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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속스캔들’의 겸양어법 통했다

“좀 합디다.” ‘과속스캔들’에서 남현수(차태현)는 다 커서 애까지 딸린 미혼모로 찾아온 딸 황정남(박보영)이 노래하는 걸 보고는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의 뉘앙스는 보통의 아버지가 딸에게 하는 말과는 다르다. “잘했다”도 아니고 “아직 부족하다”도 아닌 그 중간쯤에 위치한 이 말은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화법이기도 하다.

이 영화 속에서 차태현이 연기하는 남현수는 차태현이 그런 것처럼 더 이상 아이돌 스타가 아니다. 이제는 30대 중반의 연예인으로 그럭저럭 인기를 유지하고 있는 존재. 그런 그에게 갑자기 다 큰 딸이 애까지 데리고 찾아온다. 영화는 이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질적인 존재들이 한 집에서 살아가며 좌충우돌하는 코믹을 선보인다.

재미있는 것은 이 가족 드라마적인 요소 위에 다양한 재미의 지층들을 깔아두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늘 함께 있어서 발견하지 못했던 가족들의 놀라운 면면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그저 미혼모로만 생각되었던 황정남은 사실 노래에 재능을 갖고 있으며, 황정남의 아들 황기동(왕석현)은 피아노 천재다. 영화는 평범하게만 보였던 가족의 모습에서 비범함을 발견했을 때 느껴지는 그 기쁨의 순간들을 포착한다.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 때문에 가족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딸이 “왜 내가 없어야 하는데. 여기 있잖아 내가 여기 있는데 왜 내가 없어야 하냐고!”라고 외쳤을 때의 그 기분. 사실 늘 보석처럼 반짝이며 곁에 있었지만 그 존재를 무시해왔다는 자괴감. 그래서 잠시 사회라는 무대를 내려와 그 무대를 오롯이 가족을 위해 쓰고 싶은 이 영화의 마음은 인지상정일 것이다.

남현수가 건네는 “좀 합디다”라는 말 속에는 그 표현 자체가 어색해진 현대인들의 정서와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표현하고픈 욕구가 공존한다. 한때 잘나가던 아이돌이 이제는 아저씨돌로 돌아오는 이 영화가 포착한 문화현상은 사회경제적인 분위기를 그대로 대변한다. 삶이 어려워지면 가족은 더 그리워지게 마련이다. 아이돌과 아저씨돌이 가진 이미지의 기본적인 차이는 가족의 유무에서 비롯된다.

이 영화는 또한 우리영화계가 한때 가졌었던 아이돌 시절의 화려함보다는, 이제 겸양 어린 마음을 담은 아저씨돌의 수수함을 진솔하게 드러낸다. 이 영화는 화려한 수식어로 과장 광고되던 여타의 한국영화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접근했다. 그것은 오히려 3류의 냄새를 풍기면서 한껏 낮추었고, 그것은 거꾸로 의외의 재미를 통한 상승효과를 만들었다. 이것은 재미없을 것처럼 보이는 아저씨가 의외의 재미를 선사하는 토크쇼에서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만든다.

“좀 합디다.”라는 말로 대변되는 이 영화는 그러나 조금이 아닌 꽤 많은 즐거움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차태현은 능수능란 한 코믹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박보영은 때론 귀엽고 때론 당차며 때론 성인연기자의 모습을 보여주며, 아역으로서 왕석현은 촌철살인의 웃음과 감동을 전달한다. 이렇다할 크리스마스 영화 한 편 개봉되지 않는 작금의 영화현실, 경제현실 속에서 이처럼 힘겨워진 가족들의 어깨를 두드리는 영화는 좀체 발견하기 힘들 것이다. ‘과속스캔들’은 ‘좀’이 아닌 ‘꽤’하는 영화다.

Posted by 더키앙

새로운 시대, 새로운 가족 제시한  '엄마가 뿔났다'

김수현 작가의 '엄마가 뿔났다'에서는 가족에 대한 두 가지 시점이 교차한다. 그 하나는 고전적인 가족드라마 속의 가족으로 드라마 초반부에 보여주었던 가족관이다. 장남 영일(김정현)은 어느 날 불쑥 자식까지 가진 여자를 집으로 들여 아내로 맞고, 도무지 결혼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노처녀인 장녀 영수(신은경)는 이혼남을 사랑한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금지옥엽 키워낸 막내 딸 영미(이유리)는 부잣집 아들과 결혼해 품격 운운하는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으며 살아간다. 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자식들을 가진 엄마, 김한자(김혜자)의 뿔 이야기는 지금껏 가족드라마들이 늘 다루었던 것들. 하지만 '엄마가 뿔났다'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것이 아니다.

장남 영일이 들인 며느리, 미연(김나운)은 특유의 붙임성과 선함으로 가족 속으로 쉽게 융화되었고, 영수는 사려 깊은 종원(류진)과 그녀를 이해해주는 백점짜리 시어머니 종원 모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오히려 종원의 이혼으로 해체된 가족을 더욱 강력하게 봉합하는 역할을 해낸다. 영미는 시어머니의 잔소리에 점점 이력이 나고, 그러려니 하며 지내게 되면서 오히려 시어머니의 귀여움 같은 것을 발견한다. 김한자 입장에서 보면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아 났던 뿔은 모두 기우였던 셈이다. 자식을 위해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살아왔던 시간들에 대한 회한이 남을 법한 상황. 그녀가 가족을 벗어나 '1년 간의 휴가'를 선언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가족 중심에서 나 중심으로 돌아보다
이 드라마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주부로서, 엄마로서, 며느리로서 살아왔던 김한자가 프리선언을 하고, 재벌집 며느리와 결혼해 숨죽이며 살아온 김진규(김용건)가 돌연 자신의 인생을 찾겠다고 집을 나가며, 집안의 어른으로 품위 있게 마감할 인생만을 생각해왔던 나충복(이순재)이 로맨스그레이에 빠지고, 친엄마라는 가족관계의 틀 속에서 새엄마를 무조건 부정하기만 해왔던 소라가 새엄마가 될 영수를 받아들이는, 지금껏 가족드라마가 그려내지 않았던 새로운 이야기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니까 초반부 전형적인 기존 가족드라마 틀 속에서의 이야기는 후반부 달라진 가족의 전제가 되는 셈이다. 초반부에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서의 나를 그렸다면, 후반부에는 나를 중심으로 가족을 다시 재편하는 셈이다. 여기서 중요한 작용을 하는 것은 이 드라마가 제목에서 내세운 '뿔'이다. 가족이라는 관계 속에 매몰되는 상황에서 김한자는 불쑥불쑥 솟아나는 뿔을 느끼지만 그걸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는다. 그저 혼자 독백을 통해 속으로 풀어낼 뿐이다. 이것은 김진규가 처한 허수아비 같은 자신의 삶 속에서도 그렇고, 나이 들어 갖는 연애감정을 주책으로 취급받는(심지어 가족에게도) 나충복의 삶에서도 그렇다. 점점 개인주의화되어가는 가족 속에서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자식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소라 역시 뿔이 나기는 마찬가지다.

김수현 작가가 보여준 가족에 대한 낙관
그것은 뿔이기 때문에 드러내는 순간, 그 누군가를 아프게 한다. 그러니 과거 가족 드라마들의 미덕은 가족을 위해 그 뿔을 숨기고 혼자 삭이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가 뿔났다'는 정반대의 방식을 취한다. 그 뿔을 드러내고 가족들에게 자신의 뿔의 이유를 말하며, 그 문제의 해결을 요구한다. 중요한 것은 이때 가족들이 이 뿔을 대하는 태도다. 김한자가 프리선언을 했을 때, 시아버지인 나충복은 흔쾌히 그것을 허락해주고 남편 나일석(백일섭)은 손수 집을 알아봐주기까지 한다. 김진규가 집을 나가겠다고 했을 때, 도도하기 그지없던 아내 고은아(장미희)는 무릎까지 꿇으며 그를 잡는다. 나충복의 연애사실이 알려졌을 때, 가족들은 은근히 뒤에서 지원을 해준다. 소라가 엇나갈 수 있는 상황에서 오히려 새엄마인 영수는 소라를 보듬어준다. 이 드라마가 그간 숨겨 놓았던 가족들의 뿔을 마음껏 끄집어내는 것은 가족에 대한 김수현 작가의 무한한 낙관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실 이것은 가족이라는 틀 속에서 생겨난 뿔이기에 가족이 또한 감당해야할 문제이기도 하다. 겉으로 보기엔 평탄해 보이는 모습들과는 달리, 가족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면 과거의 가족관계가 만들어낸 뿔들이 존재하기 마련. 그것이 밖으로 표출되지 않을 때 상황은 더 어려워진다. 작은 물방울들도 흐르지 못하고 막히면 둑을 무너뜨리는 법이다. 그간 숨겨졌던 뿔들을 드러내고 보듬는 드라마 '엄마가 뿔났다'. 이 드라마가 어느 때보다 그 울림이 큰 것은 지금 현재 가족 중심주의에서 나 중심주의로, 어느 누구의 희생에서 각자의 행복으로 바뀌어나가는 가족의 가치관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이다.

Posted by 더키앙

‘에덴의 동쪽’, 붕괴된 가족을 복기하다

형 동철(김범)이 동생 동욱이 저지른 방화를 대신 뒤집어쓰고 소년원에 들어간다거나, 그 진실을 어머니에게 비밀로 숨긴다거나, “목숨걸고 공부해라”던 형과의 약속을 지키고 동욱이 서울대 법대 수석으로 합격을 한다거나 하는 ‘에덴의 동쪽’의 에피소드들은 옛 드라마들이 가지고 있던 가치관들을 그대로 재연한다. 거기에는 우리가 흔히 구태의연한 드라마들이라 비난하던 가난, 원한, 복수, 출생의 비밀, 재벌과 얽히는 삼각관계 같은 신파의 코드들이 존재한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이 70년대에나 어울릴 법한 코드들 앞에 21세기를 살고 있는 시청자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시간을 되돌려 가족을 복기하다
‘에덴의 동쪽’에서 어린 동철(신동우)은 아버지를 만난 자리에서 하늘을 향해 손을 벌렸다가 가슴을 툭툭 치고 입가로 손을 가져간 뒤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쭉 내민다. 그 수신호는 자신이 아버지를 “하늘만큼 사랑한다”는 뜻. 이 수신호는 이 드라마에서 어떤 대사보다 더 강렬하게 가족 간의 애정을 표현하는 장치다.

죽은 아버지의 무덤가에서 너무 놀라 말조차 잊어버린 동철은 마지막 가는 길에 이 수신호로 대신 마음을 전한다. 동생이 홧김에 저지른 방화를 대신 뒤집어쓰고 마을을 떠날 때, 열차 위에 오른 동철이 따라오는 동생 동욱에게 이 수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그는 외친다. “너는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내 동생이다!”라고.

만일 이 드라마의 시대가 현재라면 어떨까. 아마도 가족 간의 사랑은커녕 따뜻한 눈길조차 어색해져 버린 작금의 상황에 이 수신호는 코미디가 되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다행스럽게도 그 시대가 70년대인데다 장소도 태백 황지의 막장 탄광촌이다. 시간을 과거로 되돌려놓자 지금 시대라면 촌스러울 수도 있는 노골적인 가족애의 표현들은 진정성을 갖게 된다.

무엇이 이 가족을 붕괴시켰나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가족을 그 중심에 세우고 있다. 즉 신태환(조민기)이라는 한 인물에 의해 붕괴되고 해체된 가족이 복수심과 가족애를 무기로 세상과 맞서는 이야기다. 신태환이라는 인물을 악역으로 세우면서 최초로 내세운 에피소드가 그의 애인이었던 미애(신은정)의 아기를 강제로 지우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이로써 신태환은 자신의 욕망을 위해 가족을 붕괴시키는 자로서 자리매김한다.

이 반대편에 선 인물은 동철이다. 그는 신태환이 붕괴시키려는 가족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고 묶어두려고 노력한다. 이역만리 마카오로 챙(박찬환)에게 억지로 끌려가면서 “가족을 버리고 못가요! 난 죽어도 돌아가야 해요.”라고 외치는 동철은 가족을 지키는 자, 즉 가장으로서의 면모를 드러낸다. 이렇게 동철과 동철의 가족들이 서로를 절절히 생각하게 된 것은 모두 아버지의 부재와 관련이 있다.

가족을 위해 매일 땅속을 파고 들어가는 막장의 노동을 짊어져야 했던 아버지에게 동철이 건네던 새장이 망가져 버렸을 때, 그것은 단지 아버지의 죽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탄광일로 늘 어깨에 훈장처럼 달고 다니던 아버지의 멍 자국이, 달동네로 연탄을 나르며 공부를 하던 동욱의 어깨에도 똑같이 대물림되는 것은 이 젊은이들에게 아버지의 부재가 만들어낸 굴레이다. 그리고 그 아버지의 부재는 단순히 신태환과 이기철(이종원)의 사사로운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지금의 현재를 만든 개발과 노동의 대립에서 비롯된 시대의 아픔이다.

붕괴된 가족이 세상과 맞서는 방법
이 드라마에서 동철의 어머니가 둘이라는 점은 이채롭다. 아버지 부재의 시간을 버텨내기 위해 두 명의 어머니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하나는 세상과 직접적으로 맞서고(양춘희-이미숙), 다른 하나(정자-전미선)는 아이들을 보듬는다. 또 그들은 힘겨울 때 서로를 돕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을 그렇게 한 울타리에 묶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이기철이라는 이미 사라져버린 가장 때문이다.

이 드라마는 유독 아버지에 대한 집착이 끈질기게 그려진다. 칼에 맞은 챙을 구해준 동철에게 “네가 날 업고 뛸 때 애비 짓이라도 할 생각이었다”고 하는 챙의 진술은 인상적이다. “형이 있다죠?”하고 혜린(이다혜)이 동욱에게 물었을 때, 동욱이 “네 내겐 아버지 같은 존재죠”라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다.

동철이 돈을 벌기 위해 세상을 전전하는 것은 그 부재한 가장을 메우려는 몸부림이고, 동철의 서울대 법대 수석입학은 그것에 대한 자식 같은 동생의 화답이다. 아버지는 늘 가족을 위해 떨어져 있고(죽었거나 도망중이거나), 가족들은 늘 그 아버지의 귀환을 기다린다. 그리고 그것은 떨어져 있어도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이역만리에서도 신문에 난 법대 수석 기사를 통해, 전화 한 통화를 통해 더 절절해지는 관계다.

70년대 개발시대를 살았던 원죄의식
드라마가 어떤 복수극의 틀을 가져왔다면 지금 가족들이 기다리는 건 아버지가 부재한 자리를 채워줄 동철의 귀환이다. 법대에 수석 입학한 동욱이 “형 만한 아우 없어요”라고 말하고, 합격 환영식장에 가는 동욱에게 춘희가 “네 형도 같이 간다고 생각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의 동철에 대한 그리움은 없어도 있는 자로서 자리할 정도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시청자들은 이미 이 운명의 쌍곡선을 보아버렸다. 복수를 위해 미애가 아기를 바꾸는 장면을.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이 절절한 형제애와 가족애로 똘똘 뭉친 이들이 사실은 철천지 원수지간이라는 것을 안다. 이것은 거꾸로 신태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붕괴시키려 했던 것이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은 이 끈끈한 혈연을 전면에 내세운 드라마 속에서 어떤 파란을 예고한다.

이것은 70년대 개발시대를 살아냈던 이들의 원죄의식을 끌어낸다. 개발시대, 그 어깨에 지워질 날 없는 멍 자국을 훈장으로 만들었던 건 가족이라는 우선적인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던 그 때, 누군가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가족이 터전을 잃고 피눈물이 흘린 자리에 울타리를 세우고 살고 있었다. 개발이란 이처럼 자원의 파헤침(파괴)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흔하디 흔한 출생의 비밀이란 코드가 이 드라마에서 기능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가족의 역할 바꾸기, 혹은 상황 뒤집어보기를 간단하고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에덴의 동쪽’은 먼저 70년대라는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 점점 해체되어만가는 가족을 복기해 놓는다. 하지만 이 드라마는 그 가족에 대한 향수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끈끈하게 만들어버린 시대의 아픔을 거기서 들여다보고는, 이내 가족을 넘어 인간애를 바라다본다. 그리고 바로 이 부분이 지금 이 21세기에도 이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가 유효해지는 이유다.

Posted by 더키앙

잘못 나온 호칭, 그 역할 바꾸기의 행복

“엄마!”
아이가 내게 엄마라고 한다. 나는 문득 아이를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목소리를 여자처럼 해서 아이에게 되묻는다.
“왜 그러니?”
그러자 그제서야 자신이 잘못 말했다는 걸 깨달은 아이는 씩 웃으며 손을 내젓는다.
“아니... 아빠. 이것 좀 봐줘.”
아이의 숙제를 돌봐주면서 문득 이런 경험이 유달리 우리 집에서는 많다는 생각을 한다. 그것은 아이의 말실수에서 그치지 않는다. 나도 그렇고, 아내도 그렇다.

직장을 다니는 아내 대신, 칼럼니스트로 집안 생활까지 도맡게 된 나는 낮 시간을 대부분 초등학교를 다니는 아이와 함께 생활한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종종 아이에게 아내의 이름을 부르곤 한다. 그러면 아이는 내가 놀려주던 것을 흉내내면서 엄마 목소리로 내게 대꾸하곤 한다.
“왜 그래요. 여보?”
아이는 가끔 엄마를 아빠로 오인해 부르기도 한다. 늘 나와 함께 생활하다 보니 인에 박인 탓이다. 그러면 영문을 모르는 아내는 피식 웃어버린다.

그런데 이 잘못 나오는 호칭들은 처음에는 이상했지만 차츰 기분 좋게 들려왔다. 부모와 하루를 온전하게 보내지 못하는 아이에게 있어서 엄마의 부재를 아이가 느끼지 않는다는 말도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렇게 잘 해주는 것도 없는데, 아이가 기대는 것을 보면 기특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내가 아이에게 “여보”하고 잘못 부를 때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어느덧 아내가 없는 낮 시간대에 내 심부름도 해주면서 아내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었다는 기분이 든다.

잘못 나오는 호칭은 대상을 한 가지에 국한시키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아버지라는 특정한 틀로서 아버지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여기에는 아버지라는 상이 가진 갖가지 이미지들이 겹쳐지게 된다. 그것은 때론 오해일 수 있다. 아버지는 아버지라는 호칭이 갖는 허울 때문에 더욱 아버지처럼 보여야 하는 상황에 있을 수 있다. 물론 아버지는 그 안에 권위적인 모습 이외에도 모성애적인 부드러움까지 다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아이가 아버지를 엄마라고 잘못 부를 때, 이러한 틀은 깨진다. 그 작은 틈새가 주는 여유는 그런 경험을 해본 이들에게는 쉬 이해되는 것일 것이다. 순간적인 해방감 같은 그 느낌은 바로 그 호칭이 주는 억압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이것을 알게 모르게 교육받아왔다. 남자는 남자라는 역할에 여자는 여자라는 역할에. 이것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왜곡이 일어난다. ‘남자답다’는 말의 기준에는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따라서 때론 그 말은 성별의 차이를 넘어서 사회적인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이렇게 되면 이건 성별이 아닌 성차별이 된다.

성차별은 상대방 성에게만 가해지는 억압이 아니다. 성차별은 성차별을 교육받은 자에게도 행해지는 억압이다. ‘남자다움’을 지상과제로 교육받은 남자는 바로 그 성차별적 사고관에 갇혀 소위 여성들이 해야할 일을 하는 것에 곤혹을 느낀다. 그러나 어떨 때는 그걸 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예를 들어, 장인댁에 갔는데, 장모님이 마침 출타중이시고 장인과 단둘이 있게 되었다. 시간은 저녁시간대. 배는 고픈데 그렇다고 부엌에 들어가 밥을 하기도 어려운 상황에서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는가.

대부분 이럴 경우, 중국집배달이 대안이 되곤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건 장인과 사위가 각자 집에 혼자 있을 경우에는 상황이 다르다는 점이다. 둘 다 밥 한 끼 정도는 뚝딱 챙겨먹을 수 있는 데도 굳이 시켜먹는 것은 바로 남자로서 교육받은 것이 서로의 눈치를 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말실수 가족이다. 아빠는 엄마가 되기도 하고, 엄마는 아빠가 되기도 한다. 아이는 때론 아내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일까. 우리는 무언가 집안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마음이 겪는 불편함 같은 것이 없다. 그만큼 역할 바꾸기에 익숙해졌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런 환경을 보고자란 아이는 앞으로도 사회 속에서 성별을 넘어 더 당당히 자신을 밝힐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우리가 말실수 가족인 것이 좋다.

Posted by 더키앙

해체되는 가족, 거기서 보는 희망

MBC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이 웃음폭탄의 주재료로 다루는 건 ‘이 시대의 가족’이다. 그것이 웃음을 주는 이유는 한 집안에서 살고는 있지만 가족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파편화된 관계가 만들어내는 묘한 긴장감 때문이다. 가족 구성원들간의 과장된 대결구도는 재미의 한 요소로 끄집어 내진다. 박해미와 민용은 여러 차례 복수와 보복을 거듭하며, 나문희는 며느리인 박해미와 내적인 갈등 상황을 연출한다. 부자지간이지만 아버지인 이순재는 아들인 준하를 못잡아 먹어 안달이다. 이것은 형제지간에도 마찬가지. 윤호와 민호는 앙숙지간이다.

이렇게 질서(?)를 잃고 대결로 치닫는 가족관계는 왜 벌어지는 것일까. 그것은 과거와 달라진 가족구성원들의 역할 내지는 권력구도에서 비롯된다. 권위적인 아버지상의 아이콘이었던 대발이 아빠 이순재는 ‘야동순재’로 불리며 한층 낮아진 눈높이의 아버지상을 그려낸다. 게다가 아버지의 계보를 이어받는 준하는 이 시대가 만든 무능력한 아버지의 전형이다. 그러자 과거 아버지를 중심으로 수직적인 구조를 갖는 전통적인 가족은 해체된다. 대신 가족의 중심으로 서는 인물은 능력 있는 며느리로 표상되는 박해미다. 한 가족 속으로 들어온 며느리라는 이름의 새 구성원이 권력의 중심에 서면서 혈연으로 묶인 가족체계는 느슨해지면서 좀더 수평적인 구조로 재편된다.

설자리를 잃어 가는 남성들
이런 구조가 만들어진 가장 중요한 요인은 사회 속에서 점점 설자리를 잃어 가는 남성들의 처지 때문이다. 최근 들어 아버지에 대한 영화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것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를 문화가 포착하고 있다는 증거다. 아버지들은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고, ‘눈부신 날에’에서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며,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뜨거운 부성애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 영화들 속에서 아버지는 과거 어머니가 그러했던 것처럼 희생하는 존재다. 모성애의 빈 자리는 이제 부성애가 차지한다.

‘우아한 세계’의 송강호는 극단적인 방식으로 이 시대 남성들이 처한 문제를 포착한다. 가장이란 이름으로 칼과 피가 튀는 조직사회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그들은 자신의 잃어버린 삶을 찾기보다는 가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길을 선택한다.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정작 자신은 전혀 ‘우아하지 않은 세계’라는 진창에서 뒹구는 것이다.

이런 조직사회의 어려움은 ‘하얀거탑’이란 드라마 속에서 장준혁(김명민)이란 캐릭터를 통해 극명하게 그려진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성공을 향해 달려가지만 정작 그 길 위에서 만나는 것은 파멸된 자신이라는 것은 이 시대 가장이란 이름으로 조직생활에 몸담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내용일 것이다.

여성들 전문직으로 나아가다
반면 대중문화가 그려내는 여성들은 과거 남성들이 차지했던 그 권력의 자리에 앉혀진다. MBC 드라마 ‘히트’의 강력반 반장이 여성인 차수경이란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드라마는 작가가 밝혔듯이 형사물 이면에 ‘히트’라는 강력반으로 대변되는 유사가족의 에피소드를 다루고 있다. 마치 공포의 외인구단처럼 장점과 함께 단점을 가진 남정네들을 이끄는 인물은 차수경이란 여성이다. ‘히트’의 차수경처럼 TV나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여성캐릭터들은 이제 여필종부하는 여성들이 아니다. 심지어는 사극에서조차(예를 들면 황진이나 ‘주몽’의 소서노 같은) 여성들은 남성들을 휘어잡는 존재로 그려진다. 김수현의 불륜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에서 남성이란 존재는 부각되지 않는다. 대신 불륜에 대한 이야기는 철저히 여성들의 관점으로만 이야기된다.

대중문화 속에 전문직 종사자로서 등장하는 여성상은 이제 오로지 결혼에만 목매는 트렌디한 성격으로 그려져서는 호응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저 스스로 독립적이며(마녀유희), 즐길 줄 아는 존재(로맨스 헌터)로 공감을 얻는다. 가족을 구성하는 결혼이라는 문제에 있어서 이 같은 여성들의 변화는 가족 그 자체에 근본적인 변화를 만들어내는 주요 동인이다.

각자 살아가는, 하지만 버릴 순 없는
영화 ‘좋지 아니한가’는 이렇게 변화된 가족의 모습에 대해 두 가지 측면으로 답변을 제시한다. 그것은 제목이 제시하는 중의적 의미와도 맞닿아 있다. ‘좋지 아니한가’는 ‘좋지 아니한 가(家)’, 즉 안 좋은 가족이란 의미와, ‘그래도 좋지 아니한가’라는 문장 그대로의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이 영화에서 제시되는 가족관계는 가족이라 하기엔 너무나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좋지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파편화된 가족의 모습은 저 ‘바람난 가족’에서 고개를 들더니 ‘가족의 탄생’에서 어떤 화해의 모습을 띄다가 ‘좋지 아니한가’에 와서는 좀더 직접적으로 달라진 가족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낸다. 과거의 전통적인 가족이란 의미로서 그 가족은 좋지 않은 가족이다.

하지만 영화는 그러한 현상을 비춰주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 모래알처럼 뭉쳐지지 않는 가족에서 어떤 긍정을 찾아내기도 하는 것이다. 가족이란 틀에 얽매이지 않고 각자 걸어가는 삶 속에서 그저 묵묵히 옆을 돌아다보면 거기 늘 안길 수 있는 존재로서의 가족은, 과거 가족이란 이름으로 희생되고 억압됐던 가족 구성원들을 긍정적으로 유도하는 힘이 있다. 그래서 영화는 다시 그런 가족이라면 ‘좋지 아니한가’라고 묻는 것이다.

‘좋지 아니한가’처럼 이 시대에 가족은 두 가지 의미로 읽힌다. 하나는 살기 어려워진 사회 속에서 서로의 상처를 보듬어주는 존재로서의 가족이며 또 하나는 수평적으로 변화되어 가고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해체되는 양상으로 해석되는 가족이다. 이 두 가지는 상충되는 것이지만 지금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가족의 모습이다. 그 사이에서 가족관계는 변화를 요구한다. 명령하기보다는 대화를 시도하고, 직접 변화를 주려하기보다는 묵묵히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봐 주는 새로운 공존의 방법이 모색된다면, 좋지 않아 보이는 가족의 모습을 ‘또한 좋지 아니한가’ 하고 긍정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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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우리 문화의 경쟁력?

봉준호 감독의 영화, ‘괴물’이 중국시장에서 반응을 보인 데는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에 민감해진 중국영화시장의 분위기에 힘입은 바 크지만, 그 바탕에는 ‘괴물’ 자체가 갖고 있는 아시아적인 미덕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가족’이다. 영화가 개봉되고 중국언론들은 이 영화의 (헐리우드 블록버스터와의) 차별점으로 가족을 들었다.

‘괴물’의 중국 성공, ‘가족’ 때문?
유력일간지 징화스바오는 ‘괴물’에 대해 “기존의 멜로물과 폭력물 위주에서 탈피한 한국영화”라며 “한 평범한 소녀를 괴물로부터 구해내기 위해 평범한 가족들이 사생결단”을 “눈물 없이 보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관영 베이징르바오는 이 영화가 “으시시한 공포영화나 화려한 화면전시에 머무르지 않고 보통사람들의 단결력과 용기를 보여주며 화합의 메시지를 전해준다”고 평가했다. 사회주의 국가가 갖는 집단적 가치에, ‘가족’이라는 가치가 덧붙여졌고, 거기에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라는 확실한 경쟁자를 내세우자 반응은 더 폭발적으로 확산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할 것이 바로 이 ‘가족’이라는 소재이다. 우리이게 이 소재는 어딘지 구닥다리처럼 느껴지지만 흥행의 요소가 되는 양면성을 갖고 있다. 즉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 쿨한 전개를 파고 들어오는 가족이란 이름의 끈끈함을 종종 비아냥대면서도 시선을 떼지 못하는 소재인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가족보다는 개인에 더 초점이 맞춰지는 반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 영화들은 상대적으로 가족에 더 많은 무게중심이 맞춰져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그림자는 ‘가족의 탄생’, ‘좋지아니한가’ 같은 가족을 표방한 영화는 물론이고 우리영화 속 어디에서든 어른거린다.

조폭 짓 왜 하냐고? 가족 때문에
최근 개봉한 송강호 주연의 ‘우아한 세계’는 이제는 하나의 우리네 장르가 되어가고 있는 조폭영화에 ‘가족’을 끌어들였다. 이것은 과거 ‘비열한 거리’에서 가족들이 살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기 위해 철거촌 깡패짓을 하는 병두(조인성)의 연장선상에 있다. ‘우아한 세계’의 메인 카피, ‘조직에 몸담은 가장의 꿈’에서 조직은 중의적인 의미로 쓰인다. 즉 조폭 세계의 조직이란 뜻도 있지만 우리 현실사회에서 누구나 몸담게 되는 조직이란 의미도 갖고 있다. 따라서 이 영화는 단순히 조폭의 이야기가 아니다. 조폭은 하나의 상징이 되며 조폭에 ‘가장’이 붙게되자 영화 속 가장인 송강호의 삶은 더 독해진다. 그가 피가 튀고 죽음의 문턱을 왔다갔다하는 ‘조직생활(사회생활)’에 몸담고 있는 이유는 단 하나, 가족들 때문이다.

송강호가 가족들의 ‘우아한 세계’를 지키기 위해 자신은 정작 ‘우아하지 않은 세계’ 속에 남아 있을 때,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스크린을 장식하고 있다. ‘파란 자전거’에서는 손이 불편한 아들에게 희망을 넣어주는 아버지로, ‘눈부신 날에’는 딸을 만나 잃었던 가족애를 찾아가는 아버지로, ‘날아라 허동구’에서는 IQ 60인 아들을 향한 부성애의 모습으로 찾아온다. 그들은 모두 어려운 선택을 하고 있는데 거기에는 한 가지 공통된 이유가 있다.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형사 짓보다 가족이 우선이다
‘안방극장’이라 불리는 만큼, 드라마에 나타나는 가족의 모습은 좀더 직접적이다. 주간시청률 집계를 보면 알 수 있지만 그 상위를 차지하고 있는 드라마는 대부분이 가족드라마이다. 거기에는 ‘하늘만큼 땅만큼’, ‘행복한 여자’, ‘나쁜여자 착한여자’, ‘사랑도 미움도’, ‘아줌마가 간다’등등 문제가 되는 불륜과 논란 드라마도 끼어 있지만 그것은 역시 가족이 중심테마이다.

하지만 이런 경향은 단지 가족드라마에서만 나타나는 건 아니다. 최근 들어 새롭게 시도되고 있는 전문직드라마에서도 그러한 경향이 나타난다. ‘하얀거탑’이 병원 내에서 숨가쁘게 벌어지는 정치드라마를 그리면서도 장준혁(김명민)이 어머니를 찾아가는 장면을 빼놓지 않는 것은 가족이 갖는 장치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외과의사 봉달희’에서도 병원 내의 생사를 오가는 전문적 내용들이 다뤄지면서도, 기본적으로 그 속에서 가족의 이야기(예를 들면 이건욱(김민준)과 조문경(오윤아)의 에피소드 같은)를 끄집어낸다.

최근 시작한 한국형 범죄수사드라마 ‘히트’에서도 이런 경향은 나타난다. 수사경력 25년의 최고참 베테랑 형사이지만 만년 경사인 장용하(최일화)의 에피소드가 그렇다. 강력범죄 수사를 전담하는 ‘히트’의 멤버이면서 만사 제쳐두고 가출한 딸을 찾아 홍콩으로 가는 그는 우리 드라마에서 가족이 갖는 힘을 새삼 느끼게 한다. 이것은 외국드라마라면 상상하기 힘든 설정이 아닐 수 없다. 범인 잡는 형사이야기에서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딸과 그 딸을 보호하려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되자 드라마는 좀더 끈끈하고 절절해진다. 자극 중심의 아드레날린 드라마에 감성적 드라마가 뒤섞여지게 되는 것이다.

‘가족’이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되려면
홍콩 느와르의 전성시대를 예고했던 ‘영웅본색’은 헐리우드 영화가 갖지 못한 피의 끈끈함을 다루었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의리’이다. 소마(주윤발)가 자호(적룡)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장면은, 폭력과 피로 아드레날린을 자극하기만 하던 헐리우드 영화에 익숙한 관객들에게 갑작스레 던져진 감성의 자극이었다. 그 감성은 그러나 감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인물들 사이를 좀더 끈끈한 의리로 묶어놓자, 거기서 벌어지는 드라마에는 더 강력한 아드레날린이 가능해진다. 이것은 타인의 죽음이 갖는 의미보다 지인의 죽음이 갖는 의미가 더 강렬해지는 탓이다.

우리에게 ‘가족’은 그런 면에서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될 수도 있다. 그것은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서구가 뒤늦게 인정하게 된 가치이다. 점점 글로벌화되는 미디어 시장 속에서 세계는 국경 없는 전쟁에 돌입해있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중국과 우리나라 그리고 일본이 하나의 아시아권으로서의 영화적 경쟁력을 키워나간다고 가정할 때,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우리 식의 경쟁력이 되면서도 보편성을 띄는 가치이다. ‘의리’니 ‘가족’이니 하는 가치가 보편성을 갖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오랜 세월 똑같은 동양적 가치체계(예를 들면 유교나 불교 같은) 속에서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경쟁력이 되기 위해서는 선결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과거의 구질구질함으로 대변되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서 ‘가족’을 활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달라진 세상에 달라진 ‘가족’에 대한 새로운 가치부여의 시도가 끊임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이 소재는 자칫 과거적 가치로의 회귀에 머물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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