는 어떤 거대한 권력의 비리가 존재하고, 그 비리를 덮으려는 자들이 진실을 은폐하기 위해 또 다른 피해자들을 양산하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 피해자들과 가족들은 진실을 밝히기 위해 나서지만 드러난 진실을 마주해야 하는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게다가 그 진실을 이용하려는 이들까지 더해지게 되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tvN 토일드라마 <자백>은 바로 이 ‘진실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다. 거기에는 최도현(이준호), 기춘호(유재명), 하유리(신현빈), 진여사(남기애) 같은 진실을 밝히려는 자들이 있고, 조기탁(윤경호), 황교식(최대훈), 오택진(송영창), 박시강(김영훈) 그리고 추명근(문성근) 같은 진실을 은폐하려는 자들이 있다. 게다가 제니송(김정화) 같은 진실을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는 자들까지.

 

사건은 복잡하게 얽혀있고, 드라마는 그 사건의 진실을 단번에 보여주지 않는다. 아주 조금씩 드러내주기 때문에 <자백>을 보는 시청자들을 최도현이 느끼는 그 갈증을 고스란히 경험한다. 복잡해보여도 드러난 사건들은 어쩌면 우리가 이미 현실에서 겪었던 것들이라는 기시감을 준다. 무기 도입에 있어서 로비스트가 낀 국방비리가 있었고 그 와중에 진실을 알게 된 이들은 죽거나 협박당해 스스로 살인자라 고백하고 감옥에 갔다. 최도현은 그렇게 감옥에 간 아버지 때문에 ‘진실 추적’을 하기 시작한 인물이다.

 

하지만 <자백>은 최도현이 찾아나가는 진실의 무게를 결코 가볍게 두지 않았다. 사건이 터졌던 그 즈음에 그는 심장이식수술을 했고, 그 심장은 그 사건의 진실을 추적하다 교통사고로 의식불명이 된 검사(진여사의 아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본래 그 심장을 이식받을 대상자는 역시 당시 사건의 진실을 찾아나가던 기자(하유리의 아버지)였지만 갑작스레 병원에서 사망함으로써 그 대상자는 최도현이 되었다. 결코 우연일 수 없는 이 상황은 결국 조기탁이 누군가의 지시에 의해 만든 것이고 그 지시자 중 하나는 최도현의 아버지도 있었다. 최도현도 하유리도 또 진여사도 이렇게 얽혀진 사건 속에서 진실을 향해 나가는 일이 얼마나 힘든가를 보여준다.

 

진실을 향해 나아갈수록 이를 은폐하려는 자들의 저항도 거세지고, 어쩌면 그 진실 자체가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로 다가온다. 여기에 무기거래 로비스트 제니송(김정화)의 등장은 이 양대 대결구도에 변수를 만든다. 과거 사건의 진실을 알고 있는 제니송은 그것을 이용해 유리한 조건으로 거래를 성사시키려 한다. 박시강 의원에게 직접 거래를 제안하며 뒤에 실세로 숨어있는 추명근을 배제시키려 하던 계획이 무산되자, 그는 박시강 주변인물들부터 하나씩 제거해나간다. 황교식을 회유해 오택진 유광기업 회장을 배신하게 만듦으로서 두 사람 모두 무력화시키고 박시강 또한 과거 요정 화예에서 벌어졌던 차승후 중령살인사건의 진실을 빌미로 궁지에 몰아넣는다.

 

그런데 제니송에 의해 어쩌면 과거의 진상이 드러날 수도 있다는 기대는 어느 창고에서 울려퍼진 총성 하나로 깨져버린다. 마치 과거 차승후 중령 살인사건이 재현된 것처럼 최도현의 손에는 총이 들려 있고 제니송은 총에 맞은 채 죽어있는 그 자리를 형사 기춘호가 목격한다. 마치 도돌이표처럼 제 자리로 돌아온 듯한 이 충격적인 엔딩 속에서 또다시 터진 사건은 진실을 미궁에 빠뜨릴까 아니면 진실을 찾게 되는 변수가 될까.

 

<자백>은 처음 <비밀의 숲>과 비견되는 작품으로 소개되었지만, 갈수록 <비밀의 숲>과는 또 다른 놀라운 작품이라는 걸 스스로 증명해내고 있다. 놀라울 정도로 촘촘한 이야기 구성과 전개가 깊은 몰입감을 주면서도, 일관되게 추구하는 메시지, 즉 ‘진실에 대한 갈증’과 ‘그걸 위해 감당해야하는 무게’라는 그 주제의식을 놓치지 않고 있어서다. 진실을 밝히려는 자와 숨기려는 자 그리고 그걸 이용하려는 자의 구도를 통해 우리가 신문지상에서 스쳐 지나쳤던 ‘진상규명’이라는 단어가 가진 거대한 무게를 흥미진진하게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라니. <비밀의 숲>이 그 촘촘한 이야기로 검찰 내부의 정의라는 메시지를 담았다면, <자백>은 결코 쉽지 않은 진실 규명이 우리 사회에 얼마나 중대한 사안인가를 담아내고 있다.(사진:tvN)

‘아름다운 세상’, 어른들은 어떻게 아이들을 망치고 있나

 

JTBC 금토드라마 <아름다운 세상>의 제목은 역설적이다. 그 어디에서도 아름다운 세상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워서다. 학교 옥상에서 추락해 의식불명이 된 선호(남다름). 학교는 서둘러 자살시도라 단정 짓고 사안을 덮으려 한다. 심지어 선호가 친구들에게 이른바 ‘어벤져스 게임’이라며 집단 구타를 당하는 영상이 발견되지만 가해학생들은 ‘장난’이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건 결코 장난 수준이 아니다. 거기에는 항상 교실에서는 착한 우등생의 얼굴을 하고 있는 학교 재단 이사장 아들 오준석(서동현)의 보이지 않는 ‘조종’이 존재한다.

 

준석은 이 드라마에서 천사와 악마의 얼굴을 오가는 형상으로 묘사된다. 공부도 잘하고 집도 부자인데다 권력까지 갖고 있는 이사장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가 아이들을 지능적으로 조종하고 괴롭히며 군림하는 힘으로 작용한다. 그는 겉으론 친절한 척, 착한 척 하지만 한동희(이재인)처럼 이미 왕따 경험을 하고 전학 온 약한 아이를 또 다시 왕따시키고, 친한 친구로 지냈던 선호가 그것이 옳지 않은 일이라며 그에게 반기를 들자 그조차 집단 괴롭힘을 조장한다.

 

심지어 자신이 뒤에서 어벤져스 게임의 배역을 정해주고 지시를 내렸다는 사실이 학폭위에 의해 드러날 위기에 처하자 그 장소에 함께 있었던 조영철(금준현)에게 선물을 주며 자기 편으로 만들고 진실을 말한 이기찬(양한열)을 거짓말쟁이로 몰아세운다. 아이라고는 하지만 그의 무표정한 얼굴과 가장된 눈물 그리고 뒤돌아서 보이는 미소는 시청자들을 끔찍하게 만든다.

 

그런데 <아름다운 세상>이 하려는 이야기는 학교 폭력을 저지른 아이의 잘못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다. 그것보다는 이 아이가 어떻게 해서 이런 괴물이 되어가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준석은 어쩌다 친구까지도 왕따시키고 집단 폭력을 당하게 만드는 그런 인물이 되었을까. 그것은 그의 아버지인 세아교육재단 이사장 오진표(오만석)의 엇나간 자식 교육에서부터 비롯된다.

 

오진표는 세상을 움직이는 건 단 몇 프로의 상위그룹이라고 생각한다. 준석이 100년이 넘은 세아교육재단을 이어받을 후계자로서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다고 그는 말한다. 준석은 이러한 ‘위계’가 심지어 친구 사이에도 당연히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에게 반기를 든 선호를 집단 린치하게 만들고는 친구 사이에도 서열이 있다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결국 그래서 사건이 벌어진다. 학교 옥상에서 준석은 선호와 다퉜고, 그 와중에 선호는 추락했다. 그건 사고일 수도 있었지만 문제는 그 사고가 ‘사건’이 되게 만든 준석의 엄마 서은주(조여정)다. 그 날 옥상에서 준석을 발견한 서은주는 선호의 추락을 자살기도로 위장하기 위해 현장을 조작한다. 훗날 준석은 엄마에게 말한다. 그 날 자신이 모든 걸 다 봤다고. 일을 이렇게 만든 건 그래서 엄마 때문이라고.

 

<아름다운 세상>이 날카롭게 들이대고 있는 시선은 바로 이 지점이다.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고, 아이들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어른들은 서둘러 진실을 덮으려 하거나 조작하려 하고 심지어 피해자를 주변 사람들까지 피해를 주는 인물로 몰아세운다. 인간이라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지만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다는 그 명목은 모든 걸 정당화하고 스스로를 합리화시킨다.

 

그런데 결과는 어떨까. 그 아이들의 미래를 위한다는 그 일련의 행동들은 오히려 아이들을 망가뜨린다. 아이들은 부모들이 하는 일련의 행동들을 보며 그것이 세상이라고 배운다. 그래서 잘못을 저질러도 힘이 있으면 벌을 받지 않을 수 있고, 죄에 가담했어도 무조건 우기면 죄가 아닌 것이 될 수도 있으며, 심지어 힘 있는 사람에게 붙어야 살 수 있고 그러기 위해서는 거짓도 불사하며 친구도 버려야 한다는 걸 배운다.

 

반면 아이가 옥상에서 추락하는 그 사건을 통해 그 부모는 자신들이 얼마나 어른으로서 잘못해왔는가를 뼈저리게 깨닫는다. 선호의 아버지 박무진(박희순)은 학교선생님으로서 입바른 소리를 해왔지만 실제로 한 발 더 나아가 아이들의 사정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아픈 이야기를 들어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자신을 ‘후진 어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깨달음이나 후회, 자책감을 보이는 인물조차 없는 이 비정한 세상에서 그는 결코 ‘후진 어른’이 아니다. 그야말로 이제 제대로 된 세상을 만들어가기 위해서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하는가를 알게 된 진정한 어른이다.

 

동생 동희가 왕따를 당해왔고 심지어 너무 괴로워 죽을 생각까지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동수는 동생을 괴롭힌 아이들을 죽도록 때려주겠다며 분노를 드러낸다. 하지만 박무진은 그것이 아무 것도 해결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동수가 그러면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뭐냐고 외치자 박무진이 말한다. “들어줄 수 있잖아. 동희 이야기 들어줄 수 있잖아. 난 우리 아들 이야기 듣고 싶은데 들어줄 수가 없어. 들어줄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쳤어. 그게 얼마나 후회되고 괴로운 줄 알아?”

 

우리는 과연 제대로 살아가고 있을까. 우리가 매일 같이 치열하게 뛰어다니고 누군가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그 삶은 과연 우리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박찬홍 감독과 김지우 작가는 전작이었던 <기억>에서부터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들의 근원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아마도 세월호 참사가 가져온 충격이 분명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기억>이 기억을 지워내려는 시스템 속에서 결코 지워내선 안 되는 기억의 문제가 있다는 걸 드러냈던 것처럼, <아름다운 세상>은 어떤 사건의 진상을 제대로 파악해내는 일과, 그런 정의가 존재한다는 걸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일이 진정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말하고 있다.(사진:JTBC)

마블 마니아들부터 보통 관객까지 매료시킨 캐릭터의 전시장

 

열풍이라기보다는 광풍에 가깝다. 모이면 영화 <어벤져스:엔드게임> 이야기를 한다. “봤냐?”는 이야기로 시작된 영화 이야기는 그간 이 시리즈가 채워 넣은 무수한 캐릭터들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10여년 가까이 쏟아져 나온 마블의 슈퍼히어로물들을 꾸준히 챙겨봤던 사람이라면 한 챕터를 끝내는 이 작품에 대한 소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할리우드 슈퍼히어로 시리즈의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이토록 우리네 대중들에게도 깊게 여운을 남기고 있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작품의 무엇이 우리 대중의 마음까지 사로잡은 것일까.

 

영화 시작 전부터 화제가 될 수밖에 없었고, 사전 예매율이 치솟았던 건 두 가지 요인 때문이었다. 그 하나는 이번 편이 이 시리즈의 마지막이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지난 ‘인티니티 워’의 타노스에 의해 슈퍼히어로들이 재처럼 사라져버리는 충격적인 엔딩과 그로 인해 지금껏 무수히 쏟아져 나왔던 마지막 편에서의 반전에 대한 추측들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이 겹쳐지자 대중들 입장에서는 안보고는 못 배기는 작품이 되었다.

 

이 정도 되면 <어벤져스:엔드게임>에 대한 기대감은 최고조로 올라왔다고 볼 수 있다. 때로는 이런 기대감이 자칫 영화를 망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즉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시작부터 빵빵 터트리며 시선을 잡아끌어야 할 것 같은 강박관념 같은 걸 만들 수 있다는 것. 하지만 놀라운 건 <어벤져스:엔드게임>은 이러한 부담감 자체를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듯, 평소대로의 편안한(어찌 보면 오히려 더 평온한) 시작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게다가 영화는 시각효과의 과잉을 담기보다는 마치 ‘마지막’이 갖는 어떤 쓸쓸한 정서 같은 걸 담아내면서 관객의 마음을 툭툭 건드리기 시작한다. 물론 마블 슈퍼히어로물에서 빠질 수 없는 유머들도 곳곳에 채워진다. 그래서 관객들은 볼거리의 자극이 아니라 ‘마지막’이 주는 울컥하는 감정들과 동시에 이를 깨치기 위해 애써 노력해 던져지는 유머가 주는 웃음의 정서 속에 자연스럽게 빠져든다. 물론 이건 뒤로 갈수록 점점 거대해지는 스펙터클한 영상들을 위한 밑그림 같은 것이지만.

 

<어벤져스>라는 기획 자체가 그렇지만 이번 마지막 시리즈에는 무수히 많은 마블의 캐릭터들이 거의 ‘융단폭격’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쏟아져 나온다. <아이언맨>이나 <헐크>, <캡틴 아메리카>, <토르> 같은 시리즈는 물론이고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캡틴 마블>, <블랙팬서>, <스파이더맨> 등등 마블이 그간 해왔던 시리즈의 캐릭터들이 거의 이 한 작품 안에 꽉꽉 채워져 있다. 전부를 보지 못했어도 그 중 한두 작품에서 캐릭터의 매력을 느꼈던 관객이라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

 

이렇게 저마다 시공간 자체가 다른 캐릭터들이 한 작품 안에 녹아들 수 있었던 건 마블의 독특한 세계관 덕분이다. 시간을 뛰어넘고 지구와 지구 반대편의 우주라는 공간을 뛰어넘는 상상력의 세계는 이 모든 캐릭터들의 공존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저마다 한 세계씩을 평정하고 있는 슈퍼히어로들의 이야기를 싱겁지 않게 만들어주는 건 인물들이 가진 결함들과 그로 인해 그들끼리 갈등하는 이야기 구조 덕분이다. <캡틴 아메리카:시빌 워>에 이어 지난 <어벤져스:인피니티 워>에서도 등장한 것이지만 캡틴 아메리카와 아이언맨의 대결구도는 이번 마지막편으로까지 이어지고 그것을 해결해가는 과정 또한 이 영화를 흥미롭게 만드는 이유가 된다.

 

무엇보다 이 거대한 전쟁을 가능하게 만든 건 슈퍼히어로들의 총합인 어벤져스로도 쉽게 무너지지 않는 타노스라는 절대적인 캐릭터를 창조해낸 점이다. 세계를 파괴하는 존재지만 단 한 번도 ‘사적인 감정’이 들어간 폭력을 휘두른 적이 없다는 이 캐릭터는 그래서 희대의 빌런이지만 마치 주어진 숙명을 받아들이는 신화적 존재처럼 그려진다. 이 막강한 빌런이 세워지면서 <어벤져스:엔드게임>의 슈퍼히어로들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가 가능해졌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네 대중들은 마블의 세계에 이토록 열광하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영화 자체가 주는 재미와 더불어 지금의 중장년층들이 가진 키덜트적인 취향에 마블의 세계가 조응한 면이 있어서다. 그래픽 노블이 보여주듯이 이 만화적 세계는 결코 유치하지 않고 또 너무 뻔한 권선징악의 구조로 되어 있지도 않다. <캡틴 마블>의 여성 슈퍼히어로와 <블랙팬서>의 흑인 슈퍼히어로처럼 무엇보다 다양한 캐릭터들이 상징하는 인물군들의 이야기가 새로운 시대의 생각들까지 잡아넣는다. 그러니 아이부터 젊은 세대는 물론이고 중장년까지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세계가 된 것. 열풍을 넘어 광풍이 부는 이 현상이 공감가는 대목이다.(사진:영화'어벤져스:엔드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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