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널>에 대한 몰입, 우리에게 남은 트라우마들

 

성수대교 붕괴사건? 대교 위를 달리던 차량이 갑자기 밑으로 푹 꺼진다. 뒤따라 달리던 차들이 급브레이크를 밟고 붕괴된 다리 밑으로는 떨어진 차량이 보인다. tvN 금토드라마에 담긴 짧은 사고 장면. 아마도 외국인들이 봤다면 왜 굳이 저런 장면을 넣었을까 의구심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장면은 그리 낯설지 않다. 그 붕괴 장면을 보고 백이면 백 성수대교 붕괴사건을 떠올렸을 테니 말이다.

 


'시그널(사진출처:tvN)'

이 대교 붕괴 장면을 배경으로 다뤄지는 대도사건도 그렇다. 그것은 흔한 도둑처럼 보일 지도 모르나, 우리에게는 낯설지가 않다. 82년 군부독재시절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대도사건을 떠올리게 하기 때문이다. 고위 정부 관리들과 정치인들 같은 부잣집만 털고 유유히 사라지는 이 도둑에게 당시 대중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대도라는 별칭을 붙여주기도 했다. 대도 조세형은 결국 검거되었지만 당시 군부독재에 대한 대중들의 혐오를 읽어낼 수 있는 사건이었다.

 

이 드라마가 3,4회에 집중적으로 다뤘던 경기남부연쇄살인사건은 화성을 떠올리게 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던 이 사건은 여전히 미제로 남아 당대를 살았던 이들에게는 하나의 트라우마가 되었다. 그러고 보면 1,2회에 다뤄졌던 유괴납치살인사건도 우리 사회에서 꽤 자주 벌어졌던 사건들을 떠올리게 한다. 91년에 벌어졌던 이형호군 사건은 대표적이다.

 

<시그널>은 이처럼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척 봐도 그것이 어디서 모티브를 가져왔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을만한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그것은 취재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 수 있다. 결국 <시그널>은 현실에서 미제에 남았던 사건들을 드라마로 가져와 풀어내는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현실이 못한 것을 드라마가 판타지로나마 풀어내려 하는 것.

 

<시그널>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졌던 큰 사건들을 가져오는 건 그것이 크건 작건 우리들에게 남긴 트라우마 때문이다. 드라마는 그 트라우마를 건드리면서 무전기라는 판타지적 설정을 통해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 그리고 당대에는 해결하지 못했던 미제사건을 해결하는 것으로 이 트라우마의 극복을 시도한다. 물론 드라마 한 편이 당대의 그 아픔과 고통을 해결해줄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희생자들에 대한 진혼곡은 충분히 될 것으로 보인다.

 

이 현실적인 사건의 모티브들은 드라마의 구성적인 측면으로 봐도 꽤 효과적이다. 사실 형사물 같은 장르가 연속극에서 성공하기 힘든 이유는 한 사건만으로 드라마 전체를 채우기가 어렵고 그렇다고 여러 사건들을 다루면 이야기가 편편히 나눠지기 때문이다. 한 사건에 몰두하다가 그게 해결되고 다른 사건으로 넘어가는 그 과정에서 몰입은 깨질 수 있다. 긴장이 흩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그널>은 현실적인 사건들을 구성하면서 그 사건을 이재한(조진웅) 같은 주인공과 연루시킴으로써 몰입도를 높여 놓는다. 사실 이재한 주변에 이토록 큰 사건들이 계속 터지고 있다는 것은 개연성의 비약일 수 있다. 하지만 워낙 현실적인 트라우마가 큰 사건들이기 때문에 시청자들은 이 비약을 기꺼이 허용한다. 드라마를 통해서나마 시청자들도 트라우마를 극복하고픈 욕망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시그널> 같은 작품이 나오고, 거기에 그토록 몰입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씁쓸함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나 사건사고가 많이 터지고 그럼에도 그 사건들이 해결되지 않고 미제로 남거나 엉뚱한 사람이 억울하게 감방에 가는 비극들이 넘쳐나면 드라마를 보면서까지 이토록 간절한 마음이 생겨나는 걸까

시청자들의 마음을 읽는 나영석 PD의 남다른 소통 능력

 

tvN <꽃보다 청춘> 아이슬란드편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 짧게 2분 정도 흘러나온 아프리카 나미비아편의 예고편에 대한 반응이 폭발했다. 아이슬란드의 풍광이 워낙 대체불가여서인지 나미비아 예고편에 등장한 배경들은 그리 놀랍지는 않았다. 하지만 거기 등장한 <응답하라1988> 쌍문동 4인방의 얼굴을 다시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꽃보다 청춘(사진출처:tvN)'

역시 4인방의 얼굴 담당(?), 박보검이 차에서 눈을 감은 채 시원한 바람을 맞는 장면이 예고편의 첫 대목을 장식했다. 그 편안한 얼굴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이 시청자들의 가슴에도 그대로 전해지는 것만 같은 장면. 시청자들을 위해 <응답하라1988>을 끝까지 촬영하느라 몸도 마음도 피곤했을 그가 그토록 편안한 얼굴을 내보이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은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리고 그 같은 차 안에 함께 한 친구들, 류준열, 고경표, 안재홍 역시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아프리카 어딘가의 풍광을 바라보는 모습이 이어졌다. 유려한 음악과 함께 마치 춤을 추듯 퍼득이는 옷자락마저 흥겹고 그 바람이 내는 소리는 시청자들마저 기분 좋게 만들었다.

 

어딘가 사막 같은 공간을 배경으로 환하게 웃는 류준열의 얼굴은 <응답하라1988>을 보며 그토록 보기를 원했지만 보여주지 않았던 그 얼굴이었다. 항상 무표정하고 때로는 침울하게까지 느껴졌던 그의 얼굴이 아닌가. 늘 뒤편에 서서 속내를 숨기곤 했던 우리의 정환이. 그는 <꽃보다 청춘>에 와서 비로소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웃음에 시청자들의 마음도 환해졌다.

 

붉은 모래 위에 맨발로 덤블링을 하는 고경표는 마치 발레리노가 된 듯한 우아한 동작으로 넘어졌고, 극중 정봉의 캐릭터가 뚝뚝 묻어나는 안재홍이 모래 한 줌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섹시하게 부는 장면은 이 <꽃보다 청춘>에 웃음과 재미를 기대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박보검의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고 행복감에 젖어있는 표정은 다음 장면으로 이어지는 네 사람이 어떤 폭포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어가는 장면을 마치 그의 꿈결처럼 몽환적으로 느껴지게 했다. 마지막으로 점점 커져가는 폭포수의 소리는 2분 예고편만으로도 점점 커져버린 기대감을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꽃보다 청춘> 나미비아편은 이미 그 기획만으로도 성공한 아이템이 되고 있다. <응답하라1988>의 종영이 남긴 아쉬움은 고스란히 <꽃보다 청춘>의 자양분이 되었다. 푸켓으로 떠난 포상 휴가에서부터 납치해가는(?) 이벤트를 벌인 건 역시 나영석 PD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 일거수일투족이 이미 화제가 되어버렸으니.

 

짧은 예고편이 이토록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었던 건 그 짧은 영상 안에 <응답하라1988>을 통해 우리를 기분 좋게 했던 네 배우들의 즐거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의 <응답하라1988>을 지지하는 마음은 네 배우들이 이번 여행을 통해 충분히 즐기고 휴식하고 행복해지는 모습을 원하게 만들었다. 그걸 2분의 예고영상 안에 채워 넣다니. 시청자들의 마음을 읽어내는 나영석 PD의 남다른 소통능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우결>의 판타지를 모두 뒤집어버린 <님과 함께2>

 

윤정수는 실로 대세 예능인이 됐다. 한동안 방송에는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고 심지어 사업실패로 파산신청까지 할 정도로 추락했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최근 몇 개월만에 이토록 매력적인 인물이 된 데는 JTBC <님과 함께2>라는 프로그램에 김숙과 쇼윈도 부부콘셉트로 출연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도대체 이 프로그램의 어떤 점이 윤정수라는 어찌 보면 옛날 코미디언(?)을 이토록 뜨거운 인물로 만든 걸까.

 


'님과 함께2 최고의 사랑(사진출처:JTBC)'

사실 개그맨으로 잔뼈가 굵어온 윤정수의 웃음에 대한 감각은 명불허전이다. 어떤 것이 웃음의 포인트가 되고 그것을 하기 위해서 심지어 엄동설한에 누드시위(?)를 벌이는 것조차 꺼리지 않는 모습에서는 그의 뼈그맨으로서 면면이 묻어난다. 즉 어떤 상황에서든 웃음을 만드는 그 능력은 확실히 남다르다는 점이다.

 

하지만 윤정수를 이처럼 돋보이게 하는 건 그런 웃음의 강도 때문이 아니다. 최근 예능에서 웃음만큼 중요해진 건 그 사람에 대한 호감도다. 윤정수는 이미 바닥까지 온 자신의 처지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그것조차 웃음의 소재로 내놓는 걸 꺼리지 않음으로써 대중들의 호감을 샀다. 어떤 면에서는 그 웃음 뒤에 짠한 페이소스까지를 느끼게 만드는 윤정수는 그래서 같은 힘겨운 현실을 공감하는 서민들에게는 지지해주고픈 마음을 갖게 하는 인물이 되었던 것.

 

하지만 제 아무리 윤정수가 웃음의 능력이 뛰어나고 또 호감이 가는 인물이라고 해도 그것을제대로 뽑아내주는 <님과 함께2> 같은 프로그램이 없었다면 이처럼 그가 대세 예능인이 되지는 못했을 게다. <님과 함께2>는 지금껏 MBC <우리 결혼했어요>가 해왔던 가상 부부 콘셉트를 완전히 뒤집어버림으로써 신선한 웃음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가짜 판타지를 뒤집는 역발상이다.

 

<우리 결혼했어요>는 가짜지만 진짜인 척 하는 부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님과 함께2>는 아예 대놓고 쇼윈도 부부를 내세운다. 즉 진짜인 척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이건 가짜(혹은 그래야만 한다고)라고 주장하는 것. 그러자 이야기는 의외의 진정성을 갖게 된다. 즉 가짜라고 주장하고 때로는 그것이 하나의 상황극일뿐이라고 보여주지만, 어느 순간 짧게 진심이 슬쩍 드러나는 그 장면에서는 의외의 애정 같은 게 비춰진다는 점이다.

 

시청률 7%를 넘기면 진짜 결혼한다는 황당한 공약을 내세우고는 그걸 막기 위해 본방 시청하지 말자는 피켓 시위를 벌이는 모습이나, 이제 대세 예능인으로서 <정글의 법칙>이나 <마이 리틀 텔레비전>, <복면가왕> 같은 프로그램을 겨냥해 방송 연습을 하는 모습은 그래서 웃기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짠한 느낌도 준다. 윤정수와 거리를 두려하지만 은근히 그를 도와주는 김숙 역시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건, 마치 할 수 있는 건 다 한다는 식으로 온몸을 던지는 윤정수에 대한 시청자들의 지지와 공감대를 함께 하기 때문일 게다.

 

그 누구도 더 이상 <우리 결혼했어요> 같은 가상 부부 콘셉트가 진짜일 거라고 믿지 않는다. 그것이 잠시 현실을 잊게 만드는 달달한 판타지라는 걸 누구나 다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판타지가 아닌 <님과 함께2>가 보여주는 개그맨들의 현실에 더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웃고 있고 또 대책 없는 웃음을 만들기 위해 뭐든 하는 개그맨들의 쇼윈도 부부설정에서는 마치 살기 위해 힘겨운 직장 내에서도 웃으며 살아가는 샐러리맨들의 얼굴이 느껴진다. 서로가 살기 위해 일종의 합의된 연기를 하고는 있지만, 때때로 그 연기를 넘어서 다가오는 동료(혹은 그 이상)의 마음이 느껴질 때도 있는 법이다. 김숙이 그러하듯 윤정수에 대한 대중들의 지지의 마음이 생기는 건 그래서다

<배우학교>, 다큐 찍은 박신양, 예능 하려던 유병재

 

그저 그런 연기 오디션이나 연기를 소재로 한 예능이 아닐까. 이런 생각을 가졌던 시청자들이라면 tvN <배우학교>의 첫 방송이 사뭇 낯설게 다가왔을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여기 출연한 출연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게다. 물론 스스로의 연기력이 부족하다는 걸 인정하면서 프로그램에 합류했다는 건 그만한 용기를 냈다고 봐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자신들이 출연하는 이 프로그램이 예능이라는 점은 이만큼의 진지함과 압박감을 요구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게 했을 것이다.

 


'배우학교(사진출처:tvN)'

첫 회만 두고 얘기하자면 <배우학교>는 예능이라기보다는 다큐에 가까웠다. 박신양은 진심으로 그 학교를 찾아온 출연자들에게 연기를 가르쳐주려 했고 그래서 그 첫 번째 관문으로서 자기소개 시간에 왜 연기를 하려는가에 대한 압박질문을 던졌다. 처음 자기소개를 하러 나온 남태현에게 집요하게 왜 연기를 하려는가를 물었고, 자꾸만 머뭇거리며 회피하려 하는 속 얘기를 결국은 꺼내게 만들었다. 자신의 연기력 논란에 드라마 제작진들부터 연기자들까지 모두가 피해를 입는 상황을 견디기 힘들었고 최소한 그런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연기를 제대로 배우고 싶다고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예능 프로그램이 이토록 압박감과 긴장감을 유발하고 첫 모습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눈물까지 흘리는 이 장면은 <배우학교>가 향후 어떤 모습의 프로그램이 될 것인가를 가늠하게 해주었다. 박신양의 어찌 보면 가혹하다싶을 정도로 그냥 넘어가지 않는 독한 질문들은 일종의 화두였다. 지금껏 어찌어찌해 캐스팅된 연기를 하기는 했었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못했던 질문들. 연기란 무엇이고 나는 왜 연기를 하려하는가에 대한 연기자에게는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졌던 것이다.

 

유병재는 아마도 자신이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면서 해왔던 대로 이 프로그램 역시 배우수업이라는 상황에서의 재미를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유병재의 이 생각이 깨지는 건 단 몇 분 간의 질문세례면 충분했다. 박신양에게 심지어 자신이 선생님으로서 합격시켰다는 식의 무례한 얘기까지 꺼낸 건 분명 웃음을 주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그 말은 웃음이 아닌 무거운 분위기로 돌아왔다. 결국 거듭된 박신양의 질문 속에 압박감을 느낀 유병재는 가슴에 통증을 느끼며 말을 더 이상 할 수 없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됐다.

 

유병재를 데리고 침대가 놓여져 있는 숙소로 간 박신양은 그를 다독이며 마음을 가라앉히게 해주었고, 그날 밤 그에게 두 번째 주어진 자기소개 시간에는 훨씬 더 차분한 목소리로 왜 연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할 수 있게 했다. 발표하는 것 자체가 훨씬 편해진 그에게 박신양은 연기 또한 그렇게 몸과 마음이 편안해야 잘 나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결국 박신양이 압박질문을 통해 하게 했던 자기소개 시간은 사실은 여기 참가한 출연자들이 자기 자신을 알아가는 시간이기도 했고 또 단단한 껍질을 깨고 그 속살을 드러내는 시간이기도 했다. 연기가 누군가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 속에 있는 또 다른 나를 만나는 과정이라면 먼저 자신을 제대로 보고 인정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박신양의 첫 수업은 그래서 연기자라면 가져야 될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끄집어낸 시간들이 될 수 있었다.

 

<배우학교>는 결코 웃기려는 예능이 아니라는 것을 첫 방송은 보여줬다. 예능을 하려던 유병재를 진지한 연기의 세계로 이끄는 박신양의 진심이 느껴졌다. 물론 상황 자체가 웃음을 유발할 수는 있을 것이나 그것이 목적이 되지는 않는 새로운 예능 프로그램. <배우학교>는 웃음보다는 눈물과 땀이 더 느껴질 예능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것이 이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는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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